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이 깨졌는지 갈라진 새에서 솟아나는 피가 한웅큼이었다. 브루스는 침착하게 다른 손으로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는데 그 사이에 흐른 피가 손등까지 적실 정도였다. 할은 그가 흰 손수건으로 손가락을 꾹 감싸 쥐는 것까지 흘끔 보다가 혀를 찼다. 그러게 조심하지 않고. 브루스는 대답 없이 손만 움켜쥐고 있다. 흰 색 천이 붉게 물들어갔다. 할은 정장 바지 주머니에 양 손을 찔러넣으며 주면을 둘러 보았다.
연회는 컸다. 샹들리에가 무겁게 흔들리고 샴페인이 즐비하며 향수 내음이 가득했다. 배트맨이 브루스 웨인으로서 이런 장소에 와 필요한 정보를 캐내어 가곤 하는 일이 빈번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할 조던은 자신이 그런 일에 연류되어야 할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것이 할은 누구처럼 교묘하게 위장해서 잠입 수사 비슷한 행동을 하는 취미는 전혀 없기도 했고 그런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번거로운 절차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이건 그의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은밀한 역할을 맡는 건 배트맨 그 하나로 충분하지 않은가? 할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그가 정장을 입고 이 곳에 서있다는 것도 무시 못할 일이었다.
잠깐 자리 좀 비우지. 브루스가 그렇게 말하며 발걸음을 옮기려 들었다. 피가 쉽게 멎지 않는 모양이다. 할은 별 생각없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단순히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 자리를 뜨는 것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 똑똑해. 때를 놓치지 않는 단 말야. 그는 작아지는 브루스 웨인을 보며 샴페인잔을 입에 가져갔다. 그 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미스터 조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돌린 할은 몇 번 눈을 꿈쩍이다가 씩 웃곤 손을 내밀었다. 이게 누구신가.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군, 미스터 켄트. 할과 악수한 클락 켄트는 안경을 추켜 올리는 척 하면서 시선을 보냈다. 솔직히 말해 그가 위장을 하고 이 곳에 들어올 줄은 몰랐던 할은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으나 굳이 여기서 그를 슈퍼맨이라 부르며 추궁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클락은 조금 전까지 브루스가 서 있던 자리에 서며 연회장을 둘러보는 것처럼 굴었다.
파티는 즐기고 계십니까? 클락이 물었다. 할은 어깨를 으쓱하며 샴페인을 마셨다. 딱히 즐기러 온 건 아니라서 말이야. 누구의 초청으로 오게 된 거거든. 브루스 웨인이라고, 이 식상한 곳의 아이돌이지. 클락은 가볍게 웃었다. 하긴 그가 아이돌 대우를 받는 건 사실이죠. 실제로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아이돌이기도 하고요. 클락의 말에 이번엔 할이 웃을 차례였다. 허리를 접으며 소리내 웃던 할은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뭐, 비즈니스 계의 스타인가. 안타깝게도 내 관심사는 보잉과 걸프스트림과 봄바르디어에 한정되어있어서 말이야. 클락은 목에 걸고 있던 무거워뵈는 사진기를 들어올려 연회장을 향해 셔터를 눌러댔다. 그렇긴 하겠군요. 당신은 보통 이런 장소엔 통 오는 일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 단조로운 말에 할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무슨 뜻이지?
클락은 여전히 셔터를 누르며 대답했다. 말 그대로 여긴 당신이 속한 세계가 아니니까요. 사진기를 내린 클락 켄트가 눈으로 웃었다. 그 때 마침 돌아온 브루스가 그들을 이상한 시선으로 번갈아 보았고 그런 그에게 클락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웃어뵈며 말을 건넸다. 잠시 미스터 조던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할은 허 하고 비식거리며 팔짱을 꼈다. 그들 셋 중 누가 가장 오만한 새끼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