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콘스탄틴 x 퍼니셔
퀸토님 리퀘
까마귀 길 上
뉴욕 할렘가는 아직까지 해가 중천에 떠있는 낮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묘한 어둠이 존재하고 있었다. 어퍼 맨해튼 근처 155번가는 허드슨 강에서 불어오는 시큼한 강물의 냄새가 맡아질 정도는 되었고, 그 냄새는 건물과 도로, 그리고 사람들의 몸에 고약하리만치 박혀 들어 있는 것이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누렇게 떠있었으며 제대로 포장되지 못한 길은 절그럭거리며 그 밑에서 타올랐다. 팔십 여 년은 거뜬히 넘은 칠이 다 벗겨진 건물들로부터 간혹 해가 깊게 기울어질 때마다 시꺼먼 그림자가 땅귀신처럼 건물 바닥으로부터 흔들거리고는 했다. 존 콘스탄틴은 관자놀이에서 흐르는 땀을 손바닥으로 대충 훔쳤다. 그의 옆을 지나치는 몇 아프리카계 사람들이 이 낯선 이방인을 흘끔거렸다. 콘스탄틴은 그가 한때 이 곳에 발을 들이기만 해도 그를 알아보던 수많은 자들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는 가장 더러운 곳의 사람들과 가장 악한 곳의 지배자까지 그 계열을 가리지 않고 친분을 쌓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모래색 코트를 벗어 주머니에 꽂은 손에 걸치고, 담배를 깊게 빨아 들였다. 벌써 여름이었다. 그는 순식간에 필터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땅바닥에 던지더니 미간을 구겼다.
사실 존 콘스탄틴은 한동안 할렘가에 올 일이 없어야 했다. 아니, 할렘가 뿐이 아니라 뉴욕 자체에 발을 들일 일이 없어야 했을 것이다. 그는 최근 그를 성가시게 하던 노르웨이의 사건 때문에 계속해서 유럽 부근을 전전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갖 미신과 잡귀가 섞인 미국보다는 차라리 북유럽의 살에는 추위를 선택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가 미국에 돌아오게 된 것은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고 있던 채즈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왔기 때문이었다. 콘스탄틴은 네가 내게 연락하는 걸 보니 죽음이 가까워져오고 있나 보다고 자조적으로 이죽거렸고 채즈는 너와 알게된 것 자체가 죽음을 달고 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역시나 자조적으로 받아쳤다. 콘스탄틴의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자들 중 거의 유일하다시피 질긴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채즈는 그에게 부탁 아닌 부탁을 하나 했다. 그가 알고 지내는 가족의 지인인 누군가에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고 말이다. 존 콘스탄틴은 그가 자신의 친구라는 작자들 목숨 하나 구하기 힘든 마당에 뭔 연관도 되지 않은 사람을 구하고 앉아있을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채즈는 그가 저번에 루마니아에서 콜드 플레임과 관련해 콘스탄틴을 도와줬던 일을 들먹였으며, 그 기억을 떠올린 콘스탄틴은 신음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Bullocks.
"악마에게 덜미를 잡히는 것보다 사람에게 빚지는 일이 더 귀찮은 법이지."
그는 궁시렁거리며 고개를 좌우로 휙휙 돌렸다. 새로운 가게라던가 늘어난 거지들의 수라던가, 할렘가는 그가 마지막으로 왔을 때와는 약간 다른 모습을 띄고 있었지만 길을 잃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낡은 건물들과 더러운 도로 따위는 여전히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콘스탄틴은 채즈가 그에게 말해주었던 주소를 찾았다. 건물 앞에는 왠 거지가 죽은듯이 웅크리고 있었고 문은 다 부서지기 직전처럼 덜렁거렸다. 아주 오래된 아파트 중 하나였다. 콘스탄틴은 시계를 한 번 확인하고, 습관처럼 담배를 하나 더 빼어 물며, 건물 안으로 발을 디뎠다.
