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을 때 할 조던은 제일 먼저 자신의 옆자리를 더듬었다. 따듯한 온기를 가진 몸뚱아리가 느껴져서 할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곤 그를 끌어 안았다. 브루스 웨인은 티와 트레이닝복 바지를 입은 채로 잠들어 있었다. 아마 도중에 깨서 씻은 후 옷을 갈아입고 다시 잠든 모양이다. 그는 할이 그를 안아오자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떴다가, 상대를 확인하고는 팔을 뻗어 그를 마주 안았다. 그리곤 다시 고른 숨을 내쉬며 잠에 빠졌다. 할은 브루스의 부드러운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다가 그 안에 코를 묻었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의 내음이 났다. 팔에 넉넉하게 안긴 단단하고 남자다운 몸과 입술을 조금 벌린 채 잠들어 있는 잘생긴 얼굴도 전부 할 조던의 것이었다. 할은 마음 한켠이 따듯해지는 것을 느낀다. 아무래도 저는 이 남자를 정말로 사랑하는 모양인가 보다. 어느 순간에 어느 부분에서 그에게 빠지게 된건지는 몰랐고 알 필요도 없었다.
할은 행복했다. 그걸로 이유는 충분했다.
브루스가 완전히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할은 그에게 사귀자고 말했다. 그 단도직입적인 말이 낯간지러운지 혹은 예상 외였던 건지 브루스는 조금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애인이 있지 않나 라고 물어보는 그에게 헤어진지 오래라고 대답했다. 할은 그가 몇 주 전부터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도 말했다. 역시나 낯간지러웠나 보다. 브루스는 할의 시선을 피했지만 그가 고개를 부드럽게 돌려 입을 맞추며 조르는 듯이 재촉하자 곧 고개를 끄덕였다. 할은 씩 웃으며 브루스에게 키스했다. 그리고 그의 다리 사이로 자리 잡곤 바지를 슬금슬금 벗겨냈다. 그 능글맞은 행동에 브루스가 사색이 되어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으나 결국 할이 어제 잔뜩 시달린 그의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자 꼼짝없이 그의 아래에서 무너져 내렸다.
그들은 자주는 아니어도 간혹 만났다. 이전보다는 여러번 만났지만 할 조던이 부족함을 느낄 정도는 되었다. 그들은 만나면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했다. 주로 브루스가 할을 찾아오는 편이었다. 섹스는 가끔 했다. 브루스 웨인은 바쁜 사람이었고 일이 많았기 때문에 빨리 헤어져야 하는 경우도 드물었으며 곧잘 피곤에 절어 있어서였다. 브루스는 사귀게 된 이후로 예전보다 말수가 아주 조금 늘었다. 그래봤자 그의 일에 대해서 조금 더 말하는 정도거나 알프레드와 같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두 마디 꺼내는 정도가 다였긴 하다. 시간이 좀 더 나면 그들은 강변을 걷기도 하며 데이트같은 것의 분위기를 내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하는 모든 연인같은 행동에 브루스 웨인은 늘 희미하게나마 어색함을 보였다. 그건 그가 할에게 유한 미소를 보이는 거나 그의 손에 몸을 맡기는 것과 같은 신뢰라던가 애정의 범주를 떠난 무언가였다. 하지만 할은 그것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요새 기분 좋아보이네 랜턴. 플래시의 말에 그린랜턴은 연신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리거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린랜턴이 감정기복을 보이며 이상한 행동을 저지르는 것에 불안해했으나 최근 한달 여 간 그린랜턴은 쭉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리고 랜턴은 구지 그것을 숨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린랜턴이 순수히 고개를 끄덕이자 원더우먼도 관심을 보였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그녀의 질문에 플래시가 끼어들었다. 표정만 봐서는 연애라도 하는 모양인데. 그린랜턴은 플래시를 향해 손가락을 튕겨 보였다. 빙고. 요즘 연애중이거든. 그의 말에 플래시가 휘파람을 불고 원더우먼이 눈을 반짝였다. 슈퍼맨 역시 그들의 대화를 들었는지 다가왔다. 자네 표정을 보면 굉장히 좋은 사람인가보군. 슈퍼맨이 웃으며 하는 말에 그린랜턴은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정말 좋은 사람이지. 분명 다들 들으면 깜짝 놀랄걸. 그의 말에 다들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며 수근거렸다. 우리가 아는 사람인가? 유명한 사람인가? 그리곤 곧 그들의 기대 어린 눈빛을 받은 그린랜턴은 손으로 입에 지퍼를 채우는 모양새를 했기 때문에 다들 아쉬운 얼굴을 했다. 그들은 당연히 놀랄 것이다. 우선 여자가 아니라는 것에서부터 놀라지 않을까. 마샨에게 랜턴의 그녀가 누군지 알아보도록 해야겠다는 말을 꺼내는 원더우먼을 보며 그린랜턴이 장난이지? 라고 되물었다.
