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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팁버키 에콥님 리퀘



스팁버키

에콥님 리퀘


고공함락







버키 반즈가 전쟁터로부터 살아 돌아오고 나서 약간의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스티브는 그를 영화 상영관으로 데리고 갔다. 그 때 쯤에 버키는 그가 포로로 잡혀있었을 때에 입었던 부상을 전부 치료한 상태였고 예전처럼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회복했다. 그는 파상풍에 걸렸었고 왼쪽 견갑골에 금이 갔으며 폐렴의 증상을 보이고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리고 놀랍게도 멀끔하게 예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왔다. 물론 모든 군인들이 버키 반즈처럼 완벽한 치료의 기회를 얻은 건 아니었다. 그에는 스티브 로저스의 영향력이 컸다. 그는 슈퍼 솔저가 된 이후로 꽤나 가까운 사이가 된 하워드 스타크에게 버키 반즈의 치료를 개인적으로 부탁했으며, 하워드 스타크는 그가 아는 최고의 의사들에게 슈퍼 솔저의 친우이자 부상을 입어 몸이 너덜거리는 버키 반즈의 신병을 맡겼다. 하워드는 의사들에게 따로 돈을 찔러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스티브 로저스에게 그 말을 하는 건 고의적으로 잊어버렸다. 버키 반즈는 쾌차했으며, 스티브는 하워드 스타크가 그가 채 알지 못하는 과학 기술의 힘으로 그를 고쳐 놓았다고 생각하곤 감사 인사를 표했다. 하워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 정돈 뭐 별거 아니었네. 이제 자네의 건강해진 친구와 함께 짧게나마 즐거운 여가 시간을 즐기도록 하게나. 곧 다시 전쟁터로 나가야 할 테니. 스티브는 고개를 끄덕이고 버키를 찾았다. 약간의 대화 후에 버키는 글쎄, 영화관? 하고 별 감흥없이 제안했고 스티브는 알았다 했다. 사실 그는 버키가 말하는 그 어떤 거라도 들어줄 의향이 있었다. 버키는 죽을 뻔 했으며, 스티브는 조금 더 절박해졌다. 문제는 영화관에 갔을 때에 일어났다.


때는 여전히 전쟁이 한창일 시기였고 영화관에 걸린 영화 중 9할은 당연하게도 전쟁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건 다큐멘터리 형식이기도 했고 혹은 전쟁 장면을 재현하거나 용감한 미국 용사의 일대기에 관한 것이기도 했다. 그 외엔 포스터만 봐도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로맨스 영화가 한 개 있었다. 스티브는 그가 스탈라그 제15 수용소를 침공했을 당시 얼굴이 나오는 영상을 보러 들어가고 싶진 않았다. 버키와 그걸 보는 건 정말 생각만으로도 민망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둘 다 로맨스 영화에는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선택된 건 독수리의 비상인지 뭔지 하는 엇비슷한 제목을 가진 영화였다. 그건 한 명의 볼품없고 약하던 미국인 병사가 단신으로 적진을 뚫고 들어가 베를린의 나치 의사당에 폭탄을 투하하는 식의 내용이었다. 스티브는 보면서 어딘가 불편해졌다. 총소리가 난무하는 가운데 스티브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버키를 확인했다. 버키의 얼굴엔 흑백의 음영이 가득 드리워져 낯선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어둔 그림자가 일렁였다. 버키는 좌석의 팔걸이를 부서트릴 것처럼 세게 움켜쥐고 있었다. 스티브는 심장이 철렁 떨어지는 기분과 함께 얼른 버키의 팔을 붙잡았다. 나가자, 우리.


"자네가 실수했네. 완전."


