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팍본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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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너드 맥코이는 얼음을 잘근 씹었다. 이미 작게 부서져 있던 얼음이 잇새에서 달각이며 녹아들어갔다. 입 안이 홧홧한 게 조금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레너드는 한 손 안에 턱을 괴고 자신의 패드를 살폈다. 몇 개의 메세지들이 와있다. 채플, 커크, 채플, 채플... 그리고 스팍. 자신의 패드 위에 부함장의 이름을 떠올리고 있는 그 철자들이 이토록 어색할 수가 없었다. 메세지의 내용은 간결했다. 어제 탐사에서 부상을 입은 대원들의 진료 기록에 대한 요청이었다. 마침표까지 깔끔하게 떨어지는 문장에서 구질구질하게 늘어지는 감정같은 건 찾을 수 없었다. 레너드가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실 때 그의 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까 전부터 계속해서 자신을 핥아내리는 시선을 알아채고 있었기 때문에 레너드는 동요 하나 없었다.
-닥터 맥코이.
그럼 그렇지. 레너드는 고개도 움직이지 않고 눈만 위로 들었다. 식사 하셨습니까? 그렇게 질문을 하는 벌칸은 여느 때와 다름 없이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새까만 머리칼에 창백할 정도로 하얀 석고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눈만큼 목소리마저도 기계와 같다. 이미 매스홀에 있던 대원들이 하나같이 이 쪽을 쳐다보고 있어 레너드는 얼굴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레너드는 느릿하게 말했다. 지금 막 마쳤소.
-인간은 식후에 간단한 음료 및 다과를 즐긴하고 하더군요.
그러더니 뭔가 제 앞으로 불쑥 내밀어졌다. 음료수였다. 그것도 레플리케이터에서 만든 쓰레기가 아닌 직접 과일을 갈아 넣은 것처럼 보이는 시원한 음료수. 레너드는 자신이 손에 쥐고 있던 얼음이 다 녹아 묽어진 음료와 그것을 번갈아 응시했다. 잠깐의 침묵. 그 사이에 찌를 듯이 자신을 향하는 시선에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결국 레너드는 손에 들었던 걸 한 쪽으로 천천히 밀어내고 새 음료수를 손 안에 쥐었다.
-고맙군요. 커맨더.
스팍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휙 뒤를 돌아 매스홀에서 걸어나갔다. 반듯하게 떨어지는 걸음걸이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이다. 혼자 남겨진 레너드는 그를 흘긋대는 시선들과 손 끝에서 퍼져오는 얼얼한 한기에 그만 한숨을 쉬고 말았다.
스팍은 레너드 맥코이를 좋아했다.
혹은, 그렇다고 추정되어졌다.
근 한 달 여간 건네받은 음료만 다섯 개. 에너지 바가 두 개. 그 외의 자잘한 음식 따위가 세 번 정도. 뭔가 필요하다 싶으면 귀신같이 챙겨주고 설마 하면 역시나 시선이 느껴지는 곳에 서 있었다. 스팍이 말이다.
처음에는 착각이겠거니 했다. 상대는 그 누구도 아닌, 다름 아닌 스팍이었다. 벌칸인. 그 단어 하나면 전부 설명이 되지 않는가. 냉철하기 그지 없고 기계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정나미 떨어지는 족속. 고향이 사라지고 종족이 몰살당해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독한 녀석들이었다. 그런 벌칸인이 레너드 맥코이를 좋아한다고? 레너드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제게 뭔가 원하는 게 있으면 있었지 좋아하는 것과는 백만 광년 떨어졌을 것이다.
