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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님 생일축전~미완






예전 하나 조금 묘하다고 생각한 일이 있긴 했는데 아주 특별난 일은 아니었기에 그냥 넘겼던 적이 있었다. 저스티스 리그에 서로를 향한 불신의 씨앗이 움트고 있을 무렵, 가장 먼저 시크릿 아이덴티티를 공개하길 제안한 자는 브루스 웨인, 배트맨이었다. 그는 카울을 벗고 자신의 얼굴을 드러냈다.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CEO인 베아트리체 웨인과 남매 사이라고 주장한 브루스 웨인은 그녀의 이목구비를 거의 고스란히 가져다 놓은 듯한 얼굴에 짧은 커트를 가진, 보기 드물게 잘 생긴 미청년이었다. 대외적으로 베아트리체 웨인에게 남자 형제가 있다는 말은 그 어디에도 알려진 바가 없기 때문에 브루스 웨인의 정체는 그만큼 놀라운 것이었고, 그가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는 사실은 저스티스 리그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시점으로 다가왔다. 그건 그들의 존속 여부를 단단히 다지며, 마치 브루스 웨인이 다시 카울을 뒤집어 쓴 속도만큼 그 일은 빠르게 과거로 묻히고 그 후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그 때의 사실이 모두의 뇌리에 남아 있을망정 되새김질을 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베아트리체 웨인은 토마스와 마사 웨인으로부터 그들의 거대 기업을 물려받은 고담의 황녀였다. 그리고 그녀의 외모는 언제나 그녀의 지위 만큼이나 많은 뉴스거리 및 루머들을 뒷꽁무늬에 질질 끌고 다니기 마련이었다. 할 조던은 모두들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루머 따위에 관심이 없는 자였으나 브루스 웨인이 정체를 밝힌 이후 웨인 엔터프라이즈에 대해 아직도 아무 관심이 없다고 하기엔 힘들게 되어버렸다. 그는 툭하면 신문 1면에 얼굴이 보이는 웨인을 보며, 그녀가 어째서 남자 형제의 존재를 숨기고 있는지 또는 어떻게 그 누구도 그녀에게 형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지 못했는지 따위의, 그의 민간인으로서의 상상력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대략적인 가늠을 해보곤 했다. 그 몇 초간의 짧은 질문들의 결론은 항상 부자들은 저마다 그 이유와 수법이 있기 마련이라 는 참으로 심심한 답변으로 끝나기 마련이었다. 애초부터 브루스 웨인은 그들로 하여금 제 정체를 의심조차 할 수 없도록 아예 베아트리체 웨인과의 DNA 매치 결과라던가 그들이 함께 찍었던 사진 따위를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그와 웨인은 의심하기 힘들 정도로 비슷한 - 거의 똑같다고 할 수도 있는 - 얼굴을 가졌기 때문에, 딱히 의심의 여지라곤 주어지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 날 이후로 배트맨은 절대로 카울을 벗는 일이 없었다.


이왕 서로의 정체도 다 아는 마당에 굳이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게 무슨 소용이냐는 말도 나온적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브루스 웨인은 그 만의 사정으로 인해 정체를 숨겨야 하는 입장이라 주장했고 만일의 사태에 그의 정체가 세상에 알려지는 경우 그건 그의 시크릿 아이덴티티와 가족 및 웨인 엔터프라이즈에 막대한 영향을 가져올 거라 말했다. 장작 30여 년 간 정체를 숨기고 살아온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짐작하는 수밖에. 한편으론 배트맨의 그런 편집증적인 모습은 안경 하나로 시크릿 아이덴티티를 숨길 생각을 한 클락 켄트를 우스워 보이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근데 만약 우리가 이 미션을 하게 되면," 할 조던이 팔짱을 끼며 입을 열었다. "네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크릿 아이덴티티가 위험에 처할수도 있게 되는 것 아닌가?"


배트맨은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나의 아이덴티티보다는 베아트리체 웨인의 안전이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높겠지."

"그것 역시 딱히 좋은 소식은 아니군."

"베아트리체 웨인은 이번 미션에 대해 알고 있나?" 슈퍼맨이 물었다.

"물론이다. 함부로 그녀를 위험에 노출되게 할 수는 없으니."


그것 참 평소에 잘도 '예고 없이' 위험을 감수해내는 배트맨의 입에서 나오는 것 치곤 모순된 말이군. 대부분의 리거들이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가족이라고 생각하면 뭐라 딴지를 걸기도 힘든 미션이었다. 웨인 엔터프라이즈가 주최하는 애뉴얼 윈터 볼의 초대 명단에 그들이 노리는 타겟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건 만일 저스티스 리그가 이 미션에 전력으로 개입할 경우 윈터 볼이 열리게 될 웨인 별장이 순식간에 전쟁터로 변할수도 있단 소리였기 때문이다. 수백 여 명의 부상자가 나올 수도 있는 상황인데다 그의 가족까지 개입되었으니 배트맨의 작전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에 가까웠다. 그는 별장 내부지도 및 고용 인원들을 마치 제 수족처럼 궤뚫고 있었다. 그 와중 원더우먼이 한 걸음 나섰다.


"만약의 경우에 베아트리체 웨인의 신변 보호는 내가 맡도록 하지. 그녀가 이미 미션에 대해 알고 있다 해도 만약의 경우를 배제할 수는 없으니."

