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토니
악순환
어째선지 날씨가 조금 눅눅해진다고 생각했더니 역시나 공구의 이음새들이 듣기 싫게 삐걱 이고 강화 알루미늄 판이 손바닥 밑에서 모래바닥처럼 자각거렸다. 곧 비가 내리겠다 싶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확실히 무서울 정도로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휴일에 작업실에 나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단지 주중에 채 끝내지 못한 작업물을 마무리 짓기 위해 귀찮은 내색을 잔뜩 뒤집어쓰고 출석한 몇 명의 신입들과 그들을 관리하는 두어 명의 시니어 슈퍼바이저가 전부였다. 시끄러운 모터와 컨베이어 벨트 돌아가는 소리 사이로 간혹 슈퍼바이저들의 날카로운 훈계가 들려오는 것 빼곤 지극히 조용한 시간이었다. 샌프란시스코 중심부에서 벗어나 도시의 외곽에 자리 잡고 있는 제 21 엔지니어 워크숍은 대게 중장비와 함선용 헤비 아틸러리 부품을 다루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 규모가 웬만한 아카이브 건물 두어 개를 합쳐 눕혀놓은 것만큼 컸다. 번잡한 시내에 그 정도 크기의 건물이 위치하기엔 적합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고, 그 안에서 밤낮으로 돌아가는 기계의 소음이라던가, 혹은 혹시나 모를 안전이나 보안상의 문제라던가 등을 따져 보았을 때 대형 워크숍이나 공장들은 대부분 비교적 한적한 동네에 세워지곤 했다. 샌프란시스코 베이 근처에 살고 있는 캐롤 마커스에게 워크숍까지 오는 시간은 호버카로 삼십 여분 정도 걸렸다. 어차피 그녀가 출퇴근해야 하는 워크숍 및 공장과 연구소 등은 제 21건물 하나가 전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실 그녀가 어디에 살던 간에 오가야 할 곳은 기본적으로 열 손가락을 넘겼고, 한 달에 적어도 서너 번은 미국을 떠나거나 아님 지구를 떠나거나 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그리고 그것에 그녀는 전혀 불만이 없었다.
바깥으로 향하는 입구를 훤히 트여 놓을 수 있는 게라지 쪽에서 작업하던 캐롤은 질척한 빗물 섞인 공기가 안으로 밀려들어오자 들고 있던 스캐너와 토치를 내려놓고 작업용 고글을 이마 위로 올렸다. 계속 숙이고 있던 허리가 얼얼했다. 건너 테이블에서 일하던 동료가 그녀에게 다가와 음료수를 건네주었다.
“오늘은 그만 해도 될 것 같은데. 다섯 시간 내리 일했잖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캐롤은 음료수를 받아 한 모금 마셨다. 그녀는 한 쪽에 벗어두었던 아날로그 식 손목시계를 보곤 오후 여섯 시에 근접한 시침을 확인했다.
“거의 다 됐어요. 전선을 마저 손본 뒤에 B파트하고 융합만 시키면 끝날 것 같아요.”
“반시간은 더 걸리겠네. 자네 쉬는 날이 있긴 한 거야?”
“그럼요. 저도 인간인데.”
“쉬엄쉬엄 하라고. 지구에 돌아온 이후로 휴가 쓴 적 한 번도 없지?”
캐롤은 웃음으로 넘겼다. 휴가라. 그런 걸 차마 쓰려는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다. 그 정도로 바빴으며, 그 정도로 바쁘게 지내기 위해 노력했다. 일하는 것 외의 다른 허튼 생각을 할 수 없도록 말이다.