건물 내부는 거의 사람이 살만한 몰골처럼 보이지 않았으나 그보다 더한 곳에서 살아본 적도 있는 콘스탄틴은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낡은 카페트는 구두굽 밑에서 지꺽이는 소리가 났고 곳곳에서 쥐들이 내달렸다. 건물 안은 습했으며 아주 오랫동안 손보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귀신 하나 튀어 나오기 딱 좋은 환경이군. 그는 생각했다. 귀를 기울이면 건물 어딘가서 길게 늘어지는 신음이나 이명과도 같은 비명이 마치 환청처럼 울리는 듯 했다. 아마 평범한 인간은 듣지 못할 소리일 것이다. 다만 이승과 저승을 수 없이 오갔던 존 콘스탄틴에게 그 정도를 구분할 감각 정도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덜컹거리는 창문 너머에서 들어오는 누런 햇빛으로 그가 걷는 복도에 괴상한 그림자 자국들이 얼룩지곤 했다. 건물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존 콘스탄틴은 문득 발을 멈추고, 어깨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한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막 침대에서 나온 것처럼 머리칼을 길게 늘여트린 히스패닉계 아이는 흰 잠옷을 입은 채 그를 올려다 보았다. 콘스탄틴은 담배 연기를 몇 번 뿜다가 걸음을 돌려 아이에게 다가가 한 쪽 무릎을 꿇고 시선을 맞췄다.
"꼬마 아가씨. 이름이 뭐지?"
"레아."
"안녕, 레아. 왜 혼자 있는 거냐?"
"아저씨를 데리고 오라고 했어요."
여자아이는 그를 크고 깊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콘스탄틴은 표정없는 얼골로 그 시선을 마주하다가, 여전히 담배를 물고 있는 입술 새로 비죽이 웃었다.
"그래. 날 데리고 오라던 작자가 누구던? 이 지옥의 더러운 계집년아."
큰 눈이 깜박였다. 그리고 여자아이가 웃었다.
순식간에 아이의 얼굴이 돌변했다. 그건 여전히 아이의 몸이었으나 그것을 숙주로 이용하여 조종하는 악마의 본성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머리칼이 생명을 가진 것처럼 일어서며 검고 사악한 기운이 뱀과 같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찢어지는 귀신의 소리와 함께 악마는 콘스탄틴에게 덤벼들었고, 그는 뒤로 구르듯이 튕겨 나가며 한 손을 앞으로 뻗었다. 건물의 복도가 지진처럼 갈라지듯 악마의 자취가 새겨졌다. 콘스탄틴은 재빠르게 주문을 외웠으며 동시에 그의 손 끝에서부터 눈부신 마법진이 허공에 그려졌다. 그것에 충돌한 귀신은 아이의 몸으로 비명을 질렀다. 콘스탄틴은 오만상을 찌푸리곤 몰아 닥치는 열기 속에서 욕설을 씹어 뱉었다.
"젠장, 지옥의 하수인인가."
지옥의 강한 자들로부터 명을 받드는 하수인들의 힘은 무시할 것이 못됐다. 존 콘스탄틴은 어둠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으나 마법만이 그의 목숨을 완전하게 지켜주리라곤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콘스탄틴은 그에게로 달려드는 악령을 피해 문들 중 하나로 몸을 날렸다.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병을 꺼내 그에게 기괴한 모양새로 다가오는 여자아이에게 뿌렸다. 성수를 맞은 악마에게서부터 살 타는 소리가 들리고 고막을 찢는 비명이 뒤이었다. 방 안이 끔찍하게 진동했다. 콘스탄틴은 비틀거리는 여자아이에게 몸을 날려 그 몸뚱아리를 자신의 아래에 잡아 눌렀다. 악마가 씌인 아이는 엄청난 힘으로 버둥거리면서 인간의 소리가 아닌 것을 질러대고 있었다. 아이가 휘둘러대는 손에 다리와 허리가 온통 긁혔다. 그는 이를 악물고 온 하반신의 힘으로 아이를 잡아 내렸다. 그리곤 유리 조각을 집어 부서져 나뒹구는 나무로 된 의자다리에 문자를 그려 넣었다. 콘스탄틴은 흰 이를 드러내며 헐떡였다.
