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팁럼로우 개인지 일부 1
*최종 원고의 내용은 일부 수정될 수 있음
Operation Blue Rose
사막의 열은 끔찍할 정도로 강렬했다. 햇빛은 거의 숨통을 죄는 수준이었고 그 열기에 제 몸은 물론이고 모래 알갱이들마저 한 줌 아지랑이로 변해 증발해 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럼로우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눈꺼풀 위에 맺혀 있던 무거운 땀방울이 주륵 흘러내려 시야를 뿌옇게 만들었다. 그는 단호한 손길로 그것을 훔쳐 떨어뜨려냈다. 잇달아 얼굴을 크게 한 번 쓸어내자 양 뺨과 구레나룻, 수염 따위에 묻어 있던 모래와 각질이 우수수 떨어졌다. 버석한 입술을 핥으면 벗겨지는 표피와 짭짤한 땀이 메마른 혀끝에 묻어났다. 럼로우는 잠깐 들었던 한쪽 눈을 다시 내려 감으며 라이플의 렌즈에 시선을 가져다 대었다. 귀에 꽂은 이어피스가 치직거리는 잡음을 내더니 곧 롤린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표물 접근 중입니다. ETA 3분.]
"라저."
짧게 대답한 럼로우는 눈 한 번 깜짝이지 않고 렌즈 너머를 주시했다. 류폴드의 14배율 스코프가 황량한 사막의 돌과 모래가 깔린 길을 비췄다. 거의 8백 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였다. 잠시 후 렌즈에 모래먼지가 일기 시작하는 길이 들어왔다.
바퀴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거리였지만 벌써 일곱 여 시간동안 같은 장소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잠복하고 있던 브록 럼로우의 귀는 극한까지 곤두서 있었고 그는 무거운 군용 지프의 엔진이 털털거리는 것을 아득하게 들을 수 있었다. 최근 두 주간 스트라이크 팀이 노리고 있던 목표였다. 목표물이 가까워져오자 끊임없이 그의 신경을 거스르던 배고픔도 목마름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럼로우는 모래 둔덕에 감춰진 제 몸을 더욱 납작하게 숙이며 라이플을 다잡았다. 살을 에는 뜨거움에 땀으로 젖어든 손가락이 방아쇠 위에서 미끈거렸다. 지프는 두 대. 그 중 선두에서 달리고 있는 걸 노린다. 럼로우는 지프가 모래먼지를 자욱하게 날리며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자 속으로 수를 세기 시작했다.
셋. 둘. 하나. 그리고 소음기를 장착한 라이플에서 퓩 하는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지프가 균형을 잃고 장난감처럼 뒤집혔다.
뒤에서 따라오던 또 다른 지프가 그에 당황하며 멈춰서는 것이 보였다. 그 때쯤 럼로우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모래 둔덕을 넘어가고 있었다. 라이플을 팽개친 그는 뜨거운 모래가 제 발목을 잡아챌 수도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달리며 핸드건을 장전했다. 이어피스에서 혼비가 EMP를 작동시켰다는 신호를 보냈다. 적의 연락망은 먹통이 되었을 것이다. 사방에서 케모플라쥬를 하고 있던 대원들이 땅귀신처럼 몸을 드러내며 지프를 압박해오고 있었고 럼로우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고함 소리가 들리는 건 그들이 목표물을 포위한 다음이다. 곧이어 총소리가 난무했다.
장작 2주 하고도 서른 여 시간동안 이어진 작전이었다. 목표물을 탐색하고 그들의 동선을 그려내고 위장을 하고 잠복하는 모든 과정은 제 아무리 장기 임무에 익숙한 브록 럼로우 그라 할지라도 조금 지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지프차의 앞 유리는 토마토 터진 것처럼 피가 흩어져 있었다. 럼로우는 허리를 굽혀 머리가 박살난 채 뒤집어진 차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남자의 시체의 품으로부터 USB 케이스를 꺼냈다. 나머지 대원들이 이미 제압된 두 차량을 수색하는 동안 해트릭이 그에게 다가왔다.
"우리가 찾고 있던 게 맞습니까?"
럼로우는 상의 안쪽에 넣어두었던 휴대용 패드에 USB를 연결해보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대원들에게 말했다.
"타깃은 무사히 사수했다. 스트라이크 팀. 7분 안에 현장 수습을 마친 후 복귀한다."
그의 명령에 스트라이크 팀으로부터 짧은 긍정의 대답이 들려왔다. 럼로우는 피 묻은 손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사막에서 처음 임무를 이행해 보는 것도 아니었지만 럼로우는 항상 이 열기와 목마름에 익숙해지는 데에 어려움을 느꼈다. 이 주가 흐른 지금 그의 신체는 거의 완벽하게 사막의 기후와 환경을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그렇다 해서 인간적 한계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 다른 스트라이크 팀의 훈련된 대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말 한 마디 없이 재빨리 시체들로부터 필요한 것을 수거한 후 자리를 떴다. 시신과 지프 따위는 곧 현장처리반 쉴드 요원들이 스텔스 모드 퀸젯을 타고 와 멀끔하게 치워 놓을 것이었다.
그들은 모래 색 천으로 덮어 숨겨 놓았던 험비를 타고 이동했다. 운전석은 늘 그랬듯 해트릭이 맡았다. 그는 팔레스타인 출신으로 중동 지역에 있는 모든 사막 지리를 꿰뚫고 있었다. 사막용 험비인 H1이 덜그럭거리며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그 위에서 그들은 각각 무기를 손보거나 물통을 뜯거나 했다.
"대장. 좀 드릴까요?"
벌써부터 참지 못하고 MRE를 뜯은 혼비가 그에게 히죽 웃으며 통조림을 들어보였다. 럼로우는 물을 마시기 위해 젖혔던 목을 내리곤 고개를 저었다.
"됐어. 그나저나 난 아직 식사해도 된다 허락한 적 없는데. 혼비."
"아. 대장님도 참. 좀 봐주십쇼. 지난 열 시간 동안 물 다섯 모금 마신게 전부란 말입니다. 지금 기분으론 게이 후장도 먹어치울 수 있을 것 같다고요."
배고프다면서 잘도 떠드는 꼬락서니에 럼로우는 픽 웃었다.
"각성제 약빨이 다 되었나 보지?"
혼비는 히죽 웃더니 통조림을 북 뜯어 입 안으로 털어 넣듯이 먹었다. 십대 때부터 쿠웨이트나 사우디의 전장을 전전하면서 살았다는 혼비는 온전한 정신처럼 보일 때가 드물었다. 그가 통조림을 들이 마시는 모습을 보던 미켈슨이 모래가 잔뜩 묻은 얼굴로 킬킬 웃었다. 그녀는 혼비를 향해 탄창을 전부 비워낸 총구를 까딱거리며 럼로우에게 장난스레 말했다.
