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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뱃 네임버스 1

아서뱃 네임버스






아서 커리가 발현한 것은 그가 열 세살 쯤이었을 것이다. 하프 아틀란티언의 발현은 계절의 변화처럼 매우 조용하고 또한 순식간에 일어났다. 아침에 눈을 뜬 어린 아서는 자신의 등이 이상하게 근지러운 것을 느끼며 거울을 본다. 눈에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게 발현된 그것은 어린 아서 커리가 이해할 수 없는 모종의 그림과도 같았다. 

당시 아서는 여전히 그의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을 때였고, 고대의 아틀란티스 언어라곤 전혀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걸 보며 이제 그도 성인이 되어가는 거라며 웃었고 때가 되면 그 이름의 주인을 만날 것이라고 말했다. 마치 그의 아버지가 그러했고, 그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름의 속박은 풀기 힘든 행운이며 또한 속박이고 그걸 찾아내는 건 오직 아서 당신에게 달렸다고 그의 아버지는 말했다. 아서는 기억에 존재하지 않는 그의 어머니를 떠올리며 아버지 그도 이름의 주인을 찾아 행복했느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아서가 평생 모를 그의 어머니를 회상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서는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아서 커리는 메라의 손을 잡으며 그의 기억 속 한 장면을 멀리한다. 물결 속 산호초처럼 흔들리는 붉은 금발에 둘러쌓인 메라는 여신처럼 미소지었다.

"당신 또 무슨 생각 하나보네."

아서는 부드럽게 웃었다. "항상 예리하군. 그게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지."

"말 돌리는 것 보니 뭔가 내게 말해주기 싫은 생각."


메라는 날카롭다. 그를 오랜 시간동안 바로 옆에서 지켜봐 온 만큼 그 누구보다도 그를 잘 파악할 줄 알았고, 간혹 그것은 그에게 더할 나위 없는 지지대가 되어주었으나 한편으론 송곳으로 정곡을 찔린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서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걱정할 필요 없는 일인 것 뿐이야."

"난 캐묻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 걱정마, 아서."


그들의 작은 오두막은 바다를 다스리는 가장 위대한 두 명의 남녀가 자리하기엔 너무나도 비좁게 느껴졌다. 창문 너머에선 지평선 너머로 저물어가는 해가 보였고 그것을 배경으로 검게 우뚝 솟아있는 등대가 있었다. 아서는 메라가 항상 그를 걱정하면서 또한 부담을 얹어주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사랑인가?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서로를 누구보다도 아꼈으며 위했고 지지대가 되어 주었으며 또한 긴 시간동안의 동반자가 되었다. 만약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아서 커리는 오랜 시간을 살 수 있었다. 그는 인간이 두 겹의 인생을 살 동안 주름 하나도 변하지 않을수도 있었다. 그랬기에 인간의 기준으로 말하는 사랑이란 건 그가 생각하는 사랑과는 다를 것이다. 아서는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죽기 직전까지 돌아오지 않을 아내를 기다리던 바보같던 남자를. 인간의 사랑은 짧고 정열적이나 그 끝은 초라하다.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 챗바퀴를 뛰는 쥐들처럼 그들의 '사랑'이란 건 언제나 정해진 기간 속에서 나열되는 조건들을 충족시켜야만 했고, 너무 쉽게 빠졌고 쉽게 지친다. 그들은 시한부가 걸린 것처럼 자신의 몸에 새겨진 네임을 찾아 헤메나 그들의 삶은 자신의 네임을 찾기에조차 너무나도 짧다.

창가에 서서 검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보던 아서의 등 뒤에 메라가 다가왔다. 아서는 그녀의 손가락이 자신의 등 어느 부분을 가볍게 쓰다듬는 것을 느꼈다. 그의 네임이 있는 자리다.


"당신 반려자의 이름. 찾지 않을 생각이야?"

아서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당신이 있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지."