"네깟 귀신이 성령의 말뚝을 피할 수 있는지 시험해 볼까."
아이는 쇳소리를 내며 흰 눈을 부릅떴다. 존 콘스탄틴은 그녀의 가슴팍을 향해 양 손으로 나무조각을 치켜 올렸다.
그 때 총소리가 울렸다.
"으윽!"
콘스틴탄은 손 안에서 울리는 얼얼함에 신음하며 말뚝을 놓쳤다. 총알에 명중한 말뚝은 산산히 부서지며 파편을 흩날렸다. 그가 파편에 맞아 피를 흘리는 손을 부여잡을 때 그의 다리 사이에 눌려져 있던 아이가 요동을 쳤고 그 엄청난 파장으로 인해 콘스탄틴은 다음 순간 벽에 처참하게 쳐박혔다. 반 쯤 구겨지다시피 한 그가 어질거리는 머리를 흔들며 눈을 뜨자 보인 건, 검은 옷을 입은 사내였다. 아니, 단순한 검은 옷이 아니었다. 그건 군사용 복장이었다. 검은 방탄복을 입고 총을 든 남자는 그의 옷만큼이나 검은 머리칼을 하고 있었다. 우습게도 그건 이 기괴한 배경 중에서 가장 현실적인 모습처럼 보였다.
여자아이는 구석에서 비척거리며 고통스러운 괴성을 내고 있었다. 그에 총을 겨누고 있던 남자는 자신의 우람한 덩치를 한 어깨근육 너머로 시선을 돌리더니 콘스탄틴을 보았다. 그리곤 다른 한 손으로 총을 한 자루 더 빼내 들더니 콘스탄틴에게 겨누었다.
"움직이면 쏜다."
그르렁거리는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보통 이런 장면을 보면 민간인은 비명 지르며 도망가기 바쁠 터인데 남자는 그런 기미하나 보이지 않는, 지극히도 침착한 모습이었다. 그에게선 그 어떤 마법적 능력도 느껴지지 않았으며 악마의 기운이나 천사의 기운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 하층 쓸모없는 거 내 얼굴에서 치우고 비켜서! 악마에게 개죽음 당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콘스탄틴은 이를 갈며 피가 흐르는 손을 내저었다. 그가 몸을 반쯤 일으켰을 때 몇 발의 총알이 그의 팔다리를 스쳐 벽에 박혔다. 멍청히 입을 벌리는 콘스탄틴에게 남자는 눈을 가늘게 떴다.
"움직이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
콘스탄틴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다시 한 번 악마가 울었다. 검은 열기가 주변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 강한 파동에 콘스탄틴은 물론이고 총을 들고 있던 남자까지 기우뚱 거려야만 했다. 아이의 몸에 들어간 악마가 이를 드러내며 흰자위밖에 남지 않은 눈을 부라렸다. 그리곤 그들이 뭔가를 하기도 전에 창문을 깨며 밖으로 몸을 날렸다. 콘스탄틴이 창문 밖을 내다 보았을 땐 몇 층 밑의 바닥에 뿌려진 유리조각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제기랄! 끝내주는군!"
그는 재빨리 이동 마법을 쓰려고 했으나 그 사이에 자신에게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기 위해 억 소리를 내며 몸을 틀어야 했다. 땅바닥으로 몸을 날리는 그의 옆을 탕탕탕탕, 하고 연달아 뿜어져 나오는 총알들이 뒤따랐다. 가까스로 쓰러진 소파 뒤에 숨은 콘스탄틴에게 총알을 재장전하던 남자가 말했다.