엔터프라이즈가 지구에 착륙한지 벌써 넉 달이 다 되어갔다. 그동안 계절이 한 번 바뀌었고 셀 수 없을 만큼의 날씨 변동이 있었다. 지구 온난화의 심각성을 주장하는 환경 단체가 한차례 시끌벅적 했었으며, 그 사이 샌프란시스코는 환절기를 앓았다. 꽃가루 날리는 봄이 지나가고 여름이 오기 직전 의례 찾아오는, 그다지 심하지는 않지만 유쾌하지도 않은 변환점이었다. 캐롤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이 도시에서 런던에서도 또 우주에서도 겪지 못했던 뼈저린 환절기를 보냈다. 그건 지구 온난화에도 변덕스러운 날씨에도 기반 한 것이 아닌 그녀의 기억에서 움튼 병이라 어찌할 도리가 없었기도 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지구는 같았으면서도 또 달랐다. 문물은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변치 않고 남아있는 것들이 있었다. 오년 여 전의 사건이 그랬다. 샌프란시스코의 절반을 뭉개어버린 테러 사건은 수만 명에 달하는 희생자들의 유가족에게 있어 절대로 잊힐 수 없을 것이다. 슬픔. 고통. 증오. 그런 감정들은 어떤 것보다도 더욱 깊숙이 자리 잡아 시간조차도 지워낼 수 없게 되어버린다. 감정이란 건 원래 그렇다. 캐롤 본인 역시 지독하게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다음 주면 루나에 가봐야 해요. 엔지니어가 필요하다더군요.”
동료는 씁쓸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그는 캐롤에게 악의 없이 대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연방에서 손꼽히던 무기 전문가가 할 만한 일은 아닌데.”
“절 필요로 하는 일을 하는 것뿐이에요.”
그러니 너무 측은하게 보지 말아요, 브라이언. 뒷말은 가까스로 삼켰다. 대신 그녀는 씩씩하게 웃어 보이고 동료를 재촉했다. 일 다 끝났으면 어서 가 봐요. 애들이 집에서 기다리잖아. 동료는 어딘가 어색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인사를 하곤 떠났다. 걱정? 연민? 동정? 그 쯤 어딘가의 표정이었다.
캐롤은 낮게 한숨 쉬며 도구를 정비했다. 무거운 소낙비가 주륵주륵 내려 게라지 너머로 펼쳐진 길게 뻗은 공터와 그 뒤에 희미하게 보이는 아지랑이 같은 산맥을 안개 낀 것처럼 뿌옇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쉽게 멈출 기색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빗물이 건물 안으로 흘러들어 오기 전에 통신기를 통해 게라지 문을 닫으라는 지시를 넣었다. 높은 철문이 우웅 소리를 내며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무심코 그 너머를 바라보던 캐롤은 하나의 유성우 같은 빛이 공중으로부터 쏘아지는 것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건 원거리 미사일처럼 보이기도 했고 함선에 쓰이는 레이저 빔처럼 보이기도 했다. 빗물을 뚫고 허공에 길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온 그것은 순식간에 캐롤의 앞까지 다가와 쿵 하는 무거운 울림을 내며 착지했다. 그 주변으로 고인 빗물이 튀었다. 인체 모형을 띈 강철 수트였다.
그리고 그녀가 채 뒤돌아 달리거나 통신기로 안전 요원을 부르거나 그 어느 것을 행동으로 옮기기도 전에, 화려하게 도색된 수트가 노랗게 빛나는 눈으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기계음 섞인, 어딘가 무거우면서도 장난기가 역력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미스 마커스? 만나게 되어 반갑군. 난 토니 스타크일세. 내가 누군지는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네. 그리고 지금 수건을 하나 빌릴 수 있다면 정말 좋겠는데 말이야.”
남자의 뻔뻔한 목소리를 듣고 서있던 캐롤은 조용히 침입자 경보 버튼을 눌렀다.
*
토니 스타크는 사실 별로 불만이 없었다.
벌써 지난 이십 여 분 간 안에 몇 명의 스타플리트 소속 고위 간부들이 그에게 연락을 해와 사과의 말을 늘어놓았지만 그는 하나같이 괜찮다는 말로 물렸고 다섯 번째의 전화 연결을 받았을 때 아예 통신기를 꺼버렸다. 결국 스타플리트 소속 건물의 내부에 사전 고지도 없이 들어왔으면서 비상 경보음이 울릴 거라곤 상상하지도 못했던 자신의 잘못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는 자신의 앞에 앉은 캐롤 마커스라는 젊은 여자를 흥미로운 시선으로 보았다. 이제 이십 대 초반 쯤 되어 보이는 매력적인 여성은 검댕 묻은 작업복을 채 벗지도 않고, 그의 앞에서 팔짱을 낀 채 그를 마주 쳐다보았다. 아니, 노려보았다는 것에 가까웠다.
