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크본즈
베리님 리퀘
욕망의 수태 上
미러버스 엠프렉
작은 새가 씨앗을 물어왔다.
아주 작은 씨앗이었다.
*
그러니까, 레너드 맥코이가 부함장 스팍과 친한 사이냐면 거짓말로라도 그렇다고 하기 힘들었다. 물론 이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인지 함께 일하는 데에 문제가 없을 정도로 발전한 동료 관계가 되긴 했지만 그것이 그들이 매일 밤 포커를 두러 만난다거나 함께 술잔을 기울인다거나 하는 종류와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스팍이 포커나 술이라면 절대 가까이 하지도 않겠지만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그래서 맥코이와 스팍이 한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발견한 엔터프라이즈호의 크루들은 그것이 굉장히 보기 힘든 광경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업무로 인해 마주하고 있는 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사적인 이야기를 굉장히 진지한 얼굴로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스팍은 언제나 진지했다. 평소보다 유난히 진지한 건 맥코이 쪽이다.
"잠깐만, 지금 내가 잘 이해를 못한 것 같은데."
늙었는지 가는귀가 먹은 모양이야. 맥코이가 그렇게 짓씹듯이 말하면서 스팍을 노려보다시피 마주했다. 한편 스팍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맥코이는 손끝으로 책상을 다닥다닥 두들겼다.
"방금 엄청난 헛소리를 들은 것 같아서 말이야. 다시 한 번 말해 주겠나, 스팍 일항사."
"닥터께서 제 말을 100 퍼센트 정확하게 들으셨다는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스팍이 침착하게 말했다.
"하지만 굳이 다시 듣고 싶으시다면, 다시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스팍."
"함장님은 당신을 성적 대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쿠당탕.
의자가 뒤로 넘어가는 소리가 레크리에이션 홀에 가득 울렸다. 깜짝 놀란 대원들이 돌아봤을 때 그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엔터프라이즈호의 치프 메디컬 오피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맥코이는 양 주먹을 세게 움켜쥔 채로 스팍을 진심으로 노려보았다. 이번에 스팍은 방금 전과는 다르게 약간 우유부단한 기색을 띄며 눈을 도륵 굴렸다.
"물론 그와 필수적으로 관계를 맺으라는 건 아닙니다만."
함장님의 능률이 가히 심각한 수준으로 떨어지는 걸, 일항사로서 더 이상 가만히 보고 앉아 있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습니까. 스팍이 나직하게 마치 노래 가사를 읊는 듯한 투로 말했다. 주변의 가까이 있던 대원들로부터 하나 둘 헛숨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할 무렵, 맥코이는 스팍을 한 대 후려 쳐야 할지 아니면 이 자리에서 빠져나가는 게 우선인지 고민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전자를 택했다.
*
쓸데없이 인간들한테 안 좋은 물만 들어가지고...
맥코이는 속으로 스팍을 향해 닿지 않을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예전엔 재수 없긴 해도 저 정도로 뻔뻔하진 않았던 것 같았다. 아니, 이번 건 뻔뻔한 걸 떠나서 질이 안 좋다고 생각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가 한 말을 떠올리기만 해도 목이 뜨거워지고 얼굴에 열이 올랐다. 사실 스팍의 말이 진실이냐 아니냐를 떠나 맥코이는 당시 상황의 민망함과 열 받음에 흥분한 것이 더 컸기 때문에 그가 한 말의 무게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지금, 텅 빈 오피스에 앉아 초록색으로 물든 주먹을 쥔 채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떠올려보길 스팍이 한 말은 정말로, 믿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종류였다. 곧 문이 열리며 들어온 사람을 보자 맥코이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안녕. 본즈."
지나치게 여상스러운 목소리로 인사한 커크는 닫히는 문을 뒤로하고 성큼성큼 들어왔다. 맥코이는 의자에 앉은 채로 시선만 바짝 들어 커크의 동선을 주시했다. 커크는 맥코이의 꾹 다물린 입매와 힘이 들어간 턱, 그늘진 눈가, 그리고 벌칸의 핏물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주먹 등을 훑어보다가 팔짱을 끼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는 맥코이를 마주한 채로 벽에 등을 기대며 어딘가 지친 듯한 기색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것이었다. 맥코이가 입을 열 기색이 없자 커크가 다시 말했다.
"너 그거 폭행죄로 적용되는 거 알지?"
"......"
"너도 참 독하다. 어떻게 그 목석같은 벌칸의 아구창을 터트리냐."
커크는 순수하게 놀란 듯이 덧붙였다. 그의 목소리는 연신 진지했지만 은근한 놀라움과 약간의 통쾌함이 섞여 있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 역시 제임스 커크는 제임스 커크였다. 나도 아직 성공해보지 못한 건데. 중얼거리는 커크에게 맥코이는 부루퉁하게 대꾸했다.