"저 아이를 죽이려고 했던 건가?"
콘스탄틴은 헐떡이며 소파 너머로 소리쳤다.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방금까지 눈은 제대로 뜨고 있던 건가? 당신 눈엔 저게 멀쩡한 여자애로 보여?"
"네가 그 애의 심장을 뚫어버리려고 했다는 건 알겠더군."
짜증 가득한 신음을 낸 콘스탄틴은 손 안에서 마법진을 그리는 것과 동시에 소파 밖으로 몸을 일으켰다. 역시나 예상했듯이 총알들이 날아왔다. 그는 마법진으로부터 터져나온 불길이 주변을 휩쓸며 그에게 날아오는 탄환을 태우고 남자에게까지 뻗어나가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남자는 예상 외로 쉽게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남자는 불길을 뛰어넘어 콘스탄틴에게 온 몸으로 육박했다. 그의 몸은 단련된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그 주먹에 아슬아슬하게 광대를 빗겨 맞은 콘스탄틴은 순간 얼굴 뼈가 주저앉는 착각을 느꼈다. 그는 재빨리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남자가 그의 멱살을 잡아채는 쪽이 더 빨랐다. 멱살이 끌려온 콘스탄틴의 미간에 남자가 총구를 들이대는 것과, 콘스탄틴이 제 다른 손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을 남자의 얼굴 옆에 가져가는 건 거의 동시였고, 그리고 그들은 순간 정지한 듯이 멈췄다.
두 쌍의 푸른 눈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수 년 전에 그가 사용했던 아지트는 여전히 그 상태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몇 안 되는 물건과 책들, 잡동사니, 마법 도구들 위에 먼지가 잔뜩 쌓여 있어서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뿌옇게 흩날렸다. 콘스탄틴은 그에 신경쓰지 않고 천과 책들을 헤짚으며 뭔가를 분주하게 찾았다. 그는 그 와중에도 수화기 너머를 향해 쉴틈 없이 말을 쏟아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악마의 하수인이었다고, 채즈. 그것도 적잖이 강한 놈이었어. 그런데 뭐, 악령이 씌였던 게 전부라고? 만약 내가 성수를 갖고 있지 않았으면 뒈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야. 오, 그렇지. 난 항상 살아남지. 내 주변 사람들이 다 죽어가고 있을 때 나 혼자 살아남는다고.지금 그 말이 하고 싶은 거야?"
그가 물건들을 뒤지는 동안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남자는 경계를 풀지 않는 눈초리로 주변을 둘러 보았다. 총을 든 손에서 힘을 빼지 않는 걸 발견한 콘스탄틴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남자는 마치 야생 동물같았다. 시퍼런 눈이 먹이를 노리는 짐승의 것처럼 자신을 향할 때엔 저도 모르게 등줄기로 소름이 달리는 기분이었다. 존 콘스탄틴은 모든 세상의 가장 끔찍한 것까지 목격해온 사람이었고 그가 그 어떤 것에도 놀라거나 두려움을 느낄 수 있을 리는 없었지만, 이 남자는 뭔가 달랐다. 단순한 군인도 아니었지만 그렇다 해서 특별한 힘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남자를 다르게 만드는 것인가? 그는 전화를 끊은 뒤 잡동사니 속에서 찾아낸 책 한 권을 옆구리에 끼고 다가갔다. 사방이 시야에 잘 들어오는 곳에서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남자는 콘스탄틴이 그에게 걸어오는 걸 주시했다. 남자를 지나쳐 테이블 위에 책을 내려둔 콘스탄틴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그래서, 당신 이름이 뭐라고?"
치익, 라이터에 불 켜지는 소리와 함께 담배 끝이 붉게 타들어갔다. 뿌연 연기 너머로 푸른 눈을 깜박이며 남자가 낮게 말했다.
"퍼니셔."
"퍼니셔라."
