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스팁 무의식 썰 미완
어지러웠고 시야가 흐렸음. 마치 안개가 잔뜩 꼈는데 아무리 눈을 비벼도 나아지지 않았음. 스티브는 자신이 어느 공간에 있는지 제대로 알 수가 없었음 주변의 공기가 녹아 내리는 것 같았고 그가 등지고 선 벽만이 딱딱했음. 적어도 그를 지탱해주는 것이 있다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음. 서 있기는 했는데 땅을 디딘 발이 푹푹 빠지는 느낌이 들었음 그래서 무의식중으로 손을 뒤로 뻗어 벽을 짚다가 자신의 앞에 드리워지는 인영을 보았음. 자신보다 키가 약간 작은 남자였는데 흐린 시선으로는 그가 누구인지 얼굴을 알아 볼 수가 없었음. 보든 것이 불확실함. 스티브는 그 불확실함에 불안함을 느꼈고 그의 앞에서 다가와 밀착하는 낯선 존재를 향해 약간의 경계심을 느꼈음. 물론 그건 머리로만 느낀 것임 그의 몸은 그의 의도와 전혀 다르게 행동하고 있었음. 그는 이런 상황에 익숙했음 그의 몸이 알고 있었음. 스티브는 당연하다는 듯이 남자가 자신에게 상체를 기울일 때 고개를 모로 비틀었음. 어디서 시원하면서도 달큰한 향이 풍겼음 아마 그에게 다가오는 남자에게서 풍기는 것이라고 생각했음 아니, 생각 뿐만이 아니고 확신했음. 그 내음 역시 스티브의 몸이 알고 있었기 때문임. 심장이 아플 정도로 벅차 올랐는데 그게 바로 자신의 앞에 선 남자 때문이라는 것 역시, 알고 있었음. 눈물이 났음. 이유는 없었음. 이 익숙한 감정은 기쁨과 슬픔, 절망과 환희를 모두 포함한 그의 흐려진 오감을 갉아 먹는 무언가였고 스티브는 안개 낀 눈을 감았음.남자가 그에게 입을 맞췄음.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꿈 속에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는 알고 있음 아무리 꿈이 진지하고 현실감 돋아도 본능적으로 알고는 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임. 스티브 역시 마찬가지였음. 스티브는 꿈 속에서 아주 간혹 냉동되기 전의 전쟁 떄 기억이라던가 그가 불가피하게 헤어져버린 페기를 보곤 했음. 악몽이라면 악몽이라고 할 수 있는 기분이 좋지만은 않은 꿈들임. 그것들은 트라우마처럼 스티브를 괴롭혔고 그의 뇌리에 달라 붙어 잊을 만 하면 찾아오곤 했음.
스티브는 뒷목을 손바닥으로 닦았음. 땀이 흥건히 묻어 나왔음. 방금 꾼 꿈은 전쟁에 관한 것도 페기에 관한 것도 아니었음. 악몽이 아니었다는 것은 확실함. 꿈 속에서의 그는 괴로울 만큼 감정이 벅차오르긴 했으나 그것은 끔찍한 종류의 꿈은 아니었음. 꿈의 잔상은 희미했음. 하지만 확실하기도 했음.스티브는 꿈 속에서 남자와 입을 맞춘 것임.이해를 할 수가 없는 꿈이었음. 그는 전쟁 당시의 꿈이 아닌 이상 다른 종류의 꿈을 꾸는 경우가 드물었음. 성적 요소를 포함한 꿈? 마지막으로 꿨을 때가 80년 정도 쯤 사춘기를 겪을 때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음. 스티브는 어두운 방 안의 그의 싱글 침대 위에서 상체를 구부정하게 일으킨 채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음. 입을 맞추다니. 그것도 여자가 아닌 남자와. 차라리 여자라고 믿고 싶었으나 빼도박도 못하게 그의 기억은 상대가 남자라고 말하고 있었음. 스티브는 자신의 꿈에 당황했고 약간의 자괴감도 느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음. 기분 나쁜 종류의 꿈이 아니었기 때문임. 꿈 속의 그는, 인정하기는 괴로웠으나 상대방을 향해 엄청난 감정을 갖고 있었음. 어렴풋이 떠올리자 스티브는 갈빗뼈 안쪽이 저릿한 느낌을 받았음.악몽같지 않은 악몽이라고 생각하며 스티브는 다시 잠들지 않는 몸을 일으켰음.
