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fic/marvel

스팁토니 누명

스팁토니


누명





  때는 겨울이었고 온통 추웠다. 온 몸에 서리는 한기를 뚫고 사건은 매서운 눈보라처럼 닥쳐왔다. 스티브 로저스가 눈을 떴을 때 그는 차갑고 눅눅한 땅바닥에 드러누운 자신을 발견했다. 12월, 체온에 녹아내린 눈이 추위에 얼어붙고 하길 몇 번을 거쳤는지 그가 바닥에서부터 얼굴을 들어낼 때 살점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어지러움이 컸기에 고통은 덜했다. 스티브는 자신이 외딴 장소에 버려져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눈에 희게 덮인 들판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도시의 흔적에 스티브는 의아하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어떤 것도.

  하지만 버려졌다 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왜일까. 그는 자신의 단어 선택에서 단서를 찾기 위해 소리 없이 방황했으나 결국 답은 주어지지 않았다. 스티브는 우선 걸었다. 손 끝이 시퍼렇게 죽어 있었으며 얼굴엔 더 이상 감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세럼으로 들어찬 피가 제대로 활동하기 까진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종아리까지 쌓인 눈을 뚫고 걸으며 스티브는 연신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그것이 얼어 붙은 뇌 때문인지 혹은 기억 상실의 일종인지 자신이 어떻게 이 곳에 도달했는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수 없었다. 한참을 걷던 그는 웬 동떨어진 낡은 집을 발견했다. 작고 허름한 집이었으나 창문 너머로 밝혀진 노란 빛은 스티브로 하여금 저절로 그 쪽을 향해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스티브는 비척이며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 뒤 문이 열리고 거의 자신의 키만한 라이플을 든 여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반 시체같은 몰골을 한 스티브를 보자 들고 있던 총을 떨어트릴 뻔 한다. "어마! 세상에나!" 여자는 스티브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그를 부축해서 집 안으로 들였다. 벽난로에서부터 타오르는 열기가 몸을 덮치자 스티브는 안도와 동시에 몰려드는 피로감에 휩쌓인다. 여자는 우왕좌왕 담요 따위를 꺼내왔고 따듯한 물을 받았다. 뭔가 말을 꺼내기에 스티브의 입술은 지나치게 죽어있었다. 여자는 그의 얼굴에 난 상처 위에 거즈를 덧대고 테이프를 붙였다. 여자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세상에, 얼굴 좀 봐. 누군가에게 공격당한 건가요? 말은 할 수 있겠어요?" 스티브는 질문들에 대답하는 대신 물었다. "여기가 어딥니까?" 그건 거의 쉬어버린 목소리라 여자가 가까이 있지 않았다면 알아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알라바마예요. 가장 가까운 시내가 여기서부터 차로 45분 거리구요. 구급차를 불러야 겠어요. 계속 지체하다간 당신은 죽고 말거야." 그녀는 전화기로 가려 했고 스티브는 여자의 손목을 잡아 저지했다. 그녀는 새된 소리를 냈는데 그게 그의 피부의 냉기 때문인지 단순히 놀라서인지 알 수 없었다. "조금만 쉬면 됩니다." 그는 자신의 정보가 알려지지 않길 바랬다.

  스티브는 그가 이렇게 된 것에 대해 몇 가지 가설을 내릴 수 있었다. 하나, 그는 임무 중 공격을 받아 정신을 잃었다. 몇 곳의 찰과상이 전투의 흔적을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그가 정신을 잃었다면 누군가 의식이 없는 상태인 그를 손쉽게 죽일 수 있지 않았을까? 스티브는 그 홀로 벌판에 남겨져 있었다. 게다가 그는 전투복을 입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캡틴 아메리카 코스튬이 아닌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둘, 그는 누군가로부터 쫓기다 이 곳까지 도달해 쓰러졌다. 그를 쫓던 자는 결국 스티브 로저스를 따라 잡지 못했고, 스티브는 알라바마에서 헤메다 모종의 이유로 정신을 잃는다. 물론 이 가설 역시 근거가 없다. 탁 트인 공간에 쓰러져 있는 그를 찾는 데엔 그다지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셋, 그는 배신당했다. 그는 이 곳 알라바마 까지의 이동이 전혀 사고나 전투의 가능성과 거리가 멀다 믿고 있었기에 위험을 감지하지 못했다. 평상복을 입고 있는 걸 봐선 아마 일종의 여행일지도, 만약 그렇다면 동행과 함께 했을 수도 있다. 스티브 로저스에게 알라바마를 찾아올 이유 따위는 없었다. 그가 아는 거라곤 알라바마에 천사상이 있다는 것 뿐이었다.

  천사상?

