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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ts뱃 단문


딕뱃 단문






반복 학습이라고들 한다. 여러 번 거치는 과정에서 무언가에 익숙해지는 것을 말한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아프다 아프다 생각하다가도 그것이 반복되면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통증에 무뎌지고, 둔감해진다. 피를 보고도 아무런 감흥이 들지 않는 것이라던가 하는. 혹은 제 살점이 떨어져 나가 너덜거리는 모습이라던가, 통알에 궤뚫린다거나 뼈가 부러진다거나. 고통의 종류는 갖은 방법으로 그를 마주한다. 그녀에게 있어서 위험이라는 명사는 그저 추상적이기만 한 개념이 아닌, 보다 더 현실적이고 아슬아슬한 모습을 띈 것이었다. 베아트리체 웨인은 순간 따끔하게 느껴지는 고통에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입술에 스치기만 한 머그잔을 도로 내려놓은 베아트리체는 그 손으로 제 입가를 매만졌다. 아랫 입술을 검지로 슬쩍 찍어서 떼어보니 붉은 기가 묻어났다. 설마 해서 혀를 내밀어보았다. 쇳맛이 느껴지는 것에 그는 확실히, 입술에서 피가 나고 있단 걸 납득한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아주 드문 일만도 아니었다. 그녀는 체력 단련을 위해 몸을 관리할 지언정 자신의 외모에 신경을 쓸 일은 전혀 없다시피 했고 그 덕분에 이런 식으로, 불편함을 겪는 일이 종종 생겼기 때문이다. 입술이 심하게 부르터 피를 볼 정도가 된다거나 하는. 알프레드는 간혹 그녀에게 외관에도 약간의 신경을 쓰는 건 나쁘지 않다는 식의 말을 하곤 했었다. 단지 그녀의 몸을 위한 게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고 연기해야하는 웨인 사의 베아트리체 웨인 역을 연기하기 위해서라고 말이다. 사업을 하는 여성의 몸은 잘 가다듬어져 있어야 하고 부드러우며 동시에 빛을 발해야 했다. 그녀는 혀로 제 아랫입술을 살살 쓸었다. 부르튼 입술이라던가, 이런 식의 관리받지 못한 듯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되는 것이라고.


"안녕, 브루스."


그녀는 케이브 안으로 들어오는 딕 그레이슨을 흘끗 보곤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잊고 있던 임무가 생각나서였다. 자신의 이름 대신 그녀를 브루스라는 애칭으로 부르곤 하는 거의 유일한 사람인 딕 그레이슨은 단지 그녀를 한참 어릴 때부터 그리 부르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한다. 다 자란 지금까지도 그걸 고칠 생각을 하지 않는 딕에게 그 이름으로 불릴 때마다 베아트리체는 저도 모르게 그들의 과거를 회상하도록 만들어 어울리지 않게 감성적으로 만들곤 하는 것이다. 그녀는 머그를 다시 입으로 가져갔고 딕은 그녀의 뒤에서부터 다가와 목덜미에 가볍게 입맞췄다.


"웬일로 일상복이에요?"

"아직 패트롤 시간 까지는 여유가 있잖니."

"난 또 나 좋으라고 입은 줄 알았네."


딕은 그녀의 한 쪽 어깨의 셔츠 자락을 검지로 잡아 벌리며 드러나는 어깨선을 따라 키스했다. 속옷 끈이 조이는 부근에 머무는 입술에 베아트리체는 몸을 조금 기울여 그의 입술을 피했다. 성가신 것 떨쳐내는 듯한 몸짓에 딕은 조금 아쉬운 기분이 된다. 그녀는 딕이 뒤에서부터 엉겨붙느라 조금 흐트러진 머리칼을 다시 풀어 높게 묶으며 말했다.


"오늘은 바빠질 것 같으니 준비를 해 두는게 좋을 거다."


딕은 그녀가 앉은 의자를 잡아 천천히 빙글 돌려 그들이 마주보게 했다. 감정이 잘 엿보이지 않는 푸른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딕은 손을 들어 그녀의 아랫 입술을 검지로 살살 어뤘다.


"그럼 오늘은 섹스 할 새가 없겠네요."

"딕."

"인상쓰지 마요. 주름 잡혀."


입술도 이렇게 엉망이 되서는. 알프레드가 그렇게 관리하라고 하는데도 도통 신경을 안 쓰네요, 당신. 딕이 웃었다. 뭐, 그게 당신 다워서 매력적인 거겠지만. 베아트리체는 내심 딕이 자신의 어느 부분을 보고 반했다 지껄이는 건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그보다 한참 나이도 많았고 온 몸이 상처 투성이였으며, 그래, 이렇게 관리라는 것관 거리가 먼, 오랜 기간동안 여자로서의 삶을 제대로 모르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사근사근하게 말하는 것과 거리가 멀었고 손엔 굳은 살이 가득이었다. 그녀는 항상 어둠속에서 살아야했다. 그것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딕은 자신의 주머니에서 무난한 향의 립밤을 하나 꺼내더니 제 입술에 충분히 발랐다. 남자의 보기 좋은 형태의 입술이 반들거리며 호선을 그렸다. 그리고 딕은 그 입술로 그녀의 입술에 입맞췄다.


상처난 입술은 그 접촉에 아림을 호소했지만 차츰 그 감각은 무뎌져갔고 대신 알싸한 립밤이 피부 속으로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딕은 그녀의 양 뺨을 조심스럽게 잡고 마치 깨어지는 것을 대하는 듯 키스했다. 상냥하지만 욕심을 숨기지 않는 혀가 파고들었다. 베아트리체는 느리게 깜박이던 눈을 감으며 그에 입술을 벌리고 고개를 기울였다. 달뜬 숨이 맞물린 입술 사이 대신 코를 통해 흘러나왔다. 딕은 입술을 뗀 후에 선 좋은 눈이 둥글게 접히도록 웃었다.


"가끔은 당신이 상처입는 것도 좋네요."


그 틈을 이용해서 더 파고들 수 있으니까. 딕이 말했고 그녀는 실없는 소리 말라며 핀잔했다. 다시 한 번 젖은 입술이 다가왔다. 베아트리체는 딕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무뎌지는 것은 상관 없었다. 단지 걱정되는 건, 누군가의 존재가 그를 다시 고통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약하게 만드는 것. 그것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