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맷
아이언맨 데어데블
blinded with senses
미완
헬스키친은 나름대로 그만의 분위기와 동선이 있었다. 그리고 매튜 머독의 보이지 않는 눈에는 그것이 마치 반딧불이의 움직임처럼 길고 또 화려하게 다가온다.
햇살이 따사로운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지팡이를 들고 밖으로 나선다. 바람이 불음에 따라 자작이는 나뭇잎들, 길거리를 내달리는 아이들의 웃음 소리, 행인들의 분주한 발걸음, 자동차 엔진의 진공, 건너 블락에서부터 풍겨오는 신선한 빵 내음, 그 모든 것이 뒤섞여 입체적인 그림을 자아내 맷 머독의 앞으로 그가 걸을 수 있는 지도를 놓아준다. 그를 둘러 싼 거리는 따듯하지만 매서웠고 부드럽지만 동시에 위협적이다. 그는 도시의 가장 위험하고 음습한 부분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은 단 두어 시간 뿐이더라도 그는 날마다 되풀이되는 어둔 일상으로부터 약간의 일탈을 원했다.
맷 머독은 익숙하게 보이지 않는 연기를 한다. 일대의 사람들은 전부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장님의 변호사는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간간히 지팡이를 발 앞으로 휘젓거나 더듬거리는 발걸음을 내딛으며 목적지로 향했다. 평일의 어중띈 시간대의 도시는 나름 한가한 편이라 그는 별다른 방해 없이 적적한 공간으로 들어 섰다. 공원이었다. 간간히 공원의 도보를 가로지르는 사람들이나 유유히 풀밭에 누운 대학생들 혹은 유모차를 미는 젊은 어미들을 전부 포함하더라도 공원은 조용하면서도 한가했다. 맷은 그가 오늘 길에 제빵점에 들려 사온 샌드위치를 꺼냈다. 포장을 벗기기도 전에 그의 발달된 후각에는 신선한 빵과 야채, 햄 등의 먹음직스러운 내음이 풍겨온다. 공원의 사람들은 아무도 홀로 벤치에 앉은 장님 남자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들의 재잘이는 대화나 간혹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이 평화롭다. 최근 일에 쫓기다 보니 맷 머독은 한동안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포기 넬슨과의 일이라던가 변호 업무라던가 밤마다 그가 행해야하는 자경단원으로서의 일 등은 아무리 맷 머독이라도 심신을 지치게 만들었다. 남들과 비교하여 배는 더 예민한 신경을 갖고 있기에 더욱 정신적인 피로를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평범한 일상에 섞여 들어가는 약간의 조용한 시간만으로도 최소한의 기분 전환은 되었다. 지팡이를 옆에 기대어 놓은 그는 꺼낸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샌드위치를 반 쯤 먹어갈 때에 벤치 옆자리에 누군가가 다가와 앉았다. 맷은 여전히 정자세로 앉아 샌드위치를 씹었다. 옆에 다가온 남자가 그를 향해 캔을 건넸다. 그는 조금 뜸을 들이다가 동요 없이 그 캔을 받아 들었다. 차가운 음료 캔인듯 하다. 남자는 맷 머독이 여느 장님들이 그러하듯 선글라스 낀 얼굴을 비스듬히 사선으로 기울이며 그를 향해 바로 초점을 맞추지 않는 것을 보았다. 이마 위로 흘러내려 온 붉은 금발을 가진 변호사는 단단하고 잘생긴 얼굴 위에 의아한 표정을 띄웠다.
누구시죠?
토니 스타크입니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매튜 머독 씨 맞으시죠? 악수해도 될까요. 그 말에 맷은 약간 어색한 동작으로 손을 내밀었고 남자, 토니 스타크는 부담스럽지 않게 그 손을 이끌어 잡아 악수했다.
