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팁럼로우
사랑하는 나의 무기에게
6.5
아프다, 아프다 해도 결국 육체적인 고통엔 한계가 있다. 익숙해지면 그만이고, 그도 안되면 까무러치면 되기 때문에. 정신적인 고통과는 다르다. 몸엔 흉터가 남는다. 피는 멎고 그다음 딱지가 앉는다. 하지만 정신적으론 그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대신 어느 순간부터 마음 한 구석엔 기생충이 자라나 영혼까지 좀먹어 들어가는 기분을 맛볼 수 있다. 사람은 시들어가고 죽음의 징조가 다가온다. 몸의 죽음이 아니라, 정신적인 죽음이다. 럼로우는 지금 살해당하고 있었다.
그는 사지를 묶은 구속구를 팽팽하게 당기며 소리질렀다. 비명과 신음은 모조리 재갈로 인해 짐승의 앓는 소리처럼 둔탁하게 변해간다. 마취 그런 건 없었다. 수면제 따위는 사치였다. 그는 맨 정신으로 여럿의 의사가 자신의 몸을 들쑤시는 걸 모조리 지켜봐야 했다. 알 수 없는 기계들과 도구들의 그의 벌거벗겨진 아래를 들락거렸고 그들은 럼로우가 비명을 지르던 말던 저들끼리 뭔가를 이야기 나눴다. 자궁은 건강하며 모든 호르본 반응도 정상이고 그런 식이었다. 몸 속으로 들어간 도구가 움직이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럼로우는 고통에 익숙한 남자였지만 이건 좀 상황이 다르다. 전혀 그런 반응은 없었지만, 혹시라도 그가 임신했을 수도 있는 일 아닌가? 만약 아이가 다친다면... 잘못 되기라도 한다면.
검사가 끝난 후에 그는 두들겨맞은 개처럼 방치되었다. 럼로우는 더러운 모포에 아무렇게나 감싸인 채 차가운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는 몸을 웅크렸다. 본능적인 자기보호의 행동이다. 하반신은 고통을 넘어서 이제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지만 몸이 저절로 경련오듯 떨려오는 건 막을 재간이 없었다. 나름 준비하고 있던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자궁이 착상된 것과 별개로 그가 100퍼센트 임신을 할 거란 보장은 없었다. 씨발, 멀쩡한 여자들도 임신을 못할 때가 많은데.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자조한다. 어쩌면 로저스가 불임일지도 모르고. 세상 일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셀 수 없을 정도로 섹스를 했는데 애가 들어서지 않은 게 저의 잘못이란 말인가. 그만두자. 변명은 약자나 하는 짓거리다.
잠시 후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피어스는 들어오자 마자 한숨부터 쉬었다.
"날 실망시키는군 럼로우."
자궁 착상수술 이후, 두 달 만에 마주한 남자가 하는 첫 마디였다. 럼로우는 비척이며 일어나 그의 앞에서 예의를 지키려고 했다. 하지만 피어스는 손을 들어 막았다. 중년 남자의 눈엔 기어다니는 벌레를 보는 것과 하등 다를 것 없는 감정이 비춰진다. 죽일 필요조차 없고 지나치게 하찮아서 오히려 관대하게 굴고 있는 듯한. 남자가 완벽하게 갖춰 입은 정장과 럼로우의 벌거벗겨진 알몸이 그 차이를 더 명백하게 한다. 피어스는 자신의 소매를 가다듬는다.
"충분히 기다렸는데도 결과가 이 모양이니. 난 그닥 인내심 많은 사람이 아니라네."
럼로우는 제 덜덜 떨려오기 시작하는 손을 주먹쥐었다.
"전... 말씀하신 대로 전부 했습니다. 타겟과 관계를 가졌고, 호르몬제도 충분히..."
"그건 알아. 자네를 감시하고 있던 자가 한 둘인줄 아나?" 피어스가 여상스럽게 말했다. "방금 자네 몸을 확인한 의사들로부터도 직접 확인했지. 그들도 인정했네."
"......"
"자넨 할 만큼 했어."