"나한테 징계를 내리기 전에 그 망할 놈을 모욕죄로 브리그에 처넣어줬으면 좋겠군."
커크의 눈썹이 휘었다. "모욕죄?"
맥코이는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다물었다.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가 힘들어서였다. 아아 짐, 스팍이 내게 와서 말하길 네가 날 보면서 좆을 세운다더구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으니 말이다. 그 빌어먹을 벌칸의 머릿속 어디에서 그런 생각이 나왔는지는 몰라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와 제임스 커크는 벌써 알아온 지 팔 년이 다 되어가는, 가장 친하다면 친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이였다. 그런데 뭐가 어쩌고 어째?
이런 말을 제임스 커크의 면전에다가 한다면 예상할 수 있는 반응은 몇 가지로 좁혀졌다. 가장 유력한 첫째는 깔깔거리며 웃어넘긴다는 것이다. 별 시답잖은 농담이라 치부하고 가볍게 여기는 경우였다. 그리고 둘째는 커크가 정말 어이없다는 듯이 스팍을 찾아가 온갖 질문을 해대는 쪽이었다. 그렇게 가능성 없는 반응도 아니었다. 셋째는 커크가 맥코이에게 주먹을 날리는 거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역겨운 소리 말라면서, 스팍이 그런 말을 했을 리 없다는 소리를 할지도 몰랐다. 커크가 스팍을 알아가기 시작한 이후부터 맥코이는 커크가 자신보다 스팍을 관계 면에서 더 우위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닌지 종종 생각하고는 했다. 그러니, 이것 역시, 아주 가능성 없는 반응이 아니었다.
한편 커크는 말 없는 맥코이를 이상한 눈으로 응시하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통 뭔가를 주저하는 성미가 아닌 사람이다 보니 맥코이가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모양새는 커크에게 있어서도 생소한 모습이었다.
"스팍이 네게 무슨 말이라도 한 거야?"
했지. 했고말고. 맥코이는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무것도 아니다."
만약 스팍이 커크에게 따로 한 말이 없었다면 아예 커크의 귀에 그런 소리가 안 들어가게 하는 쪽이 나을지도 몰랐다. 커크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괜시리 그가 알게 해서 좋을 것도 없다는 생각이었다. 맥코이는 내게 징계를 내리던 뭘 하던 알아서 하라고 말했으며 커크는 어딘가 찜찜한 얼굴이었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고? 커크가 다시 물었고 맥코이는 끄덕였다. 그래.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어.
"그냥 녀석이 헛소리를 하기에 내가 열 받은 것뿐이니까."
"내 말은 그 헛소리라는 게 대체 무슨..."
"지미. 걱정하지 마."
Don't worry. I got this. 맥코이가 그렇게 말하자 커크는 입을 다물었다. 잠깐 맥코이를 응시하던 커크는 곧 그에게 다가와, 한 손으로 맥코이의 어깨를 단단히 쥐며 웃었다.
"난 네가 그렇게 말할 때 존나 좋더라."
굳은 살 배긴 커크의 손은 맥코이의 목덜미를 쓰다듬듯이 쥐고 나서 떨어졌다.
맥코이는, 불가항력으로 소름이 돋는다.
*
친구끼리 어깨 좀 잡고 목덜미 좀 쥐고 하는 스킨쉽은 아무렇지 않은 것일지도 몰랐다. 분명 별 거 아닌 제스처였다. 널 믿는다는 둥, 널 신임한다는 둥의 뉘앙스가 담긴 남자들 간의 표현 말이다. 하지만 어쩐지 스팍의 말을 듣고 나서인지는 모르나, 맥코이는 저도 모르게 커크의 행동 하나하나를 의식하게 되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그는 이 모든 걸 스팍의 탓으로 돌렸다. 하지만 스팍이 함선의 치프 메디컬 오피서가 자신에게 주먹질을 한 것에 대해 묵과하기로 결정내렸기 때문에, 맥코이는 스팍에게 더 이상 주먹을 휘두르는 건 한동안 보류해두기로 했다.
그것과는 별개로, 일전엔 분명히 일상적으로만 다가왔던 사소한 것들이 다시 새롭게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제임스 커크 말이었다.
함께 식사를 하고 여가 시간에 술 한 잔 기울이고, 부상자나 업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라던가 말다툼을 하게 될 때에 그 평상시와 다름없던 매 순간들에 맥코이는 커크의 행동들을 주시하게 되었다. 옷이 스치는 것에서부터 몸이 맞닿는 것, 그리고 시선이 향하는 부분까지 의식하게 되자 맥코이는 어느 순간부터 어렴풋이 의심하기 시작했다. 스팍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여부에 대해.
