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크칸
태풍의 눈
손톱이 피부를 갈랐다. 비교적 연한 팔뚝 안쪽의 살에 길게 흠이 파이더니 뒤따라 가는 핏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칸은 남자의 뭉툭한 손끝이 제 살갗 위를 긁어 내리는 꼴을 지켜보다가 시선을 위로 들었다. 커크의 파란 눈은 칸의 팔뚝에 붙박힌듯 고정되어 있다. 그는 멈추지 않고 손을 움직였으며 곧 거의 한 뼘은 될 법한 흉한 생채기가 칸의 창백한 피부 위에 덧그려졌다. 그건 주륵 흘러내려 흰 시트에 붉은 물을 투둑 투둑 떨어트렸다. 당연한 고통이 뒤따랐다. 하지만 칸은 눈 한 번 깜짝하지 않았고 그저 제 위에 올라탄 커크의 얼굴을 지켜보았을 뿐이다. 상처를 입는 것을 좋아할 자는 없다. 하지만 그에게 상처를 낼 때의 커크의 얼굴은 그가 평소 볼 수 없는 종류의 표정을 짓곤 해서 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내버려두곤 했다. 함장은 그가 제 선원들이나 동료들에게 짓곤 하는 유들한 웃음도 혹은 자신만만한 눈빛도 또는 동정심을 유발하는 표정도 그 어느 것도 드러내지 않았다. 단지 약간의 감탄, 경외, 그리고 그 속에 섞인 혐오감과 만족감. 그런 지극히 하찮은 감정들만 얼핏 엿보일 뿐이었다. 칸은 다음 순간 인간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알고 있었다. 나에게 해봐. 커크가 그렇게 말했다. 칸은 이제 상처가 아물고 딱지가 지기 시작하는 제 팔을 들어 커크의 헐벗은 둥근 어깨쭉지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마치 그가 저에게 했던 것처럼 천천히, 그 표피가 갈라지는 아픔이 신경세포를 찢어트릴 정도로 지독하게 느린 동작으로 살갗을 긁었다. 커크가 쇳소리를 냈다. 미간이 깊게 파이고 내려감은 눈이 일그러졌지만 멈추라는 소리는 하지 않는다. 그래서 칸은 그 손이 어깨를 타고 등으로 내려가 늑골로 이어질 때까지 손톱을 세웠다. 적당히, 연약한 인간의 설점이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갈라지진 않도록. 그가 손을 떼었을 때 커크도 눈을 들었다. 파랗게 일렁이는 눈을 해서 커크는 칸의 손목을 잡에 제 입가로 끌어당겼다. 그는 혀를 내밀어 피가 고인 짧고 단정한 손톱 사이사이를 핥고 빨았다. 손에서 입을 뗀 커크는 칸의 머리채를 그러쥐고 입술끼리 맞물리게 했다. 그때 쯤 그들의 상처는 온데간데 없었다.
엔터프라이즈가 알페카 시스템에 들어서자 트랜스미터 오작동이 빈번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다. 알페카 시스템은 바조란 행성계로부터도 오백 여 시간 떨어진 곳으로 거의 아무도 가지 않는 구역이었고 아직 본격적인 탐사가 이뤄지지 않아 몇 개의 M이나 L클래스 행성을 제외하면 알려진 정보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스팍은 그들이 알페카 시스템에 들어갈 이유가 없다고 반박했었는데 결국 바잔 웜홀과 부딪히는 일을 피하기 위해 베가 시스템의 바깥쪽을 순회하던 와중 알페카 시스템으로 향하는 선로를 탈 수 밖에 없었다. 커크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별로 개의치 않아했고 스팍은 그들이 목적지에서 너무 먼 행로로 들어섰다고 주장했다. 칸은 스콧을 도와 트랜스미터와 주파 연결 시스템을 손보곤 했으나, 모든 부분이 완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 행성들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메인 신호를 제대로 잡지 못하는 것은 피치 못할 일이었다. 알페카 시스템은 딱히 위험 구역은 아니었다. 커크는 평상시와 다름 없이 눈에 띄는 주변 행성이나 탐사해보자는 말을 지껄였고, 밤에는 칸과 섹스했다. 별로 새로울 일은 없었다. 그건 엔터프라이즈가 오 년 항해를 시작하고 나서부터 계속해서 이어져 온 패턴이었다.