  스티브는 여전히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있는 여자에게 물었다. 아마 그녀는 자신의 집 안에서 시체를 치우게 되는 일을 겪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이 근처에..." 스티브는 쇳소리가 나는 목을 가다듬었으나 여전히 그대로였다. "혹시 천사상이 있습니까?" 여자의 불안해 뵈는 눈동자에 의아함이 스쳤다. 스티브는 그제서야 여자의 눈을 제대로 보았다. 그녀는 깊고 진한 코코아 색의 눈을 가졌고 속눈썹은 풍성했다. 그건 그가 아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천사상? 그런 건 없어요. 이 근처엔 어떠한 동상도 없는걸. 허허 벌판이잖아요." 어쩌면 단지 스티브의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잘못 된 정보일지도 모른다. 그가 알라바마에 있다는 것과 천사상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이다. 그는 단 하나의 실마리라도 잡아내려 몸부림치는 것에 불과했다. 여자가 나즈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러고보니 묘지가 있긴 한데, 거긴 딱히 동상같은 걸 보러 가진 않으니까요."

  여자는 차 안에서 마치 그가 총이라도 들이댈 것 마냥 연신 스티브를 흘끔거리며 주시했다. 오래된 도요타의 웅웅거리는 엔진 소리와 간혹 들리는 바퀴의 덜컹거림을 제외하면 조용했다. 눈발은 끊임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여자는 더 이상 스티브에게 뭔가 질문같은 걸 하기를 그만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스티브가 캡틴 아메리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스티브는 그것에 안심하며 차창 밖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짙게 깔린 어둠을 배경으로 헤드라이트의 불빛에 비춰진 눈발은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는 잔상을 남겼다. 스티브는 어둠 속에서 웅웅대는 한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난 끊임없이 날 쫓아오는 발소리를 듣는다네. 더 이상 달릴 수 없을 때까지 도망치다 뒤를 돌아보면 아무도 없어. 하지만 곧 다시 들려오지. 타닥. 타닥. 그리고 그건 점차 빨라져. 정신없이 달리다 보면 눈길에 발이 묶여 우스꽝스레 허우적대고 있지. 날 도와줄 자는 아무도 없었네. 자네는 신을 믿지. 내가 신을 믿느냐고? 그건 모르겠어. 항상 날 구했던 건 결국 나 자신도, 신도 아닌 다른 누구였으니 말이네. 하지만 신이 아닌 천사가 있다면 한 번 믿어보고 싶군. ...스티브는 차에서 내려 걸었다. 여자는 차에서 내릴 만큼 용기있지 않았지만 시동을 끄진 않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공동묘지는 어둠이 짙게 깔려 스티브 그의 시력으로조차 거의 무엇도 구분하기 힘들었다. 귓가에 몰아치는 눈바람이 비명소리와 같다. 그는 비죽비죽 솟아오른 무질서한 묘비들의 석상을 올려다 보았다. 기이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그들은 스티브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곧 발견했다. 눈을 내려 감은 천사상의 앞에서 스티브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손으로 묘비에 쌓인 눈을 겉어냈다. 오필리어.

  "소식 있어요, 토니?"

  홀로그램에서 잠깐 고개를 들었던 토니는 짧게 고개를 젓곤 다시 시선을 돌렸다. 페퍼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벌써 한 달 째예요. 스티브가 대체 어디로 간 걸까요?" 토니 스타크는 최대한 그녀의 말을 신경 기울여 듣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이미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조취를 취한 마당에 더 이상 그가 대대적으로 스티브 로저스를 찾기 위한 수색 지원을 할 방도는 없었다. 맨해튼이 위기에 몰린 지금, 스티브 로저스의 부재는 어마어마하게 다가왔으나 토니는 그 없이도 사태를 이겨낼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언제나 방법을 구해냈다. 그게 옳은 종류의 방법이던 아니던 간에 그는 결국 해결법을 물색하고 구원의 종착지를 만들 것이다. 토니는 작업실에서 나왔다.

  뉴욕에 한파가 몰아치며 동시에 몰려든 짙은 구름에 햇살이 거의 비추지 않는 날들이 여흐레 째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캡틴 아메리카가 없는 와중 어벤저스에겐 토니 스타크를 믿는 것만이 방도가 없었다. 토니는 그들의 한계가 단순이 지능 때문만이 아니라고 믿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은 가장 작은 물질에게도 존재하며, 우주의 운동 그리고 모빌리티의 법칙에 따라 그들 모두는 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천사로 변질된다. 하지만 그들에게 없는 것이 토니에겐 존재했다. 그리고 토니는 그와 가장 닮은 동시에 가장 맞은편에 선 자가 스티브 로저스라고 항상 생각했다. 토니는 자신을 바라보는 어벤저들의 시선으로부터 믿음 신뢰, 그리고 두려움과 불신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많은 자들이 어쩔 수 없이 토니 스타크를 따라오는 것이다. 스티브 로저스가 존재하지 않는 지금에도? "우리가 서로를 구원할 수 없다면" 토니가 크게 말했다. "누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지?"

  "신."

  문 너머에서 다 헤어진 스티브 로저스가 걸어 들어왔다. 그는 타오르는 푸른 눈으로 토니를 가리켰다.

  "자네가 날 배신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