어쩌면 그가 혼자 착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레너드 맥코이는 가끔 지나치게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써 자신의 기우를 무시하려 노력했으나 그건 말처럼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커크가 자신을 볼 때에 그 푸른 눈동자 안에 짐작할 수 없는 감정이 가득 들어차는 걸 보며, 맥코이는 자신이 어째서 이걸 진작 눈치 채지 못했나 싶었다. 설마와 그럴 리가. 이 두 단어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교차했다. 설마. 그럴 리가.
맥코이는 하루 수십 번 스팍의 멱살을 쥐고 싶어졌다.
*
그러니까, 제임스 커크는 눈치가 빠른 남자였다.
"요즘 나를 피하고 있어."
탐사를 내려갈 준비를 하며 커크가 뜬금없이 말했다. 그 옆에서 보호 장비를 착용하던 맥코이는 커크를 돌아보았다. 탐사를 내려가게 될 행성은 처음 발견된 M클래스 행성으로 딱히 산소유지 장비 따위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으나 어떤 생명체가 존재할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가벼운 무장을 했다. 방탄복과 페이저 등이었다. 맥코이는 처음 몇 번 그에게 탐사팀에 합류해야 할 임무가 주어졌을 때 치를 떨며 거절하곤 했었으나 이젠 그의 의견이 묵살되는 패턴에도 익숙해져 버렸다. 어차피 저는 커크가 속눈썹 한 번 깜짝거리면 봐주듯이 넘어가버리게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제임스 커크는 자신의 입담과 매력을 어떻게 써먹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누가 널 피해?"
페이저를 착용한 혁대를 확인하며 되묻는 맥코이에게 커크가 말했다.
"너."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맥코이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커크를 보았다. 커크의 눈은 마치 새파랗게 일렁이는 물을 여러 겹 겹쳐 놓은 것과 같은 색이었다. 그 눈은 평상시와 다르게 꽤나 이질적인 감정을 띠고 맥코이를 응시하고 있었다. 맥코이는 마른 입술을 떼어 가까스로 피식 웃었다.
"그게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모른 척 하지 마. 본즈."
커크는 몸을 감싼 그들의 보호 장비가 맞부딪힐 정도로 가깝게 다가왔다. 바로 코앞에서 숨이 섞이자 맥코이는 뒤로 물러서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날 예전처럼 대하지 않고 있잖아. 안 그래?"
"그건..."
"도망가지 마."
시선을 피하는 그를 커크가 다그쳤다.
"혹시 함선 내에 떠도는 소문 때문이냐?"
..소문? 맥코이의 얼굴에 비친 의아함을 보자 커크가 그늘 진 얼굴로 내뱉었다.
"그 때, 스팍이 네게 했던 말이라는 거."
푸른 눈에 짙은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맥코이는 숨을 들이켰다.
그 순간 함선이 크게 뒤흔들렸다.
갑작스럽게 폭격음이 울리고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엔터프라이즈의 거대한 선체가 양 옆으로 요동쳤다. 대원들의 비명 소리가 뒤따라 울렸다. 물건들이 사방으로 날아다니기 시작했고, 맥코이는 입을 열다가 옆으로 쓰러져 굴렀다. 쿠궁. 콰과광. 끼이이익. 온갖 소리가 난무했다. 비상경보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비상사태였다.
커크는 가까스로 벽을 짚어 중심을 잡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통신기를 들어 외쳤다. 브릿지! 스팍! 무슨 일이야? 뭐? 갑자기 무슨 공격? 커크가 말하는 동안에도 사방은 난장판이었다. 부상자가 속출하고 선체의 부분 부분에서 긴 울음 같은 함선의 신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커크는 막 셔틀 베이에서 빠져나가려고 하다가 한 쪽에서 몸을 일으키는 맥코이를 발견했다. 맥코이는 쓰러질 때 머리를 부딪쳤는지 찢어진 이마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는 어질 거리며 가까스로 일어나 눈가를 가리는 피를 손등으로 닦아냈다. 커크가 재빨리 그에게 다가와 부축했다.
"본즈, 너 피가..."
"난 괜찮아."
사실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길 반복하고 역한 구토감이 치밀어 오르는 게 멀쩡한 것 같지는 않았다. 머리를 어딘가에 제대로 박은 모양이었다. 사고가 느려지고 혀끝이 둔해지는데, 시야에 커크의 걱정 가득한 얼굴이 들어왔다. 푸른 눈이 쏟아질 것처럼 흔들렸다. 저런 표정을 짓다니 제 꼴이 정말 말이 아닐 거라고 생각할 때에, 통신기 너머에선 커크를 부르는 스팍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셔틀 베이가 무너질 것처럼 다시 한 번 폭음이 몰아쳤다.
"내 목에 팔을 둘러."