그나마 스팍은 반은 인간인지라 조금 더 감정이 있다는 말을 들어는 봤는데 그걸 제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레너드로서는 알 길이 없다. 듣자하니 짐 커크가 죽었을 때 반 쯤 미쳐서 날뛰었다고 하던데 사실 레너드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스팍이 칸을 들쳐 매고 메디베이로 들어왔을 적에도 늘상 단정했던 머리가 조금 흐트러져 있었던 것 뿐이었지 그 어디에도 동요의 흔적이라곤 찾기 힘들었다. 독한 놈. 그래도 기어코 칸을 잡아온 것을 보며 레너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짐이 이 주간 침대에 누워 있을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스팍은 간간히 그의 상태를 물어오긴 했으나 한동안은 찾아온 적조차 없었다. 뒷수습을 하기에 바쁘다는 소리는 들었었지만, 그래도 얼굴 쯤은 비춰줄 수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스팍이 짐의 상태를 '신경쓰고 있다'는 것 정도는 보였기 때문에 그 정도면 벌칸인의 기준으로 따지면 꽤 대단한 것인가 싶기도 해서 레너드는 그러려니 했다. 사실, 스팍이 그러건 말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것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런 스팍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허 참. 레너드는 몇 번 째 같은 질문을 머릿속에서 떠올리며 혀를 내둘렀다.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레너드는 스팍과 니요타의 관계가 어떻게 끝났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제 아무리 쉬쉬한다고 해도 커맨딩 오피서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은 알게 모르게 그들 사이에 돌고는 했다. 우주 함선이란 곳은 서로간의 비밀이라곤 쥐뿔도 없는 고립 지역이었다). 니요타는 분명 스팍을 좋아했었다. 니요타는 똑똑한 여자였다. 진심이지 않고서는 허투루 상대감을 정하지 않을 법한 여자였다. 하지만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니요타는 아직도 스팍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한숨부터 쉬고 싶은 얼굴이 되었다.
-그러니까,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사실 스팍은 정말 배려심이 깊거든.
티스푼으로 찻잔을 휘휘 저으며 니요타가 말했다. 니요타의 앞에선 술루가 씨앗 샘플을 고르며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마침 저번 탐사 이야기를 나누던 와중 스팍의 이름이 거론 된 것이었다. 부상 당한 대원들이 나온 와중에도 스팍이 탐사를 계속 진행시켰었다고 들었다. 레너드는 커맨딩 오피서용 휴게실 한 쪽에 놓여있는 레플리케이터 앞에서 커피 칩들을 살펴보면서 은근슬쩍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기념일은 꼬박꼬박 챙겨줬죠. 기념일에 대해 말했을 때 벌칸인은 그런 거 챙기지 않는다면서 단칼에 거절할 줄 알았는데 무슨 날만 되면 빠짐없이 선물을 주더라고요.
-단지 기억력이 좋은 것 아니에요?
-그것도 배려의 일종이잖아요? 기억력이 좋다 한들 챙겨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잖아.
-맞는 말이네요.
-식사 때에도 그랬어요. 벌칸인은 육식을 하지 않는 주의지만 제 취향을 고려해서 가끔 고기를 먹기도 했죠.
-들어만 보면 둘이 나름 괜찮게 지냈던 것 같은데. 왜 헤어진 거에요?
그렇게 물은 술루는 재빨리 덧붙였다. 아, 말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돼요. 예의 바른 술루의 모습에 니요타는 괜찮아요 하고 대답했다. 이제 다 지난 일인데 뭘. 니요타는 차를 홀짝이더니 조금 씁쓸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먼저 해준 적이 없거든요.
-먼저요?
-응. 내가 요구하기 전까진 먼저 다가오지 않았어요. 기념일을 챙기는 것도, 함께 식사를 하는 것도, 심지어 손을 잡고 입을 맞추는 것까지 말이에요.
-아...
-눈치도 줘보고 익숙하지 않은 투정도 부려봤는데 안 바뀌더라구요. 그제서야 알았죠. 아. 벌칸인은 벌칸인이구나.
날 정말로 좋아하는 게 아니구나.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저 단단한 껍질을 뚫고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겠구나. 니요타는 꽤나 담담하게 말했고 술루는 그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너드는 내심 저런 좋은 여자를 놓쳐버린 스팍의 한심함에 대해 생각하며 그 말을 한 귀로 흘려 버렸다. 벌칸인의 사생활이 어떻던간에 레너드에게 있어선 그닥 관심가질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스팍이 그에게 이유를 알 수 없는 공세를 해오기 직전에 있던 일이었다.
빅토리아 슬레이터 소위가 완치되기 까지는 거의 일 주일이 꼬박 걸렸다. 부러진 뼈나 손상된 피부는 재생시킬 수 있었지만 아예 뭉개져버린 골격같은 건 성형 시술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슬레이터 소위는 굉장한 미인 축에 속했기에 레너드는 물론이거니와 모든 의료진이 그녀가 본 모습을 되찾을 수 있도록 진심 어린 노력을 퍼부었다. 물론 단순히 그런 외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으나, 결론적으로 슬레이터 소위는 완벽하게 치료되었고, 모두가 만족하는 결과였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메디베이에 있었다. 슬레이터 소위의 상태가 가장 심각한 편이었으며 부상을 입었던 다른 대원들은 진작에 치료가 끝난지 오래였다.
