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팁럼로우
사랑하는 나의 무기에게
처음에는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고 되받아쳤다. 그러다가 따귀를 맞았다. 따귀를 맞으면서 드는 생각은 역시,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생각 뿐이었다. 브록 럼로우는 고개가 여전히 돌아가 있는 채로 이를 악물었다. 다시 한 번 말 해주시겠습니까? 그가 거의 짓씹어 뱉듯이 한 말에 남자는 역력하게 심기가 뒤틀린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똑바로 들었을텐데, 럼로우. 난 두 번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 럼로우는 대답하지 않고 땅만 쳐다봤다. 지금 제 자신의 얼굴을 보였다간 다시 한 번 얻어 맞거나, 혹은 더한 처사를 당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가 침묵하자 남자는 제 손을 손수건으로 닦더니 그걸 아무렇게나 바닥에 떨구곤 발을 옮겼다. 값비싼 구두 굽이 움직이는 것이 시선에 걸렸다. 그러면 당장 시술 이행할 준비 해. 만약 자네가 하지 않는다면 자네 대신 그 임무를 맡아 할 사람도 많으니, 결정은 신중하게 하는 것이 좋을 거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자는 방에서 남았다. 별 다른 가구가 보이지 않는 오피스에 혼자 남게 된 건 럼로우 그 뿐이었다. 그는 세게 쥐고 있던 주먹을 쥐었다 풀길 반복하며 참고 억눌렀던 숨을 거칠게 토해냈다. 동공이 팽창과 수축을 반복했다.
그는 하이드라의 충복이었으며 상부에서 내리는 그 어떤 지시도 마다하지 않고 행동에 옮길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는 아주 어릴 적부터 하이드라를 위해 일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마 그가 죽는 순간까지 그건 변하지 않을 사실이다. 브록 럼로우는 최대한 차분한 동작으로 제 시계를 확인하고 그의 쉴드에서 나눠 준 보급용 패드를 들어 올렸다. 지금 자신은 임무 차 나와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몇 개의 연락 중에는 그가 이젠 익숙해져 버린 이름 역시 보였다. 럼로우는 스티브 로저스의 통신을 한동안 뚫어져라 보다가, 어금니를 조금 절그럭거리곤, 그것을 꺼버렸다. 꼴도 보고 싶지 않았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그 혼자만 서있던 오피스 안으로 몇 명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하이드라의 요원들과 과학자들이었다. 아마 개중 한 명은 윈터 솔저의 신병을 맡고 있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럼로우는 그의 얼굴을 기억했다. 의사는 그에게 다가오더니 동정심 따위의 감정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따라오게나. 럼로우는 잠자코 그들을 따랐다. 애초에 동정심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다.
시술 동안 그는 깨어있어야 했다. 부분 마취만 허락된 이유는 아직 이 시술에 대한 마취법이 완전히 실험에 성공하질 못하여, 만약 수면 도중 그가 그대로 빈사 상태에 들어가거나 죽어버리기라도 한다면 골칫거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실험체를 죽여버리거나 하는 간단한 문제 때문이 아니라 시술에 필요한 약물의 양이 제한적이었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래서 럼로우는 수술대 위에 누워 거진 여덟 시간 여 동안 천장에 달린 눈아픈 조명을 껌벅이며 올려다 보아야 했고 간간히 채 무뎌지지 않은 고통 때문에 마우스피스 사이로 억눌린 비명을 질러 대었다. 어째선지 데자뷰가 느껴졌다. 그가 기절하려고 눈을 까뒤집을 때마다 링겔을 통해 지각제가 흘러 들어왔고 럼로우는 다시 식은땀에 젖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러길 열 세 번 쯤 반복했다. 시술이 끝났을 땐 거진 밤이 다 되어있었다.