스티브는 눈을 깜박였음. 그를 마주 한 남자 역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눈을 깜박이다가 입을 열었음.
"뭘봐?"
토니는 자신을 바라보다가 뭘 보냐는 말에 시선을 돌리는 스티브를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보았음. 스티브는 자신이 왜 토니의 시선을 피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당황했음. 애초에 복도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토니를 뚫어지게 보게 된 것도 이상했음. 그런 자신이 너무 이상해서 스티브는 다시 토니를 마주 보았음. 긴팔 위에 반팔 티를 겹쳐 입은 토니는 정돈 되지 않은 수염을 매만지고 있었는데 스티브에게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눈초리였음. 두 사람은 같은 어벤져스 타워에서 지내게 된 지도 몇 달이 흘렀지만 필요 이상으로 특별한 접촉이 없었음. 애초에 취미라던가 흥미가 전혀 다른 두 사람이었음. 간혹 회의라던가 업무 때문이라던가 할 때에 다른 동료들과 얼굴을 마주했고 그 외에는 몇 번 얼굴을 볼까 말까 했음.그렇다고 해서 둘의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님. 스티브는 치타우리와의 전쟁 이후로 토니를 조금은 다르게 보고 있었음. 토니는 그 특유의 여전히 빈정거리는 성격이나 농담따먹기 즐겨하는 취향은 버리지 못했지만 한 번 같이 전장에 참여했던 스티브 로져스에게 예전 만큼 비아냥거리거나 하지는 않았음.
스티브는 토니에게 고개를 까딱 한 후 그를 지나치려고 했음. 그런 그를 토니가 아 하는 탄성으로 잡았음.
"저녁에 홀로 와. 파티 있거든."
자세한 건 메시지로 보내겠다면서 토니는 등을 돌리고 가버렸음. 어벤져스 타워는 여전히 스타크 타워 용으로도 쓰이고 있었고 토니가 자신의 건물에서 스타크 인더스트리와 관련된 파티 등을 하는 일은 간혹 있었음. 그런 종류라고 생각한 스티브는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고 체육관으로 향했음.
사실 스티브는 파티를 즐겨 가는 취향이 아니었음. 모르는 사람들과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마음에 없는 말을 하며 기력을 소모하는 일은 그에게 맞지 않았음. 그의 잘생긴 외관을 보고 다가오는 여자들은 그를 지치게 했음. 파티같은 것에 익숙하지 않은 스티브는 앞으로도 그가 완전히 익숙해질 수 없을 거라고 어렴풋이 생각을 했음. 하지만 그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오늘도 파티 홀에 서 있었음. 토니가 보내온 메시지에는 그들 외에도 임무를 나가 있는 호크아이나 연구를 위해 어벤져스 타워를 잠시 떠나 있는 배너 박사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도 온다고 했음. 파티 자체는 그들 어벤져스가 참석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는 종류였고 토니는 단지 타워 안에서 그들이 편히 즐기기를 원하는 차원에서 가끔씩 이런 초대장을 돌리곤 하는 것 같았음. 어차피 스티브가 캡틴 아메리카라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은 채였음. 토니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의 아이덴티티는 여전히 비밀리에 있었고 스티브는 파티 따위를 갈 때마다 자신을 토니와 연관이 있는 장교라던가 등으로 설명을 했음.
애초에 그가 파티에 가는 이유는 별로 없었음. 그는 손에 든 샴페인을 홀짝이며 주변을 둘러 보았음. 멋지게 차려입은 여자들과 남자들이 챔버 쿼텟의 배경음을 바탕으로 대화를 즐기고 있었음. 예전에 한 번 토니가 했던 파티에 갔었는데 그건 전혀 다른 종류였음. 디제이가 레코드 판을 돌리고 조명이 번쩍거리는 그런 종류의 파티였음. 그 후로 스티브가 다시는 부르지 말라고 했었고, 토니는 더 이상 그런 식의 파티를 열지 않았음. 적어도 스티브를 초대한 파티들은 그랬음.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스티브는, 매번은 아니었으나 아주 때때로 토니가 그에게 오길 바라는 파티에 예의상이라도 참석을 하고는 했음. 거절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매번 퇴짜를 놓는 것도 예의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도 있었음.