환자복을 입은 채 누워있는 슬레이터의 상태를 확인한 레너드는 의료 패드에 하나씩 체크를 해나갔다. 시신경 완벽. 골밀도 완벽. 혈수치, 보형물 모두 안정적.
-보기 좋은데. 오늘 안으로 복귀 가능할 것 같군.
-고마워요. 닥터.
희미하게 웃어보이는 슬레이터는 확실히 안색이 좋아 보였다. 처음 메디베이에 실려올 때 움푹 주저 앉았던 광대뼈를 상상하기는 힘들었다. 링겔을 체크하는 레너드에게 슬레이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닥터.
-음?
-커맨더 스팍은 괜찮은 건가요?
예상치 못한 이름을 듣자 레너드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 상황에서 스팍의 걱정을 하고 있는 건가? 그녀를 거의 사지로 몰아넣다시피 했는데도?
레너드의 표정을 본 슬레이터가 약간의 걱정을 지울 수 없는 기색으로 말했다.
-다니엘스가 병문안을 왔을 때 말해 줬어요. 탐사에서 커맨더가 내린 결정 때문에 협상이 어렵게 돌아가고 있다고. 하지만 그건 커맨더의 잘못이 아니었는걸요. 당연한 결정이었어요. 커맨더가 비난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는데 말예요.
슬레이터 소위는 약기운이 도는지 졸린 눈을 깜박이며 그렇게 웅얼거렸다. 곧 고르게 들려오는 슬레이터의 숨소리와 의료 기계의 낮은 신호음만 메디베이 안에 울렸다. 레너드는 패드를 덮으며 뻐근한 뒷목을 문질렀다. 그는 슬레이터가 누운 침대의 옆에 놓인 의자에 천천히 앉고서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레너드 역시 상황에 따라 커맨딩 오피서가 내려야 하는 결정이 시시비비가 갈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직위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그들은 때에 따라 가혹하게 보일 수도 있는 지시를 내리게 되는 상황에 처했다. 하지만 그 '때'라는 것에도 '때'가 있는 법이다. 모든 것에는 마지노선이 있다. 탐사팀 절반이 치명상을 입었는데도 계속해서 미션을 이행했다니. 부상자들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제 눈으로 직접 본 레너드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만약 짐 커크였다면. 짐이었다면 절대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잠시 후 메디베이의 문이 췩 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어깨 너머로 고개를 틀은 레너드는 평소와 같이 뒷짐을 쥔 채 서있는 스팍을 발견했다.
-닥터.
-커맨더.
레너드는 그를 존칭으로 불렀으나 예의바른 입과는 다르게 얼굴이 찌푸려지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 스팍은 그걸 보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짧게 까닥이더니 안으로 들어왔다. 반듯한 걸음이 정확하게 바닥에 떨어질 때마다 단정한 앞머리가 가볍게 흔들렸다. 상태 한 번 좋아 보이는군. 레너드가 조금 비꼬인 속내가 되어 내심 생각했다. 누군 저때문에 일주일 내내 병상에 누워 있었는데 말야.
-진료 기록을 보러 온 거겠구만?
-그렇습니다.
끄응. 신음과 의자에서 일어난 레너드는 스팍에게 패드를 넘겨줬다. 직접 보라는 소리였다. 사실 진료 기록이나 환자의 상태에 관한 레포트 따위는 그의 패드로 전송을 부탁해도 충분할 일이었다. 하지만 스팍이 직접 찾아온 데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었고, 그 이유가 자신이 의심하는 그런 종류일까봐 반 이상의 확신을 하고 있는 레너드는 최대한 스팍의 눈을 피하려고 한다. 반들반들한 갈색 눈이 레너드의 옆얼굴에 끈질기게 따라 붙었다. 부끄러움도 모르는지 저토록 노골적이다. 그걸 애써 모른 척 하는 것도 곤욕이었다. 기분이 나쁜 건지 혹은 단순히 불편한 건지 뭔지, 뱃속이 조이는 느낌이다. 레너드는 괜시리 목을 가다듬었다.
-슬레이터 소위는 오늘 안으로 퇴원이 가능할 거요.
-좋은 소식이군요. 슬레이터 소위의 자리를 임시로 맡고 있는 레인 소위는 그녀보다 능률이 24.9% 떨어집니다.
레너드는 반사적으로 허 하고 웃었다.
-그게 답니까?
-?
-능률이 좋지 않은 대원은 죽건 말건 상관 없다는 것처럼 들리는구만.