콘스탄틴은 손가락 사이로 담배를 껴며 남자가 입은 옷을 한 번 훑었다. 검은 옷의 가슴팍 위에 그려진 흰 해골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콘스탄틴은 흐음 하는 소리를 내며 한 쪽에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던 자신의 코트를 잡아 탁탁 털어 정돈하기 시작했다. 할렘가에서의 난장판으로 인해 코트는 여기저기 잔뜩 헤어져 엉망이었지만 그는 그걸 꿋꿋하게 다시 껴입으며 말했다.
"내 평생 총을 사용한다는 퇴마사는 들어본 적이 없으니 그건 아닐테고. 용병인가? 혹시 미드나잇이 보낸 사람이라던가?"
"퇴마사도 용병도 아니다. 미드나잇이라는 자에 대해 들어본 적은 있으나 그 역시 틀렸어."
"그럼 무슨 이유로 악마의 소굴에 자진해서 들어오셨을까?"
"마침 그 곳에서 내가 뒤쫓던 놈이 발견되었다는 정보를 얻은 참이었지. 그리고 우연히 네가 있던 아파트에서 소음이 들리는 걸 발견한 거다."
"당신, 내가 누군지는 알아?"
퍼니셔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이젠 알 것 같군. 존 콘스탄틴. 악마를 속여내는 퇴마사."
콘스탄틴은 어깨를 으쓱했다. 적어도 남자는 그가 누군지 아는 모양이었고, 더 이상 그를 공격할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물론 아직까지 그가 들고 있는 총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었지만 콘스탄틴은 애써 그것을 노골적으로 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여전히 벽에 등을 기댄 채 그림자 속에 서있는 퍼니셔를 무시하며, 테이블을 손으로 짚곤 커다란 책을 한 장씩 넘기기 시작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대신 켜야만 했던 촛불 몇 개가 일렁이며 음침한 음영을 자아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다면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알겠군, 그래. 그리고 당신이 내 퇴마식을 망쳐놓았던 것도 말야."
"내 눈에 보인 건 한 남자가 여자아이를 잔혹하게 살해하려 했던 장면이다."
"끝까지 실수란 건 인정하지 않을 모양이군." 콘스탄틴이 찌푸린 눈으로 그를 흘끔 올려다 보았다. "덕분에 악마 한 놈이 달아나 버렸어. 어디로 갔는지도 종적을 찾을 수가 없지. 지금쯤 네바다로 갔을지 뉴 멕시코로 갔을지 모를 일이야."
퍼니셔는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말했다. "그 악마란 것을 잡을 방법에 대해 설명해 봐."
콘스탄틴은 눈살을 더욱 찌푸리며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넌 악마를 잡고, 난 아이를 구할 것이니까."
콘스탄틴은 잠시 책을 보기 위해 숙였던 허리를 들었다. 그는 자신의 흐트러진 금발을 쓸어 넘기며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이봐, 군인 나으리. 내가 악마를 잡으면 자연스럽게 그 아이도 구해지는 거나 마찬가지야. 악마를 해방시켜주면 숙주는 자유의 몸이 되지. 그러니 굳이 우리 둘이서 팀업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야. 그리고 난 내 팀업 상대를 고르는 데에 있어서 아주 까다롭거든."
퍼니셔는 팔짱을 꼈다. "네 의사를 물어보진 않았는데."
"나 역시 마찬가지야."
"악마를 잡으면 그 숙주가 안전하다는 걸 보장할 수 있나?"
콘스탄틴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담배 연기를 뱉었다. "장담하지."
하지만 퍼니셔는 그의 대답을 귓전으로도 듣지 않는다는 식으로 제 총을 점검했다. 데저트 이글의 총신이 철컥거렸다. "문제는 그거다. 난 너를 믿지 않아, 콘스탄틴. 네가 인간은 물론이고 수많은 영웅들과 악마들까지 잔머리로 속여 넘겼다는 건 유명한 사실이지 않나?"