럼로우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인 병실은 하이드라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 익숙한 환경이 쉴드 소속 의료 병동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가 깨어나자 간호사들과 의사들이 달려와 온갖 검진을 하기 시작했다. 생소한 단어들이 그의 귓가를 스쳤다. 심박이 어떻고, 혈액은 얼마나 더 필요하며, 봉합 부위는 어떤지 따위의 말이었다. 럼로우는 그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딱히 입을 열 수 있을 정도의 힘 조차 없었는데 몸을 움직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잠시 후 멍한 시야에 들어온 건 익숙한, 사람이었다. 금발에 푸른 눈을 한 남자는 약간은 급한 모양새로 그의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평소에는 남자로부터 보기 힘든 반응이었다. 다급하다던가, 초조해 한다던가, 혹은 당황하고 있다던가, 그런. 스티브 로저스는 조금 머뭇거리지만 꽤나 안정적인 손길로 럼로우의 한 쪽 어깨를 가볍게 짚었다. 럼로우, 정신이 드나?
럼로우는 뭔가 말하고 싶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입 위에 달려있는 산소 호흡기가 그것을 막는다는 걸 다행으로 여겼다. 내가 이제 당신의 아이를 임신해야 한다고 말하게 되는 일은, 정말이지 추호도 원하지 않았다.
*
그는 제 앞에 놓이는 음식을 보았다. 스프에 빵, 샐러드, 오렌지 주스. 계집애들도 먹지 않을 음식이었다. 럼로우는 그걸 멀뚱히 내려다 보다가 다시 시선만 들었다.
"여기서 뭐 하십니까?"
그의 말은 어쩌면 퉁명스럽다시피 들렸다. 의도하지는 않았는데 저도 모르게 그렇게 나간 모양인지, 스티브 로저스는 희미하게 눈가를 찌푸렸다. 기분이 상했다기 보다는 어딘가 불편함을 느낄 때에 남자가 자주 짓곤 하는 표정이라는 걸 럼로우는 알고 있었다. 것도 그럴 것이 남자의 옆에서 그를 보필하는 척 하고 지낸 것만도 거진 2년이다. 스티브 로저스의 행동 양식에 대해선 아마 그 어떤 쉴드 요원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 그였다. 음, 콜슨은 제외해야겠고. 그가 덧붙여서 생각할 때에 로저스가 식판을 조금 더 앞으로 슬쩍 밀어주었다. 그러더니 까딱, 고개짓을 했다.
"어제 저녁도 먹지 않았다고 들었네."
그건 사실이다. 럼로우는 시술 후 눈을 뜬 다음 통 입맛을 느끼지 못했다. 입 안은 사막처럼 거슬했고 진통제를 평균치 이상으로 투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랫배에서 오는 통증에 연신 헛구역질이 났다. 벌써부터 임신이라도 한 기분이다. 그는 숟가락 끝을 조금 만지작거리다가 천천히 들어올렸다. 바쁘신 양반께서 여기까지 와 주셨는데, 거절하는 것도 좀 그렇다 생각했다. 로저스의 시선이 그의 손을 따라 움직였다.
"이렇게 안 해주셔도 됩니다. 괜찮으니까요."
"대체 어딜 봐서 괜찮다는 말이 나오는 거지?"
"그러니까..." 럼로우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별로 아프진 않네요."
로저스는 제 보기 좋은 입술을 조금 잘근거리다가, 푹 한숨 쉬었다. 그는 자신의 이마 위로 흘러내린 금발을 습관적인 동작으로 쓸어 올렸다. 스티브 로저스는 평소와 다르게 그의 수트가 아닌 평상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건 그를 몇 살은 더 어려보이게 만들었다. 실상은 잠들어있던 기간도 따진다면 럼로우 그 자신보다 두 배는 더 늙었을 몸인데 말이다. 로저스는 답답하다는 듯 한 손으로 제 얼굴을 몇 번 쓸었다.
"미안하네. 윽박지르려고 한 건 아니었어."
럼로우는 픽 웃었다. "제가 애도 아니고. 괜찮습니다."
"그 괜찮다는 말 좀 그만 하면 안 되나? 자네가 겪은 일은 정상이 아니야." 로저스가 결국 미간을 깊게 찌푸리며 손을 휘저었다. "어떻게,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거지? 그리고 대체 왜 자네에게... 아."