그렇게 말해놓고 레너드는 바로 혀를 깨물고 싶었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 화가 났다. 마치 일만을 위해 존재하는 대원인 것처럼 그렇게 무기질 적으로 말할 수 있냐 이 말이었다. 생사의 고비를 넘은 사람을 앞에 두고, 빨리 돌아와서 일이나 했음 좋겠다는 식으로 말하고 서있는 벌칸을 보자 레너드는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목소리가 나가는 걸 멈출 수 없다. 어느 순간부터 레너드는 스팍의 눈을 피하지 않은 채 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대놓고 노려보지 않는다 해서 날선 기운이 사라지진 않는 모양인지, 스팍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저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말한 거나 다름 없지 않나.
-슬레이터 소위의 상태는 이 진료 기록만 읽어도 충분히 정상 궤도에 들어 섰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방금 닥터 본인의 입으로도 소위가 오늘 안으로 퇴원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고요. 제가 부가적으로 그녀를 신경써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오. 아니. 아냐. 없으시겠지. 없고 말고.
레너드는 비죽하니 웃으며 빈정거렸다.
-벌칸인이 누군가를 신경쓴다는 건 비논리적이니까. 그렇지 않소, 커맨더? 대원들의 안부건 나발이건 임무의 성공률 쪽이 훨씬 더 중요하니 말야.
-닥터, 그건...
-바늘로 찌르면 피 한 방울이라도 나올지 궁금하군 그래. 자네가 이끌던 대원들의 얼굴이 함몰되고 다리가 으스러지는 걸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드셨나? 아니, 그들을 생각이라도 하긴 했나? 똑똑한 벌칸 머리로 생각을 한 번 해보시지. 스팍. 과연 자네가 대원들을 이끌 자격이 있기는 한건지. 상처. 고통. 그런 게 감각따위 존재하지 않는 자네에게 조금이라도 의미가 있다면.
순식간에 내뱉은 레너드는 이를 무는 것으로 간신히 멈췄다. 흥분해버렸다. 한 번 입을 열어버리자 메디베이로 실려 들어오던 대원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면서, 한 주 꼬박 속안에 담아두던 생각이 결국 입 밖으로 터져나왔다. 아니면 어쩌면은, 한 달 전부터 이런 식으로 스팍에게 어떤 말이라도 좋으니 뭔가를 쏘아 붙이길 원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정적인 말은 차마 나오지 못하고 목 끝에서 턱 걸렸다. 레너드는 옷자락이 펄럭일 정도로 재빨리 뒤를 돌아 자신의 오피스 안으로 들어갔다. 곧 스팍이 나가는지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오피스 데스크 위에 늘어선 텅 빈 음료 병들을 보며 레너드는 이마를 짚었다.
그래서, 왜 내게 접근하는 건데?
-정말, 사람 미치게 만드는 것들이라고.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한 짐이 자리에 앉자마자 거두절미하고 투덜거렸다. 확실히 눈 밑에 뚜렷한 그늘이 내려앉고 항상 생기 넘치던 얼굴이 조금 푸석해진 것을 봐선 최근 바쁘다는 소식이 전부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짐은 레너드가 툭 던지는 사과를 보지도 않고 받아내서 우적 씹었다. 뚱한 표정을 해서 볼이 잔뜩 부풀려진게 이럴 때 보면 영락없이 철딱서니 없는 아이같았다.
-카다시안 건이 아직도 해결 안 된거냐?
-어. 진짜 말 바꾸는 데엔 천부적인 놈들이야. 이런 오메가 원소에 세 번 담금질해서 델타 시스템 변두리로 날려버릴...
짐은 차마 함장이 입에 담을 법한 말이 못 되는 기발한 악담을 퍼부었다. 보통 이렇게까지 막말하는 녀석은 아닌데. 어지간히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나 보다고 레너드는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얼마 전에 있던 협상에서 카다시안 측 꼬투리를 걸고 넘어진 게 하필이면 연합의 새로 뜨고있는 별인 엔터프라이즈호에 관련된 일이었다. 탐사에서 부상을 당했던 대원들 중 한 명은 공교롭게도 하프 카다시안이었던 것이다. 위험 지역임이 분명하다는 것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임무를 이행해 나갔다는 점에 대해 카다시안 측에서는 그것이 비인도적 -Look who's talking!- 이라고 주장했다. 레너드는 제 손 안에 들린 사과를 먹지 않고 이리 저리 굴렸다.
실컷 저주를 토해낸 짐은 그제서야 조금 속이 가라앉았는지 사과를 한 입 더 씹었다.
