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팍칸
Sacrilege 2
10.
벌칸은 꿈을 꾸지 않는다.
11.
보그 크라이시스 이후 레너드 맥코이는 더 이상 우주에 오르지 않았다. 비행선도, 트랜스포트도 이용하지 않았다. 그는 차를 한 대 구입했다. 22세기에나 간신히 볼 수 있던 오래된 쿠페였다. 거의 폐차 수준이던 것을 구해 와서 손보는 일은 쉽지 않았으나 그는 이런 부분에 빠삭하던 커크가 예전에 알려준 약간의 트릭을 사용해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모양새로 만들 수 있었다. 엔진을 배터리 형식으로 바꾸고 타이어를 교체하는 등 비용은 끔찍하게 깨졌지만 그는 자신의 차에 만족했다. 페인트까지 새로 칠해 놓으니 박물관에서 가지고 나온 것 마냥 멀끔했다. 맥코이는 조금 더 슬퍼졌다.
헌츠빌에는 여전히 그처럼 골동품을 한두 개쯤 갖고 있는 집이 많았다. 그들은 맥코이가 헌 차를 구입했을 때에도 그러려니 했고 그를 조금 더 잘 아는 사람들은 이해한다는 듯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수년간 문을 닫았던 클리닉을 다시 열었다. 평생 연락 한 번 없을 것처럼 굴던 파멜라가 딸내미를 데리고 온 적도 있었다. 여자는 두어 번 만나 보았지만 번번이 깊은 관계는 되지 못했다. 맥코이가 삼 여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쿠페 이외에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한 것은 바로 사흘 전 그에게 런던으로 오라는 초청장이 날아왔을 때였다. 그건 초청을 빙자한 소환 명령이었다.
그는 두 번 다시 스타플리트나 섹션31이나 그 어떤 정부의 단체와도 연관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과거를 회상하게 했고 지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맥코이는 그들이 평온한 잠에 빠진 증강인간을 다시 깨운다고 했을 때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을 뱉었을망정 놀라지는 않았다. 미시시피 촌구석에 박혀있을 지언즉 바깥세상이 돌아가는 꼴은 티비와 라디오에서도 지나칠 정도로 충분히 볼 수 있었다. 전쟁. 군함. 병력 모집. 그건 어찌 보면 연합의 예견된 미래였다. 그 누가 스타플리트의 제복과 함선들을 보며 평화의 상징이라 생각할 것인가. 그들은 비둘기 가면을 쓴 포식자였다. 샌프란시스코 사태와 보그 크라이시스는 그들로 하여금 조금 더 빠른 시일 안에 군사화 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해준 셈이었다. 그리고 제임스 커크는 그저 불행한 희생자가 된 것이고.
제임스. 그들의 안쓰럽고 불쌍한 영웅.
맥코이에게는 런던에 가는 것 말고는 별 도리가 없었다. 그는 우후라처럼 강하지도 못했고 스콧처럼 뻔뻔하지도 못했다. 사실, 이젠 칸이 도시를 날려먹건 나라를 불태우건 어찌 되던 상관없다는 마음도 있었다.
런던에 도착했을 때 맥코이는 이미 세 번을 토한 상태였다. 그는 땅에 발을 딛자 한 번 더 토했다. 위액까지 모조리 뱉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도착하자마자 맥코이는 스콧에게 연락을 했으나 답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스콧이 어디에 있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아마 그 사건 이후 가장 연락이 뜸한 사람이 있다면 스콧일 것이다. 거의 반년, 혹은 그보다 더 되어서 답장이 돌아오곤 했다. 그건 간혹 맥코이를 심란하게 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스팍을 만났을 때만큼 그를 심란하게 만들지 못했다. 회복실에 들어가 스팍이 칸의 목줄기를 움켜쥐고 있는 걸 발견하자 심란함은 더욱 굳혀졌다.
- 스팍! 그만 둬!
맥코이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며 괴이한 데자뷰에 빠졌다. 그건 아픈 종류의 그리움을 불러 일으켰다.
12.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축복된 일일 테다.
그건 살아있다는 걸 의미한다. 여전히 활성화 되어있는 신경 세포가 뇌로 그 고통을 전달하고 근육을 긴장하게 만든다. 그리고 숨을 쉰다. 늑골이 확장되고 폐가 부풀어 오르며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살아있다.