슈퍼보이는 마침 들어오면서 리거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쪽을 흘끔 보곤 배트맨에게 다가갔다. 배트맨은 한 쪽에서 의자에 앉아 수많은 모니터를 보며 무언가를 입력하거나 바쁘게 손을 놀리고 있었다. 저 쪽에서 다른 리거들이 대화하는 거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어 보인다. 그는 슈퍼보이가 자신의 옆까지 다가와도 시선 하나 보내지 않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지? 슈퍼보이는 손에 들고온 것을 넘겼다. 저번 임무에 관한 물건이에요. 로빈이 자신의 힘으로 안되는 부분이 있다며 분석을 부탁하던데요. 배트맨은 그제서야 슈퍼보이에게 몸을 돌렸다. 그가 들고 온 물건을 살피는 배트맨의 숙여진 머리 위로 솟은 두 개의 뾰족한 귀를 보던 슈퍼보이는 다른 리거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린랜턴에게 애인이 생긴 모양이군요? 그의 말에 배트맨이 잠시 뜸을 들이다 툭 뱉듯이 말했다. 네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슈퍼보이는 어깨를 으쓱 했다. 배트맨의 딱딱한 말투에는 그 역시 익숙했다. 슈퍼맨도 관심이 있어 보이는데요. 슈퍼보이는 문득 자신이 말해 놓고 아차 싶었는지 시선을 피했다. 배트맨은 갑자기 입을 다무는 슈퍼보이를 보다가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물건을 전했으니 볼 일도 없어진 슈퍼보이가 몸을 돌렸을 때 그의 뒤에서 배트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필요한 게 있으면. 슈퍼보이가 걸음을 멈추고 어깨 너머로 고개를 돌리자 할 말을 고르는 듯한 배트맨이 보였다. 배트맨답지 않은 모습에 슈퍼보이는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해도 된다. 그 말은 주어와 목적어가 애매했기 때문에 슈퍼보이는 대충 알았다 한뒤 그곳에서 나왔지만 나중에서야 배트맨이 말하려던 걸 깨닫자 정말 의외의 말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계절이 벌써 가을에 접어들고 있었다. 할은 샤워를 하고 나오며 시계를 본다. 밤 열한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그는 지친 표정으로 쇼파에 앉아 티비를 켜고 맥주를 마셨다.