-뭐, 그래도 잘 해결 될거야.
-자신만만한데.
-알잖아. 아카데미에서 내 전공은 말빨이었고 부전공은 외계인 꼬시기였거든.
그러더니 짐은 언제 짜증을 냈냐는 듯 샐쭉 웃으며 한 쪽 눈을 찡긋했다. 정말 얄미운데 상대방으로 하여금 싫어할 수 없게 만드는 인간이었다. 평소같으면 웃으면서 받아쳤겠지만 본즈는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에 그럴 수 없었다.
-스팍은 뭐래?
-스팍? 별 말 없던데. 내가 이번 일에서 최대한 손 떼라고 했어. 지금 그네들한테 걔 얼굴 보여봤자 좋을 거 없거든.
-흐음.
-아참, 너네 사귀어?
툭. 레너드의 손 안에서 사과가 굴러 떨어졌다. 차마 줏을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짐을 쳐다보자 짐은 여전히 사과를 씹는 입을 멈추지 않은 채 패드를 슥슥 손으로 넘기고 있었다. 그러다 짐이 둥그런 눈을 흘끗 들었다.
-뭐야. 진짜 사귀는 거?
-그럴리가 있냐!
-근데 왜 그렇게 놀라?
정말로 사귀는 줄 알았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는데 레너드는 어이가 없었다. 너 같으면 안 놀라겠냐? 응? 하여간 상식이 통하지 않는 자식. 레너드는 간신히 벌렁거리는 심장을 내리 누르며 떨어진 사과를 주워 들었다. 벌써 제 몫을 다 먹어치운 커크가 그걸 또 낼름 낚아채 갔다.
-내가 아무리 바빠도 함선 안에서 들리는 소문 정도는 체크하고 있거든.
짐이 굴곡 심하고 느릿하게 꼬리가 늘어지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분명 떠보는 것이다. 레너드는 질렸다는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금세 되레 본인이 불편한 기분이 되어 시선을 피했다. 금방이라도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은 것처럼 엉덩이를 들썩이는 레너드를 보며 짐이 눈을 빛냈다. 짐 커크의 눈이 빛났다는 건 그다지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흥미로운 먹잇감을 찾은 승냥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스팍이 너한테 대쉬하고 있다며?
-씨발. 누가 그래?
-소문이 그렇다니까. 소문이. 아냐?
레너드는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다물었다. 아니라고 해야하는데 턱 나오질 않아서 순간 저도 모르게 머뭇거려졌다. 스팍이 그에게 대쉬하고 있다고? 수십 번 째 생각하는 거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근데 그 말 외엔 잦은 물질공세와 의도된 마주침들을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가. 하지만 최근에는... 레너드는 그들이 마지막으로 말을 섞었던 때를 기억해냈다. 거의 한 주나 되었다. 메디베이에서 그가 스팍에게 날카로운 말을 쏟아냈던 이후로 그는 스팍을 전혀 마주칠 수 없었다.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때 들고가버린 레너드의 패드를 아직까지도 돌려주지 않고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생각이 다른 데로 흘러 조용해진 레너드를 본 짐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비뚜름하게 놀람 섞인 웃음을 지었다. 거 신기하네. 진짜란 말이지. 결국 레너드는 신경질을 냈다. 소문인지 아닌지는 그 녀석의 친구인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거 아냐? 짐은 어깨를 으쓱했다. 요새 스팍하고 제대로 얘기 못 나눈지 오래되서 말야.
-그래서, 어떡할건데?
-어떡하고 자시고 할 게 어딨어. 대쉬는 얼어죽을. 분명 뭔가 원하는 게 있거나, 부탁을 들어줬음 하는 게 있다던가...
-스팍이 그런 이유로 다가가진 않을걸.
그렇게 딱 잘라서 확신하는데 할 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스팍이 가장 가깝게 지내는 사람은 짐 커크였고, 아마 스팍을 가장 잘 아는 사람 역시 짐 커크일 것이어서다. 레너드가 속으로 애초에 스팍의 이름을 거론한 자신을 탓하고 있을 때, 짐이 가벼우나 농담의 기색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야 스팍이 네게 뭘 했는지 직접 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녀석은 우선 매사에 진지하니까, 허투루 행동하는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해.
-짐. 지금 나와 스팍의 교제를 독려하려는 건 아니길 바란다.
-난 평화주의자야. 좋은 게 좋은거지.
-걔가 날 마음에 두고 있기라도 한다고 생각해? 그건 감정이야. 스팍에겐 불가능한 거라고.