칸 누니엔 싱은 자신의 끝없이 이어지는 꿈을 회상한다. 목적지가 보이지 않는 눈 덮인 벌판을 홀로 걷는 자신의 모습을 말이다. 땅은 지독하게 춥고 생명체라곤 찾을 수 없다. 심지어 그 자신조차 생명체라 부를 수 없었다. 발자국이 남지 않는 어떤 것을 ‘생명’이라 부를 수 있을까? 모든 살아있는 무언가는 세상에 자취를 남기기 마련인 것을.
그는 언제나 고독했다. 그 누구도 자신의 곁에 남을 만큼 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떠돌았다. 감히 지상에서 가장 우등한 그의 동족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완벽한 낙원을 찾을 수 없어서다.
그는 목이 졸리는 채로 생각했다. 낙원이라. 그는 낙원을 꿈꾼 적 있었다.
삼백여 년 전 그의 여든 명 동족과 기약 없는 수면에 빠져들 때에 꾸었던 꿈에서는 눈 덮인 벌판도 발자국 없는 짐승도 나오지 않았다. 한 때, 그래. 한 때 그의 꿈에선 즐거웠던 적이 있었다. 그와 그의 동족이 자리 잡고 번창할 낙원 같은 세계를 상상하며 온 우주를 손에 넣는 그런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칸은 웃었다.
이것이 축복이라면, 그의 낙원은 고통의 허상이다.
13.
길어봤자 이틀이 걸린다던 절차는 사흘째가 되어서야 끝났다. 극비라는 단어가 붙은 서류들과 리코딩이 오갔다. 스팍이 칸을 죽이려고 한 시도에 대해서 약간의 대화가 오갔지만 그 뿐이었다. 연방의 유일한 드레드노트급 전함의 함장을 위협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사실 스팍은 내심 그들이 이로 하여금 자신을 칸으로부터 떼어내길 바랐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동안 스팍은 총 열 아홉 시간의 명상을 했고 그가 새로운 울리다르의 대원과 함께 스타플리트 건물을 떠날 때쯤에는 완벽하게 자신의 몸을 통제 하에 둔 상태였다. 런던의 날씨는 사흘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흐렸다. 인간들이 말하는 우울한 날씨였다.
그들은 트랜스포트 대신 셔틀로 이동했다. 스팍은 맥코이와 마지막으로 짧게 대화를 나눴으나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치부했다. 의사는 불필요하게도 걱정스러워 보였다. 맥코이는, 비록 한숨과 함께였긴 했으나 스팍에게 만나서 좋았다고 말했다. 스팍은 그 말에 동의하기 힘듦을 느꼈다. 레너드 맥코이는 커크와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하나였고 그를 만난다는 건 과거를 되짚어 상처에 소금을 문대는 듯 한 기분만 주었다.
그가 건물을 완전히 떠나기 위해 뒤돌기 전 맥코이가 그를 불렀다. 의사는 지쳐보였다. 어쩌면 며칠에 걸친 의료 절차 때문이었을지도, 혹은 숨길 수 없는 나이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변함없이 역한 날씨 탓일 수도 있었다.
- 짐은 개죽음 당한 게 아냐, 스팍.
스팍은 입을 다물고 있다가 느릿하게 알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물론 이해하는 것과 인정하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맥코이는 담배를 물었다.
- 짐은 그가 해야 할 것을 했을 뿐이야. 그건 짐이 가장 바라던 해피엔딩이었지. 웃기지 않나? 녀석은 자신을 향한 그 누구의 희생도 받아본 적 없으면서, 정작 본인의 임무에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 그걸 단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을 정도로.
- …….
- 그는 우리가 ‘살아가길’ 원했던 거야. 빌어먹을 제 목숨을 담보로, 우리가 살길 바랐던 거라고. 그걸 헛되게 하지 마.
맥코이는 저가 마치 죽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스팍은, 비록 숨을 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것이 전부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가 더욱 견딜 수 없는 것은 맥코이가 마치 커크가 죽어갈 때의 모습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을 하고 있다는 부분이었다. 그는 의사에게 긴 말을 하는 대신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다음 만남을 기약하지 않는 인사말을 남긴 채 스팍은 남자를 뒤로했다.
