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팁럼로우
사랑하는 나의 무기에게
하긴, 아주 짐작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남자는 무려 미국을 대표하는 아이돌이었다. 비록 본인은 그 자리에 대해 부담감을 느끼는 모양이었지만, 그는 타고난 사람이었다. 그는 태생적으로 사람들 앞에 서서 그들을 이끌 줄 알았고 그 누구보다도 이상에 가까운 현실을 주도할 수 있는 거의 유일무이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스티브 로저스를 보는 주된 시선이 그러했단 것이다. 유니폼에 미국의 별을 달고 미국 국기무늬가 그려진 방패를 들고 다니는 사람인데 어떻게 미국인 됨으로써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이드라의 요원인 그의 입장에서는 긍정하기 힘든 말이었으나 사실은 사실이었다. 스티브 로저스는, 그 누구보다 막중한 의무감과 책임감을 어깨 위에 얹고 사는 미국의 핀업 스타였다.
하지만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이지 않은가? 럼로우는 눈썹을 휘었다.
"책임감이요? 왜 책임감을 느끼십니까?"
그의 비뚜름한 질문에 로저스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이야기에 대해 말하기를 꺼린다는 것이 아니라, 설명하는 데에 어려움을 보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로저스는 천천히,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자네가 납치되었던 당시 우린 임무 중이었지. 스트라이크 팀원들이 경비를 제압하는 동안 나는 록손 사의 내부로 침투해 그 정보를 빼돌려내야 했네. 도중 예상치 못했던 적을 만나 시간이 지체되었고, 난 자네를 불렀지. 계획대로였다면 럼로우 자네가 내 뒤를 맡아야 했으니 말이네. 그 때였어. 자네의 대답이 들리지 않았고, 난 그 때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느꼈네."
"그건 죄송하게 됬습니다."
로저스는 고개를 저었다. "사과를 듣기 위해서 한 말이 아냐. 난 자네를 포함한 스트라이크 팀을 지휘하는 위치에 있었어. 자네가 대답하지 않았을 때에 난 가만히 있어서만은 안되었네. 임무밖에 생각하지 못했던 거야. 누군가를 보냈어야했어. 아니면 임무가 끝나자마자 내가 직접 수색팀을 끌고 나서기라도 했었어야..."
"이봐요. 캡."
"그게 내 의무였어." 로저스가 정죄하듯 말했다. "난 내 사람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거라네."
스티브 로저스는 뼛속까지 군인이다. 브록 럼로우 역시 군인이라면 군인일 테지만, 그와는 종류가 다르다. 로저스는 마치 책 속에서 튀어나온 표본과 같았다. 그는 자신의 사람, 그의 부하와 전우를 그 누구보다도 더 신경 쓰는 사람이다. 럼로우는 내심 윈터 솔저를 떠올렸다. 지금쯤 냉동 튜브에 있을 남자에 대해, 로저스는 두어 번 정도 이야기를 꺼낸 적 있었다. 그가 자신의 친우이자 전우였다는 윈터 솔저, 제임스 반즈을 잃은 것에 대해 얼마나 많은 죄책감을 갖고 있는지. 그를 눈 앞에서 구하지 못한 것 때문에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그에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오고 있는지. 비록 남자가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의 마음이나 생각은 진절머리 나도록 강하게 느껴지곤 했다.
결국 그와 비슷한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스티브 로저스의 휘하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럼로우는 '사고'를 당했다. 스티브 로저스는 자신이 그 책임을 도맡았다. 그래서, 그는 지금 럼로우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럼로우는 웃고 싶어졌다. 그는 간신히 웃음을 씹어 삼켰다.
"캡, 난 어린 애가 아닙니다."
로저스가 가라앉은 시선을 들었다. "알고 있네. 하지만..."
"캡이 하는 말은 날 모욕하는 것 밖에 안되요. 당신 잘못이라고요? 내가 이렇게 된 게?"
"럼로우."
"내가 스스로 한 몸 지키지도 못해 망할 자궁이 생겨버린 게, 당신 책임이란 말입니까?"
