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뱃콘 in my veins 3
저스티스 리그의 본부 내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조용했다. 가끔 두런거리는 짧은 대화나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울리긴 했으나 그 뿐이었다. 리거들은 간혹 흘끔거리며 그린랜턴의 눈치를 보곤 했다. 그린랜턴이 얼마 전 그의 사랑해 마지못하던 연인과 헤어졌다는 건 그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가 딱히 그 사실을 숨기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주 침통해하거나 심각한 감정 기복을 보이지는 않았고 심지어 척 봐서는 멀쩡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으나 이상할 정도로 조용한 적이 많았다. 지금도 그는 휴게실의 티비만 보고 있다. 분명 시선은 티비를 곧바로 향해 있는데 그 표정은 뭔가가 부재되어 있는 것처럼 아무런 반응이 없다. 리거들은 그가 헤어진 연인을 적잖이 좋아했나보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와 가장 가까운 편이라 할 수 있는 플래시가 그린랜턴의 옆에 다가가 앉았다. 이봐 랜턴, 티비 보는거야? 그린랜턴은 몇 초 후 한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래 보고있어. 티비에는 네셔널 지오그래피가 틀어져 있었다. 플래시는 그가 아무것도 보고있지 않다고 결론 내렸다. 그는 최대한 어색하게 들리지 않게 묻는다. 너 괜찮아? 그의 질문에 그린랜턴은 플래시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대답했다. 괜찮지 않아. 플래시는 눈을 크게 떴고 그린랜턴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내가 그린랜턴이라는 것을 밝히니 그가 헤어지자 했어. 플래시는 그의 말 도중에 잘못된 단어를 들은 것 같았지만 그거에 대해 되묻기엔 그린랜턴의 말이 너무 진지했다. 랜턴은 똑바로 말을 하고 있었으나 어딘지 나사가 빠진 듯 보였다. 헤어지자 한건 그인데 왜 그렇게 슬픈 표정을 했을까? 너무 외로워보였어. 난 그가 외로워하는 걸 더 이상 보고싶지 않았는데 웃기게도 그는 이전보다 더 슬퍼보였어... 그린랜턴은 양 손을 펴고 그 안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그에게 무슨 짓을 한걸까. 그렇게 중얼거리는 그린랜턴을 지켜보던 플래시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린랜턴의 상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히어로의 옷을 입고 있었지만 지금의 그는 늘 용기와 기백으로 넘치는 그린랜턴이 아닌 실연의 슬픔에 빠져있는 한 남자에 불과했다. 그린랜턴은 곧 낮게 한숨을 쉬면서 몸을 일으키며 마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방금 한 말은 잊어 라고 했다. 플래시는 그린랜턴의 어깨를 위로하듯 짚었다. 가끔은 사랑조차 모든걸 아름답게 만들 수 없어. 플래시는 기운 내라는 말을 남기고 그린랜턴을 홀로 내버려둔 채 휴게실에서 나왔다. 마지막으로 그가 돌아본 랜턴의 뒷모습은 눅눅하고 우울했다.
한동안 배트맨이 저스티스 리그에 나오지 못했다. 바쁘다는 이유였다. 당시 리그는 그다지 바쁘거나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에 리거들은 그의 갑작스러운 부재에도 많은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그린랜턴이 워낙 그답지 않은 이상한 모습을 보이고 있던 와중이었기에 그에게 신경쓰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린랜턴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평상시의 그로 돌아왔으나 그 속이 어떤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배트맨은 거의 이 주가 넘는 동안 연락조차 되지 않다가 삼 주 째가 끝나갈 무렵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 쯤 겨울이 계절의 문턱을 두드렸다.