울리다르에서 그들의 함장을 마중하기 위해 내려온 셔틀에 올라타자 셔틀은 지구에 내려왔던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비상했다. 스팍은 칸과 마주본 채 앉았다. 무장한 벌칸 대원이 그로부터 몇 자리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다. 함선과 마찬가지로 벌칸에게 만족스러운 기온을 유지하는 셔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칸의 얼굴은 지나치게 창백했다. 그가 목에 남겼던 손자국은 사라진지 오래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다른 부분이 없었다. 칸 누니엔 싱은 그렇게 밀랍으로 만들어진 석상과도 같았다. 마치 시간을 박제해 버린 것처럼 - 그건 스팍 역시 마찬가지일지 모르지만. 그의 등은 철심을 박아 넣은 듯이 곧았고 상대를 향하는 시선은 지배자의 것이다. 뇌 속에 칩이 박혀 있다는 사실은 증간인간의 오만함에 조금의 흠집도 내지 못했다. 타르를 녹여 만든 것처럼 검은 군사용 제복은 그것을 입고 태어난 것처럼 남자에게 지나치게 잘 어울렸다.
- 흥미롭군.
칸이 말했다. 흥미롭다고 말하는 것과 별개로 그의 목소리는 메말랐고 무심했다. 스팍은 대답하지 않았다.
- 위대한 영웅은 죽고 여신은 월계수 나무 대신 칼을 들은 꼴이라. 벌칸은 평화의 종족이 아니던가? 미스터 스팍.
- 무의미한 살생을 하지 않는다 해서 필요에 의한 폭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칸은 정말 즐거운 것처럼 발작적으로 소리 내서 웃었다.
- 필요에 의한? 오, 미스터 스팍. 마치 내가 기억하는 어떤 전쟁광 늙은이처럼 말하는군.
- 당신이 잠든 사이에 역사를 바꿀만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도는 알고 있다. 이미 기록을 전부 보았으니까. 하지만, 정말 그것 때문인가?
스팍은 입을 다물었다. 곧 셔틀이 낮은 울림을 내며 정박장에 도착했다. 칸의 긴 손가락이 손잡이를 느릿하게 두드렸다.
- 재밌는 여행이 되겠군.
스팍은 칸의 여유로운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혹은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칸은 스팍이 저를 정말로 죽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듯 했다. 어쩌면 그의 증강인간으로서의 힘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을 거라 장담하는 모양이었다. 어느 쪽이던 잘못된 가설이었으나 스팍은 달리 지적하지 않았다. 그들은 셔틀에서 내렸다.
대략 천 사백 미터에 달하는 길이. 각진 첨탑을 눕힌 듯한 두 개의 나셀. 펜촉과 같은 앞머리와 그로부터 이어지는 칠흑의 타원형 몸통. 어둠 속에서 적을 향하는 짐승의 눈알 마냥 붉은 빛을 뿜는 워프 엔진과 페이저 빔의 배출구. 다차원 레이더의 낮은 그르렁거림. 울리다르는 그 자체로 조용한 맥박이 요동치는 괴물이었다. 우주의 어둠을 기이하게 반사하는 육중한 몸뚱이의 옆구리에 달린 셔틀 베이는 아가리를 벌려 함장의 귀환을 맞았다.
종종 그러하듯 이번에도 스팍은 저의 함선에게 먹힌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는 이 함선이 언젠간 자신을 뼈까지 발라먹을 거라 생각했다. 대신 그는 침묵의 환영을 달게 받았다. 소음 하나 없이 그를 맞는 대원들의 틈에서 술루가 걸어 나왔다. 보통 부함장인 술루가 구지 함장을 마중하기 위해 셔틀 베이까지 나오는 비효율적인 일은 없다시피 했으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는 평상시와 다른 선택을 했다. 술루는 대원들의 인도를 받아 멀어지는 증강 인간을 흘끗 보았으나 그게 전부였다.
- 캡틴. 그의 직위는 어떻게 될 예정입니까?
- 기술 장교입니다.
