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너드 맥코이에게 있어서 악몽이란 건 늘상 비슷한 형태를 지녔다. 그가 악몽을 자주 꾼다거나 가위에 눌리기 쉬운 체질이란 건 아니었다. 악몽은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그가 가장 지쳐있을 때 혹은 가장 절박할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발 끝부터 천천히 늪에 끌려 들어가듯이. 그에게 찾아오는 악몽의 대부분은 기억하고 싶지 않을 정도의 좋지 않은 추억으로 시작해서 그 꼴이 아주 기괴하게 변질되어 서서히 그의 숨통을 조여오는 종류였다. 한동안 그의 악몽에 나오는 자들은 정해져 있었다. 자신의 손 안에서 죽어간 어린 제니, 이혼 서류와 함께 그의 눈 앞에서 등을 돌리던 파멜라, 그리고 그가 채 살리지 못한 병상 위의 사람들. 그들은 저의 기억 속 단편적인 부분에서 튀어나와 그를 몰아세웠다. 포기하라고 혹은 좌절하라고. 네 힘은 고작 그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맥코이가 매 순간마다 제일 견딜 수 없는 부분을 파고들어 악마처럼 속삭이거나 그를 향해 괴물처럼 폭소했다. 그는 수 년 동안 그것을 겪으며 이젠 아무리 그 소름끼치는 것을 견뎌야 하는게 지긋지긋하더라도 어느 정도 익숙해지지 않았나 싶었다. 적어도 처음처럼 악몽에서 깨어난 후에 발작적으로 술을 찾아야 한다거나 과호흡 증상을 일으키는 일은 사라졌다는 말이었다. 그 날, 맥코이는 매우 피곤했다. 사실은 피곤하단 말이 무색할 정도로 끔찍하게 지쳐있었다. 그는 꿈에서 자신이 악몽의 전조와 같은 온 몸의 세포들이 뒤집히는 역한 감각에 휩쌓이기 시작했을 때 올 것이 왔다는 생각 뿐이었지 아주 놀라지는 않았다. 슬슬, 악몽을 꿀 때가 되었다 생각을 하고 있긴 했다. 그 정도였다, 요즘은. 이번엔 누구일까. 제니? 파멜라? 혹은 그의 실패를 증명하는 또 다른 누군가? 맥코이는 저의 탁한 꿈 속에서 방관했다. 사실 악몽이건 뭐건 어찌되어도 좋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만큼 지쳐있던 맥코이는 자신의 앞에 눈이 아플 정도로 금빛이 드러나자 꿈 속인데도 그것에 눈이 부시단 생각을 했다. 맥코이는 방 안에 있었다. 그는 괴이하게 비틀어진 꿈의 시야에서 방의 침대에 누운 채 말갛게 흔들리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토기를 느낀다. 내장이 헤짚어진다 고 생각했을 때 맥코이는 자신이 목이 졸리고 있단 걸 깨닫는다. 남자의 올가미같은 손이 서서히 목줄기를 움켜쥐고 상냥하게 숨통을 막았다. 차가웠다. 속이 메스껍고 몽롱한게 금방이라도 가위에 눌려 죽을 것 같았다. 흐린 시야에서 금발이 출렁 흘들렸다. 의외다. 이건 그가 예상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 뜻밖의 악몽의 침입자는 동물의 것 같은 새파란 눈으로 살 떨리는 미소를 담고, 저에게 목소리 없이 속삭였다.
지금 누구 생각해?
맥코이는 눈을 떴다.
부릅 뜬 눈가에서 눈물 흐르듯 땀이 흘렀다. 불 꺼진 어둔 방엔 미친 듯이 호흡하는 제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물에 걸린 기분이다. 온 몸이 눅눅하고 침대가 그를 잡아먹는 듯했다. 맥코이는 벌떡 상체를 일으키고 경련하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 내렸다. 서늘한 방 공기에 땀에 젖은 몸이 순식간에 식어 몸이 떨렸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떨리는 것 만은 아닐 것이다. 그는 아직도 끈적하게 조여오는 감각이 덧그리고 있는 자신의 목을 만지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금발. 익숙한 벗은 등.
티없는 얼굴로 잠들어있는 악몽의 주인을 보며 맥코이는 차가운 이불을 쥐어 뜯었다.
