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스팁 형사와 조직보스썰 AU 미완
스티브는 머리가 좋음. 그래서 다른 동료 형사들이 채 전부 기억하지 못하는 백 스물 여섯가지의 잠복근무에 대한 원칙도 모조리 외우고 있고 작전은 모두 특공대 뺨치는 초단위로 이루어질 정도에다가 그 어떤 민간인의 눈에 띄지 않도록 몸에 여섯 개 이상의 무기를 숨겨 놓을 수 있었음. 이 정도 되면 보통 형사의 능력을 뛰어 넘는다고 보아도 되겠지만 스티브는 그냥 평범한 형사에 불과했음. 장신의 키에 그 누구에게도 뒤쳐지지 않는 다부진 몸에 튼튼한 체력, 거기다 뛰어난 육체 능력까지 더해져서 형사를 하기에는 더없이 완벽한 체격 조건을 갖추고 있었음. 조금 다른 점이라면 형사 치고는 특출난 금발벽안의 외모에 군인 출신처럼 빈틈 없는 성격을 갖추고 있다는 것임. 그런데 스티브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정말로 이라크에 파견되었던 적이 있던 미군 출신이기에 틀린 말은 아님.
스티브는 자신의 몸에 장착된 무기를 확인 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음. 룸싸롱의 복도는 어두침침한 붉은 빛으로 정육점의 분위기가 났음. 복도에서는 간혹 접대부원이나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향하는 주객 한 두명 뿐이 다였음. 스티브는 자신의 손목 안쪽에 입을 가져가 시계에 대고 말을 했음. 지금 잠입한다. 그리고 스티브는 문을 열고 룸으로 들어갔음.
스티브 로져스와 그의 동료들이 현재 수사를 하고 있는 자들은 연달아 살인 사건을 내고 있는 범인으로 추정되는 한 조직이었음. 조직범죄 수사과에서 일하는 스티브는 몇 번이나 그 이름을 들어본 유명한 갱단이었음. 그 규모가 너무 커서 조직을 위해 일하는 다른 작은 조직들이 여러개 있어서 거의 피라미드 형식을 구축하고 있을 정도였음. 그런데 정작 그 꼭대기에 있는 실질적인 조직은 늘 꼬리가 잡히지 않고 잡힐 뻔 해도 여러 번이나 교묘하게 빠져나가서 항상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고 거의 잡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이 돌 정도였음. 심지어 실질적인 조직의 정체는 제대로 아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음.
그 와중 실마리를 잡을 수 있는 살인 사건이 터졌음. 그래서 이번 잠입 수사는 스티브가 직접 나서기로 했음. 중앙 조직의 밑에서 일하는 놈을 우연찮게 잡아 열심히 족쳐 낸 결과 이 룸싸롱에 대해 알게 되었고 열심히 매니저를 구슬리고 닥달한 후에 오늘 중심 인물들의 모임이 있다는 것을 듣고 잠입 수사를 하게 된거임. 스티브는 이번에는 정말 실패가 없기를 바랬음. 간신히 잡은 실마리이고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르니까 자신이 직접 나서서 확실하게 하고 싶었음. 그는 가볍게 문을 노크하고 들어갔음.
방 안은 이미 어느 정도 달아오른 분위기였음. 남자와 여자 접대부들이 각각 재롱을 피우기도 하고 조직원들 옆에 딱 달라붙어 술을 따르기도 했음. 스티브는 남몰래 침을 삼켰음. 각각 한 명씩 옆구리에 끼우고 있는 조직원들은 들어온 스티브를 훑어 보다가 흥미로운 시선을 보내기도 했고 아예 관심을 갖지 않기도 했음. 그가 형사라는 것을 알고 있는 한 접대부가 빨리 자리 잡고 어울리라는 듯이 눈치를 줬음.
주변을 둘러 보다가 스티브는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음. 옆구리에 접대부 여자를 끼고 있는 남자는 스티브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는데 눈 모양새가 크고 둥근 모양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악감정은 느껴지지 않았음. 스티브와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들고 있던 술을 꿀꺽 넘기더니 옆에 있던 여자에게 귓속말로 뭐라뭐라 했음. 그랬더니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그 반대쪽에 있던 조직원 옆으로 가서 붙음. 남자는 빈 자리를 손바닥으로 팡팡 치며 스티브를 보았음. 어딜 봐도 옆으로 오라는 뜻이라 스티브는 잔말 않고 그 옆으로 가서 앉았음. 스티브는 남자의 옆으로 가서 앉는 도중에도 속으로는 오만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음. 남자의 얼굴은 자신이 외우고 있는 데이터 상에서 보지 못한 얼굴이었음. 옷차림을 보면 그런 데에 있어서 문외한인 스티브가 보아도 고급이었고 깔끔하게 다듬어진 수염을 보아 나이도 어느 정도 있어 보였음. 그는 스티브가 옆에 앉자 다짜고짜 술잔을 내밀었고 스티브는 말없이 술병을 들어 술잔을 채웠음. 스카치를 한 모금 마시며 그때 까지도 스티브를 빤히 보던 남자는 스티브가 불편한 기분이 들 정도가 되어서야 입을 열었음.