여자로부터 이런 대접을 받은 건 정말 오랜만이기도 했고, 나름 신선한 경험이라고 해야 할까. 그는 점잖게 손의 물기를 닦던 수건을 한 쪽으로 치우며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지극히 간단한 물건들만 놓여 있는 오피스는 워크숍 내의 방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굉장히 무기질 적이었으며 투박했다. 그리고 스스로가 엔지니어인 토니는 그런 환경에 매우 익숙했다.
“이 곳이 당신의 사무실인가, 미스 마커스?”
“왜, 여자가 쓰는 곳이라기엔 너무 초라해 보여요?”
확연히 가시 돋은 말에 토니는 눈썹을 휘었다. “뭐, 그렇다고 하기 보다는 별로 당신이 쓸 만한 사무실처럼 보이진 않아서 말야.”
“마치 나에 대해 잘 안다는 것처럼 말하고 있네요.”
“사전조사에 더한 약간의 추리일 뿐이지.”
“제 뒷조사를 했다 이 말이군요.”
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딱히 숨기지 않는 모양새가 더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캐롤은 인상을 찌푸렸다. 확실히 미운상이 단단히 박힌 듯한 게 그다지 좋은 시작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물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그의 직업이나 다름없었다. 어찌됐든 그녀가 반박을 하지 않는 걸 봐선 그녀의 사무실이 아닌 건 확실한 듯 했다. 그는 오피스 한 쪽에 세워 놓은 자신의 수트에게 손짓해 홀로그램을 띄우도록 지시했다. 곧 그들 사이의 허공에 푸른빛의 입체 도형이 떠올랐다.
“이왕이면 내 물건을 맡아줄 사람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아 놓는 편이 좋으니 말이야. 좋은 물건일수록 실력 있는 프로의 손에 넘어가야 하는 법이지.”
캐롤은 자신의 앞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도형을 보곤 단 몇 초 만에 그것이 무기의 일종이란 걸 알아차렸다.
스타크 인더스트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소기업에 그쳤던 곳이었으나 사장이 바뀐 후 고작 몇 년 만에 지구상에서 손꼽힐 정도의 거대 기업들 중 하나로 성장했다. 해운, 철강, 전자 기술, 그리고 무기 제조까지 손을 뻗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 모든 건 매우 단계적으로, 그리고 빠른 시간 안에 이루어졌고 당연하게도 캐롤은 전혀 알고 있지 못했다. 오 년 동안 우주에서 지내게 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캐롤은 그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신 아이언 맨이자 토니 스타크인 남자가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는데도 한 치의 동요 없이 차분하게 경보 버튼을 누를 수 있던 것이었고.
캐롤은 불만스런 와중에도 손끝으로 홀로그램을 휙휙 넘기며 그것을 살폈다. 저도 모르게 흥미를 갖게 되는 것은 무기를 다루던 사람의 본능이나 다름없었다. 토니는 한 쪽 다리를 느긋하게 꼰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페이저의 원리에 근거한 에너지 무기군요.”
“정확하네.”
“하지만 중성화 실린더가 없고 매뉴얼 작동을 위한 회로도 존재하지 않네요. 게다가 이건 처음 보는 모양의 빔 프로젝터인데… 에너지를 순환시켜 출력하는 대신 코어로 집중시키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훌륭해, 미스 마커스.”
싱글거리는 얼굴로 연달아 내뱉는 칭찬에 캐롤은 인상을 썼지만 남자를 지적하는 대신 그보다도 그녀를 더 신경 쓰이게 만드는 문제에 대해 말하기로 했다.
“당신이 이걸 만든 건가요?”
“그렇다면?”
“축하해요. 이 괴물은 아마 지구 역사상 손꼽히는 무시무시한 무기가 될 것 같으니.”
반쯤은 감탄, 그리고 반쯤은 비꼬는 말이었으나 남자는 그걸 칭찬으로 받아들인 것처럼 보였다. 잘 다듬어진 수염을 만지며 희미한 미소를 짓는 중년의 남자를 보던 캐롤은 갑자기 지치는 것을 느꼈다. 이런 무지막지한 걸 봐야 하는 자신의 처지나, 직접 제 앞에 도형을 들고 온 유명한 사업가나 전부 못마땅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고 그에 따라 짧은 금발이 가볍게 흔들렸다.