"오늘도 제복인가? 수트 한 벌 맞춰줘야 겠군 그래."
다른 생각을 하는 동안 토니가 어느 새 그에게 다가오며 말을 걸고 있었음. 토니는 이미 술을 몇 잔 마셨는지 얼굴에 붉은 기가 도는 혈색 좋은 모습으로 미소를 띄고 있었음. 토니의 말대로 스티브는 제복을 입고 있었고 그 옷차림은 그가 파티에 참석할 때마다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음. 토니는 자신의 비싼 수트를 보란 듯이 팔을 벌려 보이며 대중들에게 먹힐 만한 매력적인 미소를 띄며 웃어 보였음. 이런 스타일로 나중에 한 벌 뽑아 주지 생일이 언제인가? 따위의 말을 늘어 놓으면서. 스티브는 그런 토니의 입을 보았음. 보통 남자와 다른 것 없는 입술임. 보기 좋은 호선이 그려지고 색은 피부색과 어우러지는 옅은 색소를 띔. 그 입가 옆으로 웃을 때마다 약간의 주름이 지는 것이 보기 싫지 않았음.
"캡틴?"
토니가 그를 불렀을 때 스티브는 샴페인을 한 번에 들이켰음.
스티브는 금새 그 파티에서 빠져 나왔음. 그를 묘한 시선으로 보는 토니를 뒤로 하고 그에게 빈 샴페인 잔을 떠맡긴 채 피곤하다는 말을 남겼던 것 같음.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음. 대체 왜 그가 토니의 입을 보고 있었는지 정말 모르겠음. 그 조잘대는 주둥이를 때려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몇 번 본 적은 있었으나 이건 다른 것이었음. 스티브는 자신이 느낀 것을 회피하고 싶어하는 성격은 아니었음. 그랬기에 그가 잠시 넋을 놓고 토니의 입을 보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고 그것은 스티브에게 굉장한 혼란을 주었음. 그렇게 노골적으로 봤으니 토니도 이상하다고 느꼈을 것이 분명함. 한숨이 절로 나왔음.
그리고 그 날 또 꿈을 꿨음.
시야는 여전히 흐렸으나 어제보다는 많이 나아져서 어느 정도 주변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음. 적어도 그가 등을 대고 서 있는 벽이 붉은 색 벽돌로 이루어져 있다거나 하는 것은 알 수 있었음. 그리고 어렴풋이 그가 서 있는 장소가 골목길과도 같다는 것을 알았음. 하지만 그 외에는 더 이상 나아지지 않았음. 스티브는 흐린 시야를 털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고개를 몇 번이나 저으며 눈을 깜박였지만 꿈 속에서 그러는 것은 헛수고에 불과했음. 몸은 여전히 축축 늘어졌고 그를 둘러 싼 안개와도 같은 공기가 그를 잠식시키는 것 같은 괴상한 기분에 빠져 있었음. 어딘가 애매하게 질척하고 기분이 나빴지만 동시에 그의 촉각을 자극해 성적으로 흥분시키는 기묘한 감각이었음. 스티브는 숨을 헐떡이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인영을 보았음. 남자는 한 쪽 팔을 스티브의 얼굴 옆 벽에 짚은 채 얼굴을 가까이 했음. 건강해 보일 정도로 그을린 피부 색이나 어두운 색의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으나 그것 뿐이었음. 남자에게서는 쿨워터의 향이 났음. 하지만 시원한 향이어야 하는 쿨워터의 향기는 마치 차가운 늪에서 풍겨져 나오는 것처럼 스티브의 후각을 잡아 챘음. 스티브는 속수무책으로 남자를 잡았고 남자는 약간의 웃음 소리를 내며 그에게 입을 맞췄음. 입맞춤은 소름 끼치게 익숙했음. 축축한 혀가 스티브의 아랫 입술을 쓸을 때 스티브는 달뜬 숨을 뱉으며 자연스럽게 입을 벌렸음. 입술 사이를 가르고 들어오는 혀는 능숙했고 그 능숙함에 익숙해져 있는 스티브는 아무런 위화감 없이 단순히 흥분만을 느꼈음. 남자의 키스는 느릿했으나 질척였고 농밀했음. 척추를 따라 전율이 흘렀음.스티브는 눈을 뜨고 자괴감에 빠져들었음.