"일 시작한지 얼마 안 됐나? 너무 쑥맥인데." 다리를 꼰 채 술을 홀짝이며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어딘가 즐거운 투였는데 표정은 거의 변화가 없다는 것이 신기했음. "예 신입이에요. 오늘이 처음이죠." 스티브는 평상시의 말투를 숨긴 채 슬쩍 웃으며 최대한 부드러운 투로 말했음. 스티브의 말에 남자가 긍정적인 표정을 지으며 눈꺼풀을 깜박였음. "아 굉장히 긴장되겠군 그래. 처음 입어보는 제비 같은 복장은 불편해서 몸이 뒤틀릴테고, 다른 사람의 비위를 어떻게 맞춰야 하나 식은땀도 좀 날테고. 잔뜩 힘 준 머리는 노력이 가상하긴 한데, 자네는 뒤로 전부 넘기는 것 보단 자연스럽게 내리는 쪽이 더 나을 것 같군." 그리고 남자는 스티브에게 꼬치 하나만 집어달라고 말했음. 스티브는 올리브와 치즈가 꽂혀 있는 꼬치를 들고 한 손으로는 받친 채 정중히 들이밀었음. 남자는 낄낄 웃더니 스티브의 손을 잡고 가까이 끌어 당겨 음식만 빼어 먹고는 손을 놓아 주었음. 잡혔던 손이 얼얼 했음. 남자는 입 안의 음식을 우물우물 씹으며 스티브를 보다가 툭 던지듯이 말했음. "되게 익숙한 얼굴인데." 스티브는 억지로 하하 웃었음. 그는 이 남자가 자신을 너무 뚫어지게 보는 것이 불편하기도 했고 그 눈빛은 탐색하는 종류는 아니었지만 속 깊은 곳의 뭔가가 들춰내어 지는 기분이었음. 조직에 몸을 담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위협적으로 보이는 것도 아니었음. 그런데 이상하게 이 모든 공간에서 떨어져 이 남자와 단 둘이 있다는 느낌이 들게 만들었음. "제가 마음에 드셨다는 건가요?" 스티브가 애써 장난이 섞인 말투로 물었음. 그 말에 남자가 또 낄낄 웃으며 술을 마심. "이봐 블론디. 자네가 예쁘다는 건 인정하는데 말이야." 그는 얼음만 남긴 채 비워진 술잔을 탁 내려 놓고 스티브의 뺨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툭툭 두드렸음. "난 진성 헤테로라서 말이지."
그리고 남자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 때까지만 해도 서로 부어라 마셔라 하며 옆의 접대부들을 주물럭거리던 조직원들이 하나같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남. 그 일사정련한 모습에 스티브가 놀랄 정도였음. 한 남자가 급하게 물음. "스타크 씨, 벌써 가시는 겁니까?" "아아 충분히 즐긴 것 같아서. 돈 걱정은 말고 다들 천천히 놀고 오라고." 그리고 남자는 스티브를 향해 가볍게 눈을 찡긋 해보이고는 방에서 나가버렸음.
남자가 나간 후에 스티브는 한동안 더 있다가 술을 더 가져온다는 면목으로 그곳에서 빠져 나왔음. 등 뒤로 방문을 닫자 마자 스티브는 평상시의 단정하고 빈틈없는 얼굴로 돌아왔음. 복도를 빠져 나오는 그의 옆에 동료 형사 바튼이 따라 붙었음. 역시나 종업원처럼 위장하고 있던 바튼이 스티브와 함께 건물을 빠져 나오며 물었음. "뭐 좀 건진거 있습니까?" 스티브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음. "생각보다 건진 게 많았어." 확실히 그 곳에서 알아낼 수 있던 건 많았음. 그들은 단순한 조직원 나부랭이들의 모임이 아니었음. 스타크라고 불리던 남자가 나간 이후로 스티브는 그에게 야릇한 추파를 던지는 한 남자와 조금 어울려 주었음. 조금 빙 돌려 말하니 남자는 몇 가지 정보를 흘렸음. 방에서 나간 남자는 토니 스타크라는 인물이고, 아무리 못해도 조직에서 굉장히 중요한 인물 중 하나란 것은 분명했음. 그의 밑에 두고 있는 여러 개의 조직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었음.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고 바튼이 스티브를 지켜보다가 술 냄새가 많이 난다고 했음. 그 조직원이 스티브를 어떻게 해볼 작정이었는지 여기저기 더듬기도 하고 술도 잔뜩 먹였었음. 스티브가 술이 센 편이어서 다행이었지만 은근히 취기가 오르는지 목덜미가 뜨끈하긴 했음. 스티브는 괜찮다고 하고 내일 서에서 보자고 한 후 바튼과 갈라져 자신의 차로 향했음.
익숙하지 않은 룸싸롱 안이 너무 답답했었기도 하고 은근히 덥기도 해서, 꽉 조이는 셔츠 버튼을 풀어 내리며 차로 다가가는데 자신의 차에 누군가가 기대고 서 있는 것을 발견함. 시간은 거진 새벽이라 까만 밤이 내려 앉았고 사람의 형체는 희미했고 빨간 담배 불만 뚜렷이 보였음. 가까이 다가갈수록 스티브는 남자를 알아 보았음. 토니 스타크가 한 손은 주머니에 꽂은 채 비뚜름하게 선 자세로 스티브가 다가오자 그를 올려다보며 손을 가볍게 흔들어보였음. 스티브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음. 하지만 겉으로는 애써 당황스러움을 내색하지 않으며 어설픈 미소를 지은 채 놀랐다는 얼굴을 만들었음.