“미스터 스타크. 솔직히 내게 이것을 왜 보여줬는지 모르겠어요. 내 뒷조사를 했다고 말했죠? 그럼 내가 더 이상 무기에 관련된 일은 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겠네요.”
토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으로 홀로그램을 껐다. “물론 알고 있지. 지구에 돌아온 이후로 지루하기 짝이 없는 공장들이나 우주정거장들만 오갔더구먼. 무기전문가가 아닌 엔지니어라는 타이틀을 달고서.”
“그걸 알면서도 내 앞에 무기를 들이민 건 날 모욕하겠다는 의사로 봐도 되나요.”
“저런. 너무 날 세우지 말게. 캐롤 양. 그런 뜻은 전혀 없었으니까.”
자연스레 그녀를 이름으로 부른 토니는 여전히 입가에 느긋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그를 보며 캐롤은 문득 기이한 데자뷰를 느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얼굴이다. 어쩌면 유명인이라 어딘가에서 티비나 광고에서 스쳐 지나가듯이 봤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더 생각을 하기 전에 남자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의 수트 앞으로 다가가 그것을 보며 이어 말했다.
“난 우주에 나가본 적이 있다네. 우주선이나 셔틀을 타고서가 아닌, 나 혼자서 말이네. 오로지 이 수트 하나만을 착용하고.”
그는 고개를 돌려 캐롤에게 낮게 가라앉은 시선을 던졌다.
“위험이라는 것이 사람을 얼마나 바꿔 놓을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지. 죽음의 고비를 넘기는 경험이나, 눈앞에서 자신의 소중했던 자가 한낱 미물처럼 붕괴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그런 치명적인 사건이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나도 알고 있다네. 마치 자네가 아버지를 잃었던 것처럼.”
아버지.
여전히 그 경보 버튼처럼 작용하는 단어에 캐롤은 반사적으로 번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토니는 그녀의 서늘하게 타오르는 푸른 눈이 자신을 꿰뚫을 것처럼 향하는 것을 피하지 않고 받아냈다.
“유감이지만, 자네가 지금 스타플리트 내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는 알고 있어. 캐롤 양.”
캐롤은 돌처럼 굳은 표정에 비해 떨려오기 시작하는 양 손을 세게 맞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내쉬었다.
용서받지 못할 범죄를 저지른 아버지. 그녀에게 지극히 자상하던 아버지는 순식간에 악당의 모습으로 그녀 앞에 나타났고, 정당한 방법으로 그에 대한 죗값을 치르기도 전에, 그녀가 어떤 종류의 용서나 화해를 채 시도하기도 전에 그녀의 앞에서 가장 끔찍한 모습으로 죽었다. 그리고 그토록 사랑했던 아버지가 저에게 남긴 것은 죄인의 자식이라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붉은 낙인뿐이었다.
배제되고 비난받는다. 경외의 시선과 비난의 손가락을 동시에 마주한다. 토니는 자신의 손을 그러쥐었다.
“그건 평생 동안 따라다닐 업보고, 악몽에서도 죽어서도 끈질기게 뒤쫓을 귀신이지. 사람의 생명은 그렇게 질긴 거야. 자네와 나처럼 무기를 다루는 사람은 아마 절대로 벗어나지 못할 굴레지.”
캐롤은 손바닥 안에 일그러진 얼굴을 묻었다. “그래서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뭐죠.”
그는 캐롤에게 다가와 크고 마디진 손으로 그녀의 한 쪽 어깨를 짚었다. 기계를 만지는 남자의 손은 거칠었으나 어딘지 모를 안정감을 주었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의지하도록 만드는, 신임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종류의 든든함이었다.
“죽을 때까지 노력하는 거야. 우리가 가진 능력으로 좀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도록. 사람을 죽이는 무기가 아닌, 사람을 살리는 무기를 만들 수 있도록. 그게 업보를 짊어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네. 캐롤.”
토니 스타크는 미소 지었다. 그제야 캐롤은 그녀가 누구를 남자의 위에 덧그리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무모한 자신감. 고통을 딛고 일어서는 강인함.
남자는 그녀의 함장, 제임스 커크를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