배트맨은 거절했다. "그건 자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원더우먼. 난 이미 그녀의 탈출 경로를 물색해 두었어."

사이보그는 조금 탐탁치 않아했다. "배트맨. 네가 항상 치밀하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네 가족이 개입되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군. 만에하나 그녀가 위험에 닥치기라도 했을 때 네가 이성적으로 행동해야 할 순간을 놓칠수도 있는 일 아닌가. 물론 이건 경험과 보통의 통계에서 오는 가정일 뿐, 너의 실력이나 판단을 의심하는 건 아냐."

"충분히 의심하는 것처럼 들리는군." 배트맨의 심기가 틀어지는 것이 눈에 훤했다.

말싸움 비슷한 것이 시작하려 하기도 전에 아쿠아맨이 특유의 단정짓는 어투로 말했다. "배트맨이 방법을 물색해 두었다 하는데 굳이 그것을 파고 들 이유가 있나? 쓸데 없는 시간낭비로군."

할 역시 수긍했다. "누구와 달리 난 지구에서 한가하게 휴가나 보내고 앉아 있을 시간이 별로 없거든. 오아에서 내 정수리를 쪼아대기 전에 얼른 이 일을 끝마치고 싶군 그래.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나 말해봐."

배트맨이 끄덕였다. "그럼 브리핑을 마저 하도록 하지."


결론적으로 배트맨이 할 조던의 처음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은 건 둘째치고, 할은 이 미션에 개입된 베아트리체 웨인이 이토록 협조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 놀랍다고 내심 생각했다. 그녀 자신의 안전은 물론이고 사업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겪게 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녀가 이전까진 단 한 번도 저스티스 리그의 일에 개입한 적이 없었다는 점이라던가 브루스 웨인이 평소 그녀에 대해 절대로 언급하지 않는 것 따위를 종합해 보았을 때 그는 베아트리체 웨인이 브루스 웨인의 배트맨 아이덴티티를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가정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녀의 협조를 보았을 때, 그의 예상과는 반대로 되레 배트맨의 큰 조력자일 것이란 추측이 그럴싸했다.


할 조던은 아쿠아맨, 아서 커리와 마찬가지로 홀 내부에 참가자로 위장해 있었기 때문에 베아트리체 웨인이 등장할 때의 모습을 고스란히 관찰할 수 있었다. 그녀는 오픈 숄더 형식의 특별한 장식 없는 은빛의 롱 드레스를 입었으며, 할 조던이 차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가격을 자랑하는 아름다운 힐을 신은, 늘씬한 미인이었다. 보통 여자보다 큰 키는 모델 같았으며, 흰 피부에 긴 흑발은 백인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종류였는데 그래서인가 그녀에겐 어쩐지 이국적인 아름다움이 있었다. 베아트리체의 눈은 바다처럼 파랬다. 할은 내심 브루스 웨인과 지독하게 닮았다며 혀를 찼다.


"당신이 할 조던이군요." 베아트리체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알아보았다. 그녀는 한 손을 내밀었고 할은 부담없이 그녀의 손등에 입맞췄다.

"흔한 얼굴은 아니지만 꽤나 쉽게 알아보시는 군요."

베아트리체는 샴페인 잔을 빙글 돌리며 농을 걸었다. "흔한 얼굴이 아니라 함은, 본인 입으로 미남이라 인정하시는 건지?"

"당신이 자신의 외모를 인정하는 만큼 정도일겁니다."


베아트리체는 소리내서 웃었다. 그 모습이 퍽 순수해 보여서 할은 그녀에게 조금 더 호감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한다. 베아트리체는 새로운 샴페인 잔 하나를 집어 할에게 건네주었다. 플루트 잔을 쥔 긴 손가락의 손톱은 짧게 정리되어 있고 그 끝엔 단단한 굳은살이 얼핏 보이지만 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초면인데도 말에 거리낌이 없군요, 할." 그녀는 심기가 상한 것 같진 않았다. "그건 당신을 여러 번 난처한 상황에 빠트렸겠군요."


할은 샴페인으로 목을 축였다. 주변에서 그들을 주시하는 다른 리거들의 시선이 느껴지는 듯 했다.


"말 하자면 길죠. 물론, 당신처럼 아름다운 여성이 제 말재주로 기뻐하는 걸 보는 건 기분좋은 일입니다."

"어머. 제가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나요."

"적어도 오 분 씩이나 저와 시간을 보내주고 계시니 그렇게 짐작할 수 밖에요."

베아트리체가 흠 소리를 냈다. "저에 대한 기사를 본 적이 없으신가 보군요."

"당신에 대한 기사는 너무 많아서 보기도 전에 그 숫자에 질리던데요."

"제가 당신과 함께 있는 걸 본 사람들은 또 이렇게 생각하겠죠. 저 여자, 이번엔 저 남자로 찍었나봐. 이번엔 얼마나 갈까. 하룻밤? 일주일? 정말 남성편력 하나는 소문대로 끝내주는군."

"본인 뒷담을 제 3자 처럼 하시다니 그닥 좋은 취미는 아니군요."

"놀라는 기색은 아니네요."

"당신처럼 모든 걸 가진 완벽한 여성이 원하는 걸 갖는 게 뭐가 나쁜가요? 신경 쓰입니까?"

"아뇨. 별로." 그녀는 미소지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말하신 대로, 전 원하는 건 가져야 직성이 풀리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