럼로우는 눈을 들었다. 피어스는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할 만큼 했다는 말이 어떤 뜻을 내포하는지 브록 럼로우가 모를 수 없다. 그건 끝을 의미했다. 그건 도구로서의 필요성의 박탈을 의미한다. 다 쓴 것은 버리면 그만. 더 이상 갖고 있어봤자 쓸모가 없는 물건은 폐기한다. 브록 럼로우라는 도구의 죽음을 뜻하는 말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다. 럼로우는 순종적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처형을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잠시 후 피어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렇게 처분하기엔 자네는 꽤 훌륭한 실력을 지녔어. 아까운 일이야."
럼로우가 고개를 들었을 때 피어스는 이미 나가기 위해 문을 향하고 있었다.
"여태까지 해오던 대로 하게. 계속 타겟의 옆에서 그를 주시해. 그가 자네를 침대에 끼고 있다는 것도 나름 가깝게 생각한다는 말일테니, 나쁠 건 없겠지."
"...예."
피어스는 웃음을 흘렸다. "재밌게 돌아가는군."
그리고 남자는 구두굽을 울리며 방에서 나갔다. 그래, 저가 생각해도 웃기는 일이었다. 예상치 못한 전개다. 스티브 로저스가 그와 한 번도 아닌, 스테디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들은 연인이 아니었다. 비교하자면 섹스 파트너에 가까우려나. 하지만 그 단어로만 한정하기엔 부족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럼로우는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저 혼자 설레발치며 넘겨짚는 부류는 더더욱. 하지만...
곧이어 방 안으로 무거운 군화 소리를 내며 하이드라의 군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럼로우는 메마른 얼굴을 손으로 쓸어 내렸다. 지금처럼 한없이 나약해질 때 로저스의 얼굴이 떠오르는 건, 빌어먹을 우연에 불과했다.
[저번과 같아요. 위치 확인이 되지 않는군요.]
로마노프의 말에 로저스는 뛰려던 발걸음을 멈췄다. 일전 럼로우가 임무 중 사라졌을 때가 떠올랐다. 브록 럼로우는 실력이 뛰어났다. 아무런 초인적 능력이 없는 일반인이었으나 누군가에게 쉽게 제압당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자가 납치당해서 다시 나타났을 때 어땠는가? 무려 생체실험을 당했다. 로저스는 본능적으로 이번 럼로우가 사라진 것 역시 우연이 아닐 거라 짐작했다. 그건 감이었다. 로저스는 뒤를 돌아 그가 왔던 방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어벤저스 타워였다. 나간지 얼마나 되었다고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그를 돌아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자비스?"
[캡틴.]
그가 허공에 부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자비스가 대답했다. 로저스는 엘레베이터에 올라타며 버튼을 눌렀다.
"사람을 찾아야 하는데 도와줄 수 있나?"
[죄송하지만 sir, 그건 미스터 스타크의 허락이 요구됩니다.]
"그에게 연결해주게. 당장."
연락을 받은 스타크는 적잖이 바쁜 모양인지 처음엔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로저스는 강경했다. 그리고 스타크는 강경한 로저스에게 약했다. 이런 경우에는 특히. 것도 그럴 것이 로저스가 누군가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자주 하는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알았다 대답하는 스타크의 목소리는 반 흥미 반 놀람이 담겨있는 것이다. 스타크는 그에게 이름을 요구했고 로저스는 엘레베이터에서 내리며 이름을 말했다. 몇초 후 스타크가 낮게 아하 하는 소리가 들렸다. 뒷말은 없었지만 분명 스타크는 뭔가를 짐작했을테다.
[쉴드 요원이군. 정확히 말하자면 쉴드에서 일하는 팀의 요원.]
"위치는?"
[기다려. 아무리 자비스라 해도 전 뉴욕의 감시카메라를 훑어보는 건... 잠깐만.]
그때 쯤 로저스는 스타크가 있는 곳으로 도달했다. 플로어 전체에 홀로그램 영상들을 띄워놓은 토니 스타크는 로저스가 그의 옆에 다가와 서도 돌아보지 않으며 제 앞에 떠오른 경고창을 주시했다. 그는 습관적으로 턱수염을 매만졌다.
