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fic/marvel

스팁버키 태양의 도시

스팁버키


태양의 도시





"오늘은 일 안 나가나봐?"

새로 이사 들어온 브루클린의 집은 지나치게 더웠는데, 아직도 버키는 이것이 집의 위치 때문인지, 혹은 세기가 지난 후 심상찮게 벌어지고 있는 지구 온난화 현상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단지 본인이 추위에 너무 익숙해진 것 때문인지 종잡기가 힘들었다. 동거인은 그로 하여금 남향으로 난 창문을 극구 권장하였었다. 버키는 여전히 그것이 생활에 딱히 어느 영향을 미치는 지는 모르겠으나 그거와 별개로 스티브의 방에 햇빛이 들지 않는 것으로 인해 그의 습관에 지장이 생기지 않기를 바랬다. 예를 들어, 아침 햇살이 그의 얼굴 위에서 부서지는 걸 알람 삼아 깨어나는 것이 몸에 베어있던 스티브의 한 때를 버키는 여전히 뇌리 한 구석에서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전기세를 내지 못해 창문을 통해 스며 들어오는 빛으로 독서를 하는 소년이라던가 또는 그의 창가에 종종 내려앉아 자리잡고 스티브가 모이를 주기만을 기다리던 새를 돌보던 청년이라던가 그들은 하나같이 여러 모습을 한 스티브였다. 버키에게 있어 스티브는 여러가지 모습으로 남아있다. 지금의 스티브도 그랬다.

"쉬는 날이야." 버키가 말했다.

"그렇구나."

스티브는 여상스레 대꾸했다. 그는 금발을 쓸어 넘기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사실 브루클린에 자리잡게 된 이유가 그가 살던 곳이었고 또 추억이 남아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라는 감정적인 종류가 아니었다. 버키는 예전의 일을 기억하긴 했으나 그것에 감정적으로 얽메이지 않았다. 과거는 영상물 속의 그림들을 보는 것처럼 드문드문 기억 속에 남아 있었으나 그들은 자신의 얼굴을 한 타인이 주인공인 모종의 영화를 관람하는 것처럼 직접적인 감정의 공유를 선사하지 못했다. 하지만 스티브는 브루클린이 그들 간의 엄청난 일부인 마냥 행동했고 버키는 딱히 그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았다.

반대하지 않았다... 와 할 수 없었다에는 물론 막연한 차이가 있다. 버키는 시선을 들어 자신의 앞자리에 앉은 스티브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간혹 소리내지 않으며 커피를 마셨고, 오른 손으로는 신문의 페이지를 넘겼다. 시월 이십 오 일. 버키는 그 날짜를 여러 번 본 것 같은 생각에 휩쌓이지만 어쩌면 그건 매일같은 일상의 반복으로 인한 상상일 지 모른다.

어찌됬던 간에 버키 반즈가 기억을 찾은 이후 그에게 주어진 아주 제한된 선택권에 있어서 스티브 로저스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앗줄과 같은 역할을 했다. 그는 버키에게 면죄부를 선사했다. 면죄부라 함은 버키가 그 자신이 아니었을 당시 저질렀던 모든 짓거리에 죄송하며 대신의 무언가를 할 수 있을만한 기회를 제공했다는 말이었다. 신랄한 비유라고 생각하기엔 이미 버키에게는 이 보다 더 나은 환경을 바랄 여유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다른 죄인들과 같은 신세가 되어 감옥에서 썩어갈 수도 있었다. 만약 스티브가 아니었더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버키는 그가 자신의 친우가 캡틴 아메리가 임에 감사해야 하나 종종 생각한다. 물론, 별로 시간낭비일 뿐인 생각이다.

"어제 임무에 대해 말 했던가." 스티브가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엄청난 첨탑이 떨어져 베를린 시내 한 복판에 내려 꽂혔지. 네가 그 소식을 티비로 봤었을 지 모르겠군. 마치 신이 던진 번개 조각과 같았어. 도시 중앙이 화산의 분화구처럼 무너져 앉았고 수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그건 요새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 크게 놀라울 만한 소식은 아니었던 것 같아. 대수롭지 않았지. 그래서 네게 말하기를 잊었던 것 같기도 해."