"이 놈 요새 하루에 각성제를 스무 알 씩 먹고 있다고요. 대장. 반나절 못 먹었다고 이러는 꼴을 보면 뭔가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동의합니다. 난 약쟁이하고 같이 일하고 싶은 마음은 없거든."
데이비스가 라이플을 재조립하며 맞장구치자 혼비가 억울하다며 투덜거렸다. 다른 팀원들은 사막에서의 오랜 잠복 뒤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의 힘은 남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의 대화에 피식거리며 웃고는 했다. 혼비가 얼마나 악담의 대상으로 저격 받는지와 별개로 그들은 벌써 같은 멤버로 오 년 넘게 일해 왔다. 그랬기에 그들이 진심으로 하는 얘긴 아니란 걸 알고 있는 럼로우는 입 꼬리를 끌어 올렸다.
"대원들의 의견은 잘 들었다. 혼비가 사랑해 마지않는 각성제를 전부 압수할지 말지는 이 USB를 해독해 본 이후에 결정하도록 하지. 만약 우리가 건진 게 제대로 된 물건이면 한 일주일 정도 혼비의 각성제 복용은 눈 감아 주는 걸로. 어때?"
"와. 지금 제 행복이 저 USB 하나에 달려 있는 겁니까? 이게 스트라이크 팀의 전우애로군요. 진짜 눈물 날 정도로 매몰차네요. 빌어먹을 하이드라도 이거 보단 인정머리 있을 거야."
"만약 네가 타깃 설정을 제대로 한 거라면 제대로 된 USB가 맞을 테니 너무 뭐 마려운 개새끼처럼 굴지 말라고. 혼비."
운전하던 해트릭이 고개도 돌리지 않으며 말했다. 그가 위협적일 정도로 딱딱한 어투와 다르게 농담하고 있단 것을 아는 혼비는 씨바알 하고 노골적으로 신음했다. 난 아무리 각성제를 빨아도 일 하나는 존나 완벽하게 해내는 새끼라고요. 대장도 알죠? 럼로우는 끊임없이 뭐라 지껄이며 음식을 씹어 삼키는 혼비에게서 눈을 떼고 손 안에 들린 USB를 굴렸다. 딱히 이상할 것 없는 평소와 다름없는 분위기였다. 곧 있어 시야에 그들의 막사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번 사막에서의 임무는 스트라이크 팀 그들만이 단독으로 움직이는 거였으며 그랬기에 그들이 주둔하고 있는 임시 막사에 쉴드가 찾아 올 일은 없어야 했다. 그건 자칫하면 그들의 위치를 발각되게 할 위험이 있었다. 물론 쉴드의 퀸젯까지 이용해서 임무 중의 스트라이크 팀을 찾아야 할 만큼 중요한 사항이 존재한다면 모를 일이겠지만. 럼로우는 막사들 옆에 세워진 퀸젯을 보곤 미간을 찌푸렸다.
새 발령자가 있을 거란 얘기는 이미 전해 들었다. 하지만 그럴 경우 보통은 도착 전 브록 럼로우에게 미리 연락이 와야 했다. 게다가 한낱 대원 주제에 낙타를 타고 왔으면 왔지 무려 퀸젯 씩이나 타고 올 일은 없을 것이었다. 험비에서 내린 팀원들이 의아한 눈치를 주고받을 때 럼로우는 어느 새 그의 옆에 와서 서있는 롤린스에게 들고 있던 USB를 넘겼다.
"이거 레녹스에게 해독 맡겨."
"대장님."
"나 혼자 가보지."
럼로우는 그에게 시선을 보내는 롤린스에게 손을 젓곤 개인 막사 쪽으로 걸어갔다. 퀸젯을 타고 온 걸 보면 그들과 같은 처지가 아닌 쉴드 소속일 확률이 높았다. 그는 속으로 무슨 일 때문에 쉴드에서 여기까지 요원을 보냈을지 가늠해 보았다. 애초에 스트라이크 팀은 쉴드 소속이긴 하나 그들과는 철저하게 다른 특별임무를 위해 움직이는 소수정예 팀이었다. 결국 쉴드 요원과 그들 사이는 동료애보다 견제를 느끼기에 더 쉬운 관계였다. 일종의 대통령 직속 보좌관과 일반 경호팀 정도의 차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건 둘째 치고 벌써 임무에 돌입한 지 2주가 넘었는데 큰 변경 사항 따위가 있을 예정이라면 곤란했다. 럼로우는 막사 입구를 열었다.
그 곳엔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스트라이크 팀은 사실 명목상 쉴드 소속이긴 했으나 정확히는 그 사이 반 쯤 걸쳐진 애매한 위치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스트라이크 팀의 국장인 토드 래드클리프는 쉴드와 어떠한 연관도 없으며 그에 대해 많은 정보가 알려진 것도 아니어서 누구도 국장의 이야기를 하는 적은 없었다. 스트라이크 팀의 리더인 브록 럼로우는 쉴드의 국장인 닉 퓨리로부터 임무를 받거나 또는 아주 간혹 래드클리프로부터 직접적인 명령을 전달하곤 하는 헌터 제독을 따랐다. 만약 퓨리가 명령을 내린다 하더라도 헌터가 승인하지 않으면 스트라이크 팀은 그 명령을 이행해야 할 이유가 없다. 쉴드에서 내린 임무에 대해 헌터로부터 그 어떤 말도 없다면 스트라이크 팀은 쉴드의 명령을 들어야 했고 이게 대부분의 경우였다. 이번 시리아에서의 임무도 마찬가지였다.
몇 쉴드 요원들은 뒤에서 스트라이크 팀을 가리켜 언젠간 쉴드에 크게 엿을 먹일 시한폭탄이라 불렀다. 럼로우는 놈들이 뭘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지껄이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특히 엿을 먹는 건 되레 이쪽이란 걸 증명하는 이와 같은 경우에는 더욱.
"그래서, 앞으로 자네들의 총 지휘를 맡게 될 스티브 로저스네."
정작 놀라서 들고 있던 수통을 떨어트린 건 혼비였다. 막사 내에서 유일하게 꼴사나운 행동을 보인 대원이었지만 사실 그의 표정은 그 안에 있던 모든 대원들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그를 증명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미켈슨이 꽤나 큰 소리로 목을 가다듬었다. 조금은 불편한 기류가 바닥을 구르는 수통처럼 그들 발치를 훑고 지나갔다. 와중에도 럼로우는 수통의 입구에서 줄줄 흐르는 물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사막에서 물은 귀한 존재였다. 그건 아마 현존하는 그 어떤 군사부대에 비교해서 모자를 것 없는 식량 지원을 받는 스트라이크 팀일지라 해도 별로 다른 상황은 아니었다. 잠깐 뜸을 들인 젊은 남자는 이 불안한 분위기를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변함없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자네들에 대한 자료는 이미 읽어 보았네. 하나같이 빼어나더군. 처음엔 어색한 것도 많겠지만 잘 조율해 나갈 수 있을 거라 믿네."