됐다거나 날 신경 쓰지 말고 가라거나 하고 대꾸할 만한 정신머리는 없었다. 코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희뿌연 시야로 맥코이는 손을 더듬어 커크의 어깨를 짚었다.
그리고, 셔틀 베이가 폭발했다.
엄청난 굉음과 동시에 섬광이 가득했다. 눈이 멀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손끝에서 멀어지는 커크의 체온을 마지막으로, 맥코이는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
*
새는 그의 손바닥 위에 씨앗을 올려놓고 날아가 버렸다.
풀은 녹색이고 새는 파랬지만 진짜 생명을 가진 건 어디에도 없었다.
그건 씨앗 역시 마찬가지였다.
*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다. 사람이 죽기 직전에는 별 다른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는다던데 정말 그랬다. 워낙 갑작스럽기도 했고 맥코이에게 있어서 과거를 돌아보거나 추억을 회상하거나 할 만한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난데없는 공격을 받아 머리를 부딪쳐 죽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하긴 우주에 나온 이상 어떤 방법으로든 죽게 되어 있었을 지도 모른다. 단지 미련이 남는 거라면 딸 애 얼굴을 한 번 더 못 본 거라던가, 어머니를 찾아뵙지 못한 거라던가, 혹은 커크에게 끝까지 물어보지 못한 말이라던가. 네가 정말 나를 좋아하는 거냐는 그 웃긴 질문이 여전히 한 쪽 구석에서 웃기게도 빙빙 맴도는 것이었다. 만약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그렇게 진지한 척 생각하는 건 그만두고 술이나 함께 기울이면서 우스갯소리로 물어보았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맥코이는 눈을 떴다.
사방이 어두웠다. 그는 순간 자신이 관속에 들어와 있는 건 아닌지 생각했을 정도였다. 온 몸이 저릿거렸고 관절마다 찌뿌듯했다. 머리는 깨질 듯 아파왔고 손발에는 감각이 둔했다. 이건 마취 후의 증상과 비슷했다. 이런 감각을 느낀다는 건 누군가가 그를 치료했다는 소리였고, 그건 그가 죽지 않고 살아있단 말이었다. 점차 확보되는 시야에 희미하게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맥코이는 침대에 누워 있었으며, 주변에는 거의 아무런 사물도 보이지 않았다. 독방이었다. 맥코이는 이질적인 감각이 몸을 휘감는 것에 조금 떨었다. 그는 엔터프라이즈의 어디에도 이런 장소가 있는 건 본 적이 없었다.
"정신이 들어?"
맥코이는 고개를 휙 돌렸다. 투명한 벽 너머에서 한 쌍의 푸른 눈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건 커크였다. 커크는 다리를 꼰채 그 위에 팔꿈치를 세우고 뺨을 받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어둑한 불빛 밑에서 커크의 눈은 어딘가 웃음기를 띄고 있었다. 맥코이는 그를 보자 몸의 고통도 잊고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절로 신음이 나왔지만, 그는 커크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기쁨을 감추기 힘들었다. 죽은 줄만 알았다. 셔틀 베이가 공격받지 않았던가.
"짐! 다친 데는? 어떻게 된 거야?"
"난 멀쩡해."
"함선은? 대체 누가 공격한 거지?"
"글쎄..."
커크가 손가락을 두들겼다.
"누가 공격했을까?"
그제야 맥코이는 주춤한다. 그는 커크의 이질적인 표정을 보며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건 그냥 단순한 독방이 아니었다. 그가 있는 곳은, 브리그였다. 맥코이는 포스 필드의 벽을 손으로 짚었다.
"짐, 이게 무슨..."
"아. 그래. 공격을 받았었지."
커크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뒤를 돌았다. 뒷짐을 짚은 그의 걸음걸이는 어딘가 과장되어 있었고 동선은 마치 연극하는 것처럼 맥코이를 놀리려는 듯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맥코이는 여전히 상황이 이해되지 않고 있었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그는 이제 자신이 엔터프라이즈호에 있는지도 알 수 없어 졌다. 그리고 그가 알던 커크 역시, 아주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갑작스레 함선이 흔들리더군. 넌 뇌출혈을 입었었어. 아주 심각하게.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몰골이었지. 커크가 그렇게 말하며 맥코이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본 맥코이는 뒷걸음질 쳤다.
"내가 널 구했어."
맥코이는 떨리는 시선으로 커크의 얼굴을 보았다. 한 쪽 입가에서부터 귀 밑까지 길게 난 흉터가 조명 밑에서 기괴하게 번들거렸다. 커크는 그 흉터 위를 손끝으로 쓸었다.
"이건, 그 때의 영광의 상처쯤이라고 해둘까."
푸른 눈이 호선을 그리며 웃음을 흘렸다. 입매가 올라가는 동시에 흉터가 뒤틀리며 섬뜩하게 일그러졌다. 그를 마주보던 맥코이는 마른 침을 삼켰다.