첫 눈이 내리던 날 리그는 조용했다. 잔잔하고 평화로웠지만 폭풍 전의 고요와 같은 안락함이었다. 슈퍼보이는 눈을 털며 들어와 배트맨에게 바로 다가갔다. 다른 멤버들은 하나같이 태평한 모습이었으나 배트맨 그만큼은 무슨 일이 그렇게 많은지 홀로 모니터들 앞에서 바빠 보였다. 그는 슈퍼보이가 다가오자 얼굴을 묻고 있던 서류들에서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무슨 일이지? 그의 말에 슈퍼보이가 눈썹을 미묘하게 찌푸렸다. 절 보면 그 말밖에 나오지 않는 건가요? 그 말에 배트맨이 입을 꾹 다물더니 다시 그가 보고 있던 서류들로 얼굴을 돌렸다. 사실 슈퍼보이 그에게 뿐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그런 식으로 말한다는 건 알고 있긴 했지만 내심 배트맨이 이런 반응을 보이니 슈퍼보이는 조금 신기했다. 할 말이 없으면 꺼지라는 투의 배트맨의 모습에 슈퍼보이는 짐짓 얼굴을 굳히며 팔짱을 낀다.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하라면서요. 배트맨의 얼굴에 당황이 스친건 아주 잠시였고 그는 곧 딱딱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가 심심할 때마다 본부를 들쑤셔도 된다는 말은 아니었다, 슈퍼보이. 그의 엄격한 말에 슈퍼보이는 혀를 내두르며 그가 찾아온 용건을 말했다. 저번 임무에 관한 거였다. 배트맨은 가만히 그의 말을 듣다가 말했다. 그와 함께 싸우는 건 어땠지? 슈퍼보이는 갑자기 입을 닫았다. 배트맨이 말하는 그가 슈퍼맨이란 것을 모를리가 없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는 잘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아직 그들의 사이는 소원하기 그지 없었다. 배트맨은 무언가 생각하듯 잠시 침묵하다가 곧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임무에 관한 이야기를 마저 이어갔다.
그런 그들을 한쪽에서 지켜보던 그린랜턴이 다가왔다. 그가 갑작스럽게 걸어오자 슈퍼보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는 배트맨이 말을 멈추며 입을 닫는 것을 보았다. 두 리거의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린랜턴은 슈퍼보이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모니터를 가리키며 배트맨에게 물었다. 이거 특정한 민간인도 찾을 수 있는건가? 그의 질문에 배트맨이 낮게 대답했다. 그건 왜. 그린랜턴은 별일 아닌 듯이 말한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그의 말에 슈퍼보이는 눈을 크게 뜨며 배트맨을 돌아보았지만 배트맨은 전혀 놀랍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사적인 일에 사용할수는 없다. 그렇게 딱 잘라 말하며 그린랜턴을 무시하는 배트맨을 잠시 쳐다보던 그린랜턴은 몸을 돌려 걸어갔다. 슈퍼보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 분위기였지만 어느 부분이 이상한 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가 무심코 배트맨을 보았을 때 그는 배트맨이 그의 평소처럼 딱딱한 표정과 다르게 무릎 위에 올려진 한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완연한 겨울이었다. 미국은 외계 생명체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이전 외계생물의 침공 때 모체를 완벽히 제거했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씨앗이 번져 또 다른 형태의 기형 모체를 탄생시켰다. 리그의 감시망에도 걸리지 않은 채 땅 속 깊은 곳에서 성장한 그것은 완전한 성체가 되어 지반을 뚫고 솟아났으며 수 마리의 괴생물을 출산했다. 그 외계생물의 자세한 것은 여전히 불명이었다. 배트맨은 이전 사건에서 그가 일의 처리를 소홀히 했다고 생각한 듯 했다. 슈퍼맨은 그의 책임이 아니라고 말했으나 배트맨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는 밤낮으로 리거들과 그 괴생물을 막는 데에 힘을 합치고 그 성분을 분석하는 데에 모든 시간을 쏟았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리거들이 손놓고 앉아 있기만 했다는 말은 아니지만 배트맨은 그 누가 봐도 무리하고 있었다. 도심으로 향하던 괴생물을 제거하고 오며 슈퍼맨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이 사태가 자신의 소홀함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의 말에 다른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하며 동의했다. 외계생물의 번식 방법은 그들 중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었고 그것에 대해 배트맨이 책임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최근 그가 너무 자신을 몰아 붙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원더우먼의 말에 플래시가 하루 이틀이 아니긴 하지만 뭐. 하고 중얼거렸다. 배트맨은 벌써 배트포트를 타고 점처럼 멀어져 가고 있었다. 아마 곧장 돌아가 모니터링을 하거나 실험실 같은 곳에 틀어박힐 것이다. 플래시는 평소 같으면 한 마디 끼어들었을 그린랜턴을 쳐다 보았다. 하지만 그린랜턴은 입을 굳게 닫은 채로 배트맨이 사라진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얼마 후 민간인 실종자의 수가 급격히 늘어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전부 그 괴생물이 출몰했던 지역이었다. 몇 번 째인지 모를 괴생물과의 전투 이후 그들은 성체가 된 괴생물의 힘이 사람을 그 자리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을 보았다. 그 광선을 직접적으로 받게 된 민간인이 나중에 몸이 바스러지듯 사라지자 그들은 이것이 쉽게 간과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이 지구 위에서 증발해 버리는 것이다. 죽는 것이라는 가능성이 가장 신빙성 있게 들렸기에 사태는 점차 심각성을 드러냈고 리거들은 괴생물을 죽이는 데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배트맨은 손에 들고 있던 장비를 마지막으로 확인한 뒤 시선을 들었다. 눈발이 흩날리는 고요한 공원은 모체가 자리잡은 이후부터 황무지가 되었다. 심장의 파동 소리를 내며 운동하는 기괴한 모체의 주변에는 반투명한 기분나쁜 막이 둘러싸며 그것을 보호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틀리지 않았다면 배트맨이 들고 있는 장비는 그것을 뚫어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는 그것에 가까이 다가갔다.
