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뱃
the rest is silence
할 조던은 책상 귀퉁이에 담배를 지졌다. 나무의 살이 타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시꺼먼 재가 보기 흉한 자국을 남겼다. 마지막 연기를 훅 뱉자 그들의 사이에 난 공간으로 흩뿌연 장막이 솟아 오르다가 곧 흩어졌다. 할은 마디진 손으로 제 관자놀이부터 뒷머리까지 느릿한 동작으로 머리칼을 쓸어넘기곤 비스듬하게 시선을 들었다. 브루스는 제 앞에 선 젊은 남자의 태도에 미간을 찌푸렸다. 창밖으로 해가 넘어가자 실내에 내려앉기 시작하는 어둠에 반 쯤 잠겨버린 할 조던의 얼굴에 기이한 음영이 드리웠고 그건 남자를 정말 답지 않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사실 최근의 할 조던은 항상 그랬다. 할은 허리를 젖혀 의자의 등받이에 상체를 기댔다.
"분명 찾아오지 말라고 했을텐데."
할의 목소리는 메말랐다. 브루스는 검지 손가락을 구부려 자신의 목께에 걸고 가볍게 잡아당겼다. 꽉 조인 넥타이가 답답했다. 긴장 따위는 아니었다. 그가 다른 누구도 아닌 할 조던의 앞에서 긴장할리가 없었다.
"내가 그 말을 들을 거라 생각했나?"
할은 픽 웃었다. 그거야 그렇지. 중얼거린 남자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입술을 기분 나쁘게 끌어 올렸다.
"천하의 배트맨이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는다면 그것도 웃긴 일이겠군."
"......"
"그래서 내가 너한테 발정났던 거였기도 하고."
단조롭게 말하는 할의 손가락 끝이 책상 위를 토독 토독 가볍게 두드렸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맹수를 길들여본 적 있어? 정말 흥분되는 일이지.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언제 목줄기를 물어 뜯길지 모르거든. 맹수를 괜히 맹수라 부르는 게 아니지. 그들은 사냥하는 법을 알며 꾀를 부릴 줄 알아. 할은 손가락 끝으로 제 한 쪽 관자놀이를 톡톡 건들였다. 그러니까, 맹수란 것들은 머리 꽤나 굴리는 법을 안다는 말이야.
"그런 놈들과는 두뇌 싸움을 하면 안되지. 머리로 이길 수 있는 놈들이 아니거든."
"조던."
"본능으로 싸워야 하는거야."
브루스를 마주보던 할은 싱긋 웃었다. 그는 팔꿈치를 책상 위에 대고 그 손에 턱을 괴었다. 거의 반사적으로 브루스의 시선은 그 턱을 괸 손에서 빛나는 검은 반지에 머물렀다. 할은 그가 시선을 어디에 두던간에 여전히 브루스의 얼굴을 눈으로 훑고 있었다. 시선으로 벌거벗기려고 하려는 것처럼. 하지만 이미 그의 앞에서 벌거벗은 적이 있던 브루스에게 마치 숫처녀처럼 부끄러움을 느낄 이유는 없었다. 삐걱. 끼이익. 머리 위에 달린 백열등이 그들 위에 일렁였다. 브루스는 푸른 눈으로 침착하게 남자를 응시했다.
"조던. 너와 싸우기 위해 찾아온 게 아니다."
할은 이해한다는 듯이 끄덕였다.
"알아. 네가 날 죽이려 들리는 없잖아."
그렇지 브루스? 네가 내게 배터랭을 박아 넣거나 하진 않을 거잖아. 내가 피를 흘리는 걸 지켜보는 거. 견딜 수 있겠어? 할은 웃으며 그렇게 말했고 브루스는 잠시의 침묵 후에 입을 열었다.
"못 하겠지."
"응. 넌 못해."
할은 책상 너머로 손을 뻗었다. 브루스는 그가 제 뺨을 만지도록 내버려 두었다. 손은 자상하게 그의 이마 위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칼을 건드리고 그의 얼굴선을 따라 스치듯이 가볍게 덧그려내렸다. 브루스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할 조던은 웃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남자의 갈색 눈 속에서 그가 알고 있던 사람의 자취를 찾기 위해 약간의 절박함을 경험했으나, 곧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할 조던의 눈은 그를 보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 눈 속에 어둠이 움터 잠식당해 버린 것처럼.
브루스는 그의 손 안에 의지하는 것처럼 얼굴을 기울였다. 할은 푸흐 하고 소리내 웃었다. 브루스 역시 얼핏 마주 웃었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할의 손을 감싸고 눈을 내려 감았다.
섬광이 퍼졌다.
배트맨은 눈을 떴다. 그는 이제 비어버린 손을 천천히 내렸다. 시선의 끝자락으로부터 땅바닥에 나뒹구는 남자의 손 끝이 얼핏 보였다. 미동 하나 없었다. 브루스는 새까맣게 타버린 기계를 땅바닥에 툭 던지곤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 내렸다.
사랑. 그런 조잡한 감정일리는 없었다. 애착? 웃기지도 않았다. 정. 그래, 어쩌면 정일지도 몰랐다. 머리 위에서 백열등이 여전히 삐걱였다. 그는 남자를 해칠 수 없었다. 하지만 브루스 웨인이라면 불가능한 것을 배트맨은 할 수 있었다. 할 조던은 그걸 간과했던 것일까. 그 뭣도 믿지 않았던 그가 저로부터 무엇을 믿고? 그건 사랑이었을까 애착이었을까. 혹은 한낱 정이었을까.
소리없는 질문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남은 것은 침묵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