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퀘 내용과 아주 많이 달라진... 할뱃입니다...ㅠㅠ 리퀘 내용은 정말 좋았는데 왜 이런...
미안해요 ㅠㅠ캐붕발싸..!
장마철이 온 것인지 갑작스레 비가 퍼부었다. 창을 후두둑 때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매서운 소나기로 이어지는 빗방울에 길거리에 있던 사람들은 우왕좌왕하며 달리기 시작했다. 간혹 처마 밑으로 비를 피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창 뜨거운 여름이 계속되어 가뭄이 말썽을 일으키고 있었기에 이번 비는 조금 오래 갔으면 좋겠다 싶은 마음도 들었다. 저녁 일곱 시, 아직은 해가 있어야 할 시간인데 예고 없는 비 때문인지 먹구름 낀 하늘은 우중충하니 회색이었다. 브루스는 창 밖으로 이러 저리 뛰는 사람들과 그들 위로 퍼붓는 거센 빗줄기를 보았다. 창가 자리라 그런지 그 앞으로 비를 피해 들어오는 사람들의 뒷모습도 간간히 보였다. 비는 당혹스러웠지만 사람들 중엔 웃는 자들도 있었다. 너무나도 뜨거운 더위였다. 빗물은 순식간에 그 더위를 식히고 땅을 차갑게 물들였다. 창문 너머를 바라보는 브루스 웨인의 옆으로 한 웨이터가 다가와 커튼을 드리울까요 하고 물었다. 브루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창으로부터 시선을 떼었을 때엔 저의 앞 자리에 앉은 여자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만난 지 이 주도 채 되지 않은 여자는 구불거리는 금발에 늘씬한 몸매를 가진 모델이었다. 재뉴어리라는 봄같은 이름 역시 갖고 있었다. 아마 예명일 것이다. 여자는 콧대가 높았고 자신의 갚어치가 비싼 것처럼 굴었다. 실질적으로는 당장 브루스의 지갑에서 꺼낸 돈만으로도 고용할 수 있을 정도뿐이 안될 텐데 말이다. 하지만 브루스는 신사였지 무뢰한이나 파렴치한은 아니었다. 그는 여자의 프라이드를 존중할 줄 알았고 매너를 지킬 줄 알았다. 물론 겉으로 드러나는 억만장자 브루스 웨인의 모습으로서 말이다. 그리고 그는 여자의 존재를 이용하는 법 역시 알고 있었다. 간혹 그의 아이덴티티를 숨기기 위해서는 원하지도 않는 바보같은 짓거리를 해야 할 때가 종종 있었는데 이 시간 소모적인 쓸데 없는 만남 역시 그 중 하나였다. 몇 달을 기다려야 예약할 수 있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한 코스에 천 불이 넘어가는 식사와 최고가의 와인을 주문하고 주변 모든 사람들이 감탄과 동경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이에서 하는, 아름다운 모델과의 식사. 이것은 그의 정체를 가려주는 아주 편리한 방법이 되어 왔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브루스는 속으로 한숨 쉬었다. 낭비벽 심한 바람둥이의 브루스 웨인 이미지를 고수해야 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한 일이었지만 그건 간혹 그를 지치게 만들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연기하는 것은 그렇게 감정 소모적이었다. 더군다나 앞에 앉은 여자가 심기 불편한 반응을 보이고 있을 때엔 더욱. 어느 남자가 그러겠냐만은, 그는 화난 여자를 풀어주는 일이 생기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왜 그래, 음식이 마음에 안 드나? 그는 부드럽게 질문한다. 마치 그녀의 안색이 걱정스럽다는 듯 자상함을 가장하며. 하지만 여자는 여전히 표정이 좋지 않다. 방금까지 어디 보고 있던 거에요? 그녀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아 질투인가. 식상하다고 생각하며 브루스는 속으로 다시 한 번 한숨 쉬지만 드러내진 않는다. 밖을 보고 있던 것 뿐이야. 비가 오길래. 그는 그렇게 말하곤 포크를 다시 집으려 하다 관두었다. 그릇 위에 처량하게 올려진 토끼 고기에 입맛이 뚝 떨어졌다. 와인 잔을 들어 입에 가져가는 브루스 웨인에게 여자는 지겹게도 물고 늘어졌다. 여자 보고 있었잖아요, 붉은 머리의 수트를 입은. 나로는 부족한 거에요? 브루스가 뭐라 입을 열기 전에 그녀가 날카롭게 덧붙였다. 얼마 전 신문에서 당신 기사를 봤어요 브루스. 두 명의 N사 모델과 스캔들이라니, 설마 내가 신문도 안 볼줄 알았어요? 내가 모델이라 멍청해 보여요? 여자의 립스틱 칠한 입술이 뒤틀리기 시작하자 브루스는 정말로 이마를 짚고 싶어졌다. 잘못 걸려도 단단히 잘못 걸린 모양이었다.