속박
束縛
단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맥코이는 차마 그렇게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다. 원래부터 입이 걸은 것에 비해 말 만큼은 모질지가 못한 성격은 상대가 여자라면, 그것도 저런 소심해보이는 얼굴을 해서 부끄럽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생도라면 말 할 것도 없었다. 아마 저보다 댓살 이상은 충분히 어려보이는 여자애는 맥코이보다 머리통 두 개 정도 작아서 그를 한참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그 표정이 자칫 잘못 말하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리거나 할 것 같은 종류라, 자칭 서던 젠틀맨인 맥코이가 아무리 단호한 사람이라 해도 그렇게까지 거칠지는 못한 것이다. 맥코이는 거슬한 입 안을 한 번 혀로 훑어내고 손을 뻗어 여생도가 건네는 것을 조심스럽게 받았다. 아기자기한 모양의 상자는 분홍색 포장지에 빨간색 리본이라는, 정말 그의 손으로 들고 있기에조차 황송할 정도로 깜찍한 물건이다. 여생도의 손에는 커보였던 상자가 그의 손으로 옮겨지자 조그맣게 보였다. 그는 그것을 잠시 보다가, 여전히 저를 쳐다보고 있는 그녀에게 어설프게 웃어뵈었다. 입꼬리만 슬쩍 비트는 정도지만. 고마워. 라고 말하자 그녀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변했는데 그건 나름 보기가 좋아서 맥코이는 남자로서 아주 잠깐 설렜다.
23세기의 지구에서 아직까지도 발렌타인 데이에 초콜릿을 주고 받는 풍습이 사라지지 않은 건 거의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엉뚱한 식목일이나 노동의 날 같은 걸 없애는 것 보단 발렌타인 데이를 금지시키는 것이 훨씬 문화적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맥코이는 상자를 든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약간 어정쩡하게 서서 그런 생각을 했다. 여생도는, 이름도 몰랐는데 분명 외계생물학 수업인가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가물가물하다. 제게 관심이 있다는 기색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는데, 수업이 끝난 후 나가자 문 앞에서 주저하며 그를 멈춰 세운 것에 조금 놀랐다. 그리고 아무리봐도 사탕과 같은 단 것이 들어있을 게 분명한 상자를 받은 것도 정말 의외였고. 복도에 선 그들 옆을 지나치는 생도들이 휘파람을 불곤 했는데 맥코이는 약간 불편하다. 이 나이 먹고 고백받는 십대 남자애 취급을 받는 건 영 내키지가 않았다. 한편 여생도는 이쁘장하다. 귀엽고 가느다란 몸매였는데 그것이 척 보기에 좋은 광경임에도 불구하고 그닥 동하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는 머뭇거리며 선 채 떠날 생각은 하지 않았고 맥코이는 그녀가 떠나지 않는 이상 자신이 먼저 움직이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고. 결국 견디지 못한 맥코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발렌타인 선물 맞지? 잘 먹을게.
결혼을 한 번 해보면 이성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정도는 몸에 베어 알고 있다. 딱히 그게 아니더라도 맥코이가 여자 앞에서 수줍음 타는 성격은 아니었기에 간혹 몇 몇은 그를 예상 외로 능숙한 사람이라 말하곤 하기도 했다.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모습에 여생도 역시 의외라고 생각했는지 조금 눈을 크게 뜨다가 고개를 가만히 끄덕인다.
-아, 응. 저기 레너드. 혹시 주말에 시간 있어?
생각보다 직설적이다. 수줍어 보이기만 하는 외모에 비해서 꽤나 대담한 성격인 것 같다. 맥코이는 조금 호감이 동했다. 참 이상하게도 옛날부터 그는 자신의 주관이 뚜렷하거나 강인한 타입을 좋아했다. 나쁘게 말하면 제멋대로인 여자들도 좋아했다. 전 와이프인 파멜라 역시 그런 쪽이었다. 그녀는 미시시피 대학에서 알려진 가장 예쁜 여자였고 덕분에 무시못할 만큼 콧대가 높기도 했다. 맥코이는 자신의 앞에 선 여생도에게서 잠시 파멜라의 모습을 찾다가 그만둔다. 예쁜데다가 성격도 괜찮은 듯 하지만.
-미안. 여유가 없어.