"안색이 안좋은데요."
오랜만에 만난 나타샤가 스티브에게 말했음. 나타샤는 쉴드의 정식 요원이었고 늘 임무니 뭐니 바빴기 때문에 얼굴을 보기가 힘든 경우가 많았음. 그녀는 마침 체력 단련을 위해 운동복 차림으로 체육관에 들어왔다가 잠시 쉬고 있는 스티브를 만난 것이었음. 스티브는 나타샤의 말에 자신의 얼굴을 한 번 쓸었음. 그 정도로 눈에 띄게 안색이 나빠졌나 싶었음. 나타샤는 슈퍼 솔져도 안색이 나빠질 수 있냐고 정말 의외라는 듯이 한 마디를 남긴 채 웨이트룸으로 들어갔음. 그녀의 쭉 빠진 다리가 사라지는 것을 보던 스티브는 고개를 돌려 전면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았음. 매일 보는 얼굴이라 그런지 별로 달라진 것을 느끼지 못하겠음. 그리고 스티브는 요새 하루가 멀다하고 꾸는 꿈에 대해 다시 한 번 떠올리고는 피가 식는 느낌을 받았음.
동성에게 입맞춤을 받으며 기분이 좋다 못해 엄청 느껴버리는 꿈은, 막상 꿈속의 자신의 몸뚱아리는 얼마나 좋아하고 달가워할지 모르겠지만 깨어난 후의 여파는 장난이 아니었음. 스티브는 남자를 상대로 그런 생각은 기필코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음. 동성애를 혐오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애초에 그런 것 자체에 대해 생각할 건덕지조차 없었던 것임. 그런 그가 꿈 속에서는 고작 남자의 키스로 인해 몸이 달아 오르다 못해 정신적으로도 홀랑 그 남자를 향해 빠져버리곤 했음. 꿈 속에서의 스티브는 그 자신이 아닌 것 같을 정도로 모든 사고를 잃은 채 그저 남자의 체취나 손길 혹은 접촉에 모든 것은 맡기고 흥분할 뿐이었음. 전부 성적인 흥분으로만 가득 찼다면 또 모름. 정신적으로도 그는 남자를 향해 말할 수 없을 만큼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음. 그것은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었음.그런 꿈이 몇 번이나 계속 되었음. 자신보다 작은 키에 보통 체격의 남자가 꿈 속에서의 상대였음. 짙은 색의 머리카락에 햇볕에 그을린 피부색을 하고 있음. 입술은 거칠지도 부드럽지도 않고 간혹 가슬한 느낌을 받은 것으로 보아하면 수염도 있음. 남자는 스티브가 어쩔줄을 모르고 흥분할 때 낮게 웃었음. 키스를 하는 도중에 남자가 웃는 소리를 낼 때면 그 울림이 자신의 입 안까지 들어와 골을 울려대곤 했음. 남자의 모든 행동은 부드러우면서도 스티브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그런 스티브를 어떻게 다룰 지 알고 있었음. 그리고 꿈 속에서의 자신은 그런 남자에게 반항 한 번 하지 않았음.
사실 키스에서 더 이상 진도가 나갈 줄 스티브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음. 아니, 꿈에서는 알고 있었다고 하는 편이 이 상황에서는 맞을 것 같음.어느 순간 골목길이라는 꿈의 배경은 방 안으로 바뀌어 있었음. 침대만이 덩그러니 있는 방임. 그 외의 사물은 온통 일그러져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음. 침대 위에 누운 스티브는 자신의 위로 올라오는 인영을 보며 익숙함을 느꼈음. 늘 그에게 입을 맞추던 남자임. 이제 와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거니와 꿈 속의 스티브는 이미 그 남자가 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만큼 그 남자에게 순종하고 있었음. 스티브는 그 위로 올라와 머리를 쓸어주는 남자의 손길에 희열을 느끼고 몸을 떨었음. 남자의 모든 것이 그에게는 섹스어필이었고 정신적인 최음제였음. 남자는 여느 때처럼 입을 맞췄는데 더욱 농밀했고 유사 섹스와도 같이 야했음. 혀가 거칠게 구강을 공격하는 동시에 남자의 양 손이 전라인 스티브의 몸을 더듬었음. 스티브는 그 입맞춤과 손길에 흥분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꿈 속에서 이 정도로 느낄 수 있는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할 정도였음. 너무나도 리얼한 감각에 기분이었음.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꿈이란 것도 알고 있었음.눈 앞이 하얗게 점멸하는 것과 동시에 스티브는 잠에서 깼음.그리고 설마 하는 마음에 이불을 들춰 보고는 좌절해버렸음.