오늘 저스티스 리그의 일이 엉망이었다. 배트맨이 계획한 대로만 행동했다면 사실 아무런 문제 없었을 일이었다. 그건 할 조던 역시 수긍해야 했다. 하지만 변수란 것은 생기기 마련이었고 할 조던은 도중에 그가 개인 행동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적의 공격 궤도를 막아내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배트맨이 부상을 입을 줄은 할 조던 역시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다고는 하나 그의 잘못으로 인해 동료가 부상을 입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건 좋은 기분만은 아니었다. 물론 전투 중에 부상을 입는 거야 자주 있는 일이었고 아주 심한 것도 아니었는지 배트맨은 금새 일어나 적에게 반격했지만 할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가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도 그렇고 그것에 휘말린 게 배트맨이라는 이유도 있어서였다. 그는 순간이었지만 배트맨이 공격을 받아 건물의 잔해 위로 쓰러지던 모습을 기억했다. 그리고 상황이 정리 된 이후 아무렇지 않아 보였던 그가 휘청이며 슈퍼맨의 부축을 받는 것도 보았다. 그가 배트맨에게 사과를 하러 다가갔을 때 사실 한 소리 듣겠거니 하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지만, 예상 외로 배트맨은 앞으로 주의하라 는 말만 남기고 등을 돌려 가버렸었다. 할 조던은 다시금 생각이 떠오르자 빈 맥주캔을 구겨 던져버렸다. 그의 행동에 대해 비난받는 것보다 말 없는 외면이 더 기분 나쁠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맥주를 한 캔 더 뜯던 그는 핸드폰을 확인한다. 오늘 브루스와 만나기로 했었다. 곧 있으면 올 시간이 되어간다. 할은 조금이라도 빨리 그의 연인이 보고싶었다. 이 짜증나고 착잡한 기분도 남자의 얼굴을 보면 풀릴 것 같았다. 하지만 곧 그에게서 온 문자 한 통이 할 조던의 얼굴을 딱딱하게 굳게 만든다. 바쁜 일이 생겨서 오지 못할 것 같다며 사과하는 브루스 웨인의 문자가 도착했다. 할은 왠지 심술이 돋았다. 그래서 그는 그가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답장했다. 잠시 후 문자가 왔다. 늦게 끝날거야. 그리고 할은 다시 답장한다. 상관없어. 그리고 그는 핸드폰을 쇼파 한쪽으로 툭 던졌다. 그 답지 않았다. 조르는 거라던지 막무가내로 밀어 붙이는 건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할은 답답한 마음에 맥주를 들이켰다.
남자는 그가 티비 앞에서 꾸벅꾸벅 졸 때가 되어서야 도착했다. 근 일주일 만에 만난 브루스 웨인의 얼굴은 정말로 안색이 좋지 않아 보여 할은 그가 남자에게 못할 짓을 했단 걸 실감했다. 얼굴은 창백했고 입술에도 핏기가 없었다. 가을 날씨에 그리 된거라 하기보단 아파보이는게 컸다. 할은 미안함과 동시에 화가 뻗치는 것을 느낀다. 이렇게 될 때까지 일한거야? 그는 화를 내며 브루스의 손목을 잡고 집 안으로 이끌려 한다. 하지만 브루스는 그 손을 정중하게 떼어냈다. 금방 가봐야 해. 할 일이 남았거든. 할 조던은 더 이상 듣지 않기로 생각하고 다짜고짜 그를 끌었다. 브루스는 조금 버텼지만 곧 힘이 부치는 건지 그에게 끌려왔다. 할은 그의 겉옷을 벗게 하고 침대 안으로 밀어 넣었다. 어쩔 수 없이 할의 뜻대로 움직이던 브루스는 막상 침대에 눕자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잔뜩 풀어진 표정이 되었다. 안쓰러웠다. 할은 그의 반듯한 이마를 만져보곤 땀이 묻어난 것을 느꼈다. 그는 젖은 수건을 가져와 브루스의 이마를 닦아 주었다. 몸살이라도 걸린 게 아닌가 싶다. 그는 브루스의 셔츠를 마저 벗겨주려 했지만 브루스는 그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남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심지어 관계를 가질 때에도 그의 앞에서 완전히 옷을 벗는 경우가 없었다. 불편하지 않아? 할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던 브루스는 그에게 오라는 듯이 손짓을 했다. 그는 브루스의 옆자리에 누웠고 브루스는 그를 껴안으며 눈을 감았다. 곧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할은 금새 잠이 든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그 역시 곧 잠에 빠졌다.
