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팁럼로우
사랑하는 나의 무기에게
럼로우는 눈을 떴다. 시간 감각이 없었다. 자신의 방이 아니란 것을 자각하는 게 처음이었고 그러자 어제의 기억이 물밑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직 채 블라인드를 걷지 않은 창 너머로부터 어둔 햇살이 희미하게 로저스의 공간을 물들이고 있었고, 럼로우는 제 옆을 돌아보았다. 로저스는 침대에 없었다. 럼로우는 신음과 함께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냥 누워있게."
반 쯤 일어나 앉았을 때 로저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양 손에 머그잔 하나씩을 들고 있었다. 막 샤워를 한 모양인지 머리칼은 젖어 있었고 그가 입고 있는 티셔츠와 트레이닝복 바지로부턴 어제의 흔적따위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멀끔했다. 럼로우는 한숨처럼 숨을 내쉬면서 도로 누워버렸다. 저런 완벽한 남자가 존재한다는 게 믿기지가 않을 정도다. 아무리 더럽혀도 더럽혀질 수 없는 사람같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로저스는 머그잔을 탁상 위에 올려두곤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곤 허리를 숙여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럼로우에게 입맞췄다.
럼로우는 눈을 내려감으며 생각했다. 정말 좆됐다고.
이런 자상함을 원한 게 아니었지만 로저스의 행동은 그로 하여금 차마 거부할 수 없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로저스는 민트향이 나는 입술로 그에게 너무 다정해서 한편으론 서툴어 보이기까지 하는 키스를 했다. 럼로우는 제 내장이 너무 울렁거려 토할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로저스는 입술을 떼고 물었다.
"몸은 좀 어때?"
푸른 눈엔 익숙한 다정함과 더불어 걱정이 섞여 있다. 익숙한? 그렇게 생각하자 럼로우는 전에 비교할 수 없는 자학심이 몰아치는 걸 느꼈다. 도망치고 싶은 것과 동시에 남자에게 달려들어 입맞춤을 퍼붓고 싶기도 했다. 몸정 때문만은 아니다. 성욕이 전부가 아니었다. 스티브 로저스와 그의 빌어먹을 성격이 문제였다. 아니, 성격이라고 단정지을 수만도 없는 남자의 모든 것은 그의 주변 사람들을 동화시키고 물들게 만든다. 럼로우는 아주 오랜만에 자신이 초라해지는 기분이 된다. 누군가에게 굴복하고 싶다는 감정. 그런 위험한 생각을.
그는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을 잊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이건 임무일 뿐이다. 수 없이 되내여도 이젠 비참해지는 기분이 드는 걸 부정할 수가 없다. 럼로우는 내심 그가 이 남자의 아이를 갖는 것을 실패하길 바랬다. 어떤 이유에서든 임신이 되지 않았으면 했다. 그래서 하이드라가 실패한 도구에 불과한 자신을 죽이기를 바랬다. 그는 남자의 멱살을 잡고 제 몸 위로 끌어내렸다.
"지금 당장 한 번 더 할 수 있을 정도로 괜찮은데요."
그렇게 말하며 아직까지 알몸인 제 다리로 로저스의 허리를 조였다. 잠시 머뭇거리는 기색이 보이던 로저스는 곧 순순히 자리를 잡고 럼로우의 목덜미에 입을 묻었다. 한 손이 자연스럽게 벌어진 허벅지를 추켜 들었고 다른 손은 그의 아래를 더듬었다. 어제 그가 잔뜩 싸질러놓은 것이 구멍 안쪽에서부터 조금씩 밀려나오고 있었다. 럼로우는 작게 신음했다. 로저스는 구멍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으며 낮게 속삭였다.
"이거 빼내야 하지 않을까."
그 말에 고개를 저은 럼로우는 남자에게 그냥 박아달라고 했다. 로저스는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자신에게 삽입하는 남자에 생리적인 신음을 흘리면서 럼로우는 마치 제게 최고의 섹스토이가 생긴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하며 자조했다. 하지만 그 중 누가 도구의 역할을 하고 있는지는 뻔한 노릇이었고, 그래서 그의 기분은 배로 더 가라앉았다. 럼로우는 흔들리기 시작하는 몸을 느끼며 눈을 내려감았다.
커피가 식어가고 있었다.
"솔직히 말 해봐. 어떻게 했어?"
