할뱃
The Law of the Jungle
새벽 댓바람부터 할을 깨운 건 문자 한 통이었다.
'크로스비. 2104. ASAP.'
몇 개의 단어 아닌 단어들의 조합은 단도직입적이고 명료했다. 그런 종류의 문자를 수십 번 받아본 적 있는 할은 발신인을 굳이 확인하지 않는다 해도 이 때 아닌 문자가 누구에게서 온 건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끄응. 신음한 할은 핸드폰을 한 쪽에 툭 던지곤 양손으로 거칠게 마른세수를 한 뒤 몸을 일으켰다. 이미 샤워실로 향하고 있는 그는 이런 상황에 기계적으로 반응할 만큼 아주 익숙해져 있었다.
밖은 아직 새벽바람에 쌀쌀한 데다 해조차 완연히 뜨지 않아 푸르스름한 하늘에 먹먹한 구름이 가득이었다. 다섯 시 사십오 분. 초가을이라 그런지 젖은 머리칼에 바람이 스며 들 때마다 약간의 으슬으슬함을 느낄 정도는 되었다. 정갈하게 다듬어진 가로수 길에 늘어진 나무마다 무거운 새벽이슬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가죽 재킷을 여민 할은 장갑과 헬멧을 쓰고 바이크에 올라탔다. 도로를 빠르게 내지르는 그의 옆으로 벌써부터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혹은 출근길에 오르는 차들이 스쳐 지나가곤 했다. 해가 채 뜨기도 전에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이었다. 뉴욕은 항상 너무 바빴다. 할은 자신이 다시금 도시 생활에 적응했음에도 불구하고 간혹 마치 어울리지 않는 곳에 있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네온사인이나 하늘을 찌르는 고층 빌딩이나 중동에 있을 당시에는 이런 삭막한 것들조차 뼈저릴 정도로 그립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정작 돌아온 고향은 그를 반기지 못했다. 어쩌면 너무 오랜 시간을 미국에서 떠나 지냈기에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당치 않은 이질감이다. 동물도 제가 태어난 곳은 알아본다는데 할은 어째서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도시에서 이방인이 된 듯한 느낌이 들어야 하는지 가끔 의아하다.
호텔이 위치한 길목 어귀에는 척 봐도 비싸 보이는 차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척 봐도 아무나 들어갈 수 없어 보이는 호텔이다. 할은 익숙하게 벨 보이에게 자신의 바이크를 맡기고 호텔 로비로 걸어 들어갔다. 리셉션에 있던 여직원이 그가 들어오는 것을 발견하자 카드키를 건네주었다.
-기다리고 계세요.
알아. 안다고. 할은 속으로만 그렇게 중얼거리며 로비를 큰 보폭으로 가로질렀다.
그들이 만나는 호텔은 종종 바뀌었다. 방은 매번 바뀐다. 대부분 고급 호텔에 신분이 절대 노출되지 않을 만한 곳. 할은 21층으로 올라가 카드키로 4호의 문을 열었다. 노크는 필요하지 않았다.
-늦었군.
등 뒤로 문을 닫자마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금세 샤워라도 한 건지 젖은 머리에 배스 가운을 입은 채로 소파에 앉아 랩탑을 두들기고 있었다. 할이 걸어 들어오는 동안 고개조차 들지 않던 브루스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두툼한 봉투 하나를 집어 그의 쪽으로 성의 없이 툭 던졌다.
-빨리 처리해. 늦어도 사흘 안으로.
할은 갈색 종이봉투를 집어 내용물을 꺼냈다. 종이 뭉치들 위엔 어떤 남자의 사진과 함께 그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었다. 신발은 어떤 걸 신느냐 부터 시력은 몇인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열쇠 구멍 개수와 회사 카드 넘버까지 빼곡하게 적힌 종이들 뒤로는 남자가 일상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들이 수장이나 이어졌다. 타겟의 신상은 그 어떤 일부도 빠트릴 수 없을 정도로 모든 부분이 중요하다. 조금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되어서다. 할은 그의 손을 거쳐 간 수많은 타겟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고, 그래야만 했다. 그건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자신의 안전과 더 나아가 제 눈앞에 앉은 고고한 고용인의 안전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허점은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 이 세계의 룰이었으니 말이다. 할은 손가락 끝으로 종이를 휙휙 넘기며 무심하게 말했다.
-이번엔 뭐가 심사를 건드리셨나?