술루의 무표정이 조금 흔들렸다. 장교라 함은 남자가 그들 커맨딩 오피서들과 동등한 위치를 갖게 된다는 말이었다. 더군다나 기술 장교였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한 스팍이 발걸음을 옮기며 덧붙였다.
- 리겔 행성에 통신하여 마커스 대위에게 알리도록 하십시오. 그녀가 돌아왔을 때 놀라지 않길 바라니까.
- 알겠습니다.
놀랄 뿐일텐가. 캐롤 마커스가 그녀와 같은 부서에서 일하게 될 이 새로운 선원에 대해 얼마나 시뻘건 분노를 표출할지 생각했으나, 술루는 함장의 말에 토를 달지는 않았다. 스팍은 술루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술루는 인간이었음에도 지극히 이성적이었고 감정을 배제하는 법을 알았다. 보그 크라이시스 이후로 더욱 그랬다. 그것이 스팍이 그를 부함장으로 놓은 이유였다.
사실 술루는 그가 울리다르의 함장을 맞게 되었을 때 엔터프라이즈의 구 선원들 중 유일하게 자진하여 그의 대원이 되길 희망한 자였다. 적어도 살아남은 자들 중에서는 말이다. 울리다르는 하나의 철옹성이었으나 동시에 분노로 산화한 지식의 무덤이었다. 이 함선은 그 어디에서도 엔터프라이즈의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햇살처럼 우주를 질주하던 백마의 빛에 길들여진 자들은 울리다르의 어둠을 본능적으로 거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스팍은 이해했다. 그랬기에 그는 떠나는 이들을 잡지 않았다.
- 항로에 변경은 없습니까, 캡틴?
술루의 질문에 스팍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 계획대로 알파 쿼드란트의 2차 순찰을 행합니다. 1400시에 출발하도록 하죠.
- 괜찮으시다면 '그'의 이동 범위는 엔진실을 포함한 제 5구역 내로 한정 짓겠습니다.
스팍은 그의 부함장을 보았다가 인간의 눈에서 채 숨기지 못한 증오의 빛을 발견했다.
- 그렇게 하십시오.
술루는 경례했다. 그는 벌칸의 곧은 등이 복도로 멀어지는 것을 보다 브릿지로 이동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어디선가 우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으나 그의 주변엔 검은 옷을 입은 석상 같은 벌칸 대원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14.
<스타데이트 2265.59 지구 스타플리트 데이터 코드S 알파-레벨 관람 제한기록 no.1928044.45>
「…따라서 딜리시움의 순간적 고갈로 인지한 워프 코어의 작동이 대략 2분 47초 동안 중지되었으며 동시에 함선의 2백마일 거리에 생성된 바잔 웜홀과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바잔 웜홀은 매 233분마다 그 모습이 실체화되며 당시 USS 엔터프라이즈의 경우 동력의 상실로 인에 레이더 센서의 기능 소실, 웜홀의 존재를 인지하는 것에 실패.. (중략) 사전 기록에 따르면 바잔 웜홀을 통해 델타 쿼드란트로 이동한 경우는 존재하지 않아 그에 따른 정보가 극히 제한되어 있음이며... (중략) USS 엔터프라이즈의 레코딩을 참조, 웜홀의 생성 시간이 14476.2 이었음을 고려했을 때 보그의 인위적인 조작에 대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보그와 USS 엔터프라이즈 간에 이루어진 직접적인 마찰로부터 알아낼 수 있는 그들의 기술과 무기에 대해서는... (중략) 무인 행성 ZX748827-00으로 이어진 전투에서 USS 엔터프라이즈의 전 함장 고 제임스 T. 커크가 사망, 이후 총 지휘권은 전 부함장 S'chn T'gai 스팍에게 전달…」
15.
저 자는 왜 우는 겁니까?
인간이잖습니까.
16.
친애하는 캐롤.
오랜만이네, 캐롤. 나일세. 맥코이.