여유가 없는 건 사실이었다. 이미 그의 온 신경을 쏟아야 하는 제멋대로인 사람은 있으니까. 그는 자신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한 얼굴에 저도 모르게 콧잔등을 조금 찌푸렸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건 여자 아이는 보통 남자라면 껌벅 죽을 만한 표정으로 약간은 매달리듯이 그를 쳐다봤는데 덕분에 죄책감은 두 배가 된다. 그녀가 오물거리며 말했다.
-정말 안되는 거야?
아, 그는 정말 이런 데에 약했다. 매정하게 거절하지 못하는 건 그의 천성일지도 모른다. 맥코이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변명 따위를 찾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하지만 역시, 사실대로 말해야겠지.
그렇게 생각할 때 등에서부터 출렁 해서 갑작스럽게 조금 흔들렸다. 맥코이가 당황하기도 전에 그의 한 쪽 어깨 위로 팔이 올라오며 익숙한 체향이 훅 끼쳤다. 약간의 담배 냄새와 남성용 스킨 향. 귓가에 맞닿는 숨에서는 방금 점심으로 햄버거라도 먹었는지 기름 진 고기 냄새. 눈을 슬쩍 돌리니 바로 얼굴 옆에 맞닿는 얼굴의 일부가 보였다. 제 어깨 위에 턱을 얹으며 이런 지극히 가까운 접촉을 자연스런 해오는 상대는 한 명 뿐이었다.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이미 그 체취만 맡고서도 상대를 알아채는 자신의 조련된 감각해도 혀를 차고 싶기는 했다.
-엘리사. 오늘도 예쁘네. 머리 잘랐어?
-안녕, 제임스.
커크는 여자 앞에서 짓는 특유의 설탕이 떨어질 것 같은 목소리를 냈고 그 얼굴은 역시 보나마나 뻔했다. 맥코이는 눈을 굴리고 싶어진다. 여자애 -엘리사인가.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는 익숙하게 마주 인사했는데 그들이 아는 사이라는 게 어쩐지 놀랍지는 않다. 커크가 이 아카데미의 모든 여자들의 이름을 알고 있다 한들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들이 몇 인삿말을 주고 받는 걸 보며 동시에 맥코이는 자신이 갑자기 이 자리의 불청객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 사실 끼어든 건 커크였는데도 불구하고.
왠지 모를 불편함에 유난히 가까이 붙은 몸에서 떨어지려고 하자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아플 정도로 쥐어오는 통에 절로 움찔했다. 그러자 마디 진 손이 가슴을 느릿하게 가로질러 아예 제 상체를 끌어안다시피 하며 한 쪽 가슴팍에 넓게 편 손바닥을 안착한다.
살 떨리는 소유욕. 순간 목이 졸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거 어쩌지? 본즈는 나랑 지금 볼 일이 있는데.
내가 데이트 방해한 건 아니지? 그렇게 귓가에서 주절거리는 목소리는 조심스러움을 가장했으나 가볍고 무게가 없다. 말 그대로, 사실도 아니고 진심도 없으니 가볍고 무게가 없을 수밖에. 여생도의 얼굴이 조금 아쉽다는 표정을 짓자 커크는, 젼혀 그렇지 않으면서도, 미안하게 됐어 라던가 날 두고 본즈를 선택한거야? 상처 받았어 라는 둥의 말을 지껄였다. 정신을 차렸을 땐 무슨 말을 채 꺼낼 새도 없이 여자애는 벌써 저 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그 등을 향해 팔랑팔랑 손을 흔들던 커크가 말했다.
-쟤 너랑 안 어울려.
그렇게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웃으면서.
지난 여름이었다.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등에 축축하게 땀이 고여 몸 치수에 정확히 들어맞는 생도복을 입어야 하는 매일이 고역인 날들이 이어졌다. 남부에서 자라온 맥코이에게 있어서 살 타는 뜨건 여름의 햇빛 정도는 익숙한 종류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더위를 못 느끼는 건 아니었다. 단지 남들보다 조금 더 참을 법하다 싶은 정도, 그 뿐이다. 그는 강의실을 나오자마자 관자놀이를 타고 주륵 흘러내리는 땀을 손등으로 대충 훔친다. 살벌한 더위였다. 하지만 이런 끔찍한 6월 말의 더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한 학년의 끝이 다가올 것이란 걸 야기했고, 그건 곧 방학을 예언했다. 세상에, 방학이라니. 열 여덟에 칼리지 졸업한 제가 언젠데 이 나이 들어서 또 다시 아카데미 라는 곳에 다니며 공부를 하고 방학을 맞는 학생이 된 자신의 처지가 새삼 우습기 그지 없었다.