그 때까지도 랩탑에 눈을 박고 있던 브루스가 시선만 들었다.
-무슨 뜻이지?
-이 남자 말이야. 분명 네 맘에 안 드는 짓을 했을 거 아닌가.
-조던. 업무 규칙에 대해선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브루스 웨인은 마치 같은 질문을 수십 번 되묻는 어린 아이를 상대해야 하는 것처럼 한숨 쉬고 싶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할 역시 알고 있었다. 부가 질문은 묻지 않는다. 맡겨진 임무를 수행하고 보상을 받는다. 그것의 반복. 단도직입적인 일이었다. 할은 가라앉은 시선으로 종이 뭉치를 들어 보였다.
-잘 알고 있고말고. 네가 이 자와 며칠 전에 어느 호텔에 들어갔는지도 알고 있지.
순간 브루스는 그를 쫓아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결국 그는 차선을 택했는지 랩탑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요새 한가한가 보군.
-잊으셨나? 네 신변을 보호하는 것도 내 일 중 하나라는 걸?
-보호가 아니라 감시 당하는 느낌이 드는건 내 착각인가.
-하. 잘나신 브루스 웨인을 감시해서 무슨 득이 되겠다고.
아니면 찔리는 게 있으신가보지. 그렇게 말하려다 할은 입을 닫았다. 제 자신이 너무 구차하게 느껴져서 였다. 역시 남자는 얼굴을 맞대는 순간 상대의 이성 끈을 짧아지게 만드는 것에 능숙했다. 더 질이 나쁜 건, 그걸 의도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습성이 남자의 몸에 배어 있다는 거다. 브루스는 여전히 물기가 남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더니 다리를 꼬았다. 배스 가운 밑에서 길고 남자다운 다리가 엇갈렸다.
-조던.
-......
-질투하나?
헛소리라고 쏘아 붙이기도 전에 남자는 할의 팔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가벼운 유도였음에도 불구하고 할은 저항 없이 끌려가는 자신의 몸뚱이를 탓했으며, 브루스는 제 위로 드리워지는 할의 혁대에 손가락을 걸며 나직하게 웅얼댔다.
-자네도 알다시피 사업을 하다보면 결과에 가장 유리한 선택을 해야 하는 일들이 생겨. 어떤 것은 나의 손으로 처리하지 않고 자네와 같은 사람들에게 맡기지. 하지만 일부는 내가 직접 나서야 할 때도 있는 법이야. 내가 원하던 혹은 원하지 않던.
원래 남자는 이렇게 길게 말하는 적이 드물었다. 게다가 답지 않게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 나른하게 울리는 말에 할은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며 자신의 버클 위를 훑는 단정한 손끝을 시선으로 쫓았다. 그는 여전히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브루스의 검은 머리칼을 건드렸다. 그래서, 내키지 않았는데 억지로 그래야 했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할이 묻자 브루스는 얼핏 웃었다.
-아니. 적당한 질투는 능률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지.
아. 정말이지 그는 남자를 당해낼 수 없었다.
처음에는 군인이 되겠단 생각이 없었다. 단지 비행기를 조종하는 것에 흥미가 있었던 것이었고 그의 관심을 끌던 보다 멋지고 빠른 기체들은 주로 전투용 비행기에 속했다는, 지극히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흥미만 있던 것뿐만이 아니라 우연찮게 그 쪽에 재능까지 갖춘 것으로 드러나 할 조던은 사관학교를 탑으로 끝마쳤고 삼 년도 지나지 않아 중동으로 파견되었다. 비록 전쟁이 끝난 평화의 시간이 도래했다고는 하더라도 군인들은 거의 매일처럼 그 삭막한 타국으로 보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할 조던은 쉽게 지루함을 느끼는 성미였다. 미국에서 신입들을 가르치며 편히 지위를 누리고 떵떵거리는 것은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할은 직접 전쟁터로의 파견을 신청했다.