'그' 스타크 사의 토니 스타크 씨란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따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무례하게 찾아와야 했던 점 이해해 주길 바랍니다. 남자의 목소리는 정중하게 사과했지만 맷은 미간이 슬쩍 찌푸려지는 것을 참지 않았다. 그는 먹던 샌드위치를 내리며 벤치의 등받이로 등을 기대었다. 오랜만의 자유시간이었는데 방해받는 기분이 좋지만은 않군요. 그의 말에 토니 스타크는 슬쩍 미소지었지만 곧 감추었다. 워낙 바쁜 분인 건 잘 알고 있죠. 이렇게라도 찾아오지 않으면 못 만날 것 같더군요. 토니는 유들유들하게 말했지만 맷 머독은 그 사소한 칭찬을 빙자한 무례함에 넘어갈만큼 그리 쉬운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사람을 대하는 방법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맷은 낮게 한숨을 쉬곤 사업적인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십니까? 저보다 훨씬 더 바쁘실 분이 여기까지 찾아오시고. 토니는 맷과 마찬가지로 편히 등을 기대며 캔을 땄다. 치익 하고 탄산의 김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을 몇 모금 마시던 토니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변호사님께 의뢰를 하나 부탁하고 싶습니다.
밤이 내려앉는다. 오늘도 그는 의식의 절망으로 가라앉는다. 건물 사이에 드리워지는 그림자가 그를 추적하면 맷 머독은 마치 그것에 쫓기기라도 하듯 그의 세계를 더럽히는 범죄자들을 쫓는다. 더운 숨을 뱉으며 그는 자신이 저질렀던 모든 악행에게 추격 당하듯이 헐떡인다. 그건 일종의 가슴이 두근거리는 긴박감과 죄책감을 주었다. 맷은 그에게 이성이라는 것이 남아있지 않았을 때에 그의 친우들과 맞서고 살인을 저질렀던 본인을 기억한다. 악몽은 그가 어둠에 몸을 숨길 때 더욱 그를 잠식했으며 그의 철저한 의식의 장벽을 두들긴다. 식은땀이 흘렀다. 붉은 옷이 그를 숨막힐듯 조여왔다. 데어데블은 길바닥에 널브러진 범죄자들을 뒤로 했다.
집으로 들어온 그는 옷을 거칠게 벗어 던지고 갑작스러운 한기에 떨려오는 몸을 씻어내리기 위해 샤워실로 들어갔다. 붉은 머리카락이 물에 젖어 고개숙인 얼굴 위로 들러붙었다. 그는 물이 흐르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 내렸다. 오늘 재회한 남자와의 짧은 만남은 그가 잠시라도 잊으려 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고 그는 본인이 놀랄 정도로 동요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맷 머독은 예리한 남자였다. 그의 예리함이란 인간의 범주 내에서 설명할 수 없는 예리함이었다. 그는 토니 스타크가 벤치에 앉은 자신의 옆 자리에 앉는 순간 그가 누군지 알아 차렸다. 보통 사람과는 다르게 느껴지는 그의 익스트리미스가 내장된 혈액의 움직임과 생체열은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낮고 단호하게 울리는 목소리나 어렴풋한 코롱의 냄새. 옷깃이 스치는 소리만으로도 보이듯이 그릴 수 있는 맵시있는 양복이나 음료를 들고 있는 기계에 익숙한 남자다운 손. 그리고 일정한 맥박. 토니 스타크는 매튜 머독이 데어데블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는 변호사인 매튜 머독에게 의뢰를 하고 싶어했다.
'아시다시피 스타크 사는 큰 기업입니다. 크다는 형용사를 사용하는 데에 어폐가 있을 정도로요.' 토니 스타크의 정중하고 침착한 목소리에 자만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고 되려 그는 지쳐보였다. '그만큼 기밀 자료와 중요한 물건들이 있습니다. 저와 제가 믿을 수 있는 소수의 사람을 제외한 그 누구의 손에라도 들어간다면 스타크 사는 물론이고 미국 경제시장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들이죠. 한 단체가 그것 중 하나를 노리고 있습니다. 이제 막 자라나는 신성 기업인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세력이 가장 어둡고 깊숙한 곳까지 뻗어 있는 조직입니다. 그리고 그 조직의 거처가 바로 이 곳, 헬스키친이라는 정보를 얻었습니다.'