새벽녘에 할은 눈을 떴다. 무심코 눈이 떠졌는데 그의 옆자리가 휑했고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마 그를 깨우지 않고 일찍 나가려던 모양이다. 할은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다. 잠시 후 욕실에서 물소리가 끊기고 곧 브루스가 나왔다. 할은 잘 떠지지 않는 뻑뻑한 눈을 들었다. 남자는 할이 아직도 자고 있다 생각했는지 뒤를 돌은 상태로 옷을 껴입고 있었다. 그의 헐벗은 등이 그대로 드러났다. 할은 그 때 브루스의 맨 등을, 상체를 처음 보았다. 그 넓고 단단한 근육질의 등에는 셀 수 없을 정도의 크고 작은 흉터들이 무수했다. 깊게 베인 것, 무엇가에 궤뚫린 것, 총에 맞은 듯한 것. 순식간에 잠이 달아날 정도로 놀랐지만 할은 동요하지 않고 다시 눈을 감았다. 한동안 옷을 입는듯 천이 스치는 소리가 났고 침대 쪽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바로 근처에서 숨족인 숨소리가 났다. 남자의 손은 할의 머리카락을 건드릴 것처럼 가까이 다가왔지만 만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곧 그는 방에서 나갔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까지 들리고 나서야 할은 눈을 떴다. 그는 아침까지 그 상태로 잠들지 못했다.
할 조던은 인내할 수 있었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는 기다리고 있던 거다.
애초에 브루스 웨인은 그에게 과분한 남자라고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던 것은 아니다. 그는 완벽한 남자였다. 그리고 할은 그 완벽해 보이는 남자의 모든 아름다움과 더불어 그의 외로움과 고독까지 사랑했다. 그는 브루스 웨인의 상처를 핥아 줄 준비가 되어있었고 그래서 그가 자신에게 완전히 마음을 열길 기다리고 있었다. 브루스가 옷을 벗지 않는것만 해도 그는 강요하지 않았다. 그가 스스로 그의 앞에서 옷을 벗기를 기다렸던 것이다.막상 눈 앞에서 그의 흉진 등을 보는 건 다른 기분이었다. 그건 남자의 가장 아픈 부분을 몰래 엿본것과 같은 기분에 더해 미세한 죄책감마저 들게 했다. 브루스는 그 자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는 적이 드물었다. 그래서, 그는 브루스 웨인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의 흉터 하나하나가 언제 어떻게 생겼는지 그리고 그것을 자신으로부터 감추는 이유까지. 보이기에 흉측하다고 생각하는걸까. 아니면 그것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은 걸까. 할은 브루스가 그의 앞에서 보였던 침묵과 그의 미묘한 어색함을 기억한다. 그와 동시에, 브루스가 그에게 보였던 다정함과 그에게 의지하는 모습 역시 함께 떠올랐다. 할은 그들의 거리감이 서서히 좁혀나가 질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남자의 행동은 그가 할 조던으로부터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는 것만 같아, 마냥 안도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여기저기서 무차별적인 공격이 퍼부어졌다. 땅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나무들이 뽑혀 나가고 땅이 뒤엎어진다. 그 아수라장에서 히어로들은 도심 쪽으로 뻗어나가려는 적을 막으며 그들을 상대한다. 외계 생물체로 추정되는 것들은 무언가의 조종을 받는지 그 모체가 되는 것들로부터 끊임없이 솟아나고 있었다. 그 수는 점차 줄어들고 있었지만 리거들의 망을 벗어나 도심으로 향한 놈들을 잡기 위해 플래시와 원더 우먼이 쫓아갔고, 대부분의 생명체를 아쿠아맨이 물을 불러들이는 것으로 처리하자 남은 건 모체들이었다. 배트맨은 그 약점을 정확히 노려 터트리는 것으로 한 마리를 제압하며 소리쳤다. 더 번식하기 전에 막아야 해. 붉은 부분을 노려. 그 말에 슈퍼맨이 부러진 나무를 쪼개어 무시무시한 힘으로 던졌다. 그걸로 두 개가 끔찍한 소리를 내며 터져나갔다. 별로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군. 