"접근 거부라는군."
뭐? 로저스가 되물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도 보였다. 빨갛게 떠오른 문구는 정보에 접근할 수 없다는 표시가 분명했다. 스타크는 아까 전 가벼운 기색은 사라진 채 허공에 손짓을 몇 번 했다.
"정보기관 다타베이스에 접근하는 것도 아니고 위성 추적에 불과한데 이런 경고가 뜨다니 웃기는데. 처음 보는 일이야."
"혹시 오류가 난 건 아닌가?"
스타크는 픽 웃었다. "그럴리가. 한 가지 가능성은 있지.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브록 럼로우라는 자를 찾지 못하도록 접근을 차단시키고 있는 것."
"그렇다면..."
"오. 이제야 신호가 뜨는군."
문득 기다렸다는 듯이 발작적으로 경고창이 사라지고 대신 붉은 점같은 것이 홀로그램 지도 위에 나타나 깜박이고 있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그것이 럼로우의 위치를 알려주는 거나 다름없었다.
"메이슨 가를 따라 이동중이야. 차에 타고 있는 모양인데."
"고맙네. 토니."
스타크는 그를 멀뚱히 돌아보았다. "안 쫓아가?"
로저스는 미동 없이 움직이는 점을 노려보았다. "뭔가 의심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 말에 스타크는 끄덕였다. 애초 추적이 먹히지 않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느낀 차였다. 스타크가 사용한 위성 자료는 누군가가 개인적으로 해킹해서 한 명 한정으로 파이어월을 세워 막는다는 건 상상하기 힘든 규모였다. 보다 큰 조직이 뛰어난 기술을 사용하여 체계적으로 막았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그 대상이 다른 누구도 아닌 일개 군인이라고? 있기 힘든 일이었다. 그에게 그 정도의 중요 가치가 있지 않는 이상은. 그들의 머릿속에 동시에 같은 질문이 떠올랐다. 브록 럼로우에게 그 정도의 중요성이 존재하나?
물론 토니 스타크는 럼로우가 일전 납치당해 자궁이 심어진 사실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 그가 저번에 쉴드의 다타베이스를 한 번 해킹한 이후 그가 쉴드의 레벨9 이상 정보에 접근하는 데에는 상당한 노력과 위험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타크가 럼로우에 대해 아는 것은 매우 한정되어 있었으나 로저스는 이것에 뭔가 더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 생각했다. 한 사람에게 수상쩍은 일이 두 번이나 일어날 우연의 가능성은 얼마나 되는가? 비록 그 상대가 그가 매일같이 침대 위에서 만나는 사람이라 할 지라도... 로저스의 상념을 깬건 스타크였다.
"88번가에서 멈췄어. 거긴 폐공장 지역인데."
"CCTV 연결 가능한가?"
스타크는 근처의 감시 카메라를 찾아내었고 곧 영상이 떠올랐다. 카메라의 앵글에서는 멀찍이서 서는 검은 SUV 한대가 잡혔고, 잠시후 몇 명의 사내가 한 사람을 끌고 내리는 게 비춰졌다. 양 팔이 잡혀 끌려내린 남자는 고개가 푹 숙여진 채 거의 의식이 없는 상태처럼 보였지만 그가 누군지는 확실했다. 럼로우였다.
남자의 몸엔 이미 구타를 당한 것처럼 얼룩덜룩한 상처가 즐비했다. 복면 쓴 사내들은 그를 질질 끌어다가 아무렇게나 던졌다. 럼로우는 간신히 몸을 추슬러 일으나려 했으나 남자들이 그를 공격하는 게 더 빨랐다. 그리곤 자비없는 폭력이 이어졌다. 럼로우는 다시 쓰러졌고 그는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지는 광경이었다. 이번에 로저스는 두 번 망설임없이 자리를 박차고 뛰었다. 그 등에 대고 스타크가 외쳤다.
"도와줄까!"
하지만 대답없이 로저스가 탄 엘리베이터는 닫혔다.
스타크는 한숨쉬었다. 하여간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 하는 데에 일가견이 있다니까.
"자비스. 아빠 수트 준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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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으니까 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