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잼주의 그냥다주의
술렁거림은 배트맨이 잠시 리그를 떠나게 되었을 때가 되어서야 멈췄다. 모종의 일로 바쁘다고 했다. 말은 쉽지만, 그렇게 간단하기만 한 일은 아니란 걸 다들 짐작할 수 있었다. 원래 말이 많은 자는 아니다. 알고는 있어도 섭섭한 기색을 지우기 힘들어하는 이들이 보인다. 캐물어봤자 소용 없다는 걸 아는 게 다행. 배트맨은 그들에게 질문할 수 있는 여지조차 남기지 않고 떠난다. 카울 밑으로 드러난 아랫얼굴은 잠깐의 이별을 고할 때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덧붙이자면 전에 느꼈던 그 어떤 메스꺼운 유혹의 기미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할은 혀를 내두른다. 남자는 그가 언제 배트맨이 되어야 하는지 또는 브루스 웨인이 되어야 하는지, 혹은 그 사이의 짐작하기 힘든 일종의 창녀가 되어야 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의 그는 배트맨이다. 누구도 그에 한 마디 토를 달 수 없었다. 집착하려는 기미조차 보일 수 없다. 배트맨은 배트맨이었고 그건 절대적인 대명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할은 그가 말하는 순간부터 떠나는 등을 볼 때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는 동료들의 짐승같은 시선에 그는 서늘하게 조소했다.
알파본능을 가진 자들은 원체부터 제 속내를 숨기는 것에 어려움을 보였다. 애초에 숨겨야 할 이유 따위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을 바로 잡는 자들이었고 정의를 구축하는 신적인 존재였다. 그들이 하는 행동이 그릇될 일은 없었으며 그만큼 바보같을 정도로 단도직입적이었고 머저리같다 해도 할 말 없을 만큼 순수한 의사표시를 보였다. 선. 옳음. 정의. 용기. 우월함. 고결함... 그런 상징적인 단어들을 표현하는 데에 들어가는 자들이 바로 그들 자신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거짓된 행동을 하는 데에 서툴렀다. 웃기게도 그건 그들이 가진 지극히 인간적이고 질낮은 욕망을 숨기는 데에 조차 한치 도움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배트맨의 부재는 그들을 간신히 제정신으로 만들어 놓았다. 최면에서 풀린 것처럼 다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하고 웃고 점잖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마치 한밤 중에 사창가와 스트립클럽을 전전하던 치들이 해가 뜨면 멀쩡하고 번듯한 사람인 체 하는 것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면 정말 남자의 존재를 외면하려고 하는 것인가? 그가 끼쳤던 영향을 회피하기 위함인 노력이었나?
먼저 다가온 건 슈퍼맨이다. 그는 찍어낸 듯한 웃음과 함께 할의 어깨를 짚었다.
좋은 소식이 있어. 친구. 지구 역사상 범죄률이 가장 낮은 순간이야.
뭐,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기에 그럴 듯한 이유였다. 그래도 나쁠 건 없는 소식이니 할은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가 한 눈 파는 새에 산타라도 다녀간 모양이군.
할은 역력하게 비꼬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남자새끼 하날 사이에 두고 시선으로 못 벗겨먹어 안달나 있었지.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밖으로 뱉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대가 알아듣지 못했을 리는 없을 터. 역시나 그는 슈퍼맨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는 걸 발견한다. 문득 태양에 그늘이 진다. 갑작스레 공기가 식었다.
시선을 기울이자 크립토니안의 어깨 너머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리거들이 하나같이 표정 없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문득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슈퍼맨이 웃었다.
할. 내 친구. 그게 무슨 뜻이지?
식은땀이 흘렀다. 할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입술을 비틀었다.
소리 하나 내지 마. 동료를 가장한 적들의 눈이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마샨은 침묵했다. 할은 그게 다행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유일하게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는 아쿠아맨은 오랫동안 소식조차 없었지만 할은 차라리 그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제정신이 아닌 건 한 사람이라도 덜할수록 좋다. 그는 술을 마셨다. 담배를 피웠다. 조금이나마 취한다면 이게 꿈이라고 여길 수 있을지도 몰랐다. 캐롤이 그에게 언젠가 괜찮냐고 물어왔고 할은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는 누린내가 가득한 술집에서 처박혀 싸구려 맥주를 마시고 수북한 담배꽁초를 쌓아올렸다. 그 누구도 저가 할 조던인지 그린랜턴인지 알아차릴 수 없을만큼 그림자 속에 구겨져 있었다. 그 편이 나았다. 저 역시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술집의 고물 티비에서 배트맨이 나왔다. 어딘가 익숙해뵈는 악당과 대치하는 모습이었다.