하여간 별 것 아닌거 가지고 까다롭게 군다니까. 커크가 그의 목에 입술을 묻으며 웅얼거렸다. 방금 전까지 회의에서 스팍과 열을 올리며 말을 주고 받았을 것이 분명했다. 칸은 긴 목을 좀 더 기울여 커크가 이를 박을 수 있도록 하며 생각했다. 사실 커크는 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손마디마다 굳은살이 박혀 있고 몸싸움으로 얻은 게 분명해 보이는 잔근육이 뚜렷하면서도 커크는 상대와 언성을 높이는 걸 내키지 않아했고 그게 그의 대원들 특히 스팍이면 더했다. 물론 그것이 커크가 상처를 내고 피가 흐르는 걸 지켜보는 행위를 즐긴다는 것을 설명하진 못했다. 어쩌면 그는 그런 식으로 제 핏줄 속에 갓 흐르게 된, 아직 완전히 익숙해지지 못한 포식자의 갈망을 풀어내고 있는걸지도 몰랐다. 그리고 칸은 자신의 그것을 커크로 하여금 제 몸에 거칠게 좆질을 해대도록 허락하는 것으로 풀고 있는지 오래다. 가학과 피학엔 분명 유사한 쾌락이 존재했다. 칸은 커크의 금발을 손가락 사이로 흐트러트렸다. 그래봤자 결국엔 네 벌칸의 말을 들을 것이 아닌가? 커크는 칸의 말에 움찔하지도 않았다. 그는 칸의 셔츠 위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쓸어 내렸다. 사람들이 잘 지나치지 않는 구역이라 해도 엄연한 복도였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녀석은 내가 너랑 붙어먹는 게 맘에 들지 않는거야. 논리적이지 않다지. 킬킬거린 커크가 호선을 그린 입술을 칸의 귀에 붙였다. 하지만 어쩌겠어. 내 몸상태를 유지하려면 네가 필요한데 말야. 칸의 혈청은 확실히 커크의 몸에 변화를 주었고 커크는 비록 증강 인간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자가 치유능력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세포 조직에 변화가 오고 있다는 것이 발견된 후 섹션31과 치프 메디컬 오피서인 맥코이의 승인 아래 칸은 엔터프라이즈에 탑승했다. 커크의 신체적 변화에는 칸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기에 연구를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칸은 커크의 옆구리를 쓸며 눈으로 웃었다. 나와 성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할 수는 없지 않나? 그 말에 커크는 낮게 웃었다. You have no idea, Khan.
그리고 선체가 크게 흔들렸다.
양 옆으로 진동한 함선이 긴 소리를 내며 고통스럽게 울었다. 칸은 비틀거렸고 커크는 손으로 벽을 집은 채 기우뚱댔다. 커크는 마치 자신이 공격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시퍼런 눈을 빛내며 이를 드러냈다. 잠재적으로 흐르던 공격적 성향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것과 동시에 함선은 다시 한 번 흔들렸고,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들은 달렸다. 그 와중 커크는 커뮤니케이터를 통해 빠르게 지시를 내렸고 칸은 그의 옆에서 달리며 주변을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마치 기계 회로처럼 나노 단위로도 셀 수 없을 공식이 돌아가기 시작하며 이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스파크가 튀고 고함소리가 울렸다. 그 와중 커크의 목소리가 으르렁댔다. 이온 폭풍이 몰아치는데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니 그게 무슨 개소리야! 당장 궤도 변경해! 커뮤니케이터 너머에서 술루와 스팍의 목소리가 번갈아 들렸고 커크는 욕설을 뱉았다. 브릿지가 코앞이었다. 칸은 엔지니어실로 가는게 맞겠으나 커크와 나란히 달렸고 커크는 그를 막지 않았다. 그리고, 쿠웅. 선체가 천천히 모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중력이 사라졌다. 발이 공중으로 붕 뜨는 것을 마치 영화 속 슬로우모션처럼 느끼며, 칸은 시선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본 건 저를 경악에 가득 찬 시선으로 쳐다보는 커크의 푸른 눈이었다.
