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에 얼굴이 뭉개진 배트맨은 숨막히는 소리를 냈다. 카울은 반쯤 부서진 채로 간신히 얼굴의 일부만을 가리고 있는 정도였다. 케블라 수트는 아무렇게나 여기저기 헤어지고 뜯겨져서 상처 나 피흘리는 그의 몸 일부분들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할은 웃었다.
아. 정말 칠흙같은 밤이었다.
배트맨은 연신 바닥을 손끝으로 긁으며 몸부림을 쳐댔다. 팔 다리가 하나씩 부러지고 금이 간 채로 이 정도의 반항을 할 수 있는 걸 보면 역시 만만찮은 상대임이 분명했다. 그래도 인간은 인간. 결국 그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고 그가 조잡하게 부리는 인간의 손에서 개발된 조잡한 무기들도 우주적인 힘 앞에서는 가루처럼 부서져내리는 것이다. 할은 손으로 남자의 꿈틀거리는 등근육 위를 지긋이 눌렀다. 그것만으로도 손 밑에서 뼈가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배트맨은 목끓는 신음을 냈다. 경련하던 배트맨은 어깨 너머로 간신히 고개를 돌려 저를 옭아매는 상대를 노려 보았다. 타오르는 푸른 눈동자 안에 비치는 건, 일렁이는 어둠에 잠식되어버린 남자였다.
이건 네 모습이 아니라고, 정신을 차리라고 배트맨은 쉴 새 없이 외쳤으나 할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네 의지는 고작 이것 뿐이었다. 배트맨이 조롱했다. 할은 그의 케블라 수트를 조각 조각 해체하며 별 감흥없이 생각했다. 내게 있던 의지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공포를 이겨냄으로서 오는 그 의지는 비록 순수했을지언정 웃음이 나도록 멍청하고 바보같은 종류가 아니었나. 의지는 약하지만 어둠은 강하다. 할은 남자의 카울을 벗겨냈다.
배트맨 너도 결국은 어둠에 몸을 내준 창녀가 아니던가. 그는 남자의 검은 망토를 뜯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