로저스의 말투는 단호했고 끝에 떨어지는 발음이 확실했다. 영락없는 군인의 것이었다. 그 때 해트릭이 답지 않게 어 하는 멍청한 소리를 내면서 허리를 굽혀 제 발에 부딪힌 수통을 집어 들었다. 미켈슨이 다시 목을 가다듬었다. 이번에는 웃음을 참기 위해 하는 것이 분명했다. 럼로우는 버들나무가 제 코끝을 간질이는 듯한 불쾌하면서도 동시에 퍽 유쾌한 기분을 느꼈다. 누가 제 팀원들 아니랄까봐 하는 짓도 골 때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중에 그들에게 진심 따위 조금도 없을 경고를 내려야겠다 생각할 때에 그는 다시 침묵이 흐르는 걸 깨달았다. 로저스는 속내가 잘 보이지 안흔 석상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잘 생긴 거 하나는 기록으로 봐왔던 것과 똑같군 그래. 럼로우는 무감동하게 생각했다.
"저, 질문이 있습니다."
이번에도 혼비였다. 혼비는 못 배워먹은 초등학생처럼 손을 들었다. 어딘 가서부터 대놓고 킥킥거리는 웃음이 흘러나왔는데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뭔가."
"그럼 뭐라고 호칭해야 합니까? 미스터 로저스?"
미스터 로저스라니. 정말 코미디가 따로 없다. 럼로우는 혼비에게 각성제를 줄이라고 말해줄 것을 숙지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조금 전보다도 더욱 키들거리는 웃음소리가 늘어난 건 한층 더 유쾌한 일이었다. 럼로우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뒷짐 쥔 채 열중쉬어 자세를 취한 그대로 제 앞에 신나를 들이마신 꼬맹이들처럼 불손한 태도를 보이는 대원들을 주시했다. 문득 로저스와 눈이 마주쳤다. 럼로우는 웃음 짓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로저스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캡틴, 아니면 sir 정도로 충분하네. 혼비."
"아, 예. 캡틴."
"그리고 아직 모르고 있다면 충고하겠는데. 난 지금 마음만 먹으면 한 손으로 자네 오 번 척추를 부러트린 후 강제로 명예 제대를 선물해준다 해도 아무도 문제 삼지 않을 사람이야."
"……."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침묵은 웃음이 터졌을 때만큼 발작적으로 찾아왔다. 모두들 하나같이 제가 방금 들은 걸 의심하고 있을 때 로저스가 방금 여차파면 자기 대원을 반 불구자로 만들겠단 힌트를 준 사람 치곤 지나치게 맑은 얼굴로 싱긋 웃었다.
"자기소개는 여기까지만 하겠네."
이만 볼 일이 있어서 나머지 브리핑은 내일 0600시에 하도록 하지. 로저스가 마지막 말을 남기고 막사에서 나갔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팀원들로부터 동시다발적으로 욕설 섞인 당황스러운 말들이 튀어나왔다.
"대장님! 이게 뭔 귀신이 곡하는 소립니까? 제가 각성제를 너무 많이 쳐 먹어서 환청을 듣는 거라고 해주십쇼. 네?"
혼비가 요란스럽게 소리쳤다. 다른 대원들 역시 그만큼 소란을 부린 건 아니었지만 반응들은 한결같았다. 럼로우는 자신에게 몰려드는 그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막사 입구를 응시했다. 그는 방금 전까지 그 자리에 있던 스티브 로저스를 떠올렸다. 목덜미가 후끈거리고 이가 갈렸다. 아마 사막의 지독한 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
스트라이크 팀은 머저리로 구성된 엘리트 집단이었다. 이렇게만 들으면 다들 모순으로 들어찬 설명이라 생각하겠지만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엘리트라 함은 스트라이크 팀이라 불리는 이 특별전술부대 대원들의 프로필만 다 합쳐도 백악관 침략 정도야 어린애들 공기놀이 하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처럼 들린단 뜻이다. 그들은 이미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겪은 베테랑들로 이루어져 있는 늑대 집단이다. 애초에 그 정도 실력이 될 때까지의 시간과 경험이면 혼자서 알파 미션을 뛰어도 문제없을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런 자들은 완벽함을 추구했고, 그랬기에 대부분 누군가를 동류로 받아들이는 데에 적지 않은 시간을 필요로 하기 마련이었다. 늑대처럼 말이다. 브록 럼로우가 이끄는 스트라이크 팀도 마찬가지였으며, 그랬기에 그들은 캡틴 아메리카가 갑작스레 이 임무의 총지휘관이 된 사실을 노골적으로 못마땅해 했다. 원래 정상까지 올라온 사람들이 되레 투정 많은 애새끼처럼 굴 때가 잦은 법이었다.
럼로우는 애초 지시전달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탓했다. 마지막으로 헌터 제독과 컨택했을 때 그는 단순히 임무 도중 새 발령자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고만 알려주었을 뿐이었다. 정확히 누군지도 어느 소속인지도 알려주지 않았다. 불친절한 지시전달이 한두 번도 아니었고 스트라이크 팀의 리더로서만 오년 째 굴러먹고 있는 브록 럼로우는 그런 류의 지시에 나름 익숙해져 있는 상태였기에 토를 달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다른 때도 아닌 임무 도중에 새 인원을 받게 되는 건 처음이기도 했으며 그에는 가볍게 넘길 수 없을 만큼의 후폭풍이 뒤따를 것이었다. 임무로 인해 예민해져있을 대원들 간 마찰이라던가 하는. 그래서 그는 하루 전 팀원들에게 미리 알렸다. 동료가 한 명 더 늘어날지도 모르니 염두에 두고 있으라고 말이다. 팀원들은 제각각 다른 방식으로 기대를 표출했다. 보통 같았으면 정색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놈이 하나 정도는 있었을지 모를 일인데 별 특별한 불만이 나오지 않은 걸 봐선 다들 계속되는 사막에서의 장기 임무로 인해 피로함과 동시에 지루함 역시 꽤나 느끼고 있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예상을 뒤엎고 뒤통수를 후려치는 전개 아닌가. 럼로우는 시리아 사막 모래 속에 묻힌 C4 위에 오줌을 갈기게 될 가능성과 임무 도중 캡틴 아메리카를 상관으로 맞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비교했다. 역시 후자가 더 현실성 없었다.
"대장님. 설명이 필요합니다."
개인 막사를 찾아온 건 예상대로 롤린스였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 막 헌터 제독과의 성과 없는 커뮤니케이션을 끝마친 럼로우는 제 충실한 부하에게 딱히 알려줄 게 없단 점을 안타깝게 여겼다. 럼로우는 제 가방에 몇 가지 안 되는 개인용품들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앞으로 다른 대원들과 함께 공용 막사를 사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롤린스는 마치 빈민가에서부터 길바닥으로 이사 가는 부랑자 보듯 보았다. 물론 그 정도는 아니었겠지만 럼로우는 그렇게 느꼈다.