몰두하여 듣고 있던 버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건 자체가 대수롭지 않았던 것을 말하기 위해 얘기한 게 아냐, 버키."

"그렇다면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스티브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어제 넌 어떤 하루를 보냈지?"

버키는 조금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 너도 알다 시피 난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어. 여전히 성 몽고메리 병원에 나가고 있지. 네 말을 들으니 이제서야 언뜻 티비 소리를 들었던 게 기억나는군. 아마 네가 말한 베를린 참사에 관한 이야기였을 거야. 뉴스 진행자들이 시끌벅적 했었으니까. 제레미, 그러니까 내가 돕는 환자들 중 한 명이 시끄럽다며 티비를 꺼 달라고 말했고 난 그렇게 했어. 그는 PTSD를 앓고 있거든. 아마 베트남전이었던가. 그랬던 것 같아.  나 역시 특별한 일은 없었어."

"어제 내게 제레미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잖아."

버키는 약간의 오한을 느꼈다."말 한 대로, 특별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억하지도 못한 일이었어."

"바로 그거야, 버키." 스티브가 잔을 내려놓았다. "제레미와 있었던 일, 네가 오늘 쉬는 날이었단 거. 이런게 내겐 대수롭지 않은 게 아니거든. 버키, 이 곳에 사는 게 싫어?"

의학적으로 버키에겐 더 이상 사고의 문제가 존재하지 않았으나 그는 여전히 스티브와 긴 대화를 나눌 때에 과부하에 걸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스티브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온했으나 버키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심박수가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앞에 앉은 스티브는 굉장히 현실적이었기 때문에 동시에 현실성이 부재되었다. 버키는 당연하게도 상대가 그가 알고 있는 '그의' 스티브 로저스라는 걸 알고 있었으며 그가 늘 이래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버키 반즈는 이러한 일상적인 스티브 로저스에게 조련되어 있었다.

"그렇지 않아."

스티브는 시선을 들어 버키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보란듯이 손을 뻗어 커피잔을 옆으로 떨어트렸다. 큰 소리가 났지만 스티브는 움직이지 않았고, 결국 머뭇거리던 버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무릎을 꿇고 잔을 주워 들 때에 스티브의 발이 그의 기계로 된 손을 지긋이 밟았다. 조금만으로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스티브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말했다.

"네가 이 곳에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네가 내게 특별하기 때문이야. 버키."

버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다신 그러지 않겠다며 기계적으로 말했고 스티브는 그의 사과를 받았다.