럼로우는 무거운 눈을 들었다. 그의 앞에 버티고 선 나타샤 로마노프는 임무용의 검은 전신 타이츠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굴곡있는 가슴 앞으로 양 팔을 꼰 채 가는 눈으로 그를 내려다 보았고, 럼로우는 그 광경이 얼마나 보기 좋은 것임에 상관 없이 조금 피곤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다시 손질하고 있던 총으로 눈을 내렸다.
"정보 불충분이야. 로마노프."
앞뒤 다 잘라먹은 질문에 부가 설명을 요구하는 그에게 로마노프가 다시 말했다.
"스티브 로저스. 어떻게 꼬셔낸 거야?"
그는 결국 한숨을 내쉬면서 총을 내려놓았다. 복귀한 지 일주일도 안 되서 로마노프에게 이런 질문을 받을 정도로 뻔했나 싶었다. 사실 딱히 로저스와의 관계를 감추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들키지 않을 정도로는 처신했다 싶었는데, 단순히 그들의 관계가 그토록 뻔히 들여다 보이는 것이었는지 혹은 로마노프가 특유의 날카로운 관찰력으로 알아낸 것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귀찮게 된건 마찬가지다. 럼로우는 빈정거렸다.
"네가 상관할 일 아니잖아. 위도우. 신경 끄지 그래."
"그는 캡틴 아메리카야. 이건 모두에게 상관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럼로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위대하신 캡틴 아메리카께서 나같은 놈과 한 침대에서 뒹구는 게 못마땅하다는 건가?"
로마노프는 미간을 좁혔다. 마치 그와 로저스가 섹스하는 장면을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는 듯이 말이다. 럼로우는 짜증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녀를 지나쳐가려 했지만 그 전에 로마노프의 목소리가 그를 붙들었다.
"럼로우. 난 너를 잘 모르지만 적어도 네가 로저스를 평생 함께할 반려처럼 생각하는 건 절대 아니란 것 정도는 알고 있어. 네겐 로저스가 그냥 한 번 따먹고 말아도 될 사람처럼 보이는 모양인데 그는 그런 대접을 받으면 안 될 사람이야. 아니,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 여겨지는 것 조차도 안 될 사람이지."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군."
"진짜 모르겠어?"
로마노프는 그에게 바로 앞까지 가까이 다가왔다. 러시아인의 붉은 갈색 눈이 그를 노려보았다.
"로저스가 널 보는 시선이 정말 널 섹스파트너 정도로만 여기는 거 같아?"
럼로우는 입술을 꾹 다물고 그녀를 마주 노려보았다. 그리곤 무기고에서 나왔다.
로마노프는 분명 그가 도망치듯이 자리를 피했단 걸 짐작했을 것이다. 젠장. 전직 스파이인 그녀는 너무 예리했다. 사실 럼로우는, 매우 짜증나게도, 그녀가 하는 모든 말을 알아들었다. 상대는 무려 캡틴 아메리카다. 그런 사람이 게이 섹스를 하고 있다고 소문이라도 난다면 그 파급은 단순하게 그치지는 못할 것이다. 로저스가 그에 얼마나 상관을 하던 안 하던 간에 그는 캡틴 아메리카였으며 그건 그가 상상하는 것보다도 더 큰 심볼리즘을 차지하고 있었다. 럼로우는 그걸 잘 알았다. 왜냐면 캡틴 아메리카가 그렇게 대단한 자가 아니라면 애초에 그가 자궁을 달고 그의 애를 임신해야 하는 일도 없었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로저스가 그를 보는 눈빛이라면... 럼로우는 남자의 부드러운 푸른 눈매를 생각했다. 그는 혀를 찼다.
그와 로저스는 처음 이런 관계에 들어가기 직전 타협을 보았다. 적어도 타협이라 부를 무언가가 있었다. 약간의 충동과 계획적인 음모와 그리고 빌어먹게 우스운 죄책감으로 인해 시작한 관계였다. 사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섹스는 한다. 그러니 로마노프가 걱정하고 있는 -혹은 그렇다고 짐작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럼로우는 복도에서 로저스를 마주쳤다. 그를 발견한 로저스의 눈가에 웃음기가 섞였다.
저 표정을 마주할 때마다 낭패감이 드는 건 불가항력이지만 럼로우는 애써 그 감정을 한쪽으로 밀어 넣고 생각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캡."
"럼로우."
그들은 간단하게 인사하고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럼로우는 그의 손목에 착각처럼 머물었다 사라지는 로저스의 접촉에 어깨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고 그의 뒷모습은 멀어져 갔다.