"설명할 거 없어. 들은 대로다."
"하지만 sir."
"없다니까."
"……."
"까라면 까야지 어쩌겠어."
그 정도가 럼로우에겐 최대한으로 감정을 배제한 표현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이죽거리는 버릇 때문인지 말이 곱게만 나가지 않는 건 어쩔 수가 없었고, 애써 신경 쓰지도 않았다. 롤린스는 그보다 더 격한 반응을 기대한 모양이었다. 평상시 눈에 띄는 변화를 보기 힘든 얼굴이 미세하게 인상 쓰고 있는 걸 본 럼로우는 그가 이 상황에 적어도 다른 대원들만큼의 불쾌감은 느끼고 있단 걸 깨달았다. 아까전 대원들의 반응을 생각하면 놀랄 일은 아니었다. 럼로우는 그들이 지금 정찰을 나가있단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처음 불쾌하게나마 웃고 싶었던 것과는 달리 지금 그는 딱히 달가운 기분으로 선동을 잠재울만한 상태는 아니었다.
"로저스가 총 지휘관이 된 것과 상관없이 난 여전히 스트라이크 팀의 대장으로 남게 될 거다. 그러니까 우린 계속 임무를 이행하면 되는 거고, 넌 여태까지 네가 해왔던 것처럼 명령 기다리면서 코 묻은 M16이나 닦아놓으면 되는 거야."
"그게 전부가 아니지 않습니까."
"아. 시간 나면 MSG90도 정비해놓고."
"쉴드에서 캡틴 아메리카에게 스트라이크 팀의 지휘권을 부여했다는 건 그를 커맨딩 오피서 등급으로 치부하고 있다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비록 그가 일시적으로 지휘권을 갖게 된 거라 할지라도 그게 장기적으로 변할지는 알 수 없는 거고요."
"그렇지."
"선전효과입니다."
럼로우는 선전효과라는 단어가 과연 이 상황에 어울리는지 가늠해보려고 했다. 그의 시도를 읽은 건지 롤린스가 말했다.
"그가 쉴드 소속이라는 걸 알리는 초석이란 말입니다. 스트라이크 팀은."
그제야 럼로우는 롤린스가 말하고자하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건 크게 놀랄만한 사실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되레 잭 롤린스가 이처럼 말을 많이 하고 있다는 데에 놀람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뉴욕시에 에일리언이 마치 할렘가에 바퀴벌레 몰려들듯이 쏟아져 무분별한 학살을 해대던 사건 이후 반년도 채 흐르지 않았다. 그 사건 전까지 캡틴 아메리카에 대해선 크게 떠드는 사람이 없다시피 했다. 역사적 인물이 얼음 속에서 깨어났다는 소식이 전 세계에 말라리아처럼 퍼져 나간 것과는 별개로 남자는 그가 갖고 있는 명성에 걸맞은 이렇다 할 등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극적인 걸 좋아했다. 만약 아브라함 링컨이 살아 돌아온다 해도 실버타운에 들어앉아 래빗 프루프 펜스만 반복시청하고 있다면 아마 그 누구도 관심 한 톨 보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캡틴 아메리카는 자그마치 구십 여 살이나 먹은 몸을 이끌고 에일리언 부대를 때려잡는 데에 앞장섰다. 차마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피해가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사태는 긍정에 가까운 결과를 뱉어냈다. 세계 평화는 지켜졌고 캡틴 아메리카를 포함한 어벤저스는 영웅들로서 비상했으며 사람들은 그들을 살아있는 전설 취급하기 시작했다.
뭐, 스티브 로저스를 생각하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역사 속에서 살아 돌아온 인물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이제 캡틴 아메리카는 말 그대로 세계의 모든 기관으로부터 러브콜을 받는 몸이 되었다. 시대적 아이돌의 부활이다. 그 누가 캡틴 아메리카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 할 것인가? 그는 훌륭한 마스코트 역할을 해내는 것과 동시에 치명적인 무기로서 사용될 수도 있었다. 유용한 도구이자 선전물이 될 것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잭 롤린스가 말한 것처럼, 쉴드는 캡틴 아메리카를 그들의 알파 임무에 앞장서게 만드는 것으로 하여금 그 광고 효과를 제대로 누릴 생각이었다. 세계 평화니 뭐니 해도 쉴드 역시 손익 따지는 비밀스럽고 음침한 기관이란 점에선 다를 것이 없었다.
"아까 전 애들 반응 보셨을 겁니다."
그 말에 몇 시간 전 일이 떠오른 럼로우는 픽 웃었다.
"아주 깜찍하던데. 내 앞에서 그랬으면 지금쯤 전부 사막 한 복판에서 완전무장한 채로 기합 받고 있었을걸."
"바로 그겁니다. 로저스는 당신이 아니니까요."
"무슨 뜻이지?"
"우리 지휘관으로 받아들이기 힘들 거란 말입니다."
힘든 것뿐만이 아니라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롤린스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은 어투를 즐겼고 럼로우는 늘 그것을 맘에 들어 했다. 신중해서 나쁠 것 없다. 롤린스는 고목나무 같은 모양새로 말했다.
"우린 오 년씩이나 대장 밑에서 뛰었습니다. 파스팜프레스를 삼 년 만에 뛰쳐나온 해트릭마저요. 그건 팀원들이 당신을 누구보다 인정하고 있단 말입니다."
"날 사랑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오늘따라 말이 많은데. 롤린스."
"고작 우릴 발판으로 삼을 사람을 위에 두고서 임무를 수행할 정도로 인내심 많은 놈들이 아닙니다."
아시잖습니까. 롤린스가 시선으로 말했다. 그리고선 그 역시 자신이 너무 많은 말을 했다고 생각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제 부하의 가라앉은 눈을 마주하던 럼로우는 얼굴 위에 일말 남아있던 장난기를 지웠다.
사실 알게 모르게 내심 대원들로부터 이런 반응을 기대하지 않았다 부정할 수는 없었다. 스트라이크 팀은 쉴드를 포함한 다른 모든 부대와 동떨어진 일종의 고아원 같은 느낌이었고 그것은 럼로우를 중심으로 그들을 그 누구보다도 더 질긴 인연이 되도록 만들었다. 이미 존재하는 유대감에 변화를 바라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질서와 계급과 체계를 그 상태로 유지하길 원했으며 그건 그들을 새로 이끌게 될 자가 캡틴 아메리카라 해도 다를 것 없는 일이다.