날씨는 갈수록 더워지기만 했는데 버키는 이러다가 그의 기계 팔이 녹지는 않을까 염려했다. 대체로 문제가 없는 것이 당연했지만 초인의 발에 밟혔을 경우에는 다르다. 그는 스티브에게 수리를 하겠다 공지했고 스티브는 알았다 했다. 버키 반즈가 딱히 누군가를 알고 있을리가 만무했기에 이번에도 찾아간 사람은 토니 스타크에 불과했다. 어쩌다 금이 갔냐는 질문에 버키는 어깨를 으쓱 했으며, 스타크는 뭐 동거인이나 당신이나 입 무거운 건 비슷하다 말했다. 사실 버키의 염려는 말이 많을 수록 보고해야 하는 것 또한 늘어나게 되며 혹여라도 그가 빠트리는 것이 있다면 스티브가 기분이 상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스티브는 그가 수리를 하고 돌아오면 근사한 저녁을 차려주겠다 말했다. 스타크는 말 없는 그를 보다가 혀를 차고 포기했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예상치 못하게 마주친 복병은 나타샤였다. 버키는 그의 뇌리에 남은 나타샤 로마노프가 지금의 그녀보다 좀 더 차갑고 결여되어 있던 걸 기억한다. 지금의 그녀는 돌아갈 둥지를 찾은 철새같은 모습을 띄었는데 어쩌면 그것이 버키 반즈가 윈터 솔져였을 당시 알고 있었던 '나타쳰카'를 사라지게 만든 계기가 아닐까 싶었다. 나타샤는 그에게 요즘 어떠냐 물었다. 버키는 그가 늘 그러하듯 봉사 활동에 관한 이야기를 했고 그녀는 그것이 딱히 새삼스러운 소식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지하게 경청했다. 그가 저지른 셀 수 없는 죄목으로 인해 봉사 활동은 피할 수 없는 의무 중 하나였다. 피할 생각이 있단 것도 아니었지만... 나타샤는 어렴풋이 걱정하는 표정으로 버키가 병원에서 봉사 활동을 할만한 준비가 되었는 지 모르겠다고 말했는데 거기에 버키는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는 자기 자신을 걱정할 만한 처지가 되지 못했다. 그는 지금과 같이 자유로운 생활을 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입장이었고, 그의 죗값을 갚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던 해야 했다. 당신은 강한 사람이니 괜찮을지도 모르지. 나타샤가 그렇게 말을 흐리더니 곧 그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버키는 스티브를 떠올렸다. 그의 햇살과 같은 머리칼과 빛이 부서지는 푸른 눈동자 따위를 말이다. 나타샤는 그를 강하다고 불렀으나 버키는 그에게 스티브가 없었다면 자신은 순식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란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스티브가 돌아온 건 버키가 돌아온 이후로도 한참 만이었다. 해가 저물어가며 길게 노을을 그려내고 있었는데, 그건 집 안에 오색의 긴 사선들을 남기며 온통 노을의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스티브는 문을 열고 들어와 버키를 보고 싱긋 웃었다.

"장을 봐왔어. 얼마 안 걸릴거야. 버키."

"도와줄까?" 버키는 물었으나 답은 정해져 있었다. 괜찮아. 스티브는 정해진 답변을 하고 부엌으로 향했다.

식사는 놀라울 정도로 그의 기억 속 어릴적 먹곤 했던 음식과 흡사했다. 큼직한 고기가 들어간 스튜와 따끈한 빵, 야채 정도였다. 식사하며 버키는 스티브에게 그의 하루에 대해 말했다. 스타크와 나타샤를 만났던 것 역시 포함이었다. 스티브는 연신 미소를 띈 채 고개를 주억이며 그의 말하는 모양을 구경했다. 버키는 자신이 호두까기 인형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가 알아온 한 스티브는 항상 이래왔고 버키는 그것에 만족했다. 더 이상 창문가엔 모이 찾는 새가 찾아오지 않았고 집 안에는 소설 책이라곤 발견할 수 없었으나 버키는 스티브가 그의 옆에 남아있다는 사실에 더할 나위 없이 감사했다. 식사 후 스티브는 버키에게 방에 들어가봐도 된다 말 했으며 버키는 그렇게 했다. 침대에 누워 버키는 눈을 감았다.

당신은 강한 사람이니 괜찮을지도 모르지.

버키는 스티브를 떠올렸다.

순식간에 아침이 되어 햇살이 그의 눈꺼풀 위에서 부서져 내렸다. 버키는 자신이 더 이상 눈을 감고 있는 것인지 혹은 단지 새하얗게 점멸하는 시야 안에서 그가 꿈을 꾸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스티브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버키. 넌 혼자가 아냐." 

자상한 목소리와 함께 스티브의 큰 손이 그의 목을 감쌌다. 손에 힘이 들어갔고 버키는 익숙한 호흡의 곤란을 겪는다. 버키는 스티브가 태양과 같다고 생각했다. 도망갈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고 어느 새 인식하지 못한 채 그것에 동화되어 간다. 버키는 만족했다. 적어도 스티브는 여전히 그의 옆에 있었으며, 그의 상냥한 족쇄는 버키가 그와 함께 하기를 바랬다. 식은땀이 흘렀다. 버키 반즈는 거대한 첨탑에 꿰인 태양 아래의 부서진 도시였다. 그는 눈을 떴다.



눅눅한 러시아의 지하 감옥엔 고요함 뿐이었다. 버키는 꿈에서 깼다. 여전히, 그는 혼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