아무것도, 단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의 기억은 머리를 부딪치는 것 이후로 끊겼을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본 커크는 멀쩡했다. 부상의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단지, 막연한 섬광과 폭발을 느꼈던 기억으로부터 그가 죽었던 것처럼 커크 역시 죽었을 거라고 짐작했을 뿐이었다. 본인이 살아 있다는 사실조차 놀라울 정도였는데 눈을 뜨니 브리그 안이었다. 게다가 커크는... 맥코이는 커크의 눈을 마주했다.
알 수 없이 낯설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을 마주하는 것 같았다.
분명 그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커크가 맞았다. 눈부신 금발에 청안. 제임스 커크의 얼굴과 몸과 그리고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어딘가가 어긋나있다. 억양. 몸짓. 눈빛. 그가 아는 커크는 이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맥코이는 떨리는 손을 주먹 쥐었다.
"너 누구야."
커크는 하하 웃었다.
"저런, 레너드. 머리가 다치더니 나까지 잊은 모양이지?"
아니면 기억을 잃은 척 하는 건가. 남자의 큰 발걸음 앞에서 포스필드가 열렸다 닫혔고 갑작스레 들이닥치는 그에 맥코이가 뒷걸음질 치는 건 동시였다. 커크의 발이 그를 급하게 따라잡았다. 커크는 맥코이의 손을 억세게 그러쥐더니 그 손바닥을 자신의 흉터가 가로새겨진 뺨에 닿도록 끌어 올렸다. 커크는 눈을 내려감으며 고양이처럼 가르릉댔다.
"내가 네 손을 잡았잖아. 죽어가는 널 끌어올려서 등에 업고 달린 게 나잖아. 기억나? 죽은 생선 같은 눈으로도, 넌 끝까지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 제임스. 제임스. 내 이름을 읊으면서 말이야."
맥코이는 헐떡이며 몸을 뒤틀었지만 커크의 손아귀는 그를 놓치지 않았다. 그의 손목에서부터 팔까지 커크의 손이 느릿하게 타고 올라가 뒷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이마가 맞닿고 서로 숨이 섞인다. 그 때 쯤에 맥코이는 정신이 하나도 없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그가 보고 있는 게 과연 현실인지. 그런 식상한 꿈과 같은 의아함이 뇌리를 스치지만 커크의 올가미 같은 시선에 곧이어 수증기처럼 흩어지고 만다. 커크는 그가 자신으로부터 정신을 파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벽까지 몰린 그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며 커크가 속삭였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두 번 다시 도망가려는 생각은 하지 마."
숨 막히는 집착. 들끓는 소유욕.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감정의 자연재해 앞에서 마취약은 소용을 잃었다.
맥코이는 갑작스레 단전에서 솟아오르는 끔찍한 고통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
어릴 적 배를 탄 적이 있었다. 그 때 당시 레너드 맥코이는 지금처럼 바다를 혐오하지도 않았고 물살과 파도를 기피하지도 않았다. 되레 그것을 즐긴 쪽에 속했다. 그는 청명한 물빛에 반사되는 햇살이 넘실거릴 때마다 그것에 충동적으로 빠져들고 싶은 기분을 억눌러야 했다. 맥코이는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아버지의 등을 기억한다. 그건 그가 기억하는 아버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배에 탄 모습이었다. 미시시피에서 배낚시를 즐기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으니 그는 아버지가 낚시를 하는 법을 알고 있는지 조차 알지 못했었다. 맥코이는 작은 요트의 가장가리를 붙잡고 그 너머로 목을 길게 빼냈다.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너머까지 바다는 고요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만약 사람의 감정이 바다라면 파도는 욕정일 것이다. 단순히 성욕에 한정된 것이 아닌 그 모든 것을 향한 욕정 말이다. 기갈과 결핍. 갈망과 증오와 열꽃처럼 타오르는 희열의 미학. 그로 인해 몰아치는 파도는 일말의 이성을 쓸어가 버릴 정도로 거세고 흉포하다. 맥코이는 배를 탄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바다에 빠져들은 적도 있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표면과 다르게 시꺼먼 어둠을 내포한 바다의 속살이 그를 집어 삼키고 아래로, 더욱 아래로 끌어당겼다. 맥코이는 손을 뻗으며 입을 벌렸다. 울컥 이는 바닷물이 입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눈이 아팠다.
채워지고, 또 채워진다. 온 몸이 바다 속에서 몰아치는 파도로 가득하다.
그건 잡아먹히는 기분이며 동시에 한없이 무력해지는 감각이다. 손 끝 하나 옴짝할 수 없고 숨 한 번 들이킬 수 없다. 그건 맥코이가 가장 처음으로 느낀 공포이다. 인간이 감정에 지배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그것은 정말로 본능적인 두려움인 것이다. 온 세포에 스며드는 감정. 잠식당한다. 먹혀진다.