갑작스런 어둠이 덮쳤다.
그리고 다시 시야가 확보된 후에 마주친 푸른 눈은 지독하게 차가웠다. 커크가 눈썹을 휘었다. 이건 또 뭐야?
짙은 푸른 눈과 단단한 턱, 눈부신 금발까지 분명 커크가 맞았다. 칸은 조금 벌렸던 입을 천천히 다물었다. 하지만, 커크가 아니다. 적어도 그의 커크는 아니었다. 칸은 남자의 한 쪽 뺨을 가로지르는 긴 자상을 보았다. 마치 누군가가 그의 입가를 칼로 째려고 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귀 밑까지 보기 흉한 흉터가 이어져 있었다. 그건 커크의 잘난 얼굴에 존재하는 유일한 흠이었다. 다음 순간 칸은 그가 주저앉은 곳이 엔터프라이즈의 브릿지 안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가 알고 있는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칸이 알고 지내던 자들이 아니다. 같은 모습을 한 낯선 자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엔터프라이즈의 흔들리는 복도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이 상황을 논리적으로 결론을 내려보았다. 내릴 수 있을 만한 결론은, 한 가지였다. 그는 전혀 다른 엔터프라이즈의 안에 와있는 것이었다. 칸이 무슨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안전 요원들이 달려와 그를 포박했고 그는 상황을 지켜보기 위해 굳이 반격조차 않았다. 커크는 함장석에 앉은 채 한 팔꿈치를 세워 그 손에 턱을 괴고 비스듬히 꼰 다리를 가볍게 까딱였다. 그 차가운 얼굴에 문득 흥미가 스쳐 지나갔다. 스파이인가? 아니면 날 암살하러 온 첩자? 어떻게 엔터프라이즈에 숨어든 거지? 보안 시스템을 업데이트 했을텐데. 스팍과 대화를 해봐야겠군. 커크가 연이어 말했다. 그는 칸에게 대꾸할 기회도 주지 않고 손을 가볍게 저으며 그를 브리그에 가두라 명령했다. 대처가 나름 익숙해뵈는 걸 보니 이것과 유사한 상황이 한 두번 있던 건 아닌 모양이다.
칸이 순순히 브리그에 걸어 들어간 유일한 이유는 단지 이 상황을 조금 더 탐색할 필요성을 느꼈다는 것 그 하나 때문이었다. 모든 정황을 따져 보았을 때 그가 다른 차원에 휘말려 들었다는 건 확실해 보였다. 유사하지만 전혀 다른 사람들을 보며 칸은 흥미로움에 눈을 빛냈다. 이온 폭풍이 엔터프라이즈를 덥칠 때 과학적 작용이 일어난 것이 분명했다. 칸은 마치 그가 처음 엔터프라이즈에 올랐을 대처럼 양 손이 묶인 채 브리그로 끌려갔다. 칸은 그 통로를 스쳐 지나가며 얼핏 시선 끝에 담겼던 고문 기구들을 기억해냈다. 역시나 흥미롭다. 이 함선에는 그가 기억하는 엔터프라이즈와 다른 좀 더 야만적인 기운이 흘렀다. 그건 금방 터져버릴 시한 폭탄과 같았고 길들여지지 않은 맹수와도 같았다. 마치 함선이 하나의 공동체가 아닌, 여럿의 난폭한 짐승들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듯 했다. 그가 있던 엔터프라이즈는 이렇지 않았다. 미숙했으나 단일화 되어있었으며 예측 불가였지만 내부 혼선의 징조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 곳은?