"아서, 난 당신을 사랑해." 메라가 희미하게 웃음 띈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당신 역시 날 사랑하는 걸 알아. 우린 누가 봐도 참 멋진 동반자거든. 하지만 만약 때가 온다면, 언제든 떠나도 좋아. 당신의 이름이 불리는 날에."


아서는 대꾸하지 않았고 메라는 재촉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안은 채 잠시 함께 노을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평선 너머로 아예 사라지기 까지만이었다.


세상이 만들어지기 까지 창조설이나 진화설 또는 그 어떤 방법이 존재했을 지라도 네임이 시작한 정확한 역사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처음 매우 소수의 사람들로부터 시작해 백여 년에 걸친 시간동안 질병처럼 확산되어 지구상의 거의 90퍼 센트에 달하는 인간이 성장기 때에 발현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약 10퍼 센트의 소수 사람들만이 노-네임드로 남았고 그들은 자유인 혹은 속박되지 않은 자들이라 불렸다. 그리고 아서 커리는 아틀란티언으로서 네임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었다.

아틀란티언에겐 네임이 발현되는 역사가 없었그에 그건 아마 반쪽짜리 인간의 피가 그에게 남겨준 유물일 것이다. 아서는 자신의 몸에 새겨진 이름을 부끄러워 하지도 않았으나 그렇다 하여 떳떳하게 굴 수도 없었다. 그는 칠대양을 다스리는 왕이었고, 네임을 가졌다는 건 그가 반인간이란 사실을 쓸데 없이 부각시키는 거나 다름 없으며 바다에선 약점으로밖에 작용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운 좋게도 그가 네임드라는 사실을 아는 건 그의 아버지와 메라 둘 뿐이었다.


"슈퍼맨이 앓아 누웠다는군."


배트맨이 별 감흥 없는 소리로 소식을 전했다. 저스티스 리그에 모인 몇 인원들은 그 소식에 지구가 곧 멸망할 것이라는 말을 들은 것처럼 반응했으나 배트맨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이제서야 그가 발현을 시작한 모양이다. 그 나이면 크립토니안 기준으로 딱히 늦은 건 아니겠지."

아서는 제 턱을 매만졌다. 크립토니안도 네임드로서 발현할 수 있다는 증거가 나온 셈이었다. 그들 역시 인간과 굉장히 흡사한 문명 그리고 생태계를 갖추었던 자들이니 크게 놀라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서 커리 본인만 해도 아틀란티언이 네임드로서 발현할 수 있다는 증거가 된 셈이 아닌가. 할 조던이 옆에서 말했다.

"지금 그의 종족이 멸망한 상태에서 발현을 했다는 건 네임 상대가 종족에 상관없이 누구나 될 수 있다는 뜻인가."

마샨이 끄덕였다. "은하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족 중 인간에게만 네임이 주어진다는 증거는 없다."

"아직까지 아마존에선 사례가 없었어." 원더우먼이 신중하게 말했다. "혹시 과거 크립토니안들에게 네임이 발현되었다는 자료가 있나?"

배트맨이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내가 알기론 없다. 슈퍼맨 역시 네임에 대해선 아무 발언이 없었지."

플래시가 끼어들었다. "혹시 그렇다면 이건 다른 종족에서도 서서히 네임이 발현되기 시작한다는 뜻이 아닐까? 마치 인간에게 처음 발현이 시작되었던 때처럼..."

"...전염병처럼 말이지."


원탁에 앉아있던 모든 리거들이 그를 돌아보았다. 무심코 말을 뱉은 아서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고 배트맨과 눈이 마주쳤다.


"아쿠아맨. 아틀란티스에도 네임 발현 기록이 있나?"


아서는 잠시 그를 쳐다보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무하다."