토니는 팔짱을 낀 채 그의 눈 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구경했음. 아이언맨 수트의 헤드에서 자비스의 시스템을 이용한 화면 처리 기능만이 요란하게 돌아갈 뿐이었고 그 안의 토니는 벽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여기서 도넛이라도 먹어줘야 폼이 사는데 하는 생각만을 할 뿐이었음. 그는 캡틴 아메리카가 그 쫄쫄이 유니폼의 헬멧도 쓰지 않은 채 빌런들을 처리하는 것을 보았음. 상황이 거의 끝나가는 판이기도 했고 이제 남은 것들은 졸개들 밖에 없었기 때문에 토니가 구지 나서야 할 이유는 없었음. 아니 그 전에 스티브 로져스가 저 정도로 동요하며 전투에 임하는 모습은 처음 봤기에 신기하기도 했고 나름 구경할 만 하기도 했음. 스티브는 그 특유의 밝은 금발을 흩날리며 무서운 속도로 적들을 제압했음. 이긴거나 다름 없는데도 때려 잡고 부수고 난리도 아님. 지프차가 불길을 일으키며 터지는 것에 토니는 손을 휘저어 매캐한 연기를 쫓아냈음. 토니는 한동안 스티브를 보다가 중얼거렸음. 자비스, 요즘 캡틴이 이상하지? 자비스가 대답했음. 평소보다 거친 행동을 보이고 있다는 말씀이시라면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토니는 고개를 끄덕였음. 거 봐 자비스도 인정하잖아.
사태가 정리되자 자신의 땀으로 눌러 붙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캡틴이 그 쪽으로 걸어왔음. 오랜만에 함께 임무에 투입된 스티브는 만날 때부터 저기압이었고 말 수도 평소보다 눈에 띄게 없었음. 그런데 과격한 방식으로 일처리를 하는 것까지, 전부 그답지 않았음. 토니는 완전히 파괴되다시피 한 주변을 둘러보며 양 팔을 들어올리며 어깨를 으쓱 해 보였음.
"내가 낄 자리 정도는 줘야지 캡틴."
스티브는 토니를 흘끔 보고는 무시하려는 듯 하다가 곧 한숨을 낮게 쉬더니 손으로 이마를 턱 짚었음. 표정이 굉장히 지쳐 보여서 토니는 조금 놀랐음. 요새 스티브가 그 답지 않은 모습을 보이곤 했지만 뭔가 문제가 있는 건가 싶기도 했음. 스티브는 눈을 내려깔다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음.
"요새 꿈자리가 사나워서."
"악몽이라도 꾸나 보지?"
토니의 목소리는 수트 안에서 말할 때 특유의 낮게 울리는 목소리였음. 스티브는 뭐라 말하려고 입을 열려다가 다시 닫더니 토니를 보았음. 토니는 팔짱을 낀 채 헬멧 너머로 시선을 마주보았음. 왜 저렇게 보지?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스티브가 그의 앞까지 가까이 걸어 왔음. 그리고 손가락 끝으로 아이언맨 헬멧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음. 이거 열어 봐. 스티브의 진지한 표정과 목소리에 의아해 하면서도 토니는 별다른 말 없이 헬멧을 열었음. 진하고 큰 눈매와 사람의 시선을 빨아들이는 듯한 다갈색의 눈동자가 스티브를 마주 보았음.
"왜 그러는 거야?"
"아니 아무것도."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리는 스티브의 팔을 토니가 잡아 세웠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음.
"자네 요즘 이상해. 뭔가 문제라던가 있나?"
스티브는 자조하듯이 웃었음. 동성과 야한 짓을 하는 꿈에 시달리고 있다고 저 토니 스타크에게는 죽어도 말할 수 없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