그들은 전부 제 나름대로 사람들을 부대를 이끌어 본 자들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하나같이 베테랑이었다. 그랬기에 그들이 캡틴 아메리카를 보는 시선은 일개 군인을 보는 시선과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
원래 어미 없이 자란 놈들이 가족을 찾으면 더 서로에게 의존하는 법이다. 럼로우는 조금은 당연한 우쭐함을 느꼈다. 하긴, 제 아무리 캡틴 아메리카란 이름을 달고 있어도 이제 막 현대 세계에 걸음마 뗀 아이와 같을 사람이 신식 전투방식에 대해 뭘 알겠는가. 냉전시대는 커녕 체첸 내전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럼로우는 훌륭한 군인이었고 또한 리더였다. 허나 그것이 그가 완벽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가장 가까운 곳에 서왔던 잭 롤린스는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 과묵하면서도 묵직한 부하가 자신의 속내를 잘 알고 있다는 빌미로 무슨 말을 하려 하는 건지 알아챘다. 럼로우는 딱히 천재적인 남자라곤 말할 순 없었으나 그렇다 해서 눈치가 없는 건 아니었다. 럼로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로저스는 그가 말한 대로 누구 척추를 부러트려도 면제권을 받을 사람이지."
"더 위험한 거 아닙니까."
"하지만 그를 물려다가 되레 이쪽의 모가지가 분질러지는 수가 있어."
"……."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야."
그는 아까 전 로저스의 대사를 인용했다. 롤린스의 무감동한 표정에 문득 숨길 수 없는 낭패감이 어리는 것 같았다. 럼로우는 이 김에 자신의 뜻을 확실하게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로저스가 지휘권을 잡은 건 쉴드의 결정이긴 했지만 헌터 제독으로부터 그에 대한 특별한 지시가 없는 것도 사실이야. 더군다나 그는 쉴드에서 꽤 아끼는 무기이기도 하지. 그에게 이를 드러내서 우리에게 좋을 것 하나 없단 소리다. 그러니 우린 늘 하던 대로 명령만 따르면 돼."
"예."
"그리고 지금으로선 특별히 꼬투리 잡을 게 없는 이상 로저스를 적대시 할 이유는 없어. 우리가 이곳에 있는 목적은 임무를 위해서다. 그걸 잊지 마."
"…알겠습니다."
"이왕 말 나온 김에 대원들에게도 전해. 적당히들 하라고."
물론 브록 럼로우는 그의 사려 깊은 부하 롤린스가 예상한 것처럼 로저스의 존재가 거슬리면 거슬렸지 달갑지는 않았다. 갑작스레 나타나 그의 지휘권에 꿰차고 들어앉은 캡틴 아메리카라는 세기의 아이돌이 반가울 리가 없었다. 아직까지 스트라이크 팀의 직속 권할은 그에게 있다 할지라도 로저스의 존재는 여태까지 그들이 익숙해져 왔던 명령 체계에 큰 변화를 줄 것이다. 그리고 럼로우는 자신의 자리를 누군가에게 내어줘야 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롤린스가 제안하는 -혹은 제안하고 있다 생각하는- 반란의 일종은 지금 상황에 하등 도움 될 것이 없었다. 쉴드에 그리고 캡틴 아메리카에 반기를 든다 해서 그들이 얻을 게 무엇인가? 딱히 그 누구에게도 자애롭지만은 않은 쉴드의 성격을 고려해보자면 아마 팀의 해체가 아니라면 다행일 것이다.
브록 럼로우는 선인군자는 아니지만 섣불리 행동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롤린스는 잠시 침묵하더니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중하라고 일러두죠."
그는 말없이 나가보라는 듯 손을 내젓는 럼로우에게 경례를 올리고 그의 막사를 빠져나갔다.
럼로우는 짐이 들어찬 가방을 한 쪽 어깨에 짊어 멨다. 막사를 나오니 롤린스의 모습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고 붉고 노랗게 흔들리는 인공 불빛에 비춰진 사막의 끝없는 모래벌판만이 시야에 들어왔다. 지평선은 너무 어두워 하늘과 모래간의 경계가 구분되지 않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칠흑 같은 밤이었다. 그는 담배를 한 대 꺼내 물며 천천히 공용 막사 쪽으로 발을 옮겼다.
***
"어떻게 됐나?"
홀로그램으로 떠오른 니콜라스 퓨리가 단조로움 속에 흥미를 숨기지 못한 목소리로 물었다. 스티브 로저스는 불만이 많았다. 그 혼자서 사막 한 가운데에 입체영상장비와 샤워시설이 딸린 널찍한 개인 막사를 쓰게 되었단 점이 그 중 하나였다. 그는 미간을 좁혔다.
"아직까진 임무 진행 상태를 검토한 게 전부입니다. 타깃의 특별한 움직임은 없고요."
"그거 말고. 자네 소개식 말이네."
"뭐…"
그는 간이 데스크 위에 놓여 있는 수개의 프로필을 흘끔 보았다. 그리곤 소리 없이 한숨 쉬었다.
"두 손 들고 환영해주진 않더군요."
퓨리는 어쩐지 웃고 싶은 것처럼 보였고 로저스는 악취미라 생각했다. 물론 딱히 취미 활동이나 즐기자고 퓨리가 그를 이 사막으로 보내기엔 남자는 쉴드의 모든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로저스가 이 임무를 가볍게 여긴다는 말은 아니었다. 단지 빌어먹을 사막에서 쉴드 요원으로서의 첫 임무를 시작하는 것보다 조금 더 나은 상황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것 정도였다. 그것도 자신에게 별로 신임이라고는 한 푼도 보이지 않는 군인들을 이끌고서. 문득 로저스는 데자뷰를 느꼈다. 비슷한 일이 바로 얼마 전에도 있지 않았던가. 비록 그땐 사막이 아닌 맨해튼이었고, 그의 팀원들은 단련된 군인들이 아닌 백만장자와 과학자와 첩보요원들과 아스가르드에서 온 데미갓 정도였지만.
그 전에도 이런 상황은 있었다. 무려 칠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겠지만 스티브 로저스가 채권 팔이 짓을 집어치고 단신으로 오스트리안 알프스에 뛰어들어 107 부대를 구출해낸 다음이었다. 그 역사책에 기록될만한 행위로 인해 그는 부끄러울 정도로 열렬한 호응을 받았지만 당시엔 모든 게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이후 그가 107 부대를 이끌고 대대장으로서 첫 임무를 수행해야 했을 때 초반의 전개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를 신임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었다. 버키 반즈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하곤 했다. 언젠간 저 녀석들도 보게 될 거야. 스티브. 네가 어떤 사람인지.
지금 그의 옆엔 버키가 없었다. 그는 철저히 혼자였다. 곧 퓨리가 한 말은 안 그래도 음울한 그를 더 음울하게 만들었다.
"뭣하면 럼로우하고 둘이 짝지어서 임무라도 다녀와 볼 텐가? 위도우와 호크아이도 부다페스트에 다녀오기 전까진 그렇게 가깝다 부를 만한 사이는 아니었거든."