"스타크 씨? 아직 가지 않으셨군요." 스티브의 말에 토니는 재밌다는 듯이 웃으면서 담배를 땅에 떨어뜨려 껐음. 그리고서는 서서히 차에서 몸을 떼는데 그 뜸을 들이는 한 순간 순간이 굉장히 길었음. 스티브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음. 룸 안에서도 그랬지만 둘이서 남게 되니 그 느낌은 더욱 심했음. 남자와 단 둘이 한 공간에 떨어진 듯한 느낌. 토니는 체구가 특출나게 크지도 않고 험악하게 생기지도 않았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니 스타크의 존재감은 컸고 그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주목시키는 분위기도 있었음. 토니는 어깨 너머로 스티브의 차를 가리켰음. "저거 자네 차였나? 난 또 요즘 시대에 누가 저런 90년도 토요타를 타고 다니나 했지." "월급 날까지는 멀었거든요. 월급을 받아도 새 차를 장만할 생각은 없지만." "월급을 받으려면 그 만큼 일을 해야 할텐데 왜 벌써 나오실까 블론디 씨." "첫 날이라 일찍 돌려 보내주더라고요." 스티브는 빙긋 웃었음. 그리고 토니도 마주 미소지었지만 금새 미소를 지웠음. 아마 습관적인 표정 변화인 것 같았음. 스티브는 최대한 긴장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하지만 동시에 언제든지 몸에 숨겨 놓은 무기를 뽑을 수 있도록 계산을 하고 토니를 지나쳐 차로 다가갔음. "달리 하실 말이라도? 스타크 씨는 진성 헤테로인 줄 알았는데요." "음. 맞아." 스티브는 차 문을 열고서 뒤를 돌았음. 토니는 그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양 손을 주머니에 꽂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음. "그래서 블론디 글래머나 한 명 데리고 집에 바로 갈 생각이었지.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 얼굴이 너무 낯익었단 말이야? 난 한 번 본것은 거의 잊어먹지 않거든." 스티브는 말 해 보라는 식으로 팔짱을 꼈음. "그래서, 생각 났어요?" "아, 물론. 당연하지. 로져스 씨." 토니는 스티브가 움찔 하건 말건 자신의 품 안에 손을 넣으며 다가왔음. 순간 무기를 꺼내는 줄 알고 몸을 긴장시킨 스티브의 앞에 내밀어진 것은 명함이었음. 어설프게 명함을 받아 드는 스티브의 팔을 장난스레 툭 친 토니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음. 미소를 지은 것 뿐이지만 눈에 장난기가 가득했음. "덩치에 안어울리게 예민해서 귀엽네. 갱단에 있다고 해서 아무데서나 총을 꺼내진 않아." "......" "아무튼 내가 누군지 알 것 같으면 연락해, 블론디." 그리고 토니는 휘적휘적 걸음을 옮겨서 정말로 사라졌음. 스티브는 잠시 그의 뒤를 눈으로 쫓다가 차에 타고 명함을 보았음. 아무런 장식이나 무늬 없는 하얀 직사각형 모양의 명함에는 한 쪽 귀퉁이에 TONY STARK라는 이름이 간단하게 적혀 있을 뿐이었음. 명함의 뒷면에는 펜으로 휘갈겨 쓴 듯한 핸드폰 번호가 남겨져 있었음.
집으로 운전을 해서 돌아오는 길에야 스티브는 토니가 자신을 로져스 라고 불렀던 것이 떠오르고 약간 소름이 돋았음. 그가 자신이 형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어디선가 본 적이 있던 사람이었나? 모든 의문점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음. 스티브는 집에 도착해서 잠이 들기 전까지 토니 스타크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해 내려고 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음. 만약 그가 개인적으로 만난 일이 없었던 사람이라면, 스티브가 형사라는 정체를 알고 있었기에 그런 말을 했다는 가정밖에 남지 않음. 조직의 높은 사람이라고 했으니 그가 스티브에 대해서 뭔가를 알고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음. 스티브는 조직 꽤나 여럿 잡아넣은 전적도 있었기 때문임.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자신을 그저 명함 한 장만 쥐여준 채 고분고분 보내준 것도 이상함. 그 모습은 확실히 스티브가 연락을 먼저 해올 것이라고 장담하는 듯한 행동이었음. 스티브는 당장에라도 전화를 걸어서 어떻게 내 이름을 아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궁금증이 치달았음.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며 씩씩거리다가 잠들어 버림.
다음 날 부터 수사는 재빠르게 돌아갔음. 잠입 수사에서 본 얼굴들과 들은 이름들을 토대로 해서 수사망을 좁혀 나갔음. 대부분은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이라 수사가 조금 느려지고 있긴 했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음. 그로 인해 거의 철야로 시달리던 스티브는 밤이 한참 늦어서야 집에 돌아와 뻗고는 하곤 했음. 하루는 집에 가려는 데 바튼이 붙잡았음. "술이나 한 잔 할래요?" 피곤하기는 했지만 시원한 생맥주도 땡겼기에 스티브는 흔쾌히 수락 했음. 둘은 펍에 가서 맥주를 한 잔씩 시켰음. "스티브가 말했던 토니 스타크라는 사람은 전혀 꼬투리가 잡히지 않는군요." 바튼의 말에 스티브는 고개를 끄덕였음. 그리고 안주머니에 넣어둔 명함이 신경쓰였음. 그는 토니 스타크라는 사람에 대해 팀원들에게 알리고 함께 조사했지만 그가 명함을 받은 것은 말하지 않았음. 그건 왠지 스티브 그 자신에게만 주어진 숙제라는 느낌이 강했음. 명함 하나 가지고 숙제 어쩌고 하는 것도 웃기지만 자신과 어떤 연관이 있었던 것처럼 말하던 토니 스타크가 머리에 맴돌아서 쉽게 그것을 다른 동료들에게 보일 수가 없었음. 스티브는 시선을 피하며 맥주를 마셨음. "정체가 쉽게 밝혀지지 않는 것을 봐서는 정말 중요한 인물임이 틀림 없겠지." "어떤 사람 같던가요? 얘기 해보셨잖아요." 스티브는 맥주잔의 표면을 쓸면서 잠시 생각을 했음. 그러다가 픽 웃으면서 조용히 말했음. "진성 헤테로 중년 아저씨 같았지." 당시 그들의 대화를 도청기로 듣고 있던 바튼이 그 말에 하하 웃었음.
집으로 돌아온 스티브는 피곤했지만 왠지 모르게 정신이 깨어 있었음. 스티브는 자신의 가죽 점퍼를 대충 소파 위에 휙 던졌음. 그 소파의 옆 탁자 위에는 어릴 적 스티브와 스티브의 아버지, 그리고 잘 정돈 된 수염을 기른 한 남자가 같이 찍은 사진이 들은 액자가 있음. 욕실로 들어가려던 스티브는 멈칫 하더니 그 액자를 집어 들었음. 여섯 살 즈음의 그 자신이었음. 그리고 스티브처럼 금발에 푸른 눈을 한 아버지와, 그의 친구인 하워드였음. 그들은 모두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음. 하워드에 대한 기억은 굉장히 희미했지만 그가 유쾌하고 호탕한 성격이라는 것은 기억했음. 그의 웃는 얼굴을 보니 누군가가 어렴풋이 생각났음. 그러고 보니 하워드의 성이 뭐더라? 어릴 적이라 그런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았음. 그 당시의 기억은 스냅숏처럼 단편적이어서 단지 하워드가 자신의 아버지와 친했고, 스티브 그에게도 아들 대하듯이 잘 해줬다는 것은 기억남. 스티브는 다시 액자를 내려 놓고 욕실로 들어갔음.