사실 브루스는 이 여자가 똑똑하건 멍청하건 관심이 없었다. 외모도 직업도 혹은 성격마저도 알 필요가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들은 전부 브루스 웨인이라는 가면을 만들어 내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래, 인정하자. 그는 분명 흔히 여자들이 말하는 나쁜 남자 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있었다. 이거 나름 잘 하고 있는 건가, 라며 속으로 조소했다. 어느 쪽으로든,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간에 그가 못할 짓을 하고 있다는 건 분명해진다. 그리고 또 다른 한 남자에게도, 그리고 저 자신에게도. 브루스가 얼핏 씁쓸하게 웃는 것을 본 여자는 그 미소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자존심이 완전히 틀어져 자리에서 일어났다. 웨이터가 급하게 그녀의 숄을 가져오는 걸 입는 여자에게 브루스가 과장된 동작으로 양 팔을 벌리며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젠, 그건 전부 루머야. 당신도 알고 있잖아. 내가 또 누구에게 눈을 돌리겠어. 브루스의 머릿속으로 또 다른 자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래, 이건 전부 속임수에 불과해. 거짓된 가면이다. 너도 알고 있잖아. 문득 명치가 쓰려왔다. 여자는 브루스의 말에 아랑곳 하지 않으며 발을 옮겼다. 그는 잠시 그녀를 그냥 떠나도록 놔두고 싶다 생각했다.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싫었다. 하지만 주변의 다른 테이블에서 그를 연신 흘끗거리는 눈빛에 브루스는 견디지 못하고 일어났다. 쏟아지는 시선이 마치 바늘같았다. 대충 계산을 끝내고 여자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왔을 때에도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우산은 없었지만 차는 있었다. 아까보다는 약해진 빗줄기를 맞으며 여자는 택시를 잡으려 했고 그 모습에 브루스는 혀를 내둘렀다. 질투는 끔찍했으나 자존심과 고집 하나는 인정해야겠다. 그는 자신이 왜 이런 짓을 해야하는지 문득 회의감이 든다. 이봐 젠, 기다려. 마치 그녀를 진심으로 걱정이라도 하듯이 브루스는 비를 맞으며 뒤를 쫓아 그녀의 팔을 잡아 세웠다. 하지만 여자가 몸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그의 뺨을 때리는 것에 손을 놓고 만다. 짜악. 빗소리에 묻혀서도 날카롭게 울리는 마찰음에 브루스는 뺨을 맞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바람둥이 자식. 여자는 그렇게 중얼거렸는데 빗물 맞은 얼굴이 우는 것 같았다. 그녀는 택시를 타고 멀어졌다. 식당의 종업원들은 그의 식당 앞에서 비를 맞고 따귀를 맞은 브루스 웨인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브루스는 화끈거리는 볼에도 그의 비싼 수트를 적시는 빗물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느릿하게, 손으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되려 잘 된 일이다.
문득 옆으로 기울어지는 우산에 그의 몸 위로 쏟아지던 빗줄기가 막혔다. 브루스는 우산을 쥔 상대를 돌아보았다. 젊은 남자는 삐딱하니 한 손엔 우산을 들고 다른 손은 주머니에 꽂은 자세로 브루스에게 웃어보였다. 양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 어딘가 자신감 넘치는 만족스러운 웃음인 익숙하다. 잘 됬네. 할 조던은 그렇게 말했다. 브루스는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시선을 돌리고, 손등으로 턱을 따라 흘러 내리는 빗물을 훔쳤다. 말 없이 겉기 시작하는 그의 옆에서 할은 우산을 씌워 주었다. 길거리에는 시간도 시간인 데다가 계속해서 쏟아지는 비로 인해 사람이 거진 없었다. 차 가져오지 않았어? 묻는 할에게 브루스는 애매하게 고개를 저었다. 할은 계속해서 말했다. 세상에 살다보니 네가 길거리에서 뺨 맞는 장면도 보게 되고. 그 브루스 웨인이 말이야. 그러게, 바람 피는 사람 잘 되는 꼴 보기 힘들다잖아. 비웃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에도 브루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할은 그에게서 아무런 반응도 없자 웃던 표정을 없앴다. 그는 멈춰 서서 브루스의 팔을 잡았다. 왜 그래 브루스?
왜 그러냐니. 너는 아마도 이해할 수 없겠지. 브루스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 새어나가듯한 웃음을 흘렸다. 할은 눈 앞의 남자가 답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것에 미간을 찌푸렸다. 물에 젖어 관자놀이 위에 아무렇게나 늘어진 머리카락, 그리고 내려 뜨인 속눈썹과 물을 먹은 것처럼 젖은 푸른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지 않는 것에 할은 마치 어린 아이처럼 울컥한다. 그래서 그는 항상 자신을 감추려고만 드는 브루스 웨인에게 말했다. 넌 그런 표정 지으면 안되잖아. 그 얼굴을 해야할 건 나인데. 할 조던의 말에 브루스가 시선을 들었다. 그래 되려 브루스 그 자신이 상처 받았다는 듯이 굴면 안되었다. 이기적으로 구는 자신으로 인해 상처받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브루스는 부질없이 생각했고 할은 그제서야 자신을 마주 보는 남자의 시선에 조금 웃었다. 그렇게 봐 주니 좋잖아. 할은 우산으로 그들을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입술 위에 닿는 촉감을 느끼며 브루스는 눈을 감는다. 잠시, 창문에 커튼이 닫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