짐은 레너드를 멀뚱히 보더니 곧 하하 웃었다.
-본즈. 스팍은 충분히 감정을 느낄 수 있어. 내가 보장하지.
사람의 심경이란 참 이상한게, 누군가 자신을 쫓아다니면 그게 거북하고 불편해서 떨쳐내고 싶어지기 마련인데, 정작 그것이 사라지면 되려 신경써버리게 되곤 한다는 것이다. 레너드가 그랬다. 거의 매일같이 우연찮게 마주치던 일도, 그의 앞에 이유없이 놓이던 온갖 종류의 음료들도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대원이 오가는 매스홀에서도 또는 복도나 관측실에서도 스팍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엇갈린거라고 생각하기엔 벌써 두 주 째가 되어갔으며, 레너드는 우연을 믿지 않았다. 그러니까, 자신은 스팍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철저하게.
-닥터. 커맨더 스팍은 바빠요.
갑작스런 캐롤의 말에 레너드는 입에 머금던 커피를 뱉을 번 했다. 캐롤은 아무렇지 않은 듯 제 몫의 음식을 입 안으로 가져가며 어깨를 으쓱했다. 계속 매스홀 입구가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잖아요. 레너드는 목이 뜨끈해진 채 미간을 구겼다. 이쯤 되면 그와 스팍에 대해 함선 내에서 어떤 소문이 퍼지고 있는지 알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적 없네.
-듣자하니 협상이 잘 안 풀린 모양이더라구요.
레너드의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캐롤이 말을 이었다.
-저도 브릿지에 자주 들락거리는 입장은 아니라 건너 건너 들은 것 뿐이긴 하지만, 몇 대표들이 세스로 행성 사건을 크게 걸고 넘어졌나봐요. 캡틴은 회의들이니 통신들이니 뭐니 열어대며 행성 대표들 구슬리기에 바쁘고, 커맨더는 커맨더대로 준비하고 있느라 바쁘다더군요.
요즘 함선 내의 분위기가 긴장되어 있단 걸 레너드 역시 알고 있었다. 특히 브릿지 내에서 일하는 대원들은 더했다. 거의 마주치게 되는 일조차 없었다. 레너드는 대부분의 시간을 메디베이에서 보냈고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은 브릿지에 갈 일이 없었기 때문에 협상으로 인한 중요한 일이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차마 짐에게 뭔갈 물어볼 시간조차 나지 않았다. 사실 메시지를 한 적이 있는데 짐이 바쁘다 는 단답 하나만 돌려보낸 이후 연락이 없었기도 했다. 레너드는 자신이 스팍을 신경쓰고 있지 않다는 걸 강력히 주장하기 이전에 이 상황에 대해 더 질문할 필요성을 느꼈다.
-아직도 협상건이 해결되지 않았단 말이야?
-알다시피 대원들 부상이 여간 심각한 게 아니었잖아요. 아무리 그 때 당시 커맨더가 임무를 계속 이행하는 게 불가피하다 했더라도 실전에서 뛰는 사람이 아닌 외부인이 보기엔 커맨더 스팍의 행동이 좀... 냉정해 보일 수 있다는 것도 무시 못하죠.
그러고보니 부상당했던 대원들 중 캐롤과 친분이 있는 사람이 있었던 걸로 기억했다. 캐롤은 굉장히 애매한 반응이었다. 한편으로는 스팍의 임무 이행 결정에 비호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또 한편으론 스팍이 굉장히 걱정되며 이 모든 사태가 찝찝하다는 식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건 레너드가 느끼는 기분과 비슷했으니 말이다. 사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후자의 비중이 더 컸다. 짐 커크를 포함한 다른 대원들 사이에 흐르는 텐션만 보아도 상황이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지 않다는 건 확실했고, 엔터프라이즈가 여전히 우주정거장에 정박된 채 이동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건 웬만해서 이 일이 빠른 시간 안에 마무리 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는 뜻이었다. 더군다나 스팍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 때 레너드는 캐롤이 흘린 말 중 한 단어가 문득 떠올랐다.
-그런데 스팍이 준비한다는 건 뭘 말하는 거지?
캐롤이 식판에서 고개를 들었다. 모르고 있었어요?