로저스는 이번엔 양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었다. 그리곤 병실 한 쪽에 놓인 의자에 털썩 앉더니, 입을 다물었다. 럼로우는 이 상황이 내심 웃기다고 생각했다. 정작 당한 건 저인데 그를 대신해서 화를 내주기라도 하는 꼴인 로저스도 그랬고, 그런 남자를 꼬셔내 애를 가져야 하는 자신의 처지도 그랬고, 마치 블랙코미디 같았다. 하이드라에서 브록 럼로우를 가장 적합한 상대로 고른 건 단순히 그가 로저스와 가장 가깝다면 가까운 위치에 있는 하이드라 요원이었기 때문이었다. 쉴드에 잠입해 있는 하이드라의 일원은 셀 수도 없이 많았으나 개중 스티브 로저스와 가장 많이 접촉하고, 그와 가장 가깝다 부를 수 있을 만한 사람은 브록 럼로우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수 많은 임무를 함께 뛰었고 그 외의 시간에도 스파링을 하거나 훈련을 하는 둥의 시간을 보내곤 했기 때문이다. 물론 럼로우가 그 모든 것을 한 이유는 단순히 위장 임무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는 숟가락으로 묽은 스프를 몇 번 휘저었다. 말이 되지 않는 부분은, 그가 남자라는 데에 있었다. 뱃속에 자궁을 단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남자였다. 여성처럼 남자와 섹스할 수 있는, 질 같은 성기조차 없었다. 하이드라는 단지 그에게 임신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내장 기관을 달아두었을 뿐 그 어떤 것도 바꾸지 않았다. 그리고 럼로우가 알기로 캡틴 아메리카는 스트레이트였다. 그것도 얼음에서 깨어난 이후 여자 손 한 번 잡아봤을까 의심스러운, 꽤나 보수적인 스트레이트. 이 쯤 되면 럼로우 자신의 취향은 논외였다. 그는 이 임무라고 부르기도 우스운 임무에 대해 약간의 회의감과 꽤 많은 환멸감을 느끼고 있었다.
"혹시 기억 나는 건 있나?" 로저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가 발견된 곳은 어떤 폐가였어. 패드는 꺼져 있었고 무기 역시 하나도 보이지 않았지. 자네가 사라져 있던 열 두 시간 동안 일어났던 일을 단 하나라도 기억할 수 있겠어?"
"아뇨." 럼로우는 스프를 한 입 떠먹었다. "기억이 났다면 진작 말했을 겁니다. 아니면 제 손으로 절 이렇게 만든 놈을 죽이러 갔겠죠."
솔직히 말해, 진심이 섞였다. 만약 죽일 수 있었다면 죽였을 것이다. 로저스는 고개를 주억거리듯이 끄덕이더니 잠깐동안 그가 식사를 하는 걸 지켜 보았다. 럼로우는 그 시선을 외면하기 위해 안간 힘을 다 했다. 로저스가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먹는 모습을 봐서 다행이군."
"캡틴이 손수 가져다 준 건데, 먹어야죠."
그의 장난기 섞인 말에 로저스도 조금 표정이 풀어지는 듯 했다. "입맛이 없더라도 조금은 챙겨 먹도록 하게. 간호사들이 많이 걱정하더군."
"당신도요?"
그렇게 말한 럼로우는 자신의 혀를 씹어 삼키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그가 당황한 만큼 로저스는 당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금발 남자는 눈을 조금 크게 떴지만, 곧 단호하다시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그가 한 번 그러했던 것처럼, 럼로우의 한 쪽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물론이지.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
그는 기어코 럼로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하다 말하는 것까지 들어내고야 말았다. 스티브 로저스는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곤 병실에서 나갔다. 그의 뒤로 문이 닫히자마자 럼로우는 침대 옆에 놓여 있던 쓰레기통에 허리를 숙이고 얼마 먹지 않은 스프를 전부 게워내었다. 그는 위액조차 나오지 않을 때까지 그렇게 헛구역질을 해대다가 기절했다. 다시 일어났을 때 로저스가 가져왔던 음식은 온데간데 없었다.
*
럼로우는 병원에 십 사일 여간 있었다. 그 중 일 주일은 단순히 몸을 회복하는 데에 보냈고 나머지 일 주일은 검사 및 진단 따위를 하는 데에 보냈다. 말이 검사지 거의 연구 대상이 되는 거나 다름 없었다. 그는 엑스레이와 같은 걸 몇 번이나 찍어야 했고 혈액 체취를 수도 없이 당했으며 심지어 수 번이나 진찰대 위에 올려져 수술 부위를 확인 받아야 했다. 그건 정말이지 굴욕스럽다는 단어로조차 다 표현하지 못할 기분이었다. 그는 속으로 수십 수백 번 그에게 이런 임무를 내린 남자를 저주했다. 하지만 하이드라는 저주할 수 없었다. 그건 불가능하며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평생 충성을 맹세한 위대한 지도자를 욕보이는 일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럼로우는 왠지 주눅든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다.