전장을 겉에서 보는 것과 그 속의 일부로서 경험하는 것에는 크나 큰 차이가 있다. 황폐한 땅에서 이어지는 각박한 나날들과 신경을 옥죄는 부상자 그리고 사상자들의 호명 속에서 할 조던은 오 년을 보냈다. 그는 전장의 실체를 알아갈수록 그곳에서 벗어나기 힘듦을 느꼈다. 애국심이나 의무감 따위는 아니었다. 그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할은 가장 두각을 나타낼 줄 알았고 위험한 상황에서 저에게 유리하게 돌리는 법을 알았다. 그는 타고난 비행사였으며 군인이었다. 만약 중동에서의 내전이 사그라지지 않았더라면 할은 아마 얼마나 더 그 곳에 있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육 년 째 되는 해에 할 조던은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가 귀환한지 반년이 흐른 후에 할 조던이 브루스 웨인과 만나게 된 건, 어쩌면 기막힌 우연처럼 보였다.
아니, 악연이라고 해야 하나. 할은 그가 남자를 만나게 된 것에 기뻐만 할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불만을 갖고 있는 것만도 아니었다. 브루스 웨인은 할 조던이 차마 전부 상상을 하지 못할 정도 규모의 회사를 운영하는 사업인이었고 또 책략가였다. 그 정도의 사회적 위치에 있는 자들이 주로 그러하듯 브루스 웨인 역시 자신의 손을 대신 더럽혀줄 사람이 필요했다. 물론 그 브루스 웨인의 밑에서 일할 수 있다면 돈에 눈을 밝히고 무슨 일에라도 덤벼들 만한 치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남자는 믿을 만한 자를 필요로 했다. 그와 개인적으로 만나, 개인적인 일까지 비밀리에 처리해줄 수 있는 사람을.
사실 할은 그 일에 대해 들었을 때 내키지 않아했다. 그의 성미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고 그가 발을 들일만한 세계도 아니었다. 브루스 웨인이 첫 인상에서 얼마나 남자로서 매력적인 사람으로 인식되었는지에 상관없이, 할은 제안을 거절했다. 만약 그 후 한 달 안에 형이 사고를 당해 수술을 해야 하는 일이라던가 군내에서 인사이동이 한바탕 일어났던 거라던가 또 정부 보조금이 대폭 깎이게 되었던 일 따위가 없었더라면, 그랬다면 할은 어쩌면 브루스 웨인의 밑에서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른다. 정말 기막힐 정도의 우연의 일치였으나 할이 그에 대해서 무슨 말을 꺼내던 브루스는 이유야 알 게 뭐냐는 식으로 대꾸했다. 어쨌든 자넨 지금 날 위해 일하고 있고, 그게 중요한 거지. 남자가 그렇게 말하는데 할은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결국 일 년이 다 되도록 남자의 밑에 여전히 붙어있는 건 본인이었으니 말이다.
-괜히 소개시켜준 것 같아, 너.
평일 오전 열 시의 월 스트릿에 위치한 카페는 한가했다. 한 테이블 정도 비즈니스 이야기를 위해 모인 것처럼 보이는 사무원 두 명이 보였으나 그게 손님의 전부였다. 할은 카페 구석 테이블에서 의자에 몸을 구겨 앉은 채 커피를 쭉 빨았다. 그의 앞에 앉은 배리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고개를 설설 저었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거였는데. 할은 눈썹을 휘었다.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소개 시켜준 건 너잖아.
-이렇게 오래 일하게 될 줄은 몰랐지.
배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는데 차마 그 뻔뻔해 보이는 얼굴에 대고 뭐라고 할 수 없는 이유는 배리는 웃긴 녀석이었을망정 마음 없는 가벼운 말은 절대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할을 브루스 웨인에게 소개시켜준 것 역시 배리 앨런이었다. 비록 그 일의 종류가 굉장히 합법적이지 못하고 비밀스런 종류라 할지라도 만약 소개를 제안한 사람이 배리 엘런이 아니었더라면 할이 그것을 분명 거절했을 거라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라이더 재킷을 걸친 할과는 다르게 배리 엘런은 어딜 봐도 월 스트릿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실제로 그러고 있기도 했고 말이다. 질 좋은 구두에 딱 맞는 정장을 입은 배리는 테이크아웃 커피 컵을 든 손을 휘 내두르며 말을 이었다.
-그 때야 네가 급한 상황이었으니 급한 대로 제안했던 거였고. 솔직히 그게 보통 일이야? 본 적도 없는 다른 사람 인생을 망쳐놔야 하는 거잖아. 난 브루스가 그 정도를 요구할지는 꿈도 못 꿨어.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배리는 그저 할이 브루스를 위해 허드렛일이나 잔심부름 따위를 하고 있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맞는 말이었다. 물론 배리는 여전히 할 조던이 해야 하는 일의 실태에 대해 십분의 일도 모르고 있었다.
