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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c/dc

할뱃 장님





차분하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그는 고독하게 절망했다. 비록 절망을 느낀 사람이 그 혼자가 아니더라도 그는 지금 아무도 없는 곳에 동떨어져 그렇게 스스로를 혼자로 만드는 것이다. 주변에서 느껴지는 어떠한 온기도 허락하고 싶지 않아서 참으로 이기적이게도. 이미 밤이 깔리고 있는 하늘은 음침하게 거뭇했고 밀려오는 검은 구름떼가 마치 찰나의 노을마저 가려버리는 것 같아, 남자는 정말 싫다고 생각했다. 정말, 싫다. 이 도시와 그 하늘과 빗물과 그리고 나와 당신이 몸을 불살라야 하는 모든 셀 수 없는 전투가 참 싫어서 소름이 났다. 주위는 떨어지는 빗소리 말고는 그 아무 소음도 들리지 않아 진저리가 쳐질 정도로 고요했는데 이상하게도 귀에 울부짖음이 들린다. 그건 아마, 그의 머릿속에서 들리는. 혹은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어쩌면, 그들 모두의 소리 없는 절망의 소리. 지나치게 흩어져버린 자취를 찾다가 할 조던은 그것이 이미 더 이상 눈으로 쫓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더듬어 쫓고 있다는 것이란 걸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정말로, 그 답지 않게도 조금 울고 싶은 심정이 된다. 비가 내리며 옷을 젖어들게 하지만 그는 정말이지 상관 없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있어서 상관이라는 기준은 이미 아주 오래전에 사라져 버렸고, 그래서.

그래서 당신은 결국.

그렇게 되었나.

그 어떤 것에서도 연관점을 찾을 수가 없어. 마치 서로 백억광년씩 떨어진 별들을 이어내 그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와도 같아. 어쩌면 우리도 전부 그렇지 않을까. 그와 저가 이어지도록 만든 모든 고통에 고마워 해야 할까. 

할 조던은 짐작할 수도 단정지을 수도 없다. 그의 얄팍한 단어와 온갖 식상한 미사여구로 치장하기에 그건 너무나도 무겁고, 또 무서워서 그저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서있을 수 밖에. 그저, 당신이 저의 조용한 눈빛만으로도 이 쏟아질 듯한 감정을 알아 줬으면 하면서. 할 조던은 무겁게 손으로 얼굴을 쓸어 내린다. 더 이상 보고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의 등이라거나 부질 없는 희생이라거나 어느 순간 가치는 사라져 버려. 할 조던은 젖은 발걸음으로 그에게 한 걸음씩, 땅 속에 울음으로 스며드는 걸음을 옮긴다. 땅거미가 지고 타락한 도시에 밤이 내리는 것도 여느 때보다 흉측해 할 조던은 섬뜩함을 느낀다. 그건, 

공포.

그가 느껴서는 안 돼는 감정이 갉아먹어 들어온다. 이 도시를 향한 것이 아니다. 그건 좀 더 원초적이고 감정적인 그를 괴롭히는, 불안함에서 태어난 감정.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그를 미치게 만드는

공포

무력감. 죄책감. 조바심. 불안.

"그는 장님이야..."

그렇게 다시 한 번 새겨넣듯이 자신에게 말하며 할 조던은.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