그렇게 바다는 파도를 산란한다.
*
시야가 희게 물들었다가 도로 검어지길 반복했다. 마치 수 세기 전 고전 영화의 필름 한 귀퉁에서 깜박이는 시가렛 번처럼 말이다.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순간이 번복되었고 맥코이는 저도 모르게 물 밖에 나온 물고기마냥 숨을 헐떡였다. 아랫배에서부터 치솟아 오르는 고통은 내장을 뒤집어 놓는 것만 같았다. 배를 움켜쥐며 비틀거리는 그를, 커크가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주시했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겠지만 말야."
그는 느릿하게 맥코이의 팔뚝을 옭아매어 남자를 침대에 눕도록 했다. 거의 쓰러지다시피 침대 위에 엎어진 맥코이는 쥐어짜는 듯한 신음을 내었다. 뒷목에서 식은땀이 벌써 줄줄 흐르고 손이 떨이는 것이 보였다.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는 동공은 커크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금방 까무러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꼴이었다. 커크는 맥코이의 젖은 머리칼을 부드러운 동작으로 쓸어 넘겼다.
"나도 이렇게 까진 하고 싶지 않았어."
그렇게 말하며 커크는 웃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웃긴 일이었다. 그는 애초에 누군가에게 이런 식으로 굴어본 적이 없었다. 모든 인간은 그에게 있어서 게임에 사용될 장기 말에 불과했으며, 그 용도를 다하면 버려지거나 죽임 당해 마땅할 소모품일 뿐이었다. 사람간의 관계 그 존재 가능성이란 것은 그의 어미가 자신을 팔아넘기려고 들 때나 새아비가 칼을 들이댈 때부터 사라진지 오래였다. 저의 뒤를 봐준 파이크를 제 손으로 죽이고 나서 커크는 인간성의 상실에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다. 복수나 야망의 앞에서 그 외의 감정은 헛소리였으며 또한 사치였다. 그리고, 그건 레너드 맥코이에게 역시 다를 바 없었다.
원래 인간이란 게 그렇다. 뜻대로 손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애가 타고 내 마음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오기가 치솟는 것이다. 만약 레너드 맥코이가 조금만 더 순종적이었다면, 혹은 자신을 그토록 무기질적인 태도로 대하지 않았더라면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제임스 커크는 그동안 맥코이를 수십 번 폭행했고 그보다 더 많이 강간했으며 수차례 죽음의 문턱까지 몰고 갔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맥코이가 커크를 향해 두려움의 흔적이라던가 혹은 진심어린 순종을 보였더라면 그 역시 평범한 장기 말 중 하나로 남았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맥코이는 조용하게 반항했으며 음울하게 도발했다. 그래서 제임스 커크는 자신의 이 평범하지 않은 행동을 향해 형벌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그것은 일종의 흥미로움이나 유희의 성질을 띠고 있으면 있었지 차마 그 이상의 무언가는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관계의 진화는 제임스 커크에게 있어 부재된 형질이다. 그것이 사실이고 그래야만 했다. 커크는 손끝으로 자신의 흉터를 매만졌다.
"네가 날 이렇게 만든 거지."
그랬다. 레너드 맥코이가 그에게 흉터를 남긴 것이다.
맥코이는 이제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덜덜 떨고 있었다. 고통이 어지간히 심한 모양인지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커크는 조금 전보다 더욱 감흥 없는 얼굴로 바지 버클을 풀었다. 아직 수술 후 얼마 되지 않은지라 남자가 겪을 고통은 끔찍하기 그지없을 테지만 그런 것까지 봐줄 정도로 제임스 커크는 자비롭지 않았다. 어찌됐건 이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방적인 형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행위였기 때문이다. 커크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맥코이의 하체를 우악스런 손길로 치켜들게 만들었다. 곧 벌거벗은 둔부가 드러났다. 침대 위에 어설프게 걸쳐진 남자의 뒤에 바짝 맞붙은 커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성기를 삽입했다.
"으아...아...악."
피가 났다. 숨넘어가는 괴로운 신음이 브리그 안에 울렸다. 브리그 안의 조명은 마치 영안실의 것과 흡사해 땀에 번들거리는 남자의 드러난 살갗이나 그것을 손자국이 남도록 그러쥔 커크의 손을 기괴한 고깃덩어리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커크는 숨을 골랐다. 추삽질을 시작할 때쯤에 맥코이는 이미 힘없이 늘어져 흔들리기만 했고, 커크는 그걸 한편으론 다행으로 여기며 남자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손바닥에 남자의 아랫배가 닿았다.
이게 네 족쇄가 될 거야. 널 십자가에 박을 못이 될 테지. 커크는 남자의 서늘한 뒷목에 이마를 대며 눈을 내려 감았다. 널 영원히 내게 박제시킬.