그나마 마음에 드는 건 그에게 따로 머물 수 있는 거처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다른 팀원들과 함께 쉴드의 숙소에서 공동 생활을 했으나 쉴드에서는 한동안 그에게 따로 집을 제공하여 그 곳에서 요양하며 지내도록 했다. 물론 럼로우는 그가 완전히 쾌차했다는 사실을 어필하려고 했으나 쉴드에선 거의 반 강제적으로 그에게 휴가 비슷한 걸 내려주었다. 생각해보면 두 손 들고 반길 일이긴 했는데, 스티브 로저스와 조금이라도 더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을 늘려야 한다 생각했던 럼로우에게 있어서 그다지 달가운 소식만은 아니었다. 그는 이 와중에도 임무를 하겠답시고 생각하는 자신에 정말로 웃음이 나왔다. 그는 비밀번호를 누르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워싱턴DC 도심에 위치한 아파트는 필요한 가구들이 있었고 내부가 멀끔했다. 지나치게 깨끗한 것만 뺀다면 혼자 사는 남자의 집 다웠다. 그는 간만에 패드를 켰고 다른 팀원들에게서 들어온 통신들을 확인했다. 그를 대신해서 다른 대원이 임시 리더가 된다는 말과 더불어 빨리 쾌차하시라는 둥의 이야기였다. 브록 럼로우에게 자궁이 생겼다는 소식을 알고 있는 사람은 지극히 소수 뿐이었다. 쉴드 내의 의료진들과 몇 고위 레벨 요원들 그리고 스티브 로저스 정도였다. 적어도 럼로우 그보다 아랫 계급에 있는 사람들은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단순히 임무 중 꽤 심각한 부상을 당했거니 했을 뿐이었다. 럼로우는 쉴드에서 그에게 준 가짜 시나리오를 머릿속에 되뇌였다. 그가 얼마 안 되는 짐을 풀 때에 통신이 하나 들어왔다.
'도착했나?'
발신인은 스티브 로저스였다. 앞뒤 없는 메세지였지만, 로저스 역시 그가 거처를 옮긴다는 소식을 들은 모양이었다. 럼로우는 대충 패드를 찍었다.
'예.'
'내가데리러가려고했는데.'
럼로우는 픽 웃었다. 어지간히 급했는지 여전히 패드가 익숙하지 않은 건지 혹은 둘 다인지, 스티브 로저스의 메시지는 엉망이었다. 럼로우는 괜찮습니다 라고 적었다가 다시 지우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보냈다. 그는 통신기를 끄고 진통제를 몇 알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그가 먹어야 하는 다른 약병을 들었다. 호르몬제였다.
남자의 몸에 있어선 안 되는 장기가 생겼으니 그의 호르몬 수치는 정상이라 하기 힘들었다. 애초에 그는 꽤나 남성적인 성격이었는데, 거기에 여성 기관이 생기니 여성호르몬과 뒤섞여 몸 상태가 괴이해질 거라 의사들이 말했다. 그 약은 여성 호르몬을 억제하고 자궁의 기능을 최대한 억누르는 역할을 해야 했다. 럼로우는 잠시 그것을 보다가 화장실 변기 안에 내용물을 쏟아 넣고 물을 내렸다. 대신 그는 하이드라에서 그에게 몰래 밀입해 준 다른 약을 꺼냈다. 그건 그가 잠깐 전 들었던 약과는 거의 상반된 효과를 내는 종류일 것이었다.
두어 알을 삼킨 럼로우는 그가 속을 비워낸 병 안에 그 약을 대신 옮겨 담고 찬장 위에 올려 두었다. 그는 푹신하고 넓은 소파 위에 길게 누워서 티비를 켰다. 티비에선 아주 오래 된 시트콤이 재방송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서 깔깔거리며 나오는 웃음소리를 배경으로, 럼로우는 죽은 듯이 잠에 빠졌다.