몇 일 후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을 무렵, 스티브는 좁은 골목길을 헤짚으며 미친 듯이 뛰고 있었음. 실마리를 잡은 한 조직을 급습하기 위해 잠복 근무를 하고 있던 차였는데, 계획이 어긋나서 현장에서 잠복하고 있던 동료 형사가 발각이 되었음. 대기조였던 스티브는 바튼과 다른 골목으로 휘어져 추격 당하고 있는 동료에게 계속 연락을 시도했음. 인-이어 너머의 나타샤는 뛰고 있는 듯이 숨을 헐떡이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음. 나타샤의 계획은 원래 민간인으로 근처에서 잠복을 하고 있다가 조직 단원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하면 되는 것이었음. 원래 이런 일에서 전혀 들킬 일이 없을 정도로 치밀한 나타샤인데 이번에는 어떻게 들켰나 싶음.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던 장소는 파탄이 났고 나타샤는 쫓기고 있었으며 스티브와 바튼은 그녀를 돕기 위해 뛰고 있었음. 그들 외에도 상황을 전달 받은 다른 백업팀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을 것이 분명했음. 모퉁이를 돌은 스티브는 반대편 건물에서 재빠르게 몸을 피해 달아나는 나타샤와 그녀의 뒤를 힘겹게 뒤쫓는 사내들을 발견했음. 그리고 그 쪽으로 발을 뻗을 때, 자신의 앞으로 미친듯이 달려와 끼이익 하는 브레이크 소리를 내며 정지하는 스포츠카에 뒤로 나자빠질 뻔 했음.
"아니 이게 누구야. 블론디 씨 아냐?" 창문을 내리고 창턱에 팔을 걸치며 선글라스를 슬쩍 내리면서 장난스럽게 말하는 남자는 토니 스타크였음. 스티브는 갑작스러운 토니의 등장에 당황했음. 지금 여기서 그를 무시하고 지나쳐서 나타샤를 뒤쫓아야 하는지 아니면 의심을 받지 않도록 행동해야 하는지 1초도 안되는 사이에 수많은 가정을 떠올렸음. 하지만 금새 생각을 정했음. "스타크 씨,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되어 반갑지만 지금 급한 일이..." "아아 자네 친구가 쫓기고 있던가?" 그 말에 스티브의 얼굴이 굳었음. 토니와 찰나의 사이에 눈이 마주쳤고, 스티브는 뒷춤에 꽂혀 있는 총으로 손을 가져갔음. 그런데 토니가 들어올린 것은 핸드폰이었음. 그는 번호를 뒤지더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음. "아 난데, 그 여자 그만 쫓고 거래나 성사시키라고. 음. 형사 나부랭이 때문에 망치기에는 너무 중요한 거래니까 말야." 여유롭게 통화를 한 토니는 전화를 끊고 스티브를 보았음. 한 손을 뒷춤으로 가져간 채 잔뜩 긴장하고 있는 스티브의 혼란 가득한 얼굴을 보며 토니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음. 핸들까지 두드리며 웃던 토니는 고개짓으로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음. "우선 타지. 할 말도 있고, 올려다 보려니 목도 아프고."
정신을 차려보니 스티브는 토니의 황홀할 정도로 멋진 스포츠카의 조수석에 앉아 있었음. 토니는 옆에서 굵은 시가를 입에 물었음. 성냥불에 그을려 뿜어져 나오는 시가의 향은 독하기 그지 없어서 스티브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토니는 아랑곳하지 않았음. 스티브는 한 시라도 총으로 손을 뻗고 싶은 불안함에 머리가 핑핑 돌 지경이었음. 차 안을 순식간에 메꾼 매캐한 담배 연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머리가 어지럽고 시야가 흔들렸음.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는 스티브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며 토니가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천천히 차를 몰았음. 거리는 한산했음. 참다 못한 스티브가 입을 열었음. "당신, 내가 형사란 것을 알고 있는 건가?" "뭐 그렇지. 애초에 접대부를 할 사람 치고는 손에 굳은 살도 많고 실전에서 얻은 근육도 많았으니까 의심은 했어. 아무리 처음이라도 그렇지 세상에 어느 접대부가 술을 그렇게 따라?" 토니는 킬킬 웃으며 핸들을 꺾었음. "하지만 이상하게 익숙한 얼굴이었단 말이지... 룸싸롱을 나와서야 기억해냈지만 말이야. 아, 네가 형사란 걸 알게 된 것은 그 이후니까 너무 자존심상해 하지 마." 그리고서 토니는 스티브를 힐끔 돌아보며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음. 그제서야 스티브는 생각났음. 자신이 액자 속의 하워드를 보며 떠올렸던 사람이 바로 토니 스타크라는 것이. 왜 바로 깨닫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그들은 너무나도 닮은 꼴이었음.
새삼 깨달은 사실에 스티브는 적잖이 충격을 받은 채 토니를 쳐다 보았음. 그 시선에 토니는 유연한 표정으로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하는 소리를 짓걸이며 손으로 얼굴을 매만졌음. 스티브는 나타샤도, 자신의 총에 대해서도 잊은 채 넋나간 얼굴로 물었음. "혹시 스타크, 당신 하워드와...?" "오 드디어 알아차린 건가? 축하해 로져스 군. 우리 아버지가 좀 기억하기 쉬운 인물이긴 하지." 토니 스타크는 스티브가 자신의 아버지의 친구의 아들이라는 것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 없음. 사실 하워드와 피가 이어져 있다는 것은 그 생김새로 짐작했으나 아들이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으나 적잖이 놀라긴 했음. 토니는 마치 퀴즈를 맞춘 어린 아이를 칭찬하는 듯한 말투로 말하고 있었음. 어딘가 즐거워보이는 토니의 목소리에 스티브는 조금 얹짢아진 기분이 되었음. "날 본 적이 있나? 어떻게 알아본 거지?" 스티브의 질문에 토니가 물고 있던 시가를 손으로 옮기며 그를 돌아 보았음. 선이 진하고 큰 눈동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는 시선으로 스티브를 향했음. "내가 기억나지 않아?" 토니의 말에 스티브는 입을 다물었음.