아직까지 탐사되지 않은 행성은 차마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발견되었으나 가지 않는 곳들도 무수했다. 인드리 시스템에 위치한 L클래스의 세스로 행성은 공기 중 이산화탄소와 질소, 수은의 양이 높아 인간은 보호 장비 없이 오 분을 넘기면 호흡 곤란이 올 수 있었으며 태양열은 섭씨 70도 이상까지 올라갔다. 토지는 메말라 있어 그 곳에 생존하는 생물은 극소량의 에너지원을 섭취함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종류가 대부분이었다. 심한 기온차와 한정되어 있는 숫자의 생명체로 인해 약 2세기에 이어 11차 변형까지 거친 동식물은 행성의 환경에 따른 생존 본능 및 사냥법을 터득했고 그것은 연방법의 기준으로 매우 위험 등급으로 지정될 만한 수준이었다.
한 마디로 건들게 되는 순간 끝장나는 행성이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자료라곤 행성의 기본적인 외적 분석과 더불어, 트렐륨이 생산된다는 정보 뿐이었다. 탐사 대상 리스트에 올라와 있는 행성 중 하나였으며 공교롭게도 그 임무는 항성 시스템에서 가장 가까이 위치하고 있던 함선인 엔터프라이즈에 내려졌고, 때마침 리겔리안 플루로 인해 골골거리던 캡틴 대신 커맨더 스팍이 탐사팀을 지휘하게 된 건, 지금 생각하면 모두 일종의 기막힌 우연처럼 보였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졌을만한 우연 말이다.
레너드는 소리 없이 숨을 들이쉬고 일항사의 쿼터 문을 두드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 투성이였다. 함선에 깊게 배어있는 긴장감도, 그리고 자신을 뒤쫓던 스팍의 시선도, 일상과 동떨어진 아슬아슬한 위기감에 레너드는 속이 뒤틀리고 만다. 잘못되어도 뭔가 크게 잘못되어 있는데 어디서부터 틀어진건지 알 수가 없었으며 그것을 되돌릴 방법도 없어 보였다. 레너드는 마치 자신이 태풍의 눈에 휘말려버린 한낱 부가물처럼 느껴졌다. 세상은 언제나 그에게서 한 발짝 떨어진 공간을 중심으로 돌아갔고 그는 풍랑에 휘청이는 배처럼 그것에 휩쓸리기만 하다가 엎어지고 고꾸라지는 것처럼.
그래서 레너드는 직접 발을 들이밀었다. 잠시 기다리니 문이 열렸고, 근 이 주간 보지 못했던 벌칸의 얼굴이 나타났다. 창백하고 음영이 뚜렷한, 변함 없이 무기질적인 모습. 스팍은 레너드를 보았음에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것도 여전했다.
-잠깐 이야기 좀 나누지.
사실 거절당할 가능성도 재어보고 있었는데 의외로 스팍은 순순히 한 걸음 비켜나 길을 열어 주었다. 레너드는 쿼터 안으로 성큼 걸어들어갔다. 스팍의 쿼터에 들어온 적은 처음이었다. 벽이나 바닥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벌칸의 물건들이 보였으나 레너드는 그 쪽엔 신경도 쓰지 못했다.
-무슨 용건이십니까? 닥터.
태연자약하게 묻는 스팍을 보자 잊고 있던 화가 또 다시 울컥 치밀어올랐다.
-제정신이야?
-... 저의 정신 상태에 대해 물으시는 거라면 지난 신체 검사에서의 결과를...
-개소리 하지마.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고 있잖아.
스팍은 뺨을 맞은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레너드는 스팍이 인간의 화법에 충분히 능통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지금은 그걸 매우 다행으로 여겼다. 도무지 자신의 입을 열어 설명할 마음이 들지 않아서다.
-89.4%의 확률로 이틀 후에 있을 일인탐사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것 같군요.
자살하러 간다는 말을 참 단조롭게도 했다. 레너드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세스로 행성에서의 스팍의 결정에 대한 의견은 분분했다. 애초에 이런 일이 거론될만한 협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스로 행성 사건은 이미 그 실제적인 중요성보다도 더욱 부풀려져, 연방은 물론이거니와 이 사건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조차 없는 행성들에까지 퍼진 모양이었다. 협상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돌리기 위해 별의별 수단이 사용되는 것은 빈번한 일이었다. 때마침 기막힌 우연으로 세스로 행성 사건이 일어났다. 결국 그들이 필요로 하는 건 하나의 희생양. 그리고 재수없게 그 희생양의 자리를 차지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연방의 플래그쉽인 엔터프라이즈이자 탐사를 이끌었던 스팍이었고.