하워드가 비식거리며 말했다. 스티브는 자조적으로나마 웃고 싶었으나 실패했고, 대신 답답한 듯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술집 내부는 그들과 다른 몇 군인들을 제외하면 한산한 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군복 입은 자들은 각각의 임무를 수행하느라 정신이 없을 시기였다. 비록 스티브 로저스를 포함한 그의 몇 부대원들은 잠시 미국에 돌아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지만, 다들 그런 기회를 얻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산한 평일의 이른 저녁 술집 내부는 두런두런 들리는 낮은 말소리들과 낮게 돌아가는 축음기의 노랫소리, 컵 따위를 헝겊으로 닦고 있는 술집 주인의 느긋함이 비춰졌지만 그 밑에는 감출 수 없는 긴장감과 피로가 잦게 깔려 있었다. 그리고 스티브는 그 도랑물과 같은 분위기에 양 발을 담그고 선 듯한 느낌이었다. 슈퍼 솔저가 된 이후 쉽게 느끼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감각이다. 하워드는 그가 왜 그런 기분을 느끼는지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반즈가 자네를 한 대 치거나 하지 않은 게 용한데. 나같으면 그랬을거야." 하워드가 장난인지 진담인지 모를 목소리로 말하며 손 안의 술잔을 가볍게 돌렸다. "근데 뭐, 먼저 영화를 보러가자 제안한 건 그 쪽이었으니 책임은 반반이지. 나같아도 그 보잘 것 없는 로맨스 영화는 선택하지 않앗을테니까. 그거 아나? 그 영화에 나온 여배우가 말이지..."

"그 여배우는 아마 스타크 씨와 따로 깊은 친분이 있는 분이었거나 했겠죠." 스티브가 말을 가로챘고 하워드는 히죽거렸다. 스티브는 낮게 한숨 쉬었다. "많이 상처입었겠죠? 제가 상상한 것보다 더."

"겉으로 보이지 않는 상처는 자네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냐."

"하지만 전 책임감을 느낍니다."

"잘못된 영화를 보여줘서 그의 트라우마를 헤짚어 놓은 것 때문에?"

"그것도 그렇고, 모르겠어요. 여러가지로요."

"사서 짐을 짊어지는 양반이구만."


하워드는 그렇게 말했지만 전부 나무라는 것만 같지는 않아 보였다. 하워드는 이런 스티브 로저스의 성격을 흥미롭게 생각했고, 한편으로는 마음에 들어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만큼 남자는 겉으로 드러냄에 있어 솔직했다. 스티브는 이제 예전과 달리 잔뜩 넓어진 그의 어깨를 조금 움츠리며 손 안에 들린 위스키 잔을 내려다 보다가, 저만치 떨어진 테이블에 앉아 있는 버키를 보았다. 버키는 스티브도 알고 있는 몇 명의 군인들과 테이블에 둘러 앉아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마, 저 혼자 강해진 것 때문인 듯 합니다.


그들은 항상 나란히 걸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버키 반즈가 스티브 로저스보다 한 걸음 앞서서 걸었던 것일테다. 스티브 로저스는 이제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바뀌어버린 자신과,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 버키의 시선에서 이질감을 느낀다. 질투? 질투와는 다르다. 그건 질투라기보단 일종의 배신감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 조차 스티브는 버키를 배신하는 기분이라고 느꼈다. 하워드는 바에 기대고 있던 등을 떼어내며 술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자네는 원래부터 강했어. 바뀐 거라곤, 이제 그 강함을 겉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된 것 뿐이야."


그러더니 남자는 그의 어깨를 손으로 툭 두드리며, 행운을 빈다고 말 하더니 걸어갔다. 하워드는 나가는 도중 그에게 인사하는 몇 군인들을 대충 받아주다가 버키를 향해 뭐라 몇 마디를 건넸다. 그 말을 들은 버키는 고개를 돌려 스티브의 쪽을 보았고, 스티브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죄 지은 꼬마가 된 기분이다. 하워드가 술집에서 나가자 버키가 비척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스티브에게 걸어왔다. 눈이 조금 흐려져 있고 입술이 느슨한게, 분명 적잖이 취한 모양이다. 하지만 스티브는 버키가 전부 술에만 취한 건 아닐 거라 생각했다.


"헤이, 솔져."


버키가 히죽 웃었다. 스티브는 버키가 그가 기억하는 모습과는 조금 달라 보인다 느꼈다. 마치 자신이 바뀐 것처럼, 버키 역시 그들이 서로를 만나지 못한 사이에 변해 있었다. 다른 점이라곤 스티브 자신은 그의 선택으로 인해 변한 것이라면 버키는 그렇지 않았던 것일테다. 물론 전쟁에 참전하는 선택을 한 건 버키 반즈 그 자신이겠으나 그 속에서 겪을 고통과 참담함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버키는 조금 더 눅눅해졌고, 조금 더 가라앉았다. 마치 그가 품고있던 모든 햇살과도 같은 기운을 모조리 소진해버린 것처럼. 스티브는 조금 초조하게 눈을 굴렸다.