그 말에 콘스탄틴은 손에 들려있던 담배를 바닥으로 던지고 남자에게 사나운 표정으로 손가락을 들이댔다. "말 조심하는 게 좋을거야. 내가 아무리 굴러먹을 대로 굴러먹은 놈이라 할지라도 여자애의 생명을 가지고 장난질을 하는 자식은 아니거든."
"내가 들은 정보와 다른 것 같군." 퍼니셔의 목소리가 그의 눈빛만큼이나 낮게 가라앉았다. "레이븐스카 정신병동. 이름이, 애스트라 였던가?"
퍼니셔는 존 콘스탄틴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가 새하얗게 핏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콘스탄틴은 뭔가를 쏘아낼 것처럼 입술을 떨다가 곧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를 찾았다.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빼어 문 콘스탄틴이 불안정하게 라이터를 찰깍이다가 제대로 불이 붙지 않아 욕설을 뱉는 걸, 퍼니셔는 흐트러짐 없는 시선으로 관전했다. 결국 담배를 도로 테이블에 팽개친 콘스탄틴은 숨을 깊게 몰아쉬면서 양 손으로 제 머리를 쓸다가, 조용히 말했다.
"그 땐 철이 없었어. 뭘 모를 때였지. 내가 감히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몰랐던, 악마가 어떻고 신이 어떤지 쥐뿔도 모르면서 설쳐대던 때였다고."
퍼니셔는 대답하지 않았다. 콘스탄틴은 조금 안정이 되었는지 다시 담배를 들어 입에 물었다. "당시의 기억이 돌아온지 얼마 안되서 그런지 아직 적응이 잘 안 되는군."
"그 때의 기억을 잊었던 건가?"
"그래. '꿈'에게서 도움을 조금 받았었지."
퍼니셔는 뭔가를 생각하듯 시선을 기울였다. "편리하군."
콘스탄틴은 그의 말에 뭔가를 대꾸하려다가 관두었다. 편리하다 라. 그렇게 말할 수도 있었다. 애스트라에 관한 기억은 그를 수 년 동안 끈질기게 괴롭혔고 그를 정신병동에서 썩어가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그 모든 걸 속죄하는 마음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원한을 품은 악령들과 자신의 죄책감으로부터 오는 환영에 눈을 감을 때도, 뜨고 있을 때에도 발작을 일으키고 정신이 좀먹혀 들어갔다. 그는 미쳤었다. 그리고 그는 정당하게 미쳤다. 그건 존 콘스탄틴이 지은 죗값을 갚을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애스트라를 다시 구해낼 수 있었으나, 그것이 그가 한 행동을 지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꿈'이 그를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 악몽을 지우고 고통을 덜었으나 그것 역시 존 콘스탄틴을 완전하게 자유롭게 만들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한 행동을 받아들이기로, 그 악몽에 끝없이 시달리기로 결심했다. 콘스탄틴은 온갖 상형 문자와 그림이 가득한 책의 낡은 페이지를 손바닥으로 쓸며 중얼거렸다.
"악령에 쫓기는 자 주제에 편하게 살 수 있을 리 없지. 심지어 죽음조차도 평화로울 수 없어. 천국이 기다리고 있는 만큼, 지옥 역시 그만큼 날 기다리고 있거든. 악마를 볼 수 없는 당신이 이해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악마. 영혼. 신적인 존재. 그것들을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겐 저마다의 이유가 존재한다. 그건 저주를 받아서일 수도, 혹은 핏줄 대대로 내려오는 힘 때문일수도, 혹은 존 콘스탄틴 그처럼 태어날 때부터 죽음이란 업보를 짊어 지고 태어난 존재라 그런 것일수도 있다. 퍼니셔는 콘스탄틴을 묵묵히 지켜보다가 굳게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내게도 보여."