럼로우는 그렇게 말한 후 토하고 싶어졌다. 자궁이라는 단어를 제 입에 담은 건 처음이다. 그건 생각보다도 훨씬 더 구역질 치미는 것이었고, 그는 순간 허벅지에 걸린 나이프를 빼내 자신의 배를 가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충격을 받은 건 로저스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캡틴 아메리카의 얼굴은 순간 핏기가 빠진 것처럼 새하얗게 질렸고, 로저스는 제 입술을 짓씹었다. 하지만 그런 얼굴을 봐도 기분이 풀리지는 않았다. 럼로우는 조금 헐떡거리면서 웃었다.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군요. 무능한 부하를 둔 것도 잘못이라면 잘못 아니겠습니까?"
그는 그렇게 씹어 뱉듯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요란하게 뒤로 밀리는 소리가 났다. 로저스는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팔뚝을 잡아왔지만, 럼로우는 조금 매섭다시피 그걸 뿌리치고 회의실에서 나왔다. 그는 뒤에서 따라오는 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쉴드 건물에서 쫓기듯이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온 그는 쑤셔오는 아랫배를 부여잡은 채 휘청였다. 헛구역질이 나왔다. 높이 뜬 해가 쉴드 건물의 그림자를 그의 몸 위로 길게 드리우고 있었다.
저 그림자에서 영원히 도망가지 못할 것만 같았다.
*
신경질을 낸 건, 확실히 과민반응이었다. 자신이 몸을 바친 기관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뚜렷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심적으로 그는 이 모든 상황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게 분명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꽤나 곤두서 있던건지 몰라도 어쩌면 괜찮다 괜찮다 되풀이하는 자기 세뇌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인지, 브록 럼로우는 그에게 닥친 일에 굉장한 부담과 피로와 환멸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그에 원흉은 남자, 스티브 로저스에게 있었다. 그의 몸이 변형되어야 했던 것에도, 임신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을 치뤄야 하는 사실에도, 그가 이 년 동안 충실한 팀원을 연기하며 스파이 짓을 하고 있는 것에도, 그 뿌리가 닿는 곳엔 스티브 로저스라는 인물이 존재했다. 자신의 타겟이 되어야 하는 남자가 아무 것도 모르면서 죄책감이니 책임감이니 지껄이고 있는 말에 럼로우는 참을 수 없는 역함을 느꼈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위에서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사흘을 더 주겠다는군요."
롤린스가 말했다. 럼로우는 그를 돌아보지 않은 채 그래, 하고 대답했다. 롤린스는 그가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티비에서 눈을 떼지 않는 브록 럼로우를 내려다보았다. 남자는 소파에 미동없이 앉아 있었는데 그는 그의 체구에도 불구하고 평소보다 조금 더 작아보인다. 그는 럼로우가 땀을 흘리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괜찮은 겁니까?"
"무슨 참견인데."
럼로우가 건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상태가 좋은 것만 같지는 않아 보였으나, 롤린스는 브록 럼로우가 얼마나 견고한 사람인지 알았다. 럼로우는 하이드라의 충실하고 실력 있는 요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이런 남자가 맞은 상황을 조금 유감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 보단 남자가 그의 임무를 제대로 완수해내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럼로우는 여전히 목석처럼 서있는 롤린스에 한숨을 조금 쉬며 손을 휘저어 보였다.
"화장실 찬장."
롤린스는 그에게 약을 찾아와 건네 주었다. 호르몬제와 진통제였다. 럼로우는 몇 알을 대충 씹어 먹었다. 그는 뻑뻑한 입술을 손등으로 쓸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이틀이면 충분해."
롤린스는 고개를 끄덕이곤 곧 집에서 나갔다. 들어올 때만큼 조용하게 나가는 그의 인기척이 사라지자 럼로우는 땀에 젖은 제 얼굴을 양 손으로 쓸었다. 지쳤다. 지치고, 피로했다.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남자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자네가 그렇게 된 건, 내 책임이지 않나. 로저스가 그에게 말하고 또 말한다. 내가 자네를 구하지 못한 거라고, 그가 마주했던 그 어떤 사람보다도 더욱 진지하고 무게있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럼로우는 그 목소리에 기대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에 기대면 조금이라도 이 무게가 덜어질 것 같아서 내심 약간의 기대를 하고 있는 자신에 헛웃음이 나왔다.
로저스가 책임을 느끼는 만큼, 브록 럼로우에게도 그가 지켜야 할 책임이 존재했다. 그건 자신의 임무였고 더도 덜도 아니어야 했다. 럼로우는 호르몬제를 더 삼켰다. 약한 자는 죽는다. 그가 알아야 할 건 그것 뿐이었다.