"좀 괜찮아?"

그가 묻자 버키가 픽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만 둬."

"뭘?"

"날 무슨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유리처럼 대하는 거 말야."


스티브는 저도 모르게 혀를 깨물었다. 그는 영화관에서 쫓기듯이 뛰쳐 나온 이후를 떠올렸다. 버키는 과호흡이라도 걸린 것처럼 숨을 헐떡거렸고 푸른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팽창된 동공에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스티브는 그를 부여 잡았고 버키는 스티브의 잘 다려진 군복을 움켜쥐며 신음했다. 총소리가 멈추질 않는다고 버키가 알아듣지 못할 단어들 사이에 중얼거렸다. 스티브가 그 때를 생각하고 있단 걸 알았는지 버키가 무거운 시선으로 슬쩍 웃었다. 스티브가 말했다.


"미안해. 내 불찰이야."

"뭐가. 내가 놈들에게 잡혀 고문당하고 탄광에서 부려먹혀진게?"

뺨을 맞은 것처럼 입을 다무는 스티브에 버키가 가볍게 혀를 찼다. "꼴사납게 굴었어. 잊어줘. 생각보다 술을 많이 마신 모양이야."

"버키."

"유난스럽게 굴 생각은 없어. 다들 겪는 일이잖아. 그렇지?"

"그래. 그렇지."

"네가 바뀐 모습, 보기 좋군 그래." 버키가 몇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오자 술 냄새가 훅 풍겼다. 그제야 스티브는 그가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짐작했다. 버키는 스티브의 군복 너머 팔뚝을 느릿하게 만지며 조금 끌끌거렸다. "이젠 내 손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데."

"네 한 손에 잡혔던 게 비정상이었던 거겠지."

"알아. 하지만 난 네 비정상일 때의 모습이 좋았어."


문득 스티브는 자신이 변한 것에 버키가 얼마나 이질감을 느끼고 있을지 상상했다. 그가 변한 것이 싫었을까? 자신이 저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가 적을 물리치는 용사가 된 것에 거리감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스티브는 이 일로 인해 버키가 그로부터 멀어지게 될 까봐 두려웠다. 그는 버키를 잃고 싶지 않았다. 만약 버키가 그를 떠나게 되는 이유가 자신이 슈퍼 솔저이기 때문이라면 그는 죽은 에스카인 박사를 붙들고 그를 원래대로 돌려달라 하고 싶은 마음도 적잖이 있었다. 대신 버키는 스티브가 그런 우울한 사념에 빠진 채로 그를 쳐다볼 때에, 흔들거리는 걸음으로 한 발짝 더 다가왔고 스티브는 반사적으로 그가 쓰러질까봐 손을 뻗어 허리를 붙잡았다. 버키는 움푹 들어간 허리선과 마른 근육이 느껴질 정도로 살이 빠져 있었다. 그는 비틀거리는 듯 하더니 고개를 기울여 스티브의 입술 위에 제것을 꾹 누르더니 고개를 푹 수그렸다. 스티브는 얼빠진 기분으로 자신의 한쪽 어깨에 이마를 묻은 채 낄낄거리는 버키의 등을 내려다 보았다.


"그래도 아직 널 놀래킬 수는 있는 모양이네."


자조적인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웅웅 울렸다. 버키는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스티브의 눈을 마주 보았다. 버키의 한 손은 어느 새 스티브의 드러난 뒷목을 느릿하게 문지르고 있었고, 시선으로는 뭐가 잘못됬냐는 듯 뻔뻔하리만치 웃음을 띠고 있었다. 스티브는 버키가 단순히 충동적인 고약한 마음으로 그에게 입을 맞췄다는 걸 짐작했다. 고약한 장난질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스티브는 자신 역시 그처럼 취기를 빌미삼을 수 없다는 것에 조금 한탄하고 싶었다. 만약 그가 여기서 버키 반즈의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줘 끌어당기고, 다시 한 번 입을 맞춘다면, 아마 그들 중 누가 더 비겁한 놈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