콘스탄틴이 시선을 들었다. 퍼니셔는 제 총을 허리춤에 찔러 넣더니 그에게 성큼 다가와 펼쳐진 책 위를 손바닥으로 턱 짚었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고, 콘스탄틴은 아까 전 느꼈던 기이한 소름이 남자를 마주하다 다시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그들이 시선이 부딪혔고, 퍼니셔가 말했다.
"그러니 이제 그 악마를 잡을 방법을 말해 봐."
황혼이 내려앉을 무렵 뉴욕의 곳곳은 주말의 밤을 맞아 벌써부터 시끌벅적해지고 있었다. 그 중 가장 한산한 길로만 이동하던 콘스탄틴은 제 뒤에 따라오는 퍼니셔를 슬쩍 곁눈질했다. 남자의 존재감은 어마어마했다. 어둠 속에서 그를 노리는 들짐승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기분과 같았다. 존 콘스탄틴 자신이 그 어떤 누구라도 등쳐먹을 수 있는 만큼, 남자는 그의 뒤를 노리는 데에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과 달리 퍼니셔는 그 행동을 하는 데에 한 줌 기교 없이 직선적으로 부딪혀 올 것일테다. 적어도 그 점에서 콘스탄틴은 안심했다. 그는 한숨처럼 담배 연기를 뿜어 내었다.
"이 길이 확실한 건가?" 퍼니셔가 물었다. 콘스탄틴은 뒷목을 쓸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무리 뉴욕에서 오래 떨어져 있다 해도 길 정도는 찾을 수 있어. 왜, 쫓아올 사람이라도 있나?"
"딱히." 퍼니셔가 중얼거렸다. "뉴욕만 오면 성가시게 구는 벌레가 하나 있긴 하지만."
퍼니셔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콘스탄틴 역시 캐어 묻지는 않았다. 그는 주변을 기민하게 살피며 이동했다. 해가 완전히 저물었을 때 쯤까지 걷던 그들은 건물들이 점차 낮아지고 천막이나 캐러반과 같은 임시 거주지처럼 보이는 것들이 하나씩 드러나는 장소까지 이동했다. 집시들이 지내는 곳이 분명했다. 퍼니셔는 사방을 주시하며 긴장을 놓지 않았고, 콘스탄틴은 제 집에 온 것 마냥 쉽게 길을 이동하며 그를 이끌었다. 주변에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했고 그들은 아무도 마주치지 않을 수 있었다. 콘스탄틴은 천막들 중 하나의 안으로 들어갔다.
천막은 겉으로 보기엔 허름했으나 그 안으로 들어가자 멀쩡하고 넓은 공간이 펼쳐졌다. 거의 작은 서커스를 해도 될 만한 수준이었다. 마법의 힘이 깃든 것이 확실했지만, 퍼니셔는 생각보다 놀라는 모습을 보여주진 않았다. 콘스탄틴은 이제 남자가 그 어떤 것에라도 놀라기는 할지 궁금해졌다. 그는 천막으로 걸어들어가 주변을 둘러 보았다.
"이 곳에 분명 우리가 쫓는 놈을 추적하는데 필요한 물품이 있을 거야."
"굳이 여기까지 와야 했던 건가?."
"쉽게 구할 수 있는 거였다면 여기까지 올 필요도 없었겠지."
그리고 콘스탄틴은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주변에 있던 물건들 중에 축제용인 것처럼 보이는 화약 가루를 집어 바닥에 뿌렸다. 그리곤 둥그런 공 같은 것을 찾아왔다.
"뒤로 물러나 있어."
퍼니셔는 군말 없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났고 콘스탄틴은 마법진의 가운데에서 주문을 외웠다. 화약가루를 따라 불꽃이 피어오르더니 순식간에 진의 모양대로 불이 붙었고 그를 중심으로 바람이 불어 닥쳤다. 천막이 흔들거렸다. 사방의 물건들이 덜컹거리고, 콘스탄틴이 들고 있던 공이 불빛을 내기 시작하자 퍼니셔는 허리춤에서 총을 빼어 들었다. 콘스탄틴은 눈을 감은 채로 계속해서 주문을 외웠다. 그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둬만그."