럼로우는 손바닥으로 거슬한 얼굴을 쓸어 내렸다. 그들이 섹스한 지 이십 칠일 째. 아직 특별한 변화는 없었다.
로저스가 어벤저스 타워에 머무는 경우는 드물었다. 아직까지 제 집이라는 생각이 별로 없기도 했으며, 여러가지 일로 바쁘다 보면 쉴드 본부에 있는 시간이 타워에 들어오는 시간보다 더 길어지곤 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토니 스타크 역시 바쁘기는 마찬가지였기에 로저스는 그와 마주치게 된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스타크가 테러 사건을 겪은 이후로는 더했다. 그래서 몇 번이나 취소되고 다시 잡혔던 약속들 끝에 그들은 겨우 짧은 브런치를 함께 가질 수 있었다. 오랜만에 본 스타크는 여전했다. 그는 검정 묻은 손으로 오렌지 주스가 담긴 잔을 들며 여상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캡, 요새 자네 만나는 사람이라도 있는 모양이야."
로저스는 오믈렛을 포크로 뒤적이다 눈썹을 휘었다. 그러자 스타크는 어깨를 으쓱 했다.
"내가 동료 사생활 염탐하는 데 아니면 자비스를 또 어디에 써먹겠어?"
훌륭한 인공 지능을 가차없이 깎아 내린 스타크는 지나치게 뻔뻔해 보여서 로저스는 차마 뭐라 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럼로우를 그의 방으로 데려온 적은 한 손 안에 꼽을 정도 뿐이었다. 그 외엔 항상 럼로우의 집에서만 관계를 가졌다. 로저스는 심기 불편함을 지우려는 노력 없이 인상을 썼다.
"난 자네가 내 사생활 염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들을 많이 맡고 있을 줄 알았는데."
"오 당연하지. 그렇지 않아도 자네 상사가 부탁한 일이 좀 있거든."
"퓨리?"
스타크는 베이컨을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키 사건 때 내가 쉴드 다타베이스 좀 들여다 봤던 걸로 다신 연락 안할 줄 알았는데 도움이 필요하다 싶으니 가차없이 날 부려먹으려 들더군. 뻔뻔하게도 말이지."
"자네가 누굴 뻔뻔하다고 할 처지는 아닌 것 같군."
"나도 알아. 내가 뻔뻔한 거. 그래서, 자네의 그이는 언제 소개시켜 줄거야?"
세상에. 심지어 스타크는 상대가 남자란 것도 알고 있었다. 아마 럼로우가 누군지조차 검색해봤을 지도 모른다 로저스가 그를 노려보자 스타크가 몸을 뒤로 물리면서 손을 내저었다.
"오해하지 마. 나 그 정도로 몰상식한 사람은 아니거든. 리셉셔니스트가 알려준거야. 자네랑 몇 번 같이 들어온 남자가 있다고."
타워를 나오면서 로저스는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세상에 영원히 감춰질 수 있는 비밀은 없다. 그것이 정부의 음모이건 테러 계획이건 혹은 누군가와 섹스하고 있다는 아주 사소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비밀까지. 로저스는 딱히 그와 럼로우의 관계를 비밀스러운 걸로 남아야 하는 무언가로 단정짓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지금으로선 크게 선택권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럼로우는 그들의 관계에 항상 애매한 선의 태도만을 보여주었고, 로저스는 그것을 이 정도로 밖에 해석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까워졌나 싶으면 두 걸음 더 멀어지는 것만 같은 남자의 태도는 그들이 심지어 섹스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과 별로 달라진 점이 없는 듯 했다. 로저스는 여전히 럼로우에 대해서 조금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남자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하는 것이 옳은 감정인가 고민하곤 했다.
어쩌면 너무 깊게 생각하는 건 그 혼자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럼로우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쥐뿔도 고려라는 것을 해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첨부터 남자는 충동적으로 그에게 접근하지 않았던가. 럼로우와 그가 거의 하루 걸러서 섹스를 하고 있다 해도 그 매번이 럼로우에게 있어선 충동적인 행위일수도 있었다. 로저스는 자신이 이미 너무 깊게 생각하고 있단 걸 깨닫곤 고개를 털었다. 그는 때마침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로저스. 어디에요?]
로마노프였다. 로저스는 습관적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대답했다.
"어벤저스 타워 앞. 무슨 일이지?"
[당신이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그가 또 사라졌어요.]
누구? 반사적으로 되묻는 로저스에게 로마노프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럼로우가 사라졌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