-그럼 뭔 줄 알았는데.
-적당히 경호원 일이나 시킬 줄 알았지.
-참 빨리도 눈치 챘다.
-이 일이 할 만하다는 거야?
할은 인상을 구겼다.
정보를 건네받는다. 사람을 처리한다. 돈을 받는다.
이게 할 만한 일이냐고? 그를 잡고 있는 건 애초에 하나뿐이었다.
대답 없이 커피 잔만 내려 보고 있는 할의 머리맡을 보던 배리는 그의 친구를 향한 걱정을 감출 수 없었다. 아무리 제가 주선한 일이라곤 하나, 아니 그랬기에 더욱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확실히 브루스 웨인은 어마어마한 사업가다. 그리고 겉으로 보기엔 꽤 나쁘지 않은 남자였다. 하지만 브루스 웨인은 또한 비밀스런 남자였고, 몇 년 동안 알아온 배리 엘런조차 그의 모든 걸 알고 있다 말할 순 없었다. 그런 남자의 가장 은밀한 일을 맡아서 처리하는 건? 전혀 좋은 얘기가 아니었다. 할이 일 년 동안 멀쩡하게 지내온 게 되레 놀라울 정도로. 이쪽 세계는 늘 그랬기 때문이다. 토사구팽. 결국 사냥개는 잡아먹히게 되어있다.
-더 늦기 전에 발 빼. 네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고.
-......
-나 참. 천하의 할 조던이 고민이란 걸 하고 있다니.
배리는 반 쯤 걱정과 흥미가 섞인 얼굴을 했다. 혹시 브루스한테 빚진 거라도 있어? 장난으로 묻는 목소리엔 진심 어린 궁금증 역시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별로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할은 애매하게 어깨를 으쓱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옆에 놓여있던 헬멧을 집어 들었다.
-쓸데없는 걱정 마. 내가 언제 일에서 실패한 적 있어?
-그거야 난 모르는 일이지...
-부탁한 거나 줘봐.
품속에서 작은 USB를 꺼낸 배리는 그것을 할의 손바닥에 건네주며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왜 별 볼일 없는 금융회사의 거래 내역을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다타베이스에 남아 있더라고. 마침 한 달 전에 우리 쪽과의 계약 기간도 끝난 상태라 곧 폐기 될 예정인 것 같아서 다행이지.
사실은 계약 기간이 끝났다고는 하더라도 외부인에게 건네줄 수 있을 만한 정보는 아니었으나, 할이 그에게 요구한 건 작은 기업체인데다가 거의 아무도 들춰보려고 생각하지 않는 거래 내역이었기에 큰 문제로 불거질 리 만무했다. 더군다나 할 조던이 그걸 가지고 무엇을 하던 간에 배리 엘런을 위험에 빠트리게 될 일도 없을 것이고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그것이 필요한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 할에 배리는 어딘가 거북함이 느껴지는 것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할은 배리의 기색을 애써 무시하곤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나중에 한 턱 쏠게. 씩 웃어 보인 할은 옆구리에 헬멧을 낀 채 카페에서 걸어 나왔다.
그의 등을 보던 배리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할 조던은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맹목적이었고 한 가지에 집중하면 그것 밖에 보질 못했다. 그것은 어쩌면 좋은 점일지도, 혹은 그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지도 모르는 부분이었다. 지금은 아마도 제가 무슨 말을 하던 간에 들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언젠간 브루스와 얘기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배리는 그의 회사로 향하기 위해 걸음을 떼었다.
밤이 무겁게 내려앉은 와중, 할 조던은 한 아파트의 앞에 서 있었다.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이 산다고 여기기에는 지극히 초라해 보일 정도의 아파트였다. 건물은 지은 지 십 년은 넘어 보였고 주차장에는 혼다나 토요타같은 중고차들이 드문드문 늘어서 있었다. 할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새벽 중 애매한 시간이라 그런지 돌아다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작은 고양이 울음소리만 들려왔다. 그는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보안 키는 이미 알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미리 복사해 둔 카드키를 찍고 층수를 눌렀다. 그가 얻은 정보가 맞는다면 상대는 분명 집에 있을 시간이었다. 할은 자켓의 품 안쪽을 확인했다. 묵직한 쇳덩어리가 느껴졌다. 그는 피를 보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고 최대한 그럴 일이 없도록 노력했다. 현재까지 누군가를 죽여야 한 적은, 다행스럽게도,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그래야 할 뻔 했던 적은 여럿 있었다. 할은 그것이 자신의 마지막 남은 자의식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뭐라 생각하던 브루스 웨인은 관심이 없을 것이 분명했지만 말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할은 호수를 살폈다. 그 때 복도 반대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코너로 몸을 숨겼다. 타겟이었다.