실질적으로는 그들 전체는 물론이고 연방의 중요 협상까지 위험에 빠트린 스팍에게 그 잘못을 묻는 것이 맞을테다. 하지만 스팍의 결정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건 말 그대로 목적 없는 분란만 초래했을 뿐이었다. 더군다나 스팍은 벌칸이었다. 멸종 위기 종족이자 보호 종족으로 지정된. 결국 이 거지같은 상황은 스팍으로 하여금 단 한 가지의 선택을 남겨 주었다.
-세스로 행성에 다시 내려간다는 건 죽겠다는 말이나 다름 없어.
스팍은 시선을 똑바로 마주치지 않고 레너드의 왼쪽 귓가 언저리를 보았다.
-살아 돌아올 수 있는 확률은 있습니다.
-얼만데.
-11.59%입니다.
트렐륨의 소재를 파악하고 그 위치를 추적해 샘플을 가져온다. 위험 지역이니만큼 다른 종족에 비해 평균적으로 강한 신체 능력을 지닌 벌칸인이자 세스로 행성 사건의 카탈리스트나 다름 없던 스팍이 홀로 가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논리적이다. 라는 세 살 짜리 애도 안 넘어갈 말도 안 되는 상부의 지시였다.
레너드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제 아무리 스팍의 결정에 화가 났었더라도 이건 아니었다. 이 사실은 함선에 알려지지도 않은 채였다. 캐롤을 포함해 소식을 들은 다른 몇 대원들은 단순히 스팍이 탐사를 가게 되었다고만 알고 있었다. 병신같기 그지 없는 일이다.
-개죽음이 될거야. 스팍.
-제겐 선택권이 없습니다. 게다가 여전히 생존 확률이 존재하는...
-내가 머저리로 보이나?
-함장님께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셨습니다. 지금도 13차 토론을 위해 인드리IV로 가신 상태죠.
스팍은 시선을 내렸다. 바닥을 보는 갈색 눈은 조용했다.
-그리고, 저의 잘못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니 제가 책임을 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다시 눈을 든 스팍과 레너드의 시선이 마주쳤다. 벌칸의 눈은 사막을 떠올리기도 했고, 메마른 나무껍질과 같기도 했다. 하지만 레너드는 처음으로 그 안에 자리잡아 움튼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깨달았다. 아. 내가 그에게 뭐라고 말 했더라.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생명을 살리지 못했다는 데에서 오는 죄책감을 레너드 맥코이가 모를 리가 없었다.
레너드는 기억했다. 자신의 앞에서 죽어가는 환자를 지켜볼 수 밖에 없던 끔찍함을. 그런 그가 차마 기억하지 못했던 것은 누군가를 잃는 경험은 자신만 겪은 게 아니란 것이었다. 스팍도 잃었다. 그 역시 상실을 경험했고 눈 앞에서 죽음들을 보았다. 그런데, 레너드는 차마 그가 아프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거라고. 그래서 애초에 기억조차 하지 못했고. 그리고...
목 메인 신음이 나왔다. 자신의 끔찍한 위선과 이기심에 토기가 치밀었다.
이십 팔 분. 그 동안 레너드는 메디베이의 안에서 금방이라도 온 몸이 터져버릴 것 같은 감정의 북받침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서성였다. 구조 요청 신호가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메디베이를 뛰쳐 나가 셔틀에 오른 것도 레너드였고, 다른 대원들과 다르게 제 생사를 위협할 행성 때문이 아닌 그 위에서 죽어가고 있을 미련한 벌칸인의 생각으로 손이 떨려온 것도 레너드였다. 죄책감으로 숨이 막혀온 게 먼저일지 모르나, 그 다음으로 그를 아찔하게 만든 건 차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다. 깊게 생각하기엔 시간 조차 아까울. 그런 절박함.
레너드는 셔틀에서 구르듯 뛰쳐 나왔다. 헐떡이는 숨으로 무거운 헬멧의 모니터가 뿌옇게 서리길 반복했다. 레너드는 그의 눈 앞에 쓰러져 있는 벌칸인을 보고 죽은 듯이 멈췄다. 스팍은 자신의 피로 인해 흐려진 시선으로도 레너드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그는 쿨럭 하고 초록색 피를 토했다. 비현실적인 그림같았다. 어째서 저 눈에 아무 감정도 존재하지 않았다 생각했었을까.
-저도 고통을 느낍니다. 닥터.
차라리 원망을 해주길 바랬다. 하지만 그것 뿐이었다. 곧 스팍은 지친 듯이 흘러 넘치는 눈을 내려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