토니 스타크는 모든 지구인이 다 알고 있는 히어로 아이언 맨이다. 하지만 맷 그 역시 때로는 히어로가 나서야 할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의 차이점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 물론 아이언 맨으로서 토니 스타크가 그 조직을 소탕하고 그들이 저지른 온갖 더러운 행위에 대해 까발려 정당성을 요구한다 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절차를 밟기 전, 혹은 그것과는 별개로 법적인 일이 요구되는 면도 있는 것이 당연했고, 토니 스타크는 그 일을 해줄 사람으로서 매튜 머독을 꼽았다. 그에게 설명을 하며 부탁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일목요연하며 정중했다. 어느 면으로서나 사업가 그 자체의 모습인 토니 스타크였다. 아이언 맨으로서의 토니 스타크와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그는 자신의 위치에도 불구하고 직접 발로 뛰어 허리를 굽힐 줄 아는 사람이었으며 자신의 장점을 어떻게 어필해야 상대방의 호감을 살 수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맷 머독의 안에는 수많은 토니 스타크가 있었다. 히어로로서, 사업가로서, 또는 어벤져스의 일원이자 시빌 워 당시의 토니 스타크로서, 그리고 죽음에 위기에 처한 자신을 구하러 온 아이언 맨으로서. 맷은 샤워 부스에서 나와 배스 가운을 입었다. 그는 토니 스타크에게 더 이상 캐캐묵은 감정을 갖기에는 그런 성미도 되지 못했거니와 이미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르기도 했기에 구차해 보일 뿐이었다. 그는 토니 스타크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가 추구하는 방식이 한때 좋지 않은 쪽으로 틀어져 잘못 되었다고는 하나 그것은 이미 옛날의 일이었고 그들은 이제 오히려 동료라고 불러야 옳은 관계였다. 남자는 단지 그가 서있는 곳보다 다섯 발 앞선 미래를 예상하며 그보다 더 높은 것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 아둔할 정도의 현명함의 무게가 날카로운 칼이 되어 그 주위의 사람들에게 내려 꽂히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맷 머독은 마냥 남자에게 상냥할 수 만은 없었다. 아직 채 털어내지 못한 감정의 찌끄러기일 수도 있었고 혹은 그저 자존심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남자의 부탁을 거절했다.
맷은 회사 자문 변호사들만 해도 로펌을 차릴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 있는 토니 스타크가 어째서 그에게 찾아왔는지 물었다. 대답은 물론, 맷 머독은 유명하기로 알려진 변호사였고 그가 헬스키친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남자가 말한 의뢰가 헬스키친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것은 맷 머독 역시 잘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매번 그가 토니 스타크를 위해 일하고 그를 마주쳐야 할 상황들에 대해 생각했다. 범죄 조직의 소탕은 그가 데어데블로서 처리할 수 있는 일이었고 그게 아니라면 변호사인 매튜 머독으로서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가능한 일이었다. 구지 토니 스타크와 얼굴을 맞댈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고개를 저었지만 남자는 떠나는 와중까지 그에게 다시 한 번 고려해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맷은 그의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며 침대에 소파에 걸터 앉았다. 토니 스타크에게는 빚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의 변호사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맷은 지친 듯 한숨을 내쉬며 소파 등받이 너머로 고개를 젖혔다. 피로했다. 다시 돌아온 그의 오감은 익숙했지만 동시에 한 번 신경이 뒤바뀌었던 몸은 아직껏 전부 회복되지는 않은 모양인지 예전과 비교하여 금새 피곤을 호소하곤 했다. 한동안 서류 정리를 하던 맷은 쉬기 위해 소파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는 침대로 옮기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순식간에 몸을 날려야 했다. 재빠른 동작으로 데어데블의 복장을 착용하고 스탠드 불을 끈 그는 거실의 유리창이 요란하게 박살남과 동시에 시꺼먼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듯이 몸을 숨겼다.