결국엔 갈 곳이 없어 도망치듯 온 것이니 본인이 그렇게 투덜거리기만 할 위치는 아니란 건 알고 있다. 스타플리트는 기부금은 받을 망정 사정 여의치 못한 사람의 등골을 뽑아 먹거나 그들의 입대를 거절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세상에 돈이란 기준이 사라졌다고 한들 아직까지도 부의 개념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가난하건 부유하건 스타플리트에서는 인재를 환영했고 그들을 기꺼이 양성하여 자신의 수족으로 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맥코이는 그런 '인재' 중 한 명이었다. 미시시피 의대 수석 졸업, 대학 병원의 치프로 사 년간 일했고 발표한 학술과 논문만 일곱 개였으며 수 개의 백신 개발 연구와 리서치 팀에 참가했다. 그의 이력서는 흠 잡을 데가 없었다. 스타플리트에서 그에게 몇 퍼센트의 생도들에게만 지원하는 최고 생활 보조와 연구시설을 제안했을 정도로 말이다.
파멜라가 정말 말 그대로 먼지 하나 안 남기고 싹 털어갈 줄은 상상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고, 또 어느 면에서는 그녀가 굳이 그렇게까지 나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자신이 선뜻 그녀에게 모든 걸 내어줬을 거라고 내심 생각하고 있기도 했다. 그는 파멜라에게 별로 잘 해준 것이 없었다. 그리고 모순적이게도, 그는 그녀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생전 처음 첫눈에 반한 상대이기도 했고. 맥코이는 답답하게 목을 죄는 옷깃에 손가락을 걸어 늘렸다. 단단한 재질의 생도복은 목덜미를 꽉 죄고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종종 그의 숨통을 조여오는 악몽 속의 파멜라처럼.
-레너드! 수업 끝났어?
복도에 쏟아져 나오는 생도들 틈 사이에서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저번 학기에 심리학을 같이 들었던 모니카였다. 맥코이는 그들 주변을 스치는 생도들로부터 몸을 피하며 그에게 다가오는 모니카에게 아는 체를 했다.
-어, 지금 막. 빨리 기숙사 돌아가서 에어컨 밑에 뻗고싶다.
-나두. 날씨 진짜 덥지. 오늘 수업 더 없나보네?
-네 시에 있는 유전학 종강됐거든.
곧 파이널 기간이 다가오고 있어서 강의들은 한 두개 씩 끝나가고 있었다. 사실 방에 돌아가 뻗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건 사실이나 돌아가자마자 패드와 책들을 집어 들고 도서관으로 향해야 할 것이다. 평소에 공부를 해놓지 않는 건 아니지만 바로 다음주면 첫 시험이었다. 그리고 저번 UNSFA 세미나에서 진단세포학에 대해 그와 토론을 가장한 말싸움을 벌였던 루윈 교수는 그의 답지에서 조금의 헛점이라도 보인다면 기다렸다는 듯이 뭉터기로 감점을 해댈 게 분명했다.
정작 그는 빌어먹을 교수와 당장 닥쳐올 시험 때문에 인상을 구기고 있는데, 모니카는 종강 이라는 단어만 기가 막히게 알아들은 것 같았다.
-오늘 밤에 제2관에서 파티 있는데 너도 와, 레너드.
-파티? 다들 뭐 잘못 먹었어? 다음 주면 파이널이야, 모니카.
-오해하지 마, 레니. 그런 종류의 파티가 아니니까. 알룸나이가 주최하는 여름 말 개더링 같은 거야. 매년 이맘 때 시험 잘 보라는 의미에서 열린다구.
적어도 술과 중독성 약물이 오가는 종류는 아닌 모양이다. 알룸나이에서 주최하는 거면 꽤 점잖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 굳이 파티를 열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맥코이의 인상이 내키지 않는 것처럼 찌푸려지자 모니카가 어깨를 으쓱 했다.
-기분전환 한다고 생각해. 어차피 너 성적도 좋잖아. 과 수석은 따논 거 아니었어, 닥터 맥코이?
-그렇게 부르지 마. 너 같은 환자 둔 적 없다.