그 점액질의 일부를 맞은 슈퍼맨이 손을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다른 쪽에선 호크걸과 아쿠아맨 역시 빠른 속도로 생명체들을 없애 나갔다. 그린랜턴은 반지의 힘으로 투석구를 만들어 그것들을 공격했다. 그래서 모체를 전부 없애면 이것들이 증식을 멈추는 건가? 그의 질문에 배트맨이 공격을 피하며 대답했다. 우선 알려진 바로는 그렇다. 그린랜턴은 속으로 참 도움되는군 하며 빈정거렸다. 최근 신경이 예민해져 있어서인지 몰라도 짜증이 금새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우선 이것들을 처리하는 게 먼저였다. 괴 생물체들은 긴 다리같은 것을 휘두르거나 산성을 띈 점액질을 내뿜으며 공격했다. 그들이 모체들을 거의 다 없애 갈 때였다. 그린랜턴이 모체를 터트린 후 몸을 일으키던 와중 한 쪽에서 슈퍼맨이 그에게 외쳤다. 랜턴, 뒤! 그가 채 뒤를 돌기도 전에 옆에서 무언가가 그를 덮쳤다. 배트맨이었다. 그들은 바닥을 뒹굴다 일어났고 랜턴을 공격한 모체를 아쿠아맨이 제압하는 것이 보였다.
사태가 전부 진압되자 그린랜턴은 배트맨에게 다가갔다. 그를 공격으로부터 지켜준 것은 고마운 일이었지만 내심 배트맨에게 보호를 받았다는 것에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 아까 도와줘서 고맙다. 배트맨은 그의 목소리에 흘끗 그를 돌아 보았다가 죽은 모체를 살피는 것을 계속했다. 아깐 방심한 거지만 앞으론 그럴 일 없을거야. 그가 덧붙이는 말에 배트맨이 돌아보지도 않으며 말했다. 말 뿐이 아니고 행동으로 보여줬으면 좋겠군. 그 반지가 그렇게 대단한 거라면 말이지. 그의 말에 그린랜턴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배트맨의 팔을 잡고 돌려 세웠다. 다시 한 번 말해봐. 배트맨은 손을 탁 쳐내고 대답했다. 들었을텐데? 잘난 반지 끼고 설치기 전에 네 몸 간수부터 하라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배트맨은 자신의 얼굴을 후려치는 주먹에 옆으로 쓰러져야 했다. 퍽 하는 소리를 들은 다른 리거들이 그들을 돌아보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린랜턴은 터진 입가에서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훔치는 배트맨을 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네 입부터 조심하는게 좋겠군. 처음부터 그들을 지켜보던 슈퍼맨이 곁으로 날아와 그를 막아섰다. 랜턴, 구지 주먹질을 할 필요는 없었잖아. 그는 슈퍼맨을 밀어내며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그럼 이 음침한 놈이 나와 랜턴을 모욕하는데 가만히 있으란 건가? 그 말에 슈퍼맨이 뭐라 반박하려 했으나 비척이며 일어선 배트맨이 그를 제지했다. 배트맨은 그린랜턴에게 몇 걸음 다가왔다. 적어도 그의 시선이 바로 보일 정도로 말이다. 그린랜턴은 그가 저를 쳐다보는 시선에 얕은 분노와 더불어 좀 더 서늘한 무언가가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가 채 제대로 그것을 보기도 전에, 배트맨이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
볼이 얼얼했다. 입술이 터지지는 않았지만 광대 쪽을 맞은건지 그 근처가 얼핏 푸르스름하게 변했다. 어지간히 세게 때린 모양인지 멍이 잘 가시지 않고 있다. 할은 거울을 들여다 보다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배트맨의 사이가 빈말으로라도 좋다고 표현하기 힘든 종류란 건 본인들을 제외하고도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보면 거의 습관적으로 이를 드러냈다. 요새 한동안 아무런 부딪힘 없이 무난하게 지내왔긴 하다. 사실 할은 저가 올바르지 않은 처사를 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배트맨의 말은 듣기 좋은 건 아니었지만 그 정도의 모욕은 할 조던 그 역시 배트맨에게 간혹 하던 것이기도 하다. 애초에 최근 신경이 곤두서 있던 게 화근일지도 모른다. 