꼴사납군.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은 그 목소리를 알았다. 티비 속에 있어야 할 남자는 제 옆의 스툴을 빼고 그에 앉았다. 긴 다리가 천천히 꼬아지며 다리 선을 따라 값비싼 수트에 팽팽한 주름을 만들어냈다. 남자의 창백한 옆선에 흑백만화와 같은 음영이 졌다. 브루스 웨인은 우아한 동작으로 위스키를 한 잔 시키더니 덧붙였다.
초라한데다가.
이미 술집 안의 시선은 남자를 향해 흘끗거리고 있었다. 그가 문을 너머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그랬을테다. 의도된 거다. 계략적이다. 브루스 웨인이 계획하지 않고 뭔가를 행동한 적은 없었다. 적어도 그가 기억하기로서니. 남자는 그에게 쏠리는 시선을 무시하는 것 같았고 또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같았지만 할은 이제 알았다. 그가 이걸 즐기고 있다는 것을.
그는 지금 자신을 도발하러 왔다. 남자의 성질을 건드는 데에 그보다 더 간단한 말이 없었다. 할은 차가운 눈으로 그를 보다가 픽 웃었다. 술김에 되레 태연할 수 있는 걸지도. 어쩌면 남자의 존재가 워낙 현실감이 없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할은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원하는 게 뭐야.
사람들이 네 주변을 돌며 강간마같은 표정을 짓는 게 즐거운건가. 네 존재를 보며 안달나서 아랫도리를 세우는 걸 보며 만족감이라도 느끼는 건가. 고급 창녀처럼 그딴 수법으로 그들 위에 군림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고작 인간이기 때문에 너보다 강한 존재들을 그런 식으로밖에 다룰 수 없다고 여기기라도 했단 말인가. 할은 단전에서 들끓는 말을 집어삼킨다. 반 쯤은 진심어린 생각이었으나 반 쯤은 질투가 서려있단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질 수 없는 게 잡아보라며 눈 앞에서 알짱거리고 있다. 브루스는 손을 뻗어 할의 입에 물린 담배를 제 입으로 가져갔다.
간단해. 조던. 난 어려운 사람이 아냐.
가는 입술 새로 뿌연 연기가 흩어졌다. 푸른 눈이 길게 빠진 눈매 안에서 탁하게 빛났다. 아. 또 이 모습이다. 언제 사람들을 유혹했냐는 듯 순수한 표정. 연기와 더불어 자칫하면 흩어지기라도 할 것같은 그런 연약함. 브루스는 깊게 담배를 빨아들였다. 담배의 끝에서 붉은 빛이 났다가 사그라들었다. 남자는 할과 시선을 떼지 않으며 손가락 새에 끼워진 담배를 천천히 내렸다. 타들어가는 끝이 할 조던의 허벅지에 닿았다.
천과 더불어 살 타는 소리가 들렸다. 번쩍이는 고통. 순식간에 눈 앞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브루스는 웃었다.
강해서 나쁠 건 없지.
너...
싫다면 빠져도 좋아.
남자는 꽁초를 바닥에 떨구고 일어섰다.
약한 자는 필요없으니.
술집의 문이 열렸다 닫혔다. 그의 존재가 사라지자 봇물 터지듯 주변의 소음이 돌아오고 다시 시간이 돌아갔다. 할은 갑작스레 수백 미터를 전력질주 한 것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타들어간 허벅지를 더듬는 대신 자신의 지퍼를 내리고 그 자리에서 수음했다. 세게 위아래로 흔들고 성기 끝을 강하게 쥐어짰다. 눈 앞이 새하얘졌다. 발 끝이 움츠러들었다.
곧 사정한 그는 잠시 동안 계속해서 헐떡였다.
술집 안의 그 누구도 그를 신경쓰지 않았다. 할은 조소했다. 암컷이 저를 차지해 달라 교태를 부리는데 마다할 짐승이 있을까? 질낮은 서커스에 껴주길 원한다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