쿵쿵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을 땐 해가 저물 무렵이라 창 밖이 껌껌했다. 여태 켜져있는 티비만 번쩍이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현관문을 두들기는 소리는 점차 커져 거의 난동을 부릴 정도였고 럼로우는 약간의 신음 소리를 내면서도 재빠른 동작으로 몸을 일으켰다.소파 밑에 넣어두었던 총을 꺼내 허리 뒷춤에 집어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현관문의 구멍을 통해 상대가 누군지 확인했다. 그의 표정이 조금 묘하게 변했다. 예상하지 못한 손님이었다.
"로마노프?"
그가 천천히 문을 열자 붉은 머리의 러시아인은 성큼 발부터 들여놓고 보았다. "생각보다 멀쩡해 보이는걸, 럼로우."
나타샤 로마노프 집 안으로 들어오더니 한 번 휙휙 둘러보았다. 누가 스파이 아니랄까봐 새로운 환경은 먼저 살피고 보는 게 습관이나 다름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를 찾아온 데엔 다른 이유가 있을 터였다. 애초에 그가 아프다고 해서 병문안을 와줄 만큼 로마노프와 친한 사이도 아니었으며, 그녀가 그럴 만한 위인도 아니었다. 적어도 그녀는 자신의 '진짜' 상태에 대해 모르는 건 확실했다. 아무리 그녀가 냉혈한이라 해도 그걸 알고서도 저렇게 굴 만큼 그녀의 성격이 못되먹은 건 아니어서다. 럼로우는 현관문 께에 어깨를 기대고 서서 팔짱을 꼈다. 나타샤는 자신의 육감적인 골반에 양 손을 얹더니 그를 돌아보았다.
"이사한 기념 파티는 안 할 거야?"
"나타샤."
"아, 잘못했으니까 이름으론 부르지 마. 네가 내 이름을 부르면 뭔가 소름돋거든." 로마노프는 그에게 또각이며 걸어오더니 손에 들고 있던 걸 휙 넘겨주었다. "집들이 선물."
럼로우는 그걸 받아들었다. 종이백을 열어보자 안에는 몇 가지 음식이 있었다. 인스턴트부터 해서 빵이나 과일도 있었고, 우유도 있었다. 럼로우는 그 중에서 초콜렛 상자를 꺼내 들고 로마노프에게 눈썹을 휘어보였다. 이게 다 뭐냐는 무언의 질문에 로마노프가 어깨를 으쓱 했다.
"캡이 가져다 주라길래. 그는 지금 임무 중이야."
"농담하지 마."
"어떤 부분을? 캡이 그랬다는 거? 아니면 임무 중이라는 거? 공교롭게도 양쪽 다 사실이야."
"캡이 어째서 내 장을 다 봐주는 건데?"
"그건 내가 묻고싶은 거였어." 로마노프가 턱을 조금 치켜들며 묘한 시선을 보냈다. "고작 총상 몇 발 입은 게 전부인 부하한테 일일이 장을 챙겨 줄 정도로 한가한 사람이 아니거든, 캡은."
더군다나 나에게 부탁까지 해서 말이지. 그녀가 중얼거렸고 럼로우는 정말이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해야 할 지도 모르겠거니와 있다 해도 제대로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허튼 소리를 한다면 예리한 스파이는 그를 쉽게 간파해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럼로우는 능청맞게 웃는 쪽을 택했다.
"남자간의 전우애라고 할까. 뭐 그런 거지."
로마노프는 코웃음 쳤다. "전우애같은 소리 하네."
전쟁도 참가해 본 적 없는 애송이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분명. 럼로우는 조금 발끈하는 걸 느꼈지만 그가 뭐라 하기도 전에 로마노프는 손을 팔랑거리며 현관문을 넘어 가고 있었다. 많이 먹고 푹 쉬어, 아가야. 하면서 빈정대는 것도 잊지 않았다. 럼로우는 계단을 내려가는 그녀를 보다가 현관문을 닫고 주방으로 왔다. 종이백을 거꾸로 뒤집으니 내용물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는 허, 하고 헛웃음을 쳤다.
이거, 나름 잘 되어가는 거라고 봐야 하나. 그는 막연하게 생각하며 음식을 그대로 방치하곤 방으로 들어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