로저스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부다페스트로는 모자를 것 같습니다만. 아프가니스탄 정도 되면 모를까."
"역사 숙제 좀 한 모양이군."
"근 오십 년 어치 정도는 대충."
적어도 그가 어째서 중동 사막의 한 가운데에 떨어져야 할 만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지는 이해하고 있었다. 퓨리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내가 왜 자네를 그곳으로 보냈는지는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네."
"제 도움이 필요할 만큼 중요한 작전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중요한 작전이지. 쉴드에서 이뤄지는 모든 작전은 중요하거든. 캡틴. 난 자네가 이번 임무를 완수하는 것과 더불어 스트라이크 팀을 주의 깊게 살펴봐주길 원하네."
로저스는 눈썹을 휘었다.
"스트라이크 팀을 말입니까?"
"그래. 브록 럼로우를 선두로 한 여덟 명의 스트라이크 팀의 동태를 살피고 그에 대한 보고를 해주었으면 좋겠군."
"감시하라는 거군요."
"그 단어를 쓰고 싶지는 않군. 명목뿐이라 해도 일단 스트라이크 팀은 쉴드에 소속된 거나 마찬가지니 말이야."
로저스는 책상 위에 올렸던 손가락을 가볍게 두들겼다. 애초에 갑작스레 그를 임무로 발령 낸 것부터 의아하게 생각하긴 했으나 이런 이유 때문인지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확인한 이상 스트라이크 팀의 대원들에 대한 프로필에는 눈에 띄는 문제도 없었고 의심 갈 만한 부분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거의 백 퍼센트에 달하는 임무 성공률만 봐도 그랬다. 로저스가 뭐라 묻기도 전에 퓨리가 심기 불편함을 숨기지 않으며 이어 말했다.
"스트라이크 팀이 쉴드를 위해 일하고 있는 건 사실이네. 하지만 아니기도 하지. 그의 직송 상사는 따로 있으니 말이야. 토드 래드클리프 국장이네. 쉴드와는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기도 하고 나와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기도 하지. 그가 스트라이크 팀을 창단했네. 하지만 개인이 그런 강력한 특별부대를 소유하는 건 법적으로 불가능 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대신 스트라이크 팀의 화력을 쉴드에 빌려주기로 계약을 맺은 거였네. 그런데 최근 우리 쪽 인텔이 흥미로운 정보를 입수했다더군. 여태껏 쉴드의 알파 임무들을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완수한 스트라이크 팀이라 해도 한 번 쯤 다시 돌아보게 만들 만한 정보였지."
"그게 뭡니까?"
"안타깝게도 알려줄 수 없어. 레벨 9 이상 요원이 아닌 걸 탓하게."
로저스는 한숨 쉬며 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사막의 더위로 인해 끈적한 땀이 넘치는 짜증처럼 손에 묻어났다.
"그럼 지금 아무것도 모르는 채 그저 지켜보기만 하라는 말입니까? 제가 뭘 알아내야 하는지 정도는 알려줘야 되는 거 아닙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말게. 로저스. 벌써 한 가지 알아낸 것도 있지 않나? 그들이 자네를 상관으로 모시는 걸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
"그건…"
"난 전장에서 뛰어본 사람 치고 캡틴 아메리카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
그 말에 로저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에게 보내던 비웃음 섞인 눈빛과 조롱하는 말투를 기억했다. 확실히 그가 슈퍼 솔져가 된 이후 쉽게 받아보지 못한 반응이긴 했다. 하지만 그건 일종의 텃세라고 생각했다. 무리에 새로운 자가 들어오면 당연한 수순처럼 이어지는,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자만 살아남을 수 있는 원초적인 환경이 바로 군대였다. 그건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부분 중 하나다.
이 상황을 부자연스럽다 부를 수 있을 만한 이유는 단 하나. 스티브 로저스가 캡틴 아메리카라는 이름을 달게 된 이상 그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캡틴 아메리카라는 호칭은 그만큼 모든 걸 설명하는 단어였다.
퓨리는 모니터 너머에서 상체를 기울이더니 말했다.
"지금 이 세계는 옛날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아. 로저스. 누가 언제 뒤에서 칼을 꽂을지 모른단 말일세. 아군의, 친구의 얼굴을 하고서 배신을 서슴지 않지. 단 한 순간이라도 눈을 떼어선 안 되네."
로저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스트라이크 팀이 쉴드의 적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군요."
"그건 자네가 차차 알아내게 될 문제겠지. 그리고."
퓨리는 양 손을 맞잡으며 무겁게 말했다.
"이번 임무를 성공리에 끝마치는 것이 중요하네. 스트라이크 팀을 지켜보는 것 뿐만이 아니라, 자네가 그들을 이끌고 완수해야 하는 작전 자체를 말하는 거야. 자넨 이제 캡틴 아메리카이자 또한 쉴드의 요원이네. 난 자네가 과거에 그러했던 것처럼 지금 바로 이 세계에서도 사람들을 이끌 수 있다는 증명이 필요해. 날 위해서나 스트라이크 팀을 위해서가 아닌, 이 세상이 전부 볼 수 있도록 말이야."
로저스는 잠시 침묵했다.
"어째서입니까?"
"사람은 두 눈을 갖고 있는 이상 모든 걸 눈으로 판단하려 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지."
그는 자신의 한 쪽 밖에 남지 않은 눈을 주목하라는 듯이 말했다.
로저스가 닉 퓨리의 말에 지나치게 감성적이 되려고 할 무렵 통신은 흐지부지하게 마무리 지어졌다. 퓨리의 말은 그로 하여금 불가피하게도 버키가 했던 말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세상의 모든 확신은 전부 증거와 자료에 근거했다. 로저스는 한 때 그가 그런 것 따위 없이도 신임을 살 수 있었던 때를 기억해내 보려고 하다가 실패했다. 생각해보면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것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스티브 로저스는 군인이었다. 그리고 그 역시 심증보단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축이었다. 제 아무리 뛰어난 사격수라 해도 산 너머에 있는 적군까지 맞출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는 스트라이크 팀 대원들의 프로필을 손끝으로 훑었다. 문득 그는 개중 브록 럼로우의 파일을 집어 들었다. 사진 속 남자는 로저스 그와는 전혀 상반된 거의 검게 보일 정도로 어둔 색 머리칼에 그을린 피부를 갖고 있다. 그건 오늘 오후 로저스가 그를 잠시나마 마주쳤던 때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더라도 저 사람 적어도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한 두 번은 다녀온 군인이겠구만 하는 소리를 쉽지 않게 들었을 남자다. 로저스는 자신을 바라보던 럼로우의 시선을 떠올리고는 잠깐 불편한 기분이 되었다.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던 스트라이크 팀의 대장이라. 자신의 위치를 빼앗긴 것 때문일까. 전쟁터의 남자들은 더욱 자신의 것에 목숨을 걸게 되기 마련이다. 지위도 그 중 하나다. 로저스는 팀의 총 지휘권을 자신에게 넘겨줘야했던 럼로우가 과연 그에게 얼마나 비협조적으로 굴 것인지 가늠해본다. 사막 한 가운데서 이뤄지는 장기 임무와 더불어 아군으로부터 잠재적 적군의 가능성마저 고려해야 하는 일은 그가 아무리 슈퍼 솔져라 할지라도 절로 관자놀이를 지끈거리게 만들었다. 자신의 팀원을 최대로 믿는 상태에서 행동한다 할지라도 임무가 실패할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 게다가 리더의 위치에서 부하를 감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단 소리는 말만큼 쉬운 소리는 아닌 것처럼 들렸다.