때마침 인-이어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음. [스티브 어딥니까? 나타샤와 합류했습니다.] 바튼의 목소리였음. 스티브는 무심코 대답하려다가 토니를 힐끗 보았는데, 토니는 어느 새 정면을 보고 있었음. 스티브는 인-이어에 손을 가져다 대고 곧 가겠다고 말했음. 스티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차가 갓길에 세워졌음. 아까 전 스티브가 바튼과 헤어졌던 곳에서 가까운 장소였음. 스티브는 바로 차에서 내리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음. 토니에게 묻고 싶은 것도 많았고 듣고 싶은 것도 많았음. 그런 스티브를 흘끔 본 토니는 자조섞인 웃음을 뱉으며 짧게 타들어간 시가를 창문 너머로 던졌음. "정말이지 옛날이랑 똑같군."
궁금한 것이 많을 테니 연락을 하라, 면서 토니는 떠나갔음. 동료들에게는 그가 토니 스타크와 만났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음. 스티브는 굉장히 혼란스러웠음. 자신의 아버지와 절친한 친구였던 사람의 아들이 다름 아닌 그가 소탕하려는 조직의 중요 인물이었음. 정말 빌어먹을 우연이라고 생각했음. 그는 하워드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지, 그와의 단편적인 추억에 대해 떠올렸음. 그의 아들을 감옥에 잡아 넣는다고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음. 토니는 하워드와 닮은 듯 하면서도 달랐음. 비슷한 외모에 비슷한 웃음, 그리고 타고난 듯한 자신감 넘치는 유연한 성격. 하지만 무언가는 분명히 달랐기 때문에 그를 보면서 바로 하워드를 떠올리지 못했던 것이 분명함. 스티브는 토니의 새하얀 명함을 집어 들었음. 번호를 적은 토니의 손글씨로부터 그의 성격이 묻어나는 것 같았음. 한참을 고민하던 스티브는 결국 수화기를 들었음.
다음 날 서 내의 휴게실의 커피 자판기에서 커피를 고르던 스티브는 자신의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음. "전 밀크커피로." 스티브는 픽 웃으면서도 동전을 더 집어 넣었음. 바튼이 자신의 상태를 살피려고 눈을 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음. 하지만 너무 피곤해서 뭐라고 할 마음도 들지 않음. "나타샤는 얼굴을 들켰기 때문에 이번 임무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아아, 짐작은 했어." 건성으로 대답하며 스티브는 토니를 떠올렸음. 바튼은 커피를 받으면서 여느 때처럼 진지하게 말을 이었음. "마약 카르텔 습격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중앙 세력에 대해서 더 많은 정보를 알게 될지도 몰라요. 스티브가 말한 토니 스타크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웬만한 작은 세력의 조직원들은 모르는 모양이니." 스티브는 고개를 돌렸음. "우리 타겟이 토니 스타크의 위주로 맞추어진 건가?" "우선은 그 자가 가장 유력한 중요 인물 중 하나다 보니 그렇다고 봐야겠죠." 바튼은 그 말을 하고서 스티브를 돌아 보았음. 생각에 잠겨 있던 스티브는 바튼의 시선을 느끼고 억지로 조금 웃음을 지어 보인 후 빈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음. 바튼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음. "그 날 룸싸롱에서 토니 스타크를 만났을 때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스티브는 내색하지 않으며 고개를 저었음. "아니 아무것도."
모 호텔의 앞에 선 스티브는 마음이 착잡했음. 자신이 마치 하면 안되는 일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음. 그건 양면의 스티브를 모두 괴롭히는 이중적인 칼날과도 같았음. 자신의 직장에서는 토니 스타크와의 관계를 숨기고 있었음. 그것만으로도 굉장히 죄책감이 들 만 하지만 토니를 떠올리면 나름대로 또 불편한 감정이 들었음. 그는 토니가 그에게 기억나지 않아? 라고 물어보며 지었던 표정을 떠올렸음. 그들은 만난 적이 있던 게 확실함. 토니는 분명히 그를 기억하고 있고, 자신의 기억속에서 토니의 자취는 없었음. 하워드와 그의 부자가 그렇게 친했었지만 토니와 함께 찍은 사진은 커녕 그의 증거 하나 발견할 수 없었음. 어젯밤 집 안의 모든 앨범을 뒤지던 스티브는 이상하게도 토니를 향해 미안한 기분이 들었음. 미안하다라. 그를 기억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느낌이 되는 게 웃겼지만, 토니의 표정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음. 스티브가 토니의 아버지와 친분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토니 때문에 이런 기분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었음. 그래서 더 짜증이 났음. 그는 한숨을 쉬고 호텔 안으로 들어갔음.