*
스티브 로저스에겐 따로 집이 없었다. 브루클린에 있는 집은 찾지 않은지 오래였다. 그럴 만한 시간도 여유도 없었지만 브루클린에 가는 건 항상 그로 하여금 과거를 추억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스티브 로저스는 과거를 떠올릴 수록 감상에 젖어가는 자신에 조심하기 위해 노력한다. 간혹 그건 그를 지나치게 감성적으로 만들었고, 그는 해야 할 일이 있는 이상 감성에 젖어 들어가는 것을 즐기는 일이 없었다. 최근 그는 계속해서 지나치게 바빴다. 로저스는 술잔에 위스키를 조금 더 따랐다.
어벤저스 타워는 완공이 된 이후 언제나 스티브 로저스의 방을 멀끔하게 준비해두고 있었다. 그가 언제라도 와서 쉴 수 있도록 모든 것이 갖춰져 있는 공간이었다. 사실 방이라고 부르기도 힘든, 타워의 한 층을 전부 차지한 공간이 전부 그의 것이었다. 그 곳엔 작은 바 역시 마련되어 있다. 그는 슈퍼솔저가 된 이후 술에 취할 수 없었기에 바를 이용하는 적은 드물었다. 하지만 가끔 그 역시 술을 찾고 싶을 때가 있다. 취하진 못해도, 그런 흡사한 기분이나마 느끼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전면 유리 너머는 이미 밤이 내려앉은지 오래라 맨해튼의 도심에서 흘러나오는 불빛만이 껌벅였다. 실내의 어둑한 공간 어딘가로부터 자비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스터 로저스. 함께 드실 것을 준비해 드릴까요?]
"괜찮네. 자비스."
로저스는 정중히 거절했다. 그는 새로 술병 하나를 더 꺼내 마개를 땄다. 독한 술 냄새가 훅 풍겼지만 그에게는 음료수의 효과 그 이상으로 내지를 못하는 액체일 뿐이었다. 그가 다시 잔을 입으로 가져갈 때에 인공지능이 다시금 말을 걸었다.
[음식을 섭취하고 소화시키는 과정은 신체에서 긴장 및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로저스는 픽 웃었다. "내가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지?"
[적어도 저의 센서는 그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만.]
토니 스타크는 이 인공지능을 너무 지나치게 똑똑하게 만들었다. 로저스는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습관처럼 쓸어 넘기며 한숨쉬었다. 그는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자비스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말했다.
"나의 메타볼리즘으로는 그 정도론 어림도 없지. 노래나 한 곡 틀어주게."
곧이어 플로어에 오래 된 노래가 흐르기 시작했다. 로저스는 그의 취향을 이미 간파하고 있는 인공지능에 조금 감탄한다. 그의 기억 속에 잠겨 있던 선율에 스티브 로저스는 곧 과거를 떠올리려고 하는 자신을 추스른다. 이래선 브루클린에 가던 안 가던, 거기서 거기 아닌가. 그는 손 끝으로 잔의 테두리를 매만졌다.
책임감이란 건 그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로저스의 성질이었다. 슈퍼 솔저가 된 이후로 그는 자신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책임감이란 것을 받아들였고 그건 그가 쉽게 포용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스티브 로저스는 완벽한 인간상이었다.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건 사실이었다. 그는 모든 자의 앞에서 앞장 서서 그들을 이끌어야 하는 사람이다. 그는 군인이었고, 또한 사람의 생명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자이기도 했다. 세상에는 그를 우러러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기대의 무게는 그만큼 크다. 그의 손 끝에서 놓쳐버렸던 셀 수 없는 생명들과,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들을 떠올릴 떄마다 스티브 로저스는 아주 아프고 또 아픈 과거회상의 늪에 빠져버리게 된다.
[미스터 로저스. 방문자가 계십니다.]
그를 상념에서 잡아 끌어낸 것은 다시 들려온 자비스의 목소리다.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곧 한 남자의 발소리가 어둠 깔린 플로어 너머로부터 가까워지더니 로저스의 옆에 와서 섰다. 브록 럼로우는 평상복을 입고 있다. 가벼운 청바지에 그의 근육이 선명히 돋보이는 얇은 셔츠가 전부였다. 남자는 몸의 일부처럼 무기를 지니고 다닌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로저스는 그의 어디에서도 총이나 칼 따위를 찾아볼 수 없었다.