-올거지?
-아니. 내가 거기 가서 뭐해.
-뭐하긴. 맛 없는 펀치 한 잔 마시고, 컨트리송에 춤도 좀 추고.
-춤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됐어. 아는 사람도 없는데.
-그래서 네게 오라고 한 거야.
예상하지 못한 말에 맥코이의 눈썹이 위로 휘었다. 모니카는 가슴 위로 팔짱을 끼며 한숨 쉬고 싶은 것처럼 말한다.
-레너드. 넌 파티는 커녕 술자리 한 번 따로 안 갖잖아. 클럽에 가입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스포츠에 참여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넌 이미 경력 있고 실력 좋은 의사인데다가 연구 지원을 받고 성적은 항상 탑이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무슨 말인지 알았다. 하지만 맥코이는 대답하지 않았고 모니카는 고개를 저었다.
-주제 넘었다면 미안해. 하지만 난 네가 착하고 좋은 사람이란 걸 아니까 안타까워서 그래. 단지, 조금 더 다른 동기들과도 친하게 지내려 노력을 해보란 말이야.
-넌 속고 있는 거야, 모니카. 난 착하지 않아.
-땅바닥까지 떨어졌던 내 이종심리학 점수를 B까지 끌어올려준 것만 따져도 넌 성자야.
맥코이는 입술을 비틀며 조금 웃었다. 저번 학기의 모니카의 점수는 확실히 그대로 내버려 뒀었다면 분명 재수강을 들었어야 했을 정도였다. 강의가 끝나고 나서 옆자리에 앉았던 제게 질문하는 걸 대답해 줬다가 그대로 붙들려 개인 교습까지 해주고 그러다 친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모니카는 붙임성이 좋았고 활달했으며 강했다. 이 쯤 되면 맥코이는 그의 일관적인 취향에 관해 다시 한 번 고찰을 해보는 수밖에 없다. 그녀는 더운지 손부채를 젓다가 시간을 확인했다.
-이런, 다음 수업 늦겠다. 가볼게. 오늘 밤에 만나. 잊지마, 제 2관이야.
-난 약속한 적 없다?
-너무 비싸게 구는 남잔 매력 없어. 뭣하면 네 친구도 데리고 오던가.
-친구?
-네 친구가 한 명 밖에 더있어?
모니카는 뭔가 더 말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지만 수업 때문인지 금새 자리를 떴다. 그녀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던 맥코이는 잠시 모든 학생이 빠져나간 복도에 그렇게 서있었다. 온 몸에서 땀이 비오듯 흘렀다. 더웠다.
친구냐 하면, 그래. 친구가 맞다.
-젠장, 더럽게 무거워서...
간신히 늘어지는 몸뚱아리를 한 팔로 추스른 채 비밀번호를 누르는 건 고역이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밤인데도 불구하고 질식할 만큼 더운 바깥 공기와 다르게 낮은 에어컨이 끊임없이 돌아가는 기숙사의 방은 약간 서늘할 정도였다. 깜깜한 침대를 찾아 그 위에 반 쯤 던지듯이 몸을 내려놓으니 윽 하는 뭉개진 신음 소리가 들렸다. 맥코이는 그제서야 허리를 피고 숨을 몰아쉬며 목덜미의 땀을 훔친다. 갑작스레 식은 열기에 피부가 순식간에 식어 들어갔다.
파티 자체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적당히 흥이 돋았고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즐길 수 있었다. 세미 포멀처럼 꾸며 놓은 모양새에 칵테일 드레스를 입은 사람도 캐쥬얼 수트를 입은 사람도 보였다. 맥코이는 청바지에 셔츠 하나 대충 꿰어 입고 갔다가 그 곳에 도착하고 주변을 둘러본 후에야 알룸나이가 주최한 파티라는 걸 상기했다. 확실히 어느 정도 격식은 차린 모양인지, 모니카는 그를 발견하자마자 옷을 왜 그 따위로 입고 왔냐고 핀잔을 주었지만 맥코이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도 없어서다. 그리고 맥코이가 강의실에서 몇 번 마주쳤던 사람들과 겉도는 대화를 나누며 지독하게 맛없는 펀치를 두 잔 째 홀짝이고 있을 즈음에, 커크가 들어왔다. 그것도 지독하게 취한 채로.