고급 호텔은 가죽 점퍼에 청바지 차림인 스티브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곳 같았음. 그는 레스토랑으로 향해 토니 스타크를 찾았음. 웨이터를 따라가자 이미 식사를 하고 있는 토니가 보였음. 스티브가 다가가자 토니는 목께에 걸치고 있던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음. "여기야 여기." 그의 앞에 마주 앉으면서도 스티브는 토니의 모든 행동에서 어린아이 같은 점들을 발견하고 조금 긴장이 느슨해지는 것을 느꼈음. 토니는 몇번 보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상대방을 자신에게 주목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것 같았음. 어딜 가던 관심을 끌고 자신의 추종자를 만들 만한 사람이었음. 자신이 잡아야 하는 상대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이렇게 마주 보고 앉아 있으면서도 적개심 하나 갖지 못하는 스티브 그 자신만 봐도 알 법 했음. 그런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지만, 불가항력이었음. 하워드를 닮은 얼굴이 그 이유이 전부는 아니란 걸 알기에 더욱 그랬음. 토니는 반 정도 먹은 음식을 옆으로 밀어 놓고 와인을 마시며 스티브를 보았음. 식사 하겠냐고 묻는 토니에게 스티브는 고개를 저어 보였음. "물어볼 것이 있어서 왔네." 스티브의 말에 토니가 눈동자를 한 번 굴렸음. "너 정말 재미없어. 알아? 뭐, 물어보라고 한 건 나니까 할 말은 없군. 뭐가 궁금하지?" "하워드는 어떻게 된 거지? 기억이 나질 않아." 스티브의 질문에 토니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음. 순간 물어보면 안되는 것을 물어봤나 불안했음. 토니는 냅킨을 테이블 위에 던지듯 올려 놓았는데 조금 언짢아 보였음. "아버지 말이지? 아아, 아버지는 죽은 지 꽤 되었지. 나에게 이 빌어먹을 사업을 남겨놓은 채 말이야. 그 노친네가 나중에 가선 몸을 막 굴렸거든. 그나마 침대 위에서 죽었으니 그 정도면 조직의 보스 치고는 평화롭게 죽었다고 해야하나." 토니는 굉장히 시니컬하게 말을 이었고 그래서 스티브는 토니와 그의 아버지 사이의 관계를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음. 하워드가 조직의 보스였다는 말은 처음 듣는 것이었고 상상도 못했던 거라 굉장한 충격으로 다가왔지만 그 전에 토니의 말투가 거슬렸음. 따지고 보면 토니는 하워드의 아들이었고 만약 이런 식으로 만난 사이만 아니었다면 그들은 좀 더 친해질 수도 있었을지 모름. 하지만 토니의 말투를 들은 스티브는 그의 마음이 하워드를 향해 편파적으로 기우는 것을 막을 수 없었음. 어찌되었든 보다 많은 추억을 공유한 쪽은 토니가 아닌 하워드였음. "말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토니는 그런 스티브를 빤히 보면서 크렘브륄레에 숟가락을 푹 꽂았음. "데모크레시라고 들어는 봤는지 모르겠군."
자신에게 발언의 자유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토니 스타크에게 스티브는 더 이상 별다른 말을 할 기분이 들지 않았음. 어쨋든 그가 들은 것을 정리하자면 토니는 하워드의 아들이었고 하워드는 세상을 뜬지 꽤나 된 것 같았음. 물론 하워드는 스티브의 아버지보다 한참 나이가 많았으니 그럴 법도 했음. 그리고 당연한 이치로 하워드의 아들인 토니가 스티브 그보다도 훨씬 나이가 많은 것 역시 이해가 갔음. 약간의 침묵 후 토니는 조금 누그러진 기세로 크렘 브륄레를 떠먹었음. "아버지에게서 네 말을 많이 들었지. 아니 들은 것 뿐인가." 그렇게 말하고 토니는 입을 다물었음. 스티브 역시 그것에 대해 꼬치꼬치 물을 생각은 없었음. 그들이 예전에 만난 적이 있는지 없는지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음. 스티브는 토니 쪽을 향해 테이블로 몸을 기울였음. "알다시피 난 형사고 지금 우리 전부 그쪽을 못 잡아서 안달이 나 있는 상태야. 그러니 앞으로..." "앞으로 뭐, 몸을 사리라고? 도망치기라도 할까? 아니면 가업이고 뭐고 가서 자수라도 할까? 이봐 스티브.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생각은 관 둬." 그 말을 들으니 확실히 혼란스럽기는 했음. 아버지의 친구의 아들. 자신이 감옥에 처넣어야 하는 사람. 스티브는 한숨을 내쉬며 무겁게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음. "난 당신에게 총을 겨눠야 하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해. 하워드를 봐서라도." 토니는 결국 숟가락을 내려 놓고 냅킨으로 입을 닦았음.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감정을 억누르는 듯이 말했음. "네 같잖은 호의는 필요 없으니 사랑고백은 무덤에 가서 직접 하시지." 의자를 덜컹거리며 튀어오르려 한 스티브가 채 다른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토니는 레스토랑에서 빠져나갔음. 스티브는 다시 의자에 털썩 앉아 이마를 짚었음. 왜 저렇게 예민하게 굴지.
토니는 차가운 밤바람을 얼굴에 맞자마자 후회했음. 속이 타는 느낌에 습관적으로 품을 뒤적여 담배를 물었음. 그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항상 감정적인 면에 서툴었음. 특히 그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랬음. 토니는 담배각을 도로 품 안에다 집어넣다가 손 끝에 걸리적 거리는 것을, 역시나 습관처럼 꺼냈음. 구겨지거나 헤어지지 않도록 코팅된 작고 얇은 사진이었음.토니는 담배연기를 내뿜었음. 사진을 들여다 볼 때가, 항상 다른 사람들보다 하루하고도 절반 정도의 미래를 살고 있는 토니 스타크가 유일하게 과거를 보는 시간이었음.
"그거, 난가?"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토니는 고개를 돌렸음. 어느 새 따라 나온 스티브가 가죽 점퍼의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로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음. 그 표정에 당황할 겨를도 없이 토니는 웃음이 비져 나왔음.
토니가 딱히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서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음. 물론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스티브가 자신의 말투나 행동을 보며 어떻게 생각하는 지는 상관할 바가 아니었음. 아니, 일부러 보여주도록 행동하고 있었으니 굉장히 상관이 있는 것일까. 토니는 고민했음. 그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스티브에게 화가 났고 자기 대신 그의 기억을 차지하고 있는 하워드에게 일말의 열등감을 느꼈으며 그런 기분이 드는 자신에게도 화가 났음. 하지만 그런 자신의 기분을 스티브의 앞에서 모조리 드러낼 정도로 토니는 솔직한 사람이 아님. 특히 스티브의 앞에서라면 더욱. 그래서 토니는 눈매를 우그러뜨리며 미소 지었음. 역시 예전이랑 똑같네.