이런 구식 메시지는 오랜만이라 어색하군 그래. 마지막으로 연락한지 네댓 달 쯤 된 것 같군. 자네의 위치를 찾아보니 리겔 행성이라 뜨더구먼. 분명 어뢰이니 탄두니 뭐니 하는 것 때문에 간 거겠지? 아마 이 메시지를 확인할 때쯤이면 그 삭막한 곳에서 벗어난 후일 거라 생각하네. 이 곳 빌어먹을 남부 촌구석의 메시지 전송 방식은 여전히 아주 구식이거든. 예상일보다 항상 서너일 늦게 도착한단 말이지. 그렇다고 트랜스미터를 쓰기 위해 시내까지 나가기엔 여유가 없어. 클리닉이 바빠서 말이야.
으음…….
젠장. 난 돌려 말하는 데에 소질이 없어. 이래서 아직도 여자를 못 만나나봐.
저번 주에 스팍을 봤다네. 자네가 니요타와 다르게 스팍에 대해 별로 얘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네만 그녀에게 할 만한 이야긴 아닌 것 같아서.
자네도 스팍이 런던에 갈 거란 건 알고 있었겠지. 공교롭게도 나 역시 그 곳에 있었어. 그 빌어먹을 자식이 깨어나는 것에 나도 한 몫 협조하게 되었지. 참 웃긴 일이지 않나? 내 손으로 잠재운 놈을 다시 내 손으로 깨우게 되었으니. 나도 그렇고 자네들도 참 기구해. 하, '자네들'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도 새삼 웃기는군. 우린 항상 우리일 줄 알았지. 요즘은 전부 웃긴 거 투성이야.
아무튼, 내가 이 말을 꺼내는 건 곧 자네가 놈과 같이 일하게 될 거라 그래. 칸은 말 잘 듣는 애완 고양이처럼 가만 앉아만 있을 놈이 아냐. 놈은 자네들을 흔들어 놓을 거야. 아주 많이. 샌프란시스코 때처럼, 어쩌면 그보다도 더.
내가 비록 지구의 촌구석에 박혀 있다 하더라도 그 망할 함선이 어떤 꼬락서니인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어. 숨 막히겠지. 스팍을 보니 그건 더 확실한 가설처럼 보이더군. 언제 그 멀쩡한 척 하는 유리를 깨고 미친 야생마처럼 날뛸지 모르는 일이야. 그리고, 난 지금 스팍에 대해서만 말하는 게 아니고.
캐롤. 난 정말 걱정된다네.
자넨 똑똑한 사람이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거야. 조심해. 그리고 스코티에게 연락 한 번 해봐. 자네들 꽤 친했잖아. 어쩌면 자네 연락은 받을지도 모르지. 아님 혹시 그와 그동안 계속 연락하고 지냈나? 제길, 가끔 보면 나 혼자서 발버둥치는 것 같군. 뭐, 됐네. 시간 나면 답장이나 해줘.
그리고, 자네는 괜찮은가?
레너드 맥코이로부터.
17.
순리란 무엇인가?
칸 누니엔 싱은 그것이 만물의 움직임이며 모빌리티의 철학이라 생각했다. 당연하게 행해져야 하는 것. 지각의 변동. 꽃의 개화. 동물의 진화. 물이 높은 곳에서부터 낮은 곳으로 흐르고 바람이 기류에 따라 이동하며 지구의 태양이 동에서 서로 뜨고 지는 움직임. 물, 돌, 흙, 바람, 빛. 자연의 모든 부분이 흘러 길을 만들고 변화를 꾸미고 역사를 이뤄내는 것. 그리고 칸은 순리의 뜻이 만들어 낸 우월한 창조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모든 것에는 그 어미가 있기 마련이다. 칸은 자신이 그것마저 부정하는 순간 창조의 법칙 역시 부정하게 될 거라고 믿었다. 세계는 그들이 숨 쉬는 순간에 마저도 끊임없이 온갖 것을 생산하고 있다. 마치 그가 만들어진 것처럼 그는 또 다른 무언가를 만들 것이다. 창조물은 창조자가 되고 그 지식과 유산은 대물림된다. 칸은 그가 창조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새로운 세계와 역사를 일궈내 그의 이름을 창세기에 새겨 넣을 것이다. 그것이 그가 아는 순리였다.
칸은 함선의 검은 벽에 손을 대고 전율했다. 이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그의 창조물의 잔상이 일렁였다.