성의 없이 와장창 하고 깨어진 유리의 파편들이 우수수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거칠고 조심성이 없다. 그들의 행동을 딱히 숨길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침입자들은 복면을 쓴 채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숙달된 실력자들인지 움직임이 빠른 편이었다. 맷이 그들의 기척을 느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습격해 들어온 것을 보면 아마 계획을 짠 후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맷을 위협하기에는 한참 부족하다. 맷 머독은 한때 최고의 암살 실력을 가졌던 닌자들을 그의 수족으로 거느렸던 사람이었다. 그의 레이더 센스 안에 포착된 적들은 불 꺼진 집 안을 난폭하게 가로지르며 물건을 뒤엎곤 했다. 아마 변호사인 매튜 머독을 찾고 있으리라. 만약 그들이 매튜 머독이라는 장님 변호사가 사실은 데어데블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적어도 이 정도로 경각심 없는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실의 탁자가 넘어가고 침대가 소음기 달린 총으로 난자되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목표물이 집 안 어디서도 보이지 않자 수군거렸다. 맷은 때를 기다렸다. 마침 침입자들 중 한 명이 욕실에 들어갔다가 아직 물기가 채 가시지 않은 것을 발견한 모양이다. 다른 놈의 발길에 그가 벗어 던졌던 배스 가운이 채인다. 그들의 긴장감이 고조되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맷은 몸을 움직였다.
그 누가 기척을 눈치 챌 틈도 없이 그림자처럼 움직인다. 그는 적의 팔목을 비틀고 허벅다리를 걷어찬다. 뼈에 금이 가는 소리가 신랄하게 울린다. 맷은 일렬의 춤시위나 안무를 하는 것처럼 정갈하게 몸을 놀린다. 그의 뺨을 스치고 총탄이 발사되지만 맷은 신경쓰지 않으며 돌진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섯 명의 괴한은 모두 급소를 얻어 맞아 정신을 잃은 채 카페트 위에서 뒹굴었다.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데어데블은 한 번 깊게 호흡하는 것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쓰러진 침입자들을 살폈다. 그들은 방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쉽게 당한 것일테다. 축 늘어진 그들의 몸에서는 이렇다할 단서가 나오지 않았다. 그 어떤 표식도, 증거물도 나오지 않았지만 제 아무리 도마뱀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꼬리 정도는 남기기 마련이다. 맷은 괴한이 들고 있던 총을 살폈다. 그는 코 끝에 총을 가져다 댄다. 뜨끈한 쇠의 냄새와 어렴풋한 물기. 눅눅함. 그리고 손 끝에 우둘두둘하게 걸리는 시리얼 넘버.
맷은 잠시 후 차분한 동작으로 수화기를 귀에 대었다. 몇 번의 신호가 울리는 것을 따분한 표정으로 기다리던 그는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리자 어쩌면 약간은 날이 선 말투로 대꾸했다. 낮의 의뢰에 대해 더 이야기해보고 싶군요.
약속 시간은 여섯시 정각. 토니 스타크가 레스토랑에 들어와 착석을 마친 시간은 여섯시 십 오분이 넘어가고 있던 차였다. 맷 머독은 섬세한 동작으로 와인을 마시며 점자로 된 책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읽고 있었다. 그는 토니가 자신의 앞에 앉자 그 인기척에 고개를 들더니 책을 덮었다. 헬스 키친의 번화가에 위치한 고급 레스토랑은 평일 저녁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만석이었으며 잔잔한 클래식 음악에 맞춰 숙달된 웨이터들이 점잖은 대화가 오가는 테이블 사이를 소리 없이 누볐다. 보통 이러한 레스토랑의 손님들은 그 어떤 유명인이 들어온다 하더라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을 부류의 사람들이었으나 그들 역시 완벽한 정장을 갖춰 입은 그 유명 인사, 토니 스타크에게 한 두번 씩 시선을 보내지 않을 수는 없었다. 토니는 자리에 앉아 그와 맷 사이의 테이블 위에 놓여진 촛대라던가 샹들리에의 은은한 조명을 힐끔거리고는 웨이터가 따르는 와인을 음미했다.