세상은 항상 뜻대로만 돌아가지 않는다. 좋던 싫던 간에 곧 이 이중 임무가 어떤 결과를 낳을 지는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첫날부터 척추를 부러트리느니 하는 말을 꺼낸 건 의도한 것 보다 조금 더 거칠게 나간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후회되는 건 아니었다. 군인들에겐 그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필요한 만큼 거칠어져도 될 때가 있기 마련이었다.
로저스는 잠시 후 고개를 저어 불편한 사념들을 떨쳐냈다. 그리고 제 앞에 놓인 이 사막에서 그들이 해결해야 할 장기 임무에 대한 자료를 집어 들었다.
***
오퍼레이션 킬링필드. 이름하야 킬링필드 작전이라고 불리는 이 미션은 오로지 스트라이크 팀만이 움직이는 것으로서 예상 기간은 최대 두 달까지 걸릴 수 있다고 가늠되어졌다. 사막에서 두 달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지만 이미 다들 중동에서 한 번 쯤은 뒹굴어 본 전적이 있는 자들이었기에 그걸 어렵게 받아들이는 대원은 없었다. 단지 어렵다고 할 수 있을 만한 부분은 아마 두 달 안에 AIM과 해머의 사이에서 이루어질 물품 교환 루트를 확보 및 습격하고 그들을 아무런 인명피해 없이 비공개적으로 무사 소탕하는 것 정도뿐이겠다. 물론 이 중에도 딱히 어렵다 할 만한 부분이 없는 것처럼 들린다면 AIM이나 해머가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신무기에 대해 고려해 보는 것도 나쁜 옵션은 아닐 것이다.
이라크와 요르단 사이에 위치한 시리아 사막은 지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현재까지 전쟁이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는 이라크 쪽으로 보급되는 물자나 무기 따위는 대부분 요르단 또는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였다. 감시망을 피해 무기를 만들기에는 가장 적절한 곳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의 대부분은 알카에다나 사우디 그룹을 포함한 무장단체의 손에 떨어진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개중엔 총과 폭탄 따위를 비웃을 만한 무기들도 포함되어 있었고 그것들은 그저 테러 집단이 아닌 보다 더 큰 악당들의 수중에서 거래되는 것이었다. AIM과 해머가 그중에 알려진 일부였다.
쉴드의 추측으론 AIM이 이라크에 주둔하고 있는 테러 단체들에 무기를 공급하고 있는 주 세력이고 그것을 가능케 하도록 화력을 보태주는 게 해머 사라는 것이었다. 로저스는 지난 스타크 엑스포에서 해머 사가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을 겪고 곤두박질 쳤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마겟돈이 찾아와도 돈을 벌 놈들이 무기 회사라더니 여전히 어떻게 해서든 돈줄을 손에 넣고 있는 걸 보면 딱 그 꼴이었다.
킬링필드 작전을 맡으러 오기 바로 직전까지도 로저스는 뉴욕시의 복구 작업을 돕고 있던 와중이었다. 어마어마한 피해 규모는 가능한 모든 인력이 뛰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이틀 작업한다 해서 끝날법한 일이 아니었다. 그가 떠나야한다는 소식을 들은 토니 스타크는 처음엔 굉장히 불만스러워 보였지만 대충 내용을 전해 듣자 갑자기 태도가 바뀌더니 손을 후치며 로저스를 당장에라도 중동으로 내쫓을 기세였다.
"뭘 뜸들이고 있어? 어서 중동인지 뭔지에 가서 그 망할 놈을 싸잡아 넣으라고. 하여간 제가 만든 무기보다도 멍청한 데다 쓸데없이 끈질기기까지 하니 재앙도 두 배로군 그래."
평소처럼 능글거리는 기색도 싹 지운 스타크가 그렇게 정색하고 비꼬는 건 처음 보다시피 했다. 하여간 외모나 두뇌를 제외하면 제 아비랑 닮은 구석은 별로 없었지만 그렇다고 로저스가 그의 의견에 반대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는 군말 없이 뉴욕시의 뒷수습을 다른 자들에게 맡기고 미국을 떠났다. 그가 오지 않겠다면 스타크는 제가 직접 몸소 중동으로 날아올 기세처럼 보였다. 그의 걸미라에서 겪었던 일이나 아크 리액터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를 알게 된 건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였다.
"해머는 지금 알카트라즈에 갇혀있으니 그가 직접 움직이는 건 아니겠군. 그 말은 아직도 해머 밑에서 일하던 끄나풀이 남아서 멀쩡히 활동하고 있단 뜻이겠지."
"내가 보고받은 그대로야. 자네가 개인적인 조사를 했을 줄은 몰랐는데. 스타크."
"거의 다 무너져버리다시피 한 기업에 붙어있는 놈들이면 뒷구멍으로 뭘 적잖이 받아먹었거나 아니면 그만큼 충성심을 갖고 있는 자들일 거야."
"그럴듯한 추리로군."
"놈들을 잡으면 물 한 모금 없이 사흘 정도 사막 한복판에 세워두는 방법을 추천하지. 지들이 알아서 어떤 기밀이던 간에 술술 털어놓게 될 테니까."
스타크가 그 인정머리 없는 고문 방법에 대해 얼마나 실감 있게 설명했는지는 둘째 치더라도 로저스 역시 딱히 적군에게 자비를 두는 성미는 아니었다. 특히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걸려 있는 경우라면 더욱. 로저스는 계획을 그리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비협조하는 대원들과 함께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이 임무를 수행할 길에 대해서.
***
사막의 0600시는 여전히 추웠다.
"정찰조의 멤버를 교체한다. 루틴은 알파 팀부터 시작하는 걸로 하지. 그 다음 브라보, 에코 순으로 교대한다. 그리고 럼로우, 자네는 앞으로 나와 같은 교대에 움직인다."