울리다르는 벤전스의 모조품이었다. 그 질로 따진다면 감히 그의 손을 거친 벤전스와 비교할 수 없는 카피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조잡함 안에는 분명히 그가 기억하는 창조물의 자취가 맥박치고 있었다. 그건 거칠었고 다듬어지지 않았으며 불완전했다. 복수가 제 주인에게 길들여진 맹수였다면 울리다르는 이를 드러내지 못해 안달난 들짐승이었다. 칸은 그것에게서 색다른 매력을 느꼈다. 그의 핏속에 잠재된 지배 욕구를 일깨우는 사나운 흉포함이리라.
- 널 닮았군.
칸이 말했다. 어느 새 그의 뒤에 다가와 있던 인기척은 그 말에도 아무런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칸은 절제된 흥미를 담은 시선으로 그의 쿼터를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침대와 테이블, 모니터와 같은 기본적인 물품을 제외하면 무기질 적으로 메마른 공간이었다. 그는 몸을 돌렸다.
- 울리다르. 벌칸어로 상처라는 뜻이지. 아닌가?
스팍은 말이 없었다. 칸은 히죽 웃었다.
- 상처 입은 채 물어뜯을 먹이를 찾아 떠도는 짐승. 벌칸인을 표현하기엔 지나치게 야만적인 표현이겠지만 지금의 네겐 어울리는 것 같군.
칸은 벌칸이 표정 없는 얼굴과는 다르게 그 손을 힘줄이 설 정도로 주먹 쥐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건 오른손에 불과했을 뿐 스팍의 장갑 낀 왼손은 완벽한 주먹을 만들지 못하고 어설프게 흠칫거렸다. 눈을 가늘게 뜨던 칸은 느릿한 걸음으로 자신의 영역을 탐색하듯 방을 걸었다. 그와 동시에 칸의 시선은 곳곳에 숨겨진 감시 카메라들을 빠트림 없이 훑고 지나갔다.
- 그러고 보니 벌칸은 원래 야만스러운 종족이 아니던가? 로뮬런의 후손인 너희들은 단지 그 본성을 숨기고 지낼 뿐이지. 핏속에 흐르고 있는 흉포함까지 도려낼 수는 없을 테니까. 내 말이 틀린가? 미스터 스팍.
날 죽이려고 했던 건 바로 너였잖은가? 그 질문은 소리 없이 내포되어 있었다. 칸은 여전히 기억했다. 저 고상한 척 하던 벌칸이 그를 향해 끊임없이 주먹을 휘두르던 것을. 피부가 벗겨지고 손마디가 으스러질 때까지.
- 당신의 말이 맞단 건 인정해야겠군요.
스팍의 단조로운 목소리는 서리가 떨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밑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드러낼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 우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이 이성을 억누르게 될 가능성을 배재하려 할 뿐.
- 실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군.
- 모든 행동에는 실패의 확률이 존재합니다. 당신의 복수가 실패했던 것처럼, 그리고 내가 분노를 억제하지 못했던 것처럼.
- 그리고 제임스 커크가 죽은 것처럼 말이지.
벌칸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커크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들 사이의 공기가 끊어질 듯 팽팽해졌다. 숨 막힐 정도였다.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와 전투의 본능을 지니고 태어난 자. 그 어느 쪽도 물러서지 않았다. 칸은 스팍이 몇 년 전 샌프란시스코에서 마지막으로 마주했을 때로부터 변했다는 걸 알아차린 지 오래다. 벌칸은, 이제 더 이상 벌칸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그는 주인을 잃고 떠도는 유령이었으며 분노와 한이 둥지를 튼 껍데기에 불과했다. 칸은 이 상처 입은 짐승이 결국 도발을 참지 못하고 결국 그에게 이를 드러낼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짐작과는 다르게 스팍은 그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 당신은 한 때 인간이었죠.
포식자의 조롱하는 듯한 목소리가 뱀처럼 그의 몸에 똬리를 틀었다. 스팍의 입 꼬리가 느릿하게 비틀렸다. 흰 이가 드러났다. Then tell me.
- 여전히 인간처럼 공포를 느낍니까?
18.
칠십 이 개의 보존캡슐은 여전히 섹션31의 지하에 잠들어 있었다.
공포. 칸은 이를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