*
사실 함장님이 그런 결정을 내리실 줄은 꿈에도 몰랐지. 아, 물론 닥터 맥코이를 어떻게든 벼랑으로 몰고 갈 거란 건 예상은 했지만 이런 방법을 쓸 줄은 몰랐다는 거야. 임상 실험을 거치긴 했지만 아직 테스트가 완벽하게 성공한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 자네도 알지? 실험체 3번과 11번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런데 이렇게까지 나오시는 걸 보아하니 적잖이 화가 나셨던 모양이야. 안 돼. 불안이라는 단어는 꺼내지 마. 그런 말이 함장님 귀에 들어갔다간 머리에 구멍이 뚫릴 지도 모르니까. 닥터 맥코이도 참 징하지. 몇 번이나 가까스로 살아 나왔으면서도 여전히 함장님에게 반항할 생각을 하고 있으니. 내가 무슨 생각 했는지 알아? 함장님이 닥터의 사지를 잘라내서 몸통만 남겨두는 건 아닌가 싶었다고. 절대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그런데 세상에, 내가 멍청했지. 이 방법은 더 악질이잖아?
서서히 정신이 들기 시작하면서 맥코이는 뻑뻑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멀리서 낮은 대화 소리가 간간히 웅웅대며 귓전에 울렸다. 그 내용이 얼마나 심각한 종류이건 간에 맥코이의 정신은 그가 들은 말을 제대로 분석하여 그것에 충격 받을 만큼의 여지도 남아있지 않았다. 일정한 간격으로 울리는 기계음과 약품 냄새가 그가 병동과 같은 곳에 있다는 것을 알렸다. 흐린 시선이 천천히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지독한 악몽을 꾼 것 같았다. 정말 지독한 악몽이었다.
느리게 눈을 껌벅일 때 익숙한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채플이었다. 그녀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은 얼굴로 걸어와 맥코이를 굽어보며 트라이코더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아. 함선이 공격당했었다. 그리고 셔틀 베이에 끔찍한 피해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자신은 운 좋게도 살아남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노릇이었다. 그곳엔 제임스 커크 역시 있었다. 맥코이는 가까스로 숨을 들이쉬며 거슬한 목소리를 내었다.
"어떻게 됐어?"
채플이 조금 더 미소 지었다.
"걱정 말아요. 아이는 무사해요."
맥코이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받지 못한 채 잠시 정신적으로 방황했다. 한편 채플은 그의 찌푸린 미간을 고통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조금 더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트라이코더로 맥코이의 하복부를 조심스레 스캔하고 있었다.
"B23은 괜찮을 줄 알았는데 닥터의 몸에 맞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발작이 일어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죠. 함장님이 이후 두 번 다시 마취를 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셨어요. 마취 담당이었던 다니엘스가 죽었지만 뭐, 닥터는 어차피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잖아요. 혹여 잠시 후에 통증이 느껴진다 해도 조금만 참아요."
진심으로 말하자면 맥코이는 그녀가 말하는 것의 단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영어 철자로 이루어진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에서 기이한 언어로 재구성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말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맥코이는 전신을 거머리처럼 타고 기어오르는 자잘한 소름과 한기를 느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한 손을 자신의 배로 가져갔다.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이 기억에 못 박힌 것처럼 떠올랐다. 웃는 얼굴의 채플이 가라앉은 시선으로 그 동작을 쫓았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맥코이의 입술이 그의 의사와 상관없이 움직였다.
"뭐야?"
채플은 조금 전처럼 미소 지었다. "딸이에요."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고 곧 땅바닥을 굴렀다. 우당탕 소리와 함께 그의 환자복 옷자락에 걸린 의료 기구들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채플이 가늘게 놀란 비명을 질렀다. 닥터! 닥터! 하지만 맥코이의 귀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장님처럼 손으로 더듬대며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양 다리가 힘이 들어가지 않은 채 흐느적거려서 맥코이는 꼴사납게 다시 주저앉는다. 전신이 떨려왔다.
그에게는 놀란 표정의 채플도 유리 너머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다른 의료진도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단 하나의 본능.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는 병실의 문으로 손을 뻗었다.
그 때 문이 열리고 커크가 나타났다. 맥코이는 헐떡이며 눈을 흡떴다.
"뭐해, 레너드?"
커크는 아무렇지 않게 손을 내밀었다. 맥코이는 움직일 생각도 못하고 그 손을 보고만 있었다. 한동안 반응이 없는 맥코이에 결국 커크는 한숨을 쉬며, 허리를 굽혀 그의 팔뚝을 잡았다. 손가락 밑에서 살갗이 괴롭게 짓눌렸다.