내가 널 얼마나 보고싶었는지 넌 알 길이 없다.
어쩌면 너는 사진 속에, 내 품 속에 그대로 있었으면 더 나았을 뻔 했다. 이건 희망고문이다.
널 사랑하는 건 아니다. 사랑이 아니라는 게 더 화가 난다.
스티브는 혼란스러웠음. 그의 시선에 비춰진 토니는 정말로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음. 그는 세상에서 제일 유쾌한 사람처럼 농을 던지기도 했고 그 모든 권태를 누리는 사람처럼 고급 시가와 술을 즐기기도 했으며, 간혹 눈으로 보여지지 않는 온갖 우울함을 등에 진 것처럼 지친 표정을 짓기도 했음. 그래, 토니 스타크의 표정은 지쳐 보였음.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단순히 빛의 명암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 아니었음. 그런 그가 자신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손에 든 채 또 한번 스티브를 향해 지친 듯이 괴로운 표정으로 웃었고, 스티브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토니를 향해 품고 있던 온갖 불신과 순간적으로 솟아났던 일말의 증오마저 잊혀지는 느낌을 받았음. 토니는 스티브를 보던 시선을 돌리며 사진을 안주머니에 넣었음. "설명을 요구하는 얼굴인데 난 지금 별로 주절거리고 싶은 기분이 아니야." 스티브는 몸을 돌리려는 토니의 팔을 잡았음. "난 당신에 대해 알고싶어." 토니는 눈을 깜박였음.
토니는 과거에 대해 회상했음. 그는 남들이 볼 때 부러울 것 하나 없이 자란 고귀한 집의 고귀한 외동 아들이었음. 그 누구라도 토니 스타크를 보면 부러워했고 그의 처지가 되고 싶어 했음. 돈 많은 집안의 부러울 것 없이 자라는 외동 아들은 주변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 만 했음. 그랬기에 토니는 어렸을 적 부터 누군가를 부러워 해 본적이 없고 뭔가에 욕심을 내 본 적이 없었음. 욕심을 내기 전부터 이미 다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음. 그의 부모님이 그에게 많은 관심을 쏟지 않은 것은 또 다른 문제였음. 그들이 그러건 말건 토니에게는 별 상관이 되지 않았고 부모님에게 많은 사랑을 받지 않고 자랐다고 해서 그가 격한 증오라던가 혹은 부족함을 느끼고 자란 것은 아니었음. 물론 다른 주변의 또래 아이들을 볼 때 부모의 사랑에 있어서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곤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으로 인해 슬픔에 빠지거나 하지는 않았음. 그만큼 토니는 어렸을 적부터 강한 아이였음. 어느 날 토니는 자신의 아버지가 어떤 아이에게 유별난 관심을 보이는 것을 보았음. 자신과 전혀 다른 백금발처럼 순결한 금발과 새파란 벽안글 갖고 있는 인형과도 같은 어린 아이였음. 하워드는 자신보다도 한참 어린 아이에게 자신에게 보여준 적 없는 웃음을 보여주며 선물을 쥐여 주었음.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나쁘거나 하지는 않았음. 애초에 그의 아버지에게 많은 것을 기대했던 적이 없으니 실망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었음.
태어날 때부터 손에 장난감을 쥐고 태어난 아이와, 아무것도 갖지 못한 채 태어난 아이는 확연히 다름. 토니는 모든 것을 지니고 태어난 듯이 보였지만 가족 관계에 있어서는 아니었음. 그는 사랑이 결핍되어 있었고 그랬기에 사랑이라는 개념 자체에 있어서 감정적으로 무뎠음. 그는 스티브를 만났음. 자신의 아버지가 그렇게도 신경쓰는 아이였음. 어렸을 적의 스티브 로져스는 마치 하나의 마론 인형 같았음. 토니가 그를 처음 만났을 떄 스티브는 아무런 의심 없이 밝게 웃었고 그것을 본 토니는 자신이 그를 향해 꾸미고 있던 일말의 복수심마저 증발해 버리는 것을 느꼈음.
하지만 이런 것을 스티브의 얼굴에 대고 말할 수는 없었음. 토니는 그런 자세한 디테일까지 본인의 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았음. 애초에 그런 성미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랬고, 더욱이 그 상대가 스티브이기 때문에 그랬음. 어쩌면 스티브가 그의 첫 사랑이라고 말할 수도 있음. 만약 그의 감정을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토니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음. 그 오랜 시간동안 스티브를 잊지 못한 채 살아왔지만 그를 향한 집착이라고도 불릴 수 있는 감정은 사랑이라 부를 수조차 없다고 생각했음. 그 만큼 절박했기에 그는 스티브의 앞에 설 수록 솔직해지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했고, 그로 인해 더욱 안으로 움츠러드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했음.
토니의 집은 거대했음. 생전 그런 집에는 발 들여 놓을 일조차 없던 스티브는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그런 스티브를 본 토니가 보이지 않게 웃었음. 토니는 더 듣고 싶으면 자신의 집으로 오라고 했고 스티브는 조금 생각을 하는 듯 보였으나 곧 수긍했음. 토니는 순간 스티브가 자신의 뒤를 캐기 위해 그런 선택을 한건가 싶었지만 그를 약간 살피고는 의심을 풀었음. 스티브는 단순히 토니와 그 사이의 기억할 수 없는 관계가 궁금한 것 뿐이었음. 물론 스티브는 그 나름대로 토니가 그를 집으로 초대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음. 설마 뭔가 함정이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생각하기에 토니는 뭔가 지쳐 보였음.
흰 셔츠에 양복 바지를 입은 채 토니는 스티브를 등지고 서서 전면 유리 너머의 야경을 보았음. 아무나 부른다고 해서 따라가면 안 돼, 스티브. 토니의 조용한 말에 스티브가 움찔 했음. 하지만 토니의 말 속에 공격적인 성향은 전혀 없었음. 토니는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고 사진을 꺼내 보았음. 그 모습에 스티브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음. 스티브는 토니가 자신을 볼 때 짓지 않는 표정을 자신의 옛날 어릴 때의 사진을 보며 짓는다는 사실에 기분이 이상했음. 마치 또 다른 자신이 존재한다는 느낌. 그것은 그다지 좋기만 한 기분은 아니었음.