그가 저스티스 리그를 믿지 못한다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네임드라는 사실을 알려서 도움이 될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슈퍼맨이 발현한 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고, 어쩌면 플래시의 말처럼 인간 뿐 아니라 초인이라 불리는 다른 종족에게까지 네임이 퍼지기 시작한 것인지 모른다.

회의가 끝난 후 배트맨이 그에게 따로 다가온 것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항상 온 몸을 검게 둘러 싼 배트맨은 아서 커리가 가장 신임하기 힘들다고 느끼는 히어로였다. 남자가 말했다.


"혹시라도 아틀란티스에서 발현이 일어난다면 말해주겠나."

아서는 팔짱을 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난 다른 종족에서 일어나는 발현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네." 배트맨이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네임의 현상은 종족의 번식을 위한 작용과 같다는 가설을 세우고 있어. 예를 들어, 자신이 메이팅 할 짝을 찾는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지. 종족의 멸종을 막기 위해서 말이야."


아서는 순간 속에서 화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배트맨에게 위협적으로 한 발자국 다가갔다.


"자네는 지금 네임 현상이 번식을 위한 짝짓기 수단이나 다름 없다고 말하는 건가? 아틀란티언은 인간과 같지 않아서 매우 긴 삶을 살아갈 수 있어. 그리고 그 삶 속에서 우리는 단지 '새끼'를 낳기 위해 반려를 만나지 않는다. 지금 아틀란티언의 수준을 다른 육지 동물들 따위에 비유하는 건가?"

배트맨은 방어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난 네임 현상에 대해 말한 거지 아틀란티언에 대해 말한 게 아니다. 아쿠아맨."

"자네가 한 말은 충분히 모욕적으로 들리는군."

아서 커리는 뒤를 돌았다. "만약 발현이 일어난다면 말하겠네. 자네의 '조사'를 위해서."


저스티스 리그를 빠져나온 아서는 뒤늦게야 자신의 반응이 지나치게 예민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위험했다. 그러한 반응은 되레 오해와 의심을 초래할 지도 몰랐다. 아서는 한숨과 함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의 등에 새겨진 네임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그림자처럼 아서 커리의 사념을 따라다녔다. 그의 삶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으나, 문신처럼 새겨져 지울 수 없고 외면할 수도 없는. 어쩌면 아서 커리가 그의 이름의 주인공을 찾지 않는 건 그런 이유일지도 몰랐다. 운명의 수단처럼 여겨지고 싶지 않기에, 그가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한 사람을 반려자로 삼고 싶었기에 말이다. 그리고 매번 아서는 죽기 전까지 어머니를 기다리던 아버지를 생각한다. 아서 커리는 자신 스스로에게 네임이라는 족쇄를 채우길 거부했다.



"사랑해요, 브루스."

브루스 웨인은 미소와 함께 와인잔을 들었다. "건배할까. 당신의 아름다움에."


상대의 환심을 사는 일은 지나치게 쉽다. 그들이 원하는 걸 말하고 보여주면 넘어오게 되어 있는 것이다. 브루스 웨인에게 어렵지 않았다. 그건 정말 약간의 추리력과 가장된 허울을 쓰면 간단한 일이었으니까. 그는 여태껏 그에게 고백해오는 수많은 자들과 그가 자신의 운명의 상대인 것마냥 몸에 문신을 새기고 오는 자들 등 무수한 부류를 만났다. 그리고 그는 어떻게 그들을 적당히 상대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그에게 있어 사람들에게 알려진 브루스 웨인의 모습으로 다닌다는 건 위장을 위한 전술에 불과했다. 쉽게 사람을 사귀고 다른 사람으로 갈아타는 고담의 망나니를 연기하는 일은 항상 쉽지만은 않다. 그건 간혹 누군가의 마음과 배려를 짓밟고 무시해야 한다는 전제를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스토랑에서 나온 브루스는 답답하게 조이는 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그러고보니 요새 이런 타이를 쓰는 사람은 별로 없군. 참고해야겠어.'