뭐 하느라 보이지도 않는가 했더니 여기 있었군. 하늘에서 녹색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온 그린랜턴이 그의 뒤에 착지하며 말했다. 배트맨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지만 곧 다시 얼굴을 굳혔다. 지금쯤 다른 이들과 괴생물을 처리하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랜턴. 그의 경계에도 신경쓰지 않으며 그린랜턴은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아아 그렇지. 그리고 그 잘난 배트맨 역시 그래야 했겠지만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길래 찾아온 거고. 그린랜턴은 배트맨의 손에서 그의 장비를 빼앗아 들었다. 그는 배트맨의 당황에도 신경쓰지 않으며 그것을 반투명의 막에 꽂아 넣었다. 그러자 바로 폭발음이 울리며 막이 터져나갔다. 그 산성액이 주변의 눈을 녹이고 땅을 썩어들게 만들었다. 그린랜턴은 그와 배트맨을 보호하고 있던 녹색의 장막을 거둬들이고 앞서 걸어가며 배트맨을 돌아보았다. 계획이 있으니 혼자 여기까지 왔겠지? 배트맨은 입술을 깨물다 그를 따라 들어갔다.
다른 리거들은 메트로폴리스 쪽으로 향하는 괴생물 수 마리를 처리하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었다. 괴생물의 크기는 저마다 제각각이었으나 아무리 작다 해도 승용차 만한 크기였다. 그것들은 제 앞길을 막는 것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해 산성액으로 녹여 죽이거나 혹은 붉은 광선을 쏘아 사라지게 만들곤 했다. 틴타이탄즈 역시 리거들을 도왔다. 어느 순간 괴생물들이 하나같이 동작을 멈추더니 빠른 속도로 어디론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움직임을 보던 리거들은 갑자기 시내를 향한 공격을 멈추고 멀어지는 괴생물들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 때 주변을 둘러보던 플래시가 문득 말했다. 혹시 랜턴 어디있는지 아는 사람이나 외계인 있어? 그제서야 다들 난장판이 된 주변을 둘러보며 그린랜턴의 부재를 깨달았다. 배트맨도 보이지 않아요. 한 쪽에서 슈퍼보이가 말했다. 그 말에 슈퍼맨이 괴생물이 사라진 방향을 보았다. 모체가 있는 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 같군. 혹시... 그제서야 모두의 생각이 한 곳에 모아졌다. 그들은 더 이상 지체할 필요 없이 재빨리 괴생물들의 뒤를 쫓았다.
보호막이 터진 모체는 심상치 않은 붉은 기운을 내뿜으며 꿈틀거렸다. 역겨운 내장 덩어리를 한데 뭉쳐놓은 기괴한 꽃 같았다. 배트맨은 그가 들고 왔던 장비들 중 다른 것을 몇 개를 더 꺼냈고 그린랜턴은 모체를 경계하며 배트맨을 보았다. 단단히 준비해 온 배트맨을 보던 그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 설마 이것과 함께 죽기라도 할 생각이었던 거야? 배트맨은 그의 질문을 무시하며 그에게 장비를 떠넘겼다. 이 모체는 뿌리가 땅 밑 깊숙이 뻗어있고 그 밑에서 괴생물을 잉태한다. 적신호가 들어온 걸 보니 괴생물들이 곧 이곳으로 몰려올거다. 그 전에 처리해야 돼. 그린랜턴은 그에게 장비의 사용법을 설명해주는 배트맨의 어깨를 움켜쥐며 낮게 말했다. 이걸 혼자 하려 했던 생각이냐고 묻고 있잖아. 그의 표정은 진지했고 시선은 똑바로 배트맨을 향하고 있었다. 잠시 입을 다물었던 배트맨은 갑자기 사납게 인상을 쓰며 그의 팔을 치워냈다. 네가 무슨 상관이지? 도울 생각이 아니라면 방해하지 마. 사납게 대꾸하고 돌아서는 배트맨의 앞을 그린랜턴이 다시 막아섰다. 언성이 높아졌다. 이건 네 방식이 아니잖아, 배트맨. 넌 원래... 그가 말을 이으려던 순간 땅이 요동쳤다.
