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상실 럼로우 단문
기억의 부재는 선동의 방아쇠다. 럼로우는 모니터에 띄워올려진 남자의 얼굴을 핥듯이 훑었다. 길거리에 나가면 포스터나 광고 문구 한 두줄 정도는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남자란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얼기설기 엮어진 머릿속에서 촘촘히 들어찬 무언가가 그의 시냅스를 조롱하고 비웃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아슬아슬하게 머리꼭대기까지 차오르다가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의 거품처럼 산산히 흩어지는 그것, 기억이라는 것. 그건 곧이어 생각해내려 하면 할수록 점차 흐릿해지는 꿈의 잔상처럼 메스꺼움만을 남기고 사라지고는 했다. 럼로우는 자신의 뇌가 누군가로부터 반쯤 잘려나간 기분을 느끼며 입술을 비틀었다. 한 두 번이 아니다. 이건 매번 그를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나게 만들었다.
웃기는군, 고작 도구인 주제에. 그 목소리에 럼로우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중년의 남자는 그의 얼굴을 보며 불쾌감과 흥미가 모두 엿보이는 감정을 드러냈다. 다시 한 번 그 느낌이 몰려온다. 이 사람을 모르는데도 분명 알고 있다는 기분이 역력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조차 럼로우는 그가 이 남자의 말을 들어야하는 위치에 있다는 걸 자각했으며, 그건 지극히도 자연스러워서 그에게 어떤 굴욕감조차 주지 못했다. 순종적으로 시선을 내리는 럼로우의 한 쪽 뺨을 남자는 제 손바닥으로 상냥하지 못하게 두어 번 두들겼다. 그건 서열을 확정짓는 행동이다. 럼로우는 자신의 마음 속에서 고개를 들어올리던 일말의 선동의 기미조차 그 행동으로 하여금 자취없이 바스러지는 것을 깨닫는다. 남자가 말했다. 자넨 단지 자네가 할 일만을 하면 되는 거야. 지금까지 잘 해왔잖나? 난 실망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네. 뭘 해야할지는 알고 있겠지? 남자의 말 끝에는 도구 라는 단어가 빈틈없이 들어차 있다. 브록 럼로우는 도구였다. 그는 시선을 돌려 다시 모니터를 보았다.
처음에 타겟은 브록 럼로우의 어디가 이상한 것인지 전혀 자각하지 못했다. 럼로우는 럼로우였으며, 그건 그가 타겟의 근처에서 맴돌던 꽤나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나도 전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변함이 없다는 말은 그가 철저하게 모든 사람을 마치 매번 처음 보는 것처럼 대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거리를 두는 거라고 생각했다. 상처가 많은 자들이 그러하듯 말이다. 그리고, 로저스는 상처가 많은 자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타겟이라는 건 여전히 자각하지 못한 채- 럼로우에게 그만의 거리를 존중해주기 위해 노력했다. 애초에 로저스가 공들여 다가갈 만큼 관심을 부추기는 사내도 아니었거니와 그럴 만한 접점도 없어서였다. 럼로우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그의 임무는 잘 생긴 금발머리의 타겟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찰하는 것에 그쳤기에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리고 브록 럼로우는, 한동안은 이 지루하고 긴박감없는 임무가 지속되길 바랬다. 기억의 부재는 그를 어떤 변화로 하여금 불안하게 만들었다. 윈터 솔져는 매번 브록 럼로우와 마주할 때마다 그 특유의 얼굴 반을 가려버린 마스크 위 드러난 퀭한 눈으로 무감동스러운 동정심을 보여주곤 했다. 동정심? 빌어먹을, 심지어 저 기계같은 놈도 그에게 동정을 보내는 마당이었다. 럼로우는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깊이 빨아들였다. 그가 조소하듯 중얼거렸다. 짜증나는 일이지. 뭔가 잊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대체 뭔지 알 수가 없어. 난 지금 너를 처음 보는 것 같거든. 근데 난 너에 대해 빠짐없이 알고 있기도 하단 말이야. 네가 그 기계팔로 몇 놈의 모가지를 부러트렸는지도. 윈터 솔저는 그의 말에 눈가를 움찔거렸다. 그는 뭔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코 아래부터 얼굴 하관 전체를 덮은 마스크때문인지 침묵을 고수했다. 럼로우가 그걸 측은하게 느낄 때에 윈터 솔저는 제 뒷춤에서 권총을 꺼냈다. 그는 지극히 단조로운 동작으로 총을 장전했다. 철컥, 하는 소리가 울렸다. 럼로우는 뿌연 담배 연기 사이로 시선을 들었다. 머릿속에서 동시에 철컥이는 소리가 났고, 그는 자신에게 장전된 총을 건네는 윈터 솔저에게 물었다.
"하지만 왜?"
대답없는 질문은 그의 손에 방아쇠를 쥐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