갑작스레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바람이 잠잠하게 죽었다. 콘스탄틴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타나."
공중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며 나타난 여성은 마치 마법사의 옷차림새와 비슷한 걸 하고 있었다. 그녀는 검은 머리칼을 흐트러트리며 가볍게 바닥에 착지했고, 손을 한 번 휘둘러 마법진에 남은 마지막 불씨까지 꺼트렸다. 자타나 자타라는 콘스탄틴에게 다가가 그의 품 안에 들린 공을 단호하게 빼앗으며 눈썹을 휘었다.
"존. 마법사의 아지트에 함부로 들어오는 건 금지라는 거 몰라?"
콘스탄틴은 어깨를 으쓱 했다. "오랫만에 봐서 반가워."
자타나는 고개를 저으며 공을 공중에서 자유자제로 휘두르더니 원래 자리에 되돌려 놓았다. "하긴 당신이 룰을 어기는 것 쯤이야 한 두번 있는 일도 아니지. 그래서 저 레미니스코프로 뭘 찾고 있던 건데?"
"악마." 퍼니셔가 대신 말했다. "악마를 쫓고 있다."
그제서야 자타나는 한 쪽에 물러서 있던 남자를 발견했다. 퍼니셔는 여전히 총을 든 채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자타나는 그가 가까워지자 표정이 조금 굳었고, 콘스탄틴은 재빨리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자타나, 이 쪽은..."
"누군지 알아. 프랭크 캐슬, 맞죠?"
퍼니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긍정의 의미나 다름 없었다. 콘스탄틴은 자타나가 어떻게 퍼니셔의 존재에 대해 아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자타나 자타라가 모르는 것은 얼마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퍼니셔를 알고 있다는 것이 아주 놀랍지만은 않았다. 그는 확연하게 얼굴이 굳은 자타나에게 그들의 상황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한 악마에 씌인 여자아이를 찾고 있다는 것과, 그를 찾으려면 영혼과 악쉬를 추적할 수 있는 저 공이 필요하단 것을 말이다. 콘스탄틴의 설명을 듣던 자타나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추적 마법으로 간단하게 찾을 수 잇을 거야. 아버지에게 받은 부적이 있거든."
"거 다행이군. 내가 함부로 네 구슬을 만지게 되는 일은 원하지 않으니까."
"다신 내 아지트에 몰래 들어오는 일만 없도록 해." 그렇게 말한 자타나는 콘스탄틴을 가볍게 흘겨 보더니 퍼니셔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답지 않게 잠깐 주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다가 말했다.
"그리고, 당신. 내가 도와줄 수 있어요."
퍼니셔가 물었다. "뭘 도와줄 수 있지?"
그녀는 손가락으로 퍼니셔의 발 밑 부근을 가리켰다. "당신에게 매달려 다니는 영혼들. 내가 떼어내 줄 수 있어."
콘스탄틴은 퍼니셔와 자타나를 번갈아 보았다. 그는 자타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남자에게 영혼들이 달려 있다고? 만약 누군가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영혼들이 잇다면, 그것은 한이 맺혀 있는 것일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영혼을 콘스탄틴이 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계속해서 남자를 볼 때마다 섬뜩하게 느껴진 이유가 혹시 그것 때문인 것이었을까? 그가 생각할 때 퍼니셔는 자타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으로 만족해."
그러더니 퍼니셔는 천막 밖으로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던 자타나는 콘스탄틴을 돌아보지 않으며 말했다.
"저 남자, 분명 악몽을 꿀 거야. 아마 존, 당신보다도 더."
콘스탄틴은 그녀의 옆얼굴을 보다가 천막 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퍼니셔를 떠올렸다. 프랭크 캐슬 이라. 아마 남자에겐 그가 채 알지 못한 무언가가 더 많이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