타이를 아예 풀어서 길거리에 앉아있던 거지에게 넘겨준 브루스는 고개를 들었다. 밤이 어느정도 깊었지만 도시의 거리들은 하루 중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빛나고 있었다. 

문득 그의 시선에 하늘에서 붉게 타오르는 점이 보였다. 약하게 도는 술기운 때문에 그는 자세히 보기 위해 미간을 좁혔고, 그건 아주 빠른 속도로 점차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상을 향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소리쳤다.


"엎드려!"


엄청난 소음과 함께 지면 위에 파장이 일었다. 쇼크웨이브가 도로를 출렁이게 만들었고 사방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브루스는 바닥에 쓰러진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갈라지는 바닥으로 인해 다시 쓰러진다. 주변에서 뜨거운 불이 요동쳤다. 짐작하건데 아마 폭탄이나 미사일과 비슷한 종류.  그가 더 추리를 하기도 전에 브루스는 자신의 위로 넘어지는 콘크리트 더미를 보았다.

쿠구궁. 바위가 울리는 듯한 굉음에 브루스는 팔로 가리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금빛으로 빛나는 장신의 남자가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괜찮나?"


아쿠아맨이 한쪽 손으로 콘크리트 더미를 받친 채 물었다. 브루스는 놀람을 지울 수 없는 얼굴로, 하지만 입술을 굳게 닫은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초인의 흠없는 이마 위로 흐드러진 금발 사이 푸른 눈이 그가 다친 곳은 없는지 유심히 훑어보는 게 보였다. 그는 콘크리트를 옆으로 밀어내곤 주변을 둘러보며 브루스에게 말했다.


"이 곳에서 얼른 빠져나가는 게 안전할 거다."


그리고 아쿠아맨은 초인의 속도로 날아올라 다른 이들을 구조하기 시작했다. 멀리서부터 엠뷸런스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브루스 웨인은 아주 잠깐 고민했으나, 곧 근처에 쓰러져 있던 사람에게 달려갔다.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는 충돌은 십 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서 일어났고 그 충격은 근방의 도로와 건물들을 모조리 무너트리다시피 했다. 브루스는 상당한 인명 피해가 있을 거라 짐작했다. 만약 아쿠아맨이 때마침 도착해 사람들을 구조하지 않았더라면 더 많은 피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브루스 웨인은 자리를 피하는 것 대신 당장 눈 앞에서 위험에 처한 자들을 돕는 쪽을 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더 많은 엠뷸런스가 모여들고 기자들 역시 하나 둘 도착했다. 그가 다른 한 사람이 구급차에 타는 걸 도운 후 이마를 훔칠 때에 뒤에서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자리를 피하라고 말했을 텐데."


아쿠아맨이 말했다. 그의 비늘과 같은 금색 갑옷이 도시 곳곳에 여전히 남아있는 불꽃의 잔상으로 타오르는 듯 보였다. 브루스는 얼핏 웃었다.


"옆에서 사람이 죽어가는데 등 돌리고 도망칠 순 없죠."

"무모하군." 금발의 남자를 그렇게 말했지만 기분이 나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리고 브루스가 그 자리를 채 피하기도 전에 그를 알아 본 기자가 마이크를 들이대며 쫓아왔다. 어쩔 수 없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를 보는 그에게 기자가 질문세례를 하기 시작했다.


"브루스 웨인 씨! 맞으시죠? 폭발에 휘말리신 건가요?"

"예, 보시다시피. 덕분에 꼴이 말이 아니군요."

"다행이 목숨을 건지셨네요. 다친 곳은 있으신가요?"

"아뇨. 여기 계신 히어로 덕분에 무사합니다."


기자들은 그제서야 아쿠아맨의 존재를 눈치챘는지 그에게 카메라를 돌렸다. 브루스 웨인은 크게 뜬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아쿠아맨을 보며, 만들어진 미소를 지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