럼로우는 자신을 쳐다보는 로저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손에서 술잔을 빼앗았다. 그는 그것을 한 입에 털어넣더니, 다시 한 번 따르고, 또 비웠다. 손등으로 입을 훔친 럼로우의 옆모습에 바에서 비춰지는 불빛과 나머지의 플로어를 잠식한 어둠으로 인해 기이한 음영이 졌다. 브록 럼로우는 가끔 이런 식으로 이상한 분위기를 보이고는 했다. 그건 눈에 띄지 않을 아주 드문 경우에 불과했고, 로저스는 도무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혼란스러워 하는 건가? 어쩌면 힘들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가늠하기 어려웠다. 브록 럼로우는 항상 그랬다. 잘 알고 있나 싶었지만 그에 대해 막상 설명하려고 하면 아마도 라거나 그럴 것이다 라는 식의 단어로 치장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로저스는 멍청하게 조금 입을 벌리다가, 도로 다물었다. 럼로우가 말했다.
"취하지도 않으면서, 왜 마십니까."
그러면서 다시 한 잔을 따르는 럼로우를 보던 로저스는 그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그는 텅 빈 손끝을 매만지며 조소했다.
"혹시나 하는 거지. 바보같다는 거 알고 있네."
"당신은 정말이지..."
럼로우는 말문을 떼다 대신 가볍게 한숨을 쉬며 술을 마셨다. 연거푸 세 잔이 순식간에 비워졌다. 로저스는 그로부터 부드러운 동작으로 잔을 뺏어 바 위에 올렸다.
"급하게 마시는 건 좋지 않아."
"내가 왜 찾아온건지 묻지 않습니까?"
로저스는 혀로 거슬한 입안을 쓸었다. "물어보길 원하나."
"아뇨."
그는 눈을 몇 번 깜박이다가, 물어보지 마십시오 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곤 로저스가 뭐라 대꾸할 새도 없이 럼로우는 그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로저스가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있던 스툴이 삐걱이며 돌아갔고 그는 럼로우를 바로 마주하게 되었다. 할 말이 있는 건가. 혹은 주먹이라도 날리려나. 로저스가 막연히 생각할 때에 그는 자신의 벌린 무릎 사이로 더욱 가깝게 다가오는 럼로우를 보았다. 당황할 겨를도 없었다. 럼로우는 한 손으로 남자의 뒷목을 받친 채, 고개를 조금 숙여 그의 입술 위에 가볍게 입 맞췄다.
"책임지십시오."
그는 로저스의 입술 위에서 속삭였다. 남자의 조금 벌어진 부드러운 입매에 다시 입맞추자, 눈 앞에서 가늘게 떨리는 금색 속눈썹이 보였다. 푸른 눈이 자신을 향하는 것에 소름이 돋았다. 럼로우는 눈을 내려 감으며 말했다.
"당신을 더 원망할 수 있게 만들란 말입니다."
날 이렇게 만든 건 당신이니까. 로저스는 뒤에 삼켜진 말을 들은 것 같은 착각을 느낀다. 럼로우는 이제 남자의 양 뺨을 감싸쥐며 고개를 틀고, 조금 더 깊게 키스한다. 거친 입술을 마찰하고 벌어진 입술 새로 막무가내일 혀를 밀어 넣었다. 술 냄새가 지독했다. 귓전에선 이름을 알 수 없는 여가수의 노랫소리가 웅웅거리며 들려오고 있었다. 취기에, 촉각에, 노랫소리에 럼로우는 꿈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착각에 든다. 깨지 않았으면 싶었다. 곧 스티브 로저스의 단단한 양 손이 제 허리를 잡고 조금 더 끌어 당기는 것에 럼로우는 조금 더 이 순간을 즐겨도 되지 않겠나 싶었다. 남자에게 겨눈 무기는, 그대로 자신에게 쏘아진다. 럼로우는 그의 발치에서 피를 흘리고 죽어가는 자신을 상상한다. 아팠다. 하지만 어디가 아픈지 가늠할 수 없다.
결국, 우리 중 죽는 건 누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