분위기 한 번 끝내주는 레스토랑이군요. 로맨틱함으로 점철되어있는 레스토랑을 향한 토니의 감상에 맷은 자신의 와인잔을 코 밑에서 한 번 가볍게 돌리고는 웃었다. 그런가요, 뭐가 보여야 말이죠. 토니는 여전히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맷 머독을 향해 뭔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고 늦어서 미안하다 사과했다. 그는 곧 메뉴판을 찾는 듯 시선을 누볐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맷이 웃음 띈 얼굴로 말했다. 늦으시길래 메뉴와 와인은 제가 정했습니다. 괜찮으시죠? 그 부드러운 어투에 고개를 끄덕이던 토니는 오늘 자신이 대접하겠다고 말했던 것을 상기했고 곧 그의 앞으로 하나씩 나오기 시작하는 메뉴를 보고 헛웃음을 지어야 했다. 뭐, 제일 비싼 메뉴라 하더라도 그의 지갑 사정에는 별 기별도 가지 않는 정도지만 저 당돌한 변호사가 도발적인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그들의 앞에 놓인 화려한 시푸드 플래터를 손으로 집어 입 안으로 넣던 토니는 맷이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꽤나 능숙하게 음식을 먹는 것을 지켜보다가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기대고 턱을 괴었다. 레스토랑에서의 기본 예의 범절을 무시한 동작을 아무렇지 않게 취하며 그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습격을 당하셨다고요. 맷 머독은 캐비어를 천천히 씹어 삼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으로 돌아갔을 때 가구가 박살나고 침대 위에 총알 구멍이 나있는 것을 발견하는 건 그다지 좋은 기분이 아니더군요. 처음에는 집안이 난장판인 것도 모르고 들어갔다가 자칫하면 유리 조각 위로 구를 뻔 했지 뭡니까. 토니는 여전히 턱을 괸 채로 빵 조가리를 씹으며 맷을 보았다. 촛불의 흔들리는 음영이 맷의 선글라스 너머 흐린 눈동자를 간간히 비추었다. 탁한 시선은 토니를 바로 보지 않으며 그의 어깨 너머 사선으로 기울어져 있다. 괴한은 찾지 못한 겁니까? 맷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 했다. 제가 왔을 땐 아무도 없었습니다. 토니는 몸을 조금 기울였다. 경찰은 부르지 않으셨다 하셨습니다만. 그들이 잠시 말을 멈출 떄 메인 요리가 나왔다. 맷은 자신의 목덜미를 느릿하게 쓸다가 느릿하게 웃었다. 설마 세계 평화를 지키는 토니 스타크가 고작 본인의 변호사 하나 지키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토니는 의자 등받이로 몸을 기대며 하하 웃었다. 역시 만만한 사람도 아니거니와, 대화 상대로 즐겁기도 하다. 그는 흐트러짐 없는 정갈한 동작으로 포크와 나이프 질을 하는 맷을 보았다. 자연스럽게 이마 위로 흐트러진 붉은 머리카락이나 목 끝까지 단추가 채워진 정장이라던가 그의 빈틈 없는 행동이 눈에 들어온다. 토니는 자신의 앞에 놓인 메인 요리를 먹는 시늉만 내었다. 맷 머독은 토니 스타크가 그를 찾아온 날 밤에 집에 돌아가자 누군지 모를 사람들이 그의 집을 습격하고 갔다는 것을 깨닫는다. 총알 자국이 난 것을 보아 의도는 분명하다. 물론 맷 머독은 토니 스타크 이외에도 무수한 사람들의 변호를 한 적이 있었으며 또 현재 진행형으로 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아마 많은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맷 머독이 누구인가, 그 유명한 헬스 키친의 변호사다. 그의 정보 수집 능력이나 처리 능력은 특별한 기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굉장히 빠른 편이었다. 물론 맷 머독이 데어데블이라는 점이 그를 예리하게 만드는 데에 있어서 가장 큰 이유겠지만 맷 머독은 그것을 구지 말하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토니 스타크에게 설명할 수 있었다. 그는 투명한 봉투 안에 든 탄피와 총알 등을 남자의 쪽으로 밀었다. 그것을 살펴 보는 토니에게 맷이 말했다. 조사를 조금 해봤습니다. 예상한 대로 당신이 말했던 조직과 관련이 있는 듯이 보이더군요. 토니가 물었다. 확신할 수 있습니까? 맷이 냅킨으로 입을 훔치고 말했다. 그보다 더 확실할 순 없을 정도로.