저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올라 주먹질을 한 것이다. 처음에는 고맙다는 말을 하려 했던건데 결말이 좋지 않았다. 배트맨은 그를 도와주었던 거고, 따지고 보면 그가 했던 말도 몸 조심하라는 식의 내용이었는데 말이다. 사실 이것 뿐이면 할이 이 정도로 찝찝한 기분이 될리가 없다. 그는 자신을 때리던 배트맨의 시선과 그의 표정을 기억한다. 꾹 다물린 입과 이를 악문 듯 딱딱하게 굳은 턱. 그는 화가 났었다. 차갑게 분노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그저 분노 뿐이라고 볼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배신감? 억울함? 그것이 무언지는 종잡을 수가 없지만 배트맨은 그를 잠시나마 멈칫하게 할 정도로 숨기지 못한 감정을 표출했다. 그것은 아주 찰나였고 그 후에는 오간데 없이 사라져서 그가 잘못 느낀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할은 분명히 기억했다. 그 기억이 여태껏 그의 명치 한 구석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나온 그는 핸드폰에 문자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빛이 들어오는 걸 보았다. 브루스였다. 오늘 만날 수 없게 되었어. 라고 적힌 문자는 짤막했고 그 어떤 설명도 혹은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덧붙여지지 않았다. 할은 한숨처럼 숨을 내쉬며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어째서? 라고 문자를 보냈다. 그는 문자를 보낸 지 몇 초 되지 않아 핸드폰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왠지 모르게 볼 수 없다는 문자를 받은 것 뿐인데도 인내심이 없다. 신호음은 길게 이어졌지만 할은 전화를 끊지 않았다. 결국 브루스가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남자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메말라 있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생각할 겨를은 없다. 오늘 만나고 싶어. 할은 이기적으로 말했다. 수화기 너머의 남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곧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가 말한다. 오늘은 널 보고싶지 않아. 그 문장의 단어는 어딘가 먹먹했지만 동시에 단호해서 할은 심장이 떨어질 것만 같은 기분과 초조함을 느낀다. 손 끝이 조금 떨렸다. 집 앞으로 갈게. 브루스는 오지 말라고 했다.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대답도 듣지 않은 채 할은 전화를 끊었다. 그는 몸을 조금 웅크리며 앓는 것처럼 신음했다. 얻어 맞은 얼굴 보다도 마음이 더 아팠다.
가을비가 추적거리며 내렸다. 밤이 내려앉은 웨인 저는 시꺼먼 어둠에 물들어 음침했다. 만약 그곳에 있는 사람이 할 조던이 아닌 다른 이였다면 공포를 느낄지도 몰랐다. 할은 그 굳게 닫힌 철문 너머로 웨인 저를 보다가 코트의 주머니에 손을 꽂으며 철문에 등을 기댔다. 비는 무겁게 내리지는 않았지만 옷을 적실 만큼은 되었다. 그는 축 젖어 늘어지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사방이 어두워서 그는 마치 어둠속에 혼자 남겨진 듯 했다.
좋아한다는 감정이 뭐길래 저를 이렇게 만든 걸까. 할은 자조한다. 평범하지만 그렇지 않은 만남에 그런 상대와 관계를 맺고 그도 저도 운명같은 인연이지만 참으로 이상하게도 엇갈린다. 할은 난생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해 이런 감정을 겪는다. 상대가 남자이고 뭐고를 떠나 그는 브루스 웨인이었다. 자신의 옆에 남아줄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과 그를 사랑하는 저의 마음,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한 관계를 원했을 뿐이었다.