그를 바로 서도록 끌어 올린 커크는 연신 위태롭게 비척거리는 맥코이의 허리에 팔을 감아 바짝 당겼다. 메마른 섬유 냄새가 풍겼다. 커크는 채플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손짓을 했고 그녀는 반 쯤 도망치듯이 병실에서 나갔다. 병실 안에도 유리 너머에도, 그들 말곤 아무도 없었다. 커크는 맥코이를 조금 전까지 누워있던 침대에 앉히며 손으로 그의 얼굴을 잡아들었다. 샅샅이 그를 훑어보던 커크는 흐음, 하고 가볍게 콧소리를 내더니 습관처럼 손바닥으로 제 흉터를 쓸었다.
"떨고 있네."
"......"
"예전의 넌 무슨 일이 있어도 떨지 않았는데 말이야. 함선이 공격당한 일이 꽤 충격이었나 봐."
푸른 눈동자가 걱정보다는 흥미로 번뜩였다. 그 시선 앞에서 갈가리 벗겨지는 느낌에 맥코이는 치를 떨었다. 그는 확신했다.
이건 그의 세계가 아니었다.
그가 아는 자들은, 그가 아는 자들이 아니었다. 같은 모습을 한 완전한 타인. 믿고 싶지 않았으나 믿을 수밖에 없었다. 꿈도 아니었다. 그의 눈앞에 서 있는 자는 제임스 커크의 외관을 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의 커크는 저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저렇게 웃지도 않았으며, 저런 눈빛을 짓지도 않았다. 그는 맥코이를 레너드라고 부르지 않았다.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 내릴 수 있는 가정은 단 하나, 그가 다른 세계에 와 있다는 것이다.
혹은, 그를 제외한 모든 것이 뒤바뀐 것인가? 진실은 알 수 없었다. 가능성 높은 유추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만약 자신이 아는 자들의 다른 모습이 존재한다면 레너드 맥코이 그 자신 역시 이곳에 존재했으리라. 그가 어떤 인물이 되었든 간에, 커크는 자신이 그가 알던 맥코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맥코이가 입을 열지 못하고 있을 때 커크가 손끝으로 굳어있는 그의 어깨선을 따라가며 말했다.
"내가 너한테 반한 게 언젠 줄 알아? 눈앞에서 내가 죽어가는 데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모습을 봤을 때야."
아니다. 자신이라면 짐 커크가 죽는 걸 두고만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걸어가 버렸었지."
"잠깐만, 지금 넌 착각을..."
온 정신을 끌어 모아 입을 연 것이 무색하게 맥코이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순식간에 그의 머리가 침대에 처박혔기 때문이다. 뒤통수를 잡혀 거의 엎드린 자세가 된 맥코이는 숨 막히는 소리를 냈다. 배에서부터 수십 개의 바늘로 들쑤시는 고통이 척추를 타고 온 몸에 퍼졌다. 커크는 맥코이의 땀으로 젖은 머리칼을 움켜 쥔 손을 미끄러트려 신음을 내는 그의 목덜미를 잡았다. 맥코이는 금방이라도 그의 손 안에서 자신의 목뼈가 부러질 거라고 생각했다. 커크가 몸을 숙여 그의 귀에 속삭였다. 의사인 주제에 죽어가는 생명을 보고도 그토록 무심한 게 꽤나 섹시했어. 알아?
"생각해보면 넌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지. 레너드. 넌 네 목숨만 연명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았으니까."
커크의 다른 손이 그의 등줄기를 훑고 내려가 헐렁한 환자복을 걷어 올렸다. 맥코이는 온 몸을 내달리는 소름에 발작하듯이 몸부림쳤지만 그의 다리 사이로 파고드는 커크의 손은 거침이 없었다. 절로 숨이 막혔다.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여전히 맥코이의 뒷목을 내리누른 채로 커크는 무자비하게 그의 중심을 움켜쥐었다. 움직이지도 못하고 파들파들 떠는 맥코이의 귀 뒤에 입을 맞춘 커크의 몸이 그의 뒤로 바싹 맞붙었다.
"네 뱃속의 애가 죽는 것도 태연하게 지켜볼 수 있을까."
그것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으나 동시에 맥코이는 아주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현실의 감각이 무뎌지고 단지 도망가고 싶은 욕구만 남는다. 그는 자신의 귀에서 속삭여지는 제임스 커크의 목소리에 반응하듯이 뱃속이 요동치는 것을 느낀다. 자신의 심장 박동이 아닌 마치 자신 속의 다른 존재의 호흡처럼 들리는 울림이었다. 맥코이는 커크의 손에 따라 순순히 어깨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헐떡이는 입술에 커크의 입이 맞닿았다. 그 입술로부터 비린 바닷물이 넘실거리며 입새로 쏟아져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도망가지 마.
그 말이 어째선지 낯설지가 않았다.
*
T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