이것은 그들이 태평한 말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보다 배는 더 심각한 중요성을 갖고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었고 그들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토니 스타크가 맷 머독과 접촉했다는 것을 그 조직에서 알고 있으며 그것에 대해 무단침입 및 살인미수라는 단호한 대응을 행했다는 것 자체가 그들의 정보력이나 행동력에 대해 말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 말인 즉슨, 단순히 변호사인 맷 머독 뿐만이 아니라 그 조직이 어떤 가해라도 저지를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극단적인 방법도 사용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고, 더불어 증거를 완벽하게 회수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의 자신감 역시 갖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들이 남기고 간 총알이나 탄피 등은 구입 경로를 거슬러 올라가 맷 머독으로 하여금 그들의 존재에 대해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도록 했다. 거대하고 체계적인 단체. 맷 머독은 이미 그가 토니 스타크와 접촉한 이상 그들의 타겟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고 그에게 있어서 토니 스타크의 변호사가 되는 것은 피치 못할 일이나 다름 없었다. 맷 머독은 어쩌면 이 남자가 그것을 노리고 자신에게 보란 듯이 접근한 것인가 생각하다가 이미 그런 생각은 소용이 없다고 느꼈다. 토니 스타크는 맷 머독이 어떻게 그들의 정체를 역추적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 하는 듯한 눈치였지만 맷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토니는 장난처럼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자신의 핸드폰을 한 번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맷이 그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벌써 가시게요? 패나코타는 끝내고 가시죠. 토니는 정중하게 사양했다. 일이 부르는군요. 먼저 일어나게 되서 미안합니다. 맷은 수저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그 모양새가 왠지 불안정해 보여서 토니는 그를 부축하려 했다. 맷은 자신의 허리를 받치는 토니의 팔에 손을 얹고는 그의 뺨에 친근하게 얼굴을 붙였다. 갑자기 밀착하는 몸에 토니는 조금 당황했지만 곧 그의 귓가에 맷이 속삭이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도청당하는 것 같으니 조심하십시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하죠. 맷은 몸을 뒤로 물리다가 아직도 자신의 허리를 받치고 있는 토니의 손을 의식했다. 토니는 노골적인 시선으로 맷의 얼굴 선을 훑다가 천천히 손을 떼었다. 다음엔 변호사님 집에서 만나는 게 나으려나요. 맷은 잠시 침묵하다가 씩 웃었다. 그는 멀어져가는 토니의 인기척을 보다가 얼굴을 굳히며, 농담치고는 질이 나쁘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 자신이 먼저 시작하긴 했지만 말이다.
토니가 그를 기다리고 있던 페퍼 포츠와 마주했을 때 그녀는 토니에게 서류를 건네며 말을 꺼넸다. 토니, 당신 나름 이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서류를 넘기는 남자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미소가 떠올라 있다. 즐기지 않는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 페퍼는 그녀의 상사를 보며 못마땅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그녀는 토니 스타크의 화려한 여성 편력이나 그녀가 차마 예측할 수 없는 수를 두곤 하는 그의 행동을 이해했으나 이번에는 상대가 틀려도 한참 틀렸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숨기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 생각하지만 이미 늦었기도 했고, 토니 스타크가 생각을 고쳐 먹을 징조도 보이지 않는다. 페퍼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우선 당장 걱정인 게 있으니 그 조직을 가루로 만들기만 하면 다른 건 그냥 못본 척 넘어갈게요. 페퍼의 말에 토니는 조금 웃고는 팔뚝의 소매를 걷어 부쳤다. 걱정마, 페퍼. 나와 그가 그 이상의 뭘 할 수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