그는 커크를 부르지 않았다. 맥코이는 요즈음 커크가 이미 지나칠 정도로 학업 외의 시간에 열을 쏟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런 펀치나 치즈스틱이 즐비한 늙은이같은 파티는 커크의 취향에 맞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맥코이는 커크가 한 손에 술병을, 다른 손엔 반쯤 벗은 여자 허리를 쥐고 다른 몇 명의 그와 똑같이 취한 녀석들을 대동한 채 모두의 이목을 끌고들이고 있을 때, 분명 당황했다고 해야겠다.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소란에 모니카가 맥코이를 슬쩍 째려봤다. 그는 정말로 억울했었다. 지들끼리 낄낄거리고 캡모자를 펀치 그릇에 푹 담궈 떠먹고 앉아있는 꼬라지를 보니 한숨이 나오더랬다. 맥코이는 한숨을 쉬며 이미 반쯤 인사불성인 커크에게 다가갔고, 그 후엔 안 봐도 뻔한 일이다.
-야, 똑바로 누워. 짐 커크.
커크는 알아들을 수 없는 웅얼거림을 뱉었다. 맥코이는 어째서 항상 커크의 뒤치다꺼리를 하게 되는 걸로 마무리짓게 되는 건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정말 친구만 아니었다면. 아니, 애초에 커크와 친구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의문이었다. 그보다 몇 살이나 어린데다가 듣는 과목이 겹치는 것도 아니었고 관심 분야도 전혀 다르다. 생활 패턴이나 취향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그들은, 벌써 이 년째 친구였다.
지금 제 꼴을 보면 친구라기 보단 보호자 같기도 하고. 어쩌면 이게 자신의 업보일 지도 몰랐다. 평생동안 남을 돌보는 것 말이다. 맥코이는 속으로 한숨 쉬며 대각선으로 엎어져 있는 커크의 어깨를 잡고 똑바로 뉘이려고 했다. 시트에 묻혀 있던 얼굴이 드러나자 커크가 눈을 껌벅거렸다.
-정신이 드냐?
-어, 여긴...
-내 방이야. 하여간에, 제 정신이냐? 술 좀 작작 쳐마시라고 몇 번을 말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커크는 분명 좋은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고 과제나 시험 따위에도 충실했으나, 간혹 이렇게 몸을 버릴 정도로 질펀하게 뒹굴다 오는 적이 있었다. 아무리 화를 내고 구슬려도 여전히 고쳐지지 않는 버릇에 맥코이는 익숙함을 느끼고 마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의사였다. 직업병은 어디 가지 못하는 법이다. 해가 뜨면 귀가 따가울 정도로 훈계를 놔줄 거라고 다짐하며 불편해 보이는 자켓을 벗겨주려 손을 뻗자 커크가 제 손을 잡아왔다. 술기운으로 흐려진 파란 눈동자가 묽었다.
-하지마. 안 내켜.
맥코이는 순간 알아듣지 못했다.
-뭐가? 옷 벗는 게?
-지금... 할 마음 없다고. 레베카.
멍청하게 있던 맥코이는 헛웃음을 쳤다.
-야. 임마. 나야, 나.
-글쎄 싫다니까...
-레너드 맥코이라고. 나 참, 살다 살다 여자로 착각 당하는건 또 처음이네.
-...레너드?
커크의 시선이 순간 또렷해 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맥코이는 항상 커크의 저 눈이 여자들을 홀려먹는 데에 절반은 일조하는 것에 확신할 수 있었다. 둥글고 짙어, 어둔 방인데도 불구하고 투명한 속눈썹이 광대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까지 보였다. 어딘가 처연했고 물을 먹으면 더 애달펐다. 그래, 나야. 맥코이는 그렇게 말하며 제 손을 잡고 있는 커크의 마디진 손을 마주 잡았다. 커크는 눈꺼풀을 떨더니 초점이 흐린 시선을 내려 깔았다가, 다시 들었다.
-본즈.
대답해주려고 한 건 시도에 그칠 수 밖에 없었다. 커크는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상체를 조금 일으켰고, 그를 지탱하기 위해 레너드는 절로 기우는 상체를 막을 수 없었으며, 커크의 다른 손이 그의 뒷목을 그러 쥐었다. 숨이 섞였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자각하지도 못하는 순간, 입술이 맞닿았다.
친구냐 하면, 그래. 친구가 맞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