"넌 기억 못하겠지 스티브." 스티브가 어떤 언짢은 기분을 느끼고 있던 간에 토니는 사진을 보며 추억에 조금씩 빠져 들어갔음. 스티브는 토니가 자신을 스티브, 라고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무언가의 억양이 바뀌어 있단 것을 느꼈음. 좀 더 부드럽지만, 목부리에서 말이 걸린 것처럼 거슬하고, 말하기 힘든 것을 억지로 끄집어 내는 듯 날카롭게 튀어 나오지만, 동시에 애달픈. 스티브는 자신이 어디에선가 저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고 무의식중에 생각했음. 등을 지고 있기에 보이지 않는 토니의 눈이 낮은 조명 밑에서 노랗게 일렁였음. "기억하지 못할 거야."
하워드와 스티브의 아버지는 오랜 친구였음. 나이차는 꽤 났지만 그런 것에 얽메이지 않았음. 그들은 함께 참전도 했었고 비록 다른 업계에 종사하고 있었지만 서로에게 많은 조언과 도움을 주기도 했음. 하워드는 스티브가 태어나는 순간에도 있었음. 스티브의 아버지가 병원에서 자식의 탄생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때에 그의 옆에서 하워드가 등을 쓸어 주었음. 어머니에 품에 안긴 갓 태어난 스티브를 두 남자는 동시에 보았음. 하워드는 친우를 꼭 빼닮은 스티브를 자신의 자식처럼 아꼈음. 유아 용품과 아기옷을 사다 주기도 하고, 스티브의 아버지가 바쁜 날이면 그 대신 스티브의 어머니와 스티브를 데리고 소풍을 가기도 했음. 거의 가족과 다름 없는 하워드를 스티브가 그를 친아버지처럼 따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음. 하지만 그런 자상한 하워드 스타크가 자신의 자식에 있어서는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했음.
스티브가 태어났을 당시 토니는 MIT를 졸업한 후였음. 하워드는 토니가 그의 가업을 이어가길 원했고 그랬기에 어렸을 적부터 토니는 다른 아이들처럼 따스한 유아 시절을 보내지는 못했음. 그가 기억하는 한 그의 어린 시절은 검은 양복을 입은 마초냄새 풍기는 남자들에게 잔뜩 둘러 쌓여 가는 곳마다 보호받아야 했고 생일 선물이라고는 모형 총기구 따위를 받는 것이 전부였음. 토니는 자신에게 주어진 앞날이 끔찍할 정도로 싫었고 그가 자신의 아버지처럼 배신과 칼부림이 난무하는 서로 죽이고 죽는 세계에서 살고 싶지 않았음. 십대 때부터 늘상 밖으로 내돌며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는 토니를 보며 하워드가 달가워할 리가 없음. 하워드의 눈에 토니는 반항과 방황을 일삼는 철부지 아들일 뿐이었음. 스티브가 태어나던 날 토니는 술과 약에 쩔어 여자와 섹스를 하고 있었다가 자신을 공격하려는 다른 마피아 단의 일원을 죽였음. 그게 토니의 첫 살인이었음. 나중에 그 소식을 들은 하워드가 토니를 보며 무감동한 표정을 지은 채, 이제 조금 컸나 보구나 하고 말했음. 토니는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집을 나가버렸음.
토니가 스티브의 존재에 대해서는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음. 토니는 하워드가 자신에게 강압적으로 미래를 요구하는 것에 진절머리가 났으나 하워드는 그의 아버지였음. 방법은 틀렸으나 토니는 하워드가 자신을 아낀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 토니는 간혹 습관처럼, 혹은 자신의 둥지를 떠나지 못하는 새처럼 본가나 하워드의 주변을 멤돌곤 했음. 그랬기에 스티브의 존재를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음. 금발에 벽안을 가진 아이는 자신과는 다른 세계에 사는 것 같았음. 질투를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일거임. 하지만 사랑받고 자란 인형과도 같은 아이를 상대로 토니의 질투는 너무나도 부끄러운 감정이었음. 그래서 그는 차라리 스티브가 평생 저 빛나는 아름다움을 잃지 않기를 바랬음.
하워드는 스티브의 아버지가 죽은 후 오래 지나지 않아 죽었음. 집 안에서 난교파티를 하던 토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약에 취한 채 본가에 도착했을 때 하워드는 이미 세상을 떠났음. 그 순간 토니는 자신의 인생에 벗을 수 없는 멍에가 씌워진 것을 느꼈음. 어쩌면 하워드는 토니가 다시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름. 그게 어떤 방식이 되었던 간에. 토니는 장례식장에서 스티브를 만났음. 그의 어머니와 함께 온 스티브는 이제 학교에 입학할 나이 쯤이었음. 스티브는 장례식 내내 입술을 깨문 채로 눈물을 뚝뚝 흘렸음. 이미 아버지의 죽음을 겪은 아이가 울음을 참으려는 장면은 생소했음. 스티브는 그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토니의 몫까지 울었음. 장례식 후에 토니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돌아가려는 스티브의 앞에서 무릎을 굽히고 눈높이를 맞췄음. 그리고 아직도 눈물을 흘리는 스티브에게 말했음. 지금 그 감정과 눈물을 기억해, 그리고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같은 것을 느끼게 하지 말아. 그리고 토니는 스티브의 이마에 한 번 입을 맞추고 자리를 떠났음. 토니는 속으로 울었음. 그는 하워드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평생 그럴 수 없을 거임. 그는 수많은 생명을 빼앗았으면서 제일 순수한 영혼에게 죽음을 애도받을 수 있었던 아버지를 질투했고, 그에게 업보를 남기고 떠났기에 증오하는 동시에,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