그렇게 말한 로저스는 각 알파, 브라보, 에코 팀마다 들어갈 멤버들의 이름을 나열했다. 갑작스런 멤버 교체에 대부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크게 반응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젯밤 다들 롤린스로부터 럼로우가 한 말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신중하게. 적당히. 대원들은 그 단어들이 어떤 선을 긋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럼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캡 명령 잘 들었겠지. 스트라이크 팀. 바로 움직인다."
럼로우가 다시 명령을 내리자 그제야 대원들이 긍정의 신호를 보내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저스는 미간을 좁혔다.
정찰은 그들의 막사를 기준으로 반경 백 미터 정도를 험비로 순찰한 뒤 동북쪽, 북서쪽, 서남쪽 순서로 역 시계방향으로 움직이는 게 보통이었다. 무인 드론이나 C-130을 보내는 일도 있었지만 발로 직접 뛰는 것과는 또 다르다. 적이 어떤 루트를 사용해서 움직일 지 알 수 없었다. 특히 어제 이미 한 번 공격을 당했으니 저쪽에서 이동 루트를 변경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스트라이크 팀은 현재 시리아 사막의 남쪽 부근에서 주둔하고 있었다. 적들의 예상 교차로를 잡으려면 그들이 북으로 이동하는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레녹스의 USB 분석 결과가 나올 때까지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꾸준한 정찰은 불가피한 요소였다.
알파 팀은 로저스와 럼로우, 혼비, 러쉬가 한 조였다. 험비를 운전하는 혼비는 어제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머리 아플 정도로 떠들거나 빈정대는 대신 간혹 백미러를 통해 로저스를 흘끔거리는 게 전부였다. 총기를 점검하던 로저스가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말했다.
"내게 할 말이 있나. 혼비."
"아뇨. 없습니다. 예. 길이 좀 거치네요. 빌어먹을 사막. 운전하기에 끝내주는 곳이죠. 아까 먹은 고양이 통조림이 올라올 것 같은데요."
"고양이 통조림?"
"아. 군용식량 말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우리가 받는 통조림은 미 육군부대가 지급받는 것보다도 형편없다고요. 각성제라도 먹지 않을 거면 입에 안 대시는 게 좋을 겁니다. 혼비는 언제 조용했냐는 듯 저 혼자서 주절거리기 시작했고 로저스는 아 그렇군 이란 한 마디를 끝으로 혼비를 완벽하게 무시했다. 럼로우는 남자가 벌써부터 혼비를 대하는 요령을 알아차린 것에 내심 감탄했다.
사막은 해가 뜨기 전까진 공기가 차다. 로저스는 사막용 방한복을 입고 쉬마그를 끌어 올린 다른 대원들과는 달리 처음 도착한 날부터 짙은 푸른색의 유니폼만을 입었다. 그의 등에는 방패가 갑옷의 일부처럼 매달려 있다. 그들이 험비에서 내려 적외선 망원경으로 주변을 둘러볼 때에 럼로우가 입을 열었다.
"어제 우리 쪽에서 놈들의 정보운송 차량을 습격한 건 이미 들으셨을 겁니다. 적이 우릴 추격해 올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아마 길어도 이틀 안으론 막사를 이동하는 게 좋을 겁니다."
로저스는 눈에서 망원경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막사의 위치에서 60 킬로미터 쯤 떨어진 고지 옆을 생각하고 있었네. 대형 장비를 숨기기에도 나쁘지 않은 것 같더군."
"탁월하시네요."
"칭찬 고맙네."
럼로우는 팔짱을 끼고 있던 손으로 차가운 땀이 밴 뒷목을 문질렀다.
"어제 우리 애들 환영식이 좀 거칠어서 당황하셨을 겁니다."
로저스는 망원경을 내리고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딱히. 자네들로부터 따듯한 포옹을 받길 기대했던 건 아니니까."
럼로우는 납득한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로저스는 생각보다 눈치 하난 빠른 모양이었다. 주변 기류를 잘 읽는 것 같고.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며 방심하지 않는 사람이다. 럼로우가 그렇게 머릿속으로 분석하고 있을 때 로저스가 말했다.
"자네가 날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네. 럼로우."
아. 눈치 빠르다는 말은 취소해야겠다. 럼로우가 불편한 시선을 그를 향해 돌릴 때 로저스는 여상스럽게 이어 말했다.
"한때 나도 마치 스트라이크 팀과 같은 소규모 부대를 이끈 적이 있었지. 훌륭한 팀워크였네. 그리고 그들은 가능한 한 그 팀워크에 변화가 생기는 걸 원하지 않았어. 루키 한 명이 어쩌다 잠깐 끼게 된 적이 있었는데 다들 난리도 아니었지. 적군에게보다도 같은 팀에게 겁을 집어먹은 루키가 하루 종일 눈치만 보고 벌벌 떨 정도로 말이야."
럼로우는 비식 웃었다.
"본인을 루키 취급하는 상관은 또 처음 보는군요."
겸손한 겁니까 아니면 하찮은 동정심이라도 유발해 보려는 작전입니까. 럼로우는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그나마 남은 이성이 그의 입을 다물게 했다. 하지만 로저스는 둘 중 그 어느 쪽도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녀석은 나중에 갈리폴리 전투에서 홀로 오십 여 명을 죽인 뒤 지뢰에 다리를 날려 먹고 미국으로 귀환했지. 아마 메달을 받았을 거야. 적어도 다섯 개 정도는."
"무슨 말을 하시려는 겁니까?"
로저스는 지평선 너머를 쳐다보았다. 슬슬 해가 떠오르는 기미가 보이는 사막의 모래는 노랗고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고 그건 로저스의 머리카락 역시 마찬가지다. 로저스는 담담하게 말했다.
"부대원들은 녀석을 진작 우리 편으로 맞아주지 못했던 걸 후회하곤 했어. 누군가는 완벽한 팀 안에서 빛날 때도 있고, 누군가는 홀로 있을 때 그 역량이 더 빛을 발하기도 하지. 하지만 그 자질을 이끌어주는 건 팀의 우두머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지."
"……."
"그러니 잘 부탁하지. 럼로우."
럼로우는 제 앞에 불쑥 내밀어지는 손을 보았다. 그는 그 손을 보다가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로저스는 웃고 있지도 않았고 그렇다 해서 한 수 굽히고 들어가는 것처럼 약한 기색을 내비치지도 않았다. 로저스는 그냥 로저스였다. 그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담담하게 협조하기를 부탁했다. 부탁? 아니 부탁이라 하기도 어려운 게 로저스의 말투는 그로 하여금 이것이 럼로우 그가 맡아야 할 당연한 의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의 성취력을 평가하겠다 말하고 있었다. 로저스는 온 몸으로 그에게 가장 사내다운 방법으로 정당한 도전장을 내밀고 있는 것이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럼로우는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곧 비식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캡이 어디까지 따라올 수 있나 한 번 보죠."
로저스의 눈매에 짧은 웃음이 스쳤다. 잠시 후 그들은 험비에 올라타 다음 정찰지로 이동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