커크가 그를 찾은 건 몇 시간이나 지난 이후였다. 칸은 앉아있다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커크는 브리그 너머에서 칸을 보다가 한 손을 들어 제 뺨을 슥 문질렀다. 광대 근처에 묻어있던 녹색의 액체가 번지듯이 닦여나갔다. 칸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던 커크는 비식 웃었다. 집고양이인 척 하는 표범같군. 아니면 널 그렇게 보이도록 길들인 자가 있던 모양이지. 이 커크는 꽤나 예리했다. 그건 인정해야 했다. 칸은 대답하지 않고 커크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미세하게 기울였다. 내 처분은 어쩔 생각이지 함장? 커크의 푸른 눈이 문득 빛나더니 그는 곧 브리그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왔다. 포스 필드가 열리고 닫히는 것과 동시에 커크가 손을 뻗어 칸의 머리칼을 움켜 쥐었다. 칸은 신음 하나 내지 않고 목이 뒤로 꺾인 모양새로 커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네가 지금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입장이라 생각하나보지? 함장이 말하며 웃었다. 하지만 그건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 것에 불과했고 그로 인해 한 쪽 얼굴에 난 자상이 뒤틀려 기괴한 모양새가 되었다. 칸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브리그의 밖에서 안전 요원들이 아무 장비 없이 들어가버린 커크를 보며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그는 웃었다. 그런 당신이야말로, 함장, 내가 당신을 순식간에 죽일 수 있을 만한 능력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은 건가.
조급함 없는 행동. 왕좌에 앉은 것처럼 느긋한 태도. 칸은 그런 게 커크를 얼마나 자극할 수 있을지 짐작했다. 커크는 지배자였다. 그의 몸짓에서 그리고 억양에서 숨기지 않고 그것을 표출했다. 만약 그와 같은 성질을 가진 자가 자신을 도발하며 나온다면 독재자의 왕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어쩌면 답은 이미 정해져 있을지도 모른다. 커크는 사납게 웃었다.
동족끼리는 물어뜯는 법이다. 하나의 공간에 두 왕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장작 한 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칸은 고문받았다. 그 모든 방법을 설명하려면 끝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고문 도중 당연하게도 칸의 재생 능력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와 더불어 평범한 인간보다 강한 그의 육체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당연한 수순으로 이어져야 할 인체 실험에 대한 논의가 불거졌으나 아직까지 칸은 구금실에 갇혀 있을 뿐이었다. 커크는 그동안 칸을 두 번 찾아왔다. 하지만 칸은 커크가 어디선가 계속해서 그를 주시하고 있단 걸 감으로 알아차렸다. 피부가 뚫리고 살이 찢어지며 칸의 동물적 감각은 그 어느 때보다도 예민해졌다. 그래서 그는 피에 절어 구금실의 바닥에 널브러져있던 와중 포스 필드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익숙한 벌칸의 모습을 발견했다. 이곳의 스팍은 지독하게 기계적이었다. 그가 있던 곳의 스팍이 인간적으로 보일 정도로 말이다. 그 옆엔 커크가 있었다. 그는 브리그의 앞까지 다가와 무릎을 굽히더니 칸과 시선을 마주친 채로 자신의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네가 입을 열지 않는 덕분에 스팍이 어떻게 되었는지 봐. 칸은 눈을 굴려 스팍을 다시 보았다. 얼굴 여기저기에 딱지가 앉고 녹색 생채기가 역력한 게 보였다. 커크는 과장되게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대체 알 수가 없단 말이지. 그런 고문을 견딘 녀석은 네가 처음이야. 스팍의 마인드멜드까지 통하지 않는데다 인간의 몸을 가진 것도 아니고. 넌 대체 뭐지? 커크는 정말 순수하게 궁금한 것처럼 보였다. 칸은 쿨럭 하고 피를 한웅큼 뱉았다. 한동안 대답을 기다리던 커크는 다시 일어나 스팍에게 가볍게 손짓을 해보였다. 멀어지는 커크를 뒤로하고 스팍이 테이블에 놓여있던 메스를 집어들어 다가왔다.
칸은 의자에 묶인 채로 생각했다. 그가 이 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확률과 그 전에 자신의 세계에 있는 짐 커크가 어떠한 행동을 취할 확률 등을 말이다. 칸은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스팍은 아마 그것을 예감한 모양이었다. 그는 끈질기게 칸을 고문하며 칸 그 역시 놀랄 만큼 해부학적인 지식을 동원해 그로부터 답을 끌어내려고 했다. 칸은 며칠동안 이런 식으로 더 버티려고 든다면 그들 역시 더 이상 자비롭게 그를 고문만 하고 있지는 않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래서 칸은 그날 밤 브리그를 탈출했다. 인식 센서만 조작하면 간단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