모체가 귀를 찢을 듯한 비명을 질렀다. 그 거대한 몸뚱이의 주변으로 땅이 들썩이더니 모체의 뿌리가 뽑혀져 나왔다. 위험을 감지한 모체가 그 뿌리에 매달린 새끼를 지키기 위해 공격적인 성질을 띄기 시작한 것이다. 기괴한 몸뚱이가 움직이며 공격을 해오자 배트맨이 소리쳤다. 저것의 주의를 끌어! 그린랜턴은 그렇지 않아도 충분히 주의를 끌고 있다고 말하려 했으나 모체가 산성액을 뒤집어 씌우려 하자 입을 닫으며 재빨리 반지의 힘으로 그것을 막아야 했다. 배트맨은 그린랜턴이 그것을 상대하는 때를 타 장비를 들고 모체의 약점이 되는 곳으로 달렸다. 그건 뿌리와 본체의 중간 쯤에 위치한 부분으로 두터운 지방질과 근육 덩어리가 에너지원이 움직이는 수로를 덮은 부분이었다. 그 안에 들어있는 핵을 폭파시키면 될 것이다. 배트맨은 장비를 설치했다. 배트맨, 서둘러! 그린랜턴이 소리쳤다. 그는 무지막지한 모체의 공격을 혼자의 힘으로 막아내며 버거워하고 있었다. 배트맨은 재빨리 손을 놀렸다. 근육을 가르자 모체가 비명을 지르며 꿈틀거리고 배트맨을 공격하려 했으나 그 앞을 그린랜턴이 재빨리 막았다. 혈관처럼 요동치는 수로에 막 장비를 설치했을 때 그들은 모체의 몸통에 후려맞고 나가 떨어져야 했다. 그린랜턴이 머리를 털고 일어났다. 다 된거야? 그렇게 말한 그는 배트맨이 신음과 함께 몸을 일으키며 시선을 주는 곳을 따라갔다. 장비를 액티베이트 시키는 컨트롤러가 떨어져 있었다.
그때 거대한 진동과 함께 괴생물들이 몰려왔다.
그 다음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채 일 분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배트맨은 땅을 박차고 컨트롤러를 향해 뛰었다. 그린랜턴이 그들에게 가해지는 공격을 반지의 힘으로 막았다. 열세였다. 수가 너무 많았다. 슈퍼맨을 선두로 히어로들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반지의 힘이 깨어졌다. 컨트롤러가 손 안에 들어왔다. 붉은 광선. 거대한 폭발.
하얗게 쌓인 눈.
모든 것이 조용했다.
할 조던은 눈이 소리없이 내리는 하늘을 보았다. 몸에 감각이 없었는데 얼굴에 내려앉는 흰 눈은 차가웠다. 그는 어느 흙더미 위에 널브러진 자신을 발견한다. 매캐한 연기와 괴생물의 살 타는 냄새가 고약했다. 그는 간신히 팔을 움직여 허리춤에서 핸드폰을 꺼낸다. 덜덜 떨리는 손은 겨우 핸드폰을 쥐는 것도 무리였다. 그는 단축키를 길게 누르고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댄다. 긴 통화음이 들렸다. 사실 남자가 전화를 받지 않아도 그다지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받지 않는다면, 조금 아쉬울 것 같다.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떠오르는 사람이 그 밖에 없어서였다. 아니, 그건 사실이 아니다. 그래서가 아니었다. 남자는 할 조던에게 유일했기 때문이었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감길 때,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Hello. 그 낮은 목소리에 할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Hello. 그가 대답했다. 전화 너머의 남자는 잠시 침묵하다, 할. 이라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고요하고, 파동이 없는, 잔잔한 목소리. 할 조던은 그의 목소리가 미친 듯이 그리웠다. 그래서 대답했다. 브루스 아무 말이나 해줘. 아무거나 괜찮아. 그는 내심 남자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끊을까 두려웠다. 하지만 남자는 순순히 말을 잇는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널 알고 있었어. 하지만 우리가 이런 관계가 될 거란 건 상상도 하지 못했지. 할은 저벅거리며 그에게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는다. 배트맨은 핸드폰을 귀에 댄 채 할 조던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는 카울을 벗었다. 브루스는 카울과 핸드폰을 떨어트리고 그의 옆에 무릎을 꿇는다. 할은 남자의 차가운 푸른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본다. 네가 나에게 웃어주는데 내가 어떻게 너를 거부할 수 있었을까. 그 말에 할은 웃는다. 그는 손을 들어올려 그가 사랑하는 남자의 얼굴을 만졌다. 또 슬프게 만들었네. 그 다정한 말에 브루스는 눈을 내려 감았다. 할.
다시 눈을 떴을 때 할 조던은 사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