남자는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미남이었다. 수트에 감싸인 단단한 몸이나 각진 턱이 그의 강함과 고집스러움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푸른 눈은 깊고 진중했다. 남자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던 중이었는지 핸드폰을 귀에 댄 채 문 앞에 서서 키를 찾듯 주머니를 뒤적였다.
-음. 도착했네. 늦을 예정인가? 아니, 오늘은 없어.
할은 낭패감에 속으로 혀를 찼다. 누가 올 예정이라면 오늘 타겟을 상대하기엔 글렀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최대한 깔끔하고 신속하게 처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할은 남자가 집 안으로 들어가길 기다렸다. 그리고 남자가 막 문을 열었을 때와 거의 동시에 예상하지 못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서.
브루스 웨인은 한 손에 든 핸드폰을 가볍게 흔들어보였다. 그는 특유의 매력적인 미소와 함께 긴 다리를 움직여 복도를 가로질러 왔다. 파티에라도 다녀왔는지 몸에 딱 맞는 정장에 머리칼을 멀끔히 넘긴 채였다. 차가운 푸른 눈이 상냥하게 호선을 그리며 남자를 향했다. 아서는 희미하게 웃으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더니 자연스럽게 남자의 허리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못 올지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나.
-그걸 믿은 건가?
-반쯤은.
두 남자는 부드럽게 이야기를 나누며 곧 문 안쪽으로 사라졌다. 쿵. 낮게 문 닫히는 소리만 복도에 울렸다.
그리고 그 속에 남은 할 조던은 마치 주변의 공기가 자신을 옥죄는 것처럼 숨이 막혀오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아직 한기가 남은 새벽에 발을 디디며 브루스 웨인은 제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쌀쌀한 날씨에 입김이 절로 나왔다. 이제 가을인데도 불구하고 날은 지나치게 추웠다. 푸르스름한 동이 터오는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는 품에서 담배를 꺼내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브루스가 말했다.
-이제 들어가 봐도 돼.
아파트 건물의 그림자에 가려진 곳에서 걸어 나온 할 조던은 서늘하게 식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브루스는 남자를 위아래로 슬쩍 훑었다. 머리가 젖어 있고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봐선 아마도, 꽤 오랜 시간 기다렸을 것이 분명했다. 그는 담배 갑을 내밀었다.
-추워 보이는군. 한 대 필 텐가?
-뭐 하자는 거야.
할의 목소리는 버석하고 찼다. 브루스는 약간의 죄책감에 솟아나는 걸 느꼈지만 그건 곧 다시없던 것처럼 죽었다.
-내가 사흘을 주겠다고 했을 텐데. 아마 오늘이 기한의 마지막 날이었지.
하. 그렇지. 마지막 날이었지. 할은 코웃음을 치곤 버석한 얼굴을 손으로 쓸어 내렸다. 그의 얼굴은 어이없는 웃음과 함께 지친 듯한 피로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래서 나에게 처리하도록 명령한 타겟과 방금 전까지 보란 듯이 뒹굴고 나오셨나? 마지막 섹스라도 즐기고 싶었어?
대체 내게 뭘 원하는 거야. 할의 눈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브루스는 그를 마주 보며 한동안 담배만 피웠다. 올곧은 시선. 피하지 않는 눈동자. 절대로 굽히지 않는 긍지. 자신감. 할 조던은 그런 것들을 가진 남자였다. 브루스는 남자가 싫지 않았다. 그는 한편으로는 남자에게 모든 걸 속 편하게 털어놓고 말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욕이라도 하고 싶었다. 이 남자라면 자신의 모든 약한 부분과 공포까지도 얼러 주고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대신, 브루스는 웃었다.
-넌 내 명령만 들으면 돼. 조던. 그 이상 기어오르려 하지 마라.
그는 할 조던을 지나쳐 걸었다. 한참 동안 걸을 때 까지도 할 조던이 움직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브루스는 굳이 확인하기 위해 뒤 돌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건 미련이 남는 약자나 하는 행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