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팁버키
단문
(linlang7625 의 중국어 번역 링크 - http://www.mtslash.com/thread-116684-1-1.html)
그러니까, 때는 사 월이었다. 비가 추적추적내리는 우울한 계절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뭘 주겠어?'
버키가 그를 쳐다보지 않으며 물었다. 기억하기로서니, 버키는 아마 노트에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던 것 같다. 대개 종이에 뭔갈 끄적이는 쪽은 버키가 아닌 스티브였기에 그는 유난히도 그 때를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버키는 막사의 벽에 등을 기댄 채 무릎을 세우고 잔뜩 웅크린 자세였다. 스티브는 그런 그가 유난히 작아보인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의 수그려진 정수리 때문이거나, 연필을 긁적이느라 움크러든 어깨 때문일지도 몰랐다. 물론, 사실은 스티브 제가 이전보다 지나치게 덩치가 커졌기 때문일 것이다. 스티브는 괜스레 움츠리듯 팔짱을 꼈다.
'글쎄. 꽃다발?'
'하. 너 답네.'
'그래?'
'그래.'
버키는 고개를 슬쩍 들더니 씩 웃어보였다. 흐트러져 이마 위로 내려온 다갈색 머리에 문득문득 가려지는 눈빛은 지친 기운이 가득했다. 원래 녹빛을 띄는 밤색 눈이 낮게 가라앉아 스티브를 올려다 보다가 다시 아래를 향했다. 바로 새벽까지 아주 힘든 전쟁을 치룬 참이었다. 승리의 기쁨은 잠깐이다. 인간의 몸으로는 쏟아지는 총탄과 죽음에 스러져가는 전우들을 지켜보는 데에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스티브는 문득 이질감을 느꼈다. 전쟁은 그가 전에 보지 못한 친우의 모습들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에겐 뭐든 해주고 싶은 것 아니겠어?'
스티브가 덧붙였다. 버키는 움직이던 손을 잠깐 멈췄다가, 다시 천천히 시작했다. 맞아, 모든 해주고 싶어지지. 버키가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말했다.
'장미. 장미가 좋아.'
로맨틱하잖아. 새빨간 거. 지금 이 계절에는 구할 수 없겠지만. 버키의 짙은 눈꺼풀이 느릿하게 깜박였다. 비가 올 거야. 아마 사흘은 더 오겠지. 아니, 이 주는 올지도 몰라. 돌아갈 때면, 우리가 집에 도착했을 때면 여름일테고 그 땐 모든 공원에 장미가 흐드러져 있을거야. 퀸즈에도, 센트럴에도, 심지어 브롱스에도 말이지. 그걸 한 아름 꺾어서 내밀면 돼. 아무도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군인이 꽃을 꺾는 걸 막지 못할거야. 집에 돌아가면. 그러면 네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꽃다발을 안겨 주는거야. 스티브. 버키가 눈을 들었다.
'그래서,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야?'
스티브는 힘없이 웃었다. 이상하게도 그 말에 비를 맞은 것만 같았다.
꽃은 언제나 좋았다. 보기에도 좋았고, 키우기에도 좋았으며, 그리기에도 좋았다. 스티브 로저스는 딱히 감수성에 젖어 들판 한가운데 피어난 가련한 꽃 한떨기를 보며 눈물젖은 손수건을 훔치는 취미는 없었으나 꽃을 보며 예쁘다 이상의 단어로 표현할 정도는 되었다. 지난 여름에 있었던 뉴욕 사건에서 도시재건축 부분을 일부 담당하고 있던 토니에게 스티브는 센트럴 파크의 완벽하게 파괴되어버린 장미정원을 손봐달라 은근 말해봤다가 역시나, 기다렸다는 듯 히죽거리는 토니 스타크의 놀림 상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자네가 그렇게 꽃에 관심이 많은 줄은 몰랐는걸. 왜, 요새 아침 산보 나가던 정원이 사라지니까 늙은 마음이 헛헛하고 뭐 그런가보지? 남자의 장난기 넘치는 말투에 어느 새 익숙해진 스티브는 그저 한숨 쉬며 고개를 젓는 것이다. 그래. 그렇다고 해 두게나.
스티브는 장미 한 다발을 주문했다. 잠시 후 사과하며, 그것을 팬지 다발로 바꾸었다.
꽃집의 종업원은 스티브를 알아 보았다. 그도 그럴것이 근 이년 여 동안 일어난 일들은 그의 얼굴을 차마 유명해지지 않고는 못 배기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종업원은 그에게 특별히 팬지를 돋보이게 만들 만한 흰 데이지를 섞어 보기 좋은 포장을 하여 내밀었다. 스티브는 가격을 지불하려 했으나, 종업원은 한사코 거절했다. 캡틴 아메리카에게는 서비스에요. 그녀가 웃었다. 스티브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꽃집에서 나왔다. 익숙하지 않다곤 할 수 없었다. 그가 빙하 속에 잠들기 전 이런 대우를 받아보지 못한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시간이 흐르고 세계가 변해도 이런 것 하나는 바뀌지 않는 모양이었다.
뉴욕은 번잡하고 소란스러웠다. 정장을 차려 입고 급하게 도로를 내지르는 사람들과 차들이 경적 소리가 요란했다. 그 와중 흐드러진 꽃다발을 품에 안은 채 느긋한 발걸음으로 걸어가는 남자는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목적지에 다 와갈 때에 스티브는 처마 밑의 그늘에 서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여차하면 사람들에 묻혀 보이지 않을 법한 장소에 의도적으로 서 있는 것이 분명한 남자는 스티브가 다가오자 이미 그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를 응시했다. 아직까지 윈터 솔저였을 때의 버릇을 채 버리지 못한 게 분명하다. 스티브는 그가 다가갈수록 버키의 시선이 그의 얼굴과 품에들린 꽃다발을 번갈아 쳐다보는 걸 발견했다.
"왠 꽃이야?"
인사도 전에 버키가 물었다. 한쪽 팔을 가리기 위한 긴팔의 브이넥에 치노팬츠를 입은 버키의 모습은 꽤나 생소하다. 하지만 스티브는 꽃다발을 쳐다보는 버키의 수그려진 머리의 정수리를 보며 기민한 데자뷰를 느낀다. 차분하게 흐트러진 약간은 길다싶은 그 머리맡을 보던 스티브는 그에 손을 뻗는 대신 꽃다발을 내밀었다.
"오늘 길에 사봤어. 보기 좋길래."
그는 꽃을 받아들었다. 어둔 눈동자가 깜박였다.
버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고개를 한 번 보일 듯 말듯 끄덕였을 뿐이다. 그런 그에게 스티브는 역시 오늘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래. 여름은 멀었다. 그렇게, 조금은 천천히. 조급하지 않게. 우린 지금 너와 내가 흐드러질 여름으로 다가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