아. 어쩌면 그것부터 문제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린랜턴이자 히어로인 할 조던이 평범한 사랑을 한다는 것 말이다.
철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우산을 쓴 남자가 그에게 다가왔다. 할 그가 남자에게 주었던 우산이다. 온통 어두웠는데도 할 조던은 남자의 얼굴을 뚜렷하게 볼 수 있다. 그의 창백한 피부와 그들이 있는 밤만큼이나 까만 머리카락이 보인다. 브루스 웨인은 우산을 쓴 채 그에게 다가왔다. 할은 그를 향해 조금 웃어 보였지만 남자는 웃지 않았다. 이상하게 마음이 아팠던 건 저인데 왜 남자가 더 상처를 받은 표정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는 할에게 다가와 물기가 뚝 뚝 떨어지는 얼굴을 자상하게 훔쳐 주었다. 다 젖었잖아. 그의 얼굴은 묵묵하고 그렇게 속삭이는 말은 낮게 가라앉아 있는데 어딘지 젖어있다. 할은 그의 얼굴에 닿은 브루스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미안하다 했다. 왜 미안하다 해야 될 것같은 기분이 들었는진 모르겠지만 미안하다 해야 할 것 같았고, 그러고 싶었다. 브루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며 시선을 내리 깔았다. 할 조던은 답답하다. 그 만큼 화도 났다. 하지만 그 전부를 잠재울만큼 그가 애뜻하기도 했다. 그는 남자의 딱지가 진 한 쪽 입가를 엄지로 가만히 쓸다가 입맞췄다.
숨소리가 흐트러질 정도로 거친 입맞춤에 그들은 서로 헐떡였다. 젖은 옷가지가 철벅이며 카페트 위로 떨어지고 그들은 뒤엉켜 침대 위로 올랐다. 할은 브루스의 입술을 혀로 길게 핥았고 브루스는 입가의 상처가 따가웠는지 인상을 쓰지만 상대의 뒷목을 잡아 더 끌어당겼음 했지 밀어내지는 않았다. 단단한 몸을 더듬던 손이 셔츠의 단추에 가 닿았다가 멈췄다. 브루스는 저의 눈치를 보는 할을 마주하다 말없이 그의 손을 재촉했다. 한기와 흥분에 미세하게 떨리는 손이 단추를 풀어 내렸다. 흉터로 자잘히 덮인 상반신이 드러났다. 할은 그가 원했듯이 그 위에 하나씩 입을 맞췄다. 긴 상처는 어루듯이 혀로 쓸어 올리고 작은 것은 빨아들이다 사랑스럽게 입맞췄다. 브루스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상체를 더듬으며 내려간 손은 남자의 바지를 벗겼고 그의 발기한 것을 입안에 담으며 손가락으로는 그 아래 자리잡은 구멍을 더듬었다. 자상하고 뜨거운 행위에 브루스는 눈을 질끈 내려감으며 신음했다. 그리고 그는 할의 몸을 끌어안고 속삭인다. 그냥 해. 지금. 할은 남자의 요구를 마다하지 않는다. 뜨거운 것이 좁은 내벽 안으로 울컥이며 밀려 들어오자 브루스는 억눌린 탄성을 질렀다. 제 등을 긁어 내리는 손톱에 할은 신음했다. 그는 침대가 덜컹거릴 정도로 거칠게 움직이며 한없이 부드럽게 키스했다. 정말 행복했는데도 눈물이 날 것 같은건 저나 그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손을 뻗었다. 미끈한 몸에 감긴 녹색의 옷을 매만지는 브루스의 손길을 보며 할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브루스는 눈을 내려감으며 손을 뗀다. 용기 있는 사람. 그게 할 조던이다. 하지만 저는 그 쉬운 말 한마디 뱉을 용기조차 없었다. 그만두자. 그에겐 간신히 이 말을 할 용기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