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크파이크 AU로 시력 잃는 커크 보고싶은 부분만
파이크 여체화 주의 캐붕주의
눈이 보이지 않기 시작했을 때에 나는 많이 놀라지 않았다. 천성적으로 좋지 않은 눈이었다. 실명의 위험이 있다는 말은 항상 들어왔다.
도수가 높은 안경을 쓰고 렌즈를 껴고, 눈에 좋다는 것들을 먹었다. 각막 이식도 생각해 보았으나 소용이 없단다. 하나 마나랬다. 그래도 십대 중반 쯤부터 앞이 보이지 않을 거라 했으나 아직까지 버텨온 것이 장하다 생각했다. 그래서 내 마음은 항상 시력을 잃을 날을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그것과 별개로 난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 시야가 흐렸다. 간혹 내 눈은 곧잘 그리 침침해지곤 했기 대문에 조심스레 욕실로 가 씻었다. 몸을 닦고 머리를 말리고 옷을 입고, 아침을 준비하던 난 후라이팬을 놓쳤다. 계란과 베이컨이 사방으로 튀었다. 기름이 튄 발이 고통스러웠으나 다른 곳이 더 아팠다. 다른 곳이...
난 울었다.
난 고작 스물 셋이었다. 아직 눈물 없이 시련을 참을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다.
안내견을 구하면 어떻겠냐는 의사의 말에 난 간신히 침착했다. 아직 눈이 완전히 멀은 것은 아니었다. 의사는 아마 삼 개월 안에 완전히 멀 것이라 했는데,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닌가. 난 사실 오 년 전에 눈이 멀었어야 했다. 아직까지 가능성은 있는 것 아닐까.
병원에서 나온 나는 벤치에 앉았다. 해는 여전히 밝았고 날씨는 화창했다. 나의 주변으로 바쁜 걸음의 사람들이 수없이 스쳐 지나갔다. 노랗고, 붉고, 녹색에 푸른색 보라색 모든 것이 융합되어 있는데 난 홀로 이렇게 동떨어져 있다.
그 인파 속으로 걸어 들어야 한다는 것이 두려웠다.
마치 세상에 스포이드로 물방울을 점점이 떨어 트린 것 같았다. 번지고 흐려져 나를 감싸고 녹아 내렸다. 난 그 앞으로 손을 뻗어 조금 휘저었다. 손은 흐린 그림에 닿지 못하고 허우적거렸다. 하늘은 여전히 맑았고, 난 대체 무슨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애인은 떠났다. 그녀는 샤워하는 도중 들어와 자신의 얼굴이 보이냐 했다. 난 그녀에게 세상 모든 사람이 맷 머독 같은 줄 아냐고 고함을 질렀다. 내 잘못도 있었지만, 그녀가 잘못했다. 잡고 싶은 마음이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난 굉장히 우울하고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마침 밖에서 비가 내리는지 창문에 빗물 두들기는 소리가 요란했다.
우산없이 밖으로 나가 조금 걸었다. 문득 웃음이 나왔다. 정말 비 아래에선 뭐라도 보일 줄 알았나보다. 아무 처마 밑에 들어간 나는 물기가 관자놀이와 턱을 타고 흐르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흐린 시야 안에서 색색의 우산들만 분주하게 오가 머리가 아팠다.
"우산 없나요?"
여성의 목소리가 날 향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몇 초가 지난 후였다. 빗소리가 거셌다. 눈이 멀면 귀가 예민해진다는 건 어쩌면 전부 사실이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나 하며 난 말을 걸어온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아마 중년. 마른 편에 가느다란 인상. 흐린 이목구비가 단아하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회색의 우산을 들었다. 대답 없는 나를 의아한 듯 바라보던 그녀는 갑자기 오, 하고 작게 소리냈다. 그리곤 내게 손을 내밀었다.
"데려다줄게요. 집까지."
손이 보였다.
크리스틴은 저를 크리스라 부르라고 했다. 그녀는 투피스의 정장을 즐겨 입었다. 내가 그 말을 하자 그녀는 조금 웃으며 집에도 이런 종류의 옷 밖에 없다고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방부에서 일했기 때문이란다.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에겐 그런 단정한 옷이 굉장히 잘 어울렸다. 사실, 그녀의 모든 부분이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 흐트러짐 없이 틀어 올린 머리카락이나 은은한 향의 향수라던가. 그런 부분들이.
크리스는 일주일에 서너번, 많으면 거의 매일같이 내 집에 들렸다. 그 때마다 크리스의 손에는 음식이 들려 있었다. 코티지 파이, 훈제 닭고기, 그라탕, 파스타, 페칸 파이...
난 동정 받는 게 끔찍하게도 싫었다. 그녀에게 단지 날 가엾게 여겨 이러는 것이라면 찾아 오지 말라 했을 때 크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 눈에 익숙해질 때 까지만이에요. 적응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지는 알고 있으니까."
나중에 알게 된 것이었지만 그녀는 한 쪽 다리가 불편했다. 지금은 걸을 수도 있고 낮은 힐도 신을 수 있었지만 비가 올 때면 무릎에 박은 철심이 아려온다고 했다.
사물이 분간되지 않을 정도가 되자 난 며칠동안 집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았고 그 누구의 연락도 받지 않았다. 초인종 소리에도 나가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았다 뜨고, 계속 감고, 죽은듯이 누웠다 라디오를 켰다. 집에 있는 책과 잡지들을 모조리 쓸어다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나흘 째가 되었을 때 초인종이 울렸고 이번에도 난 대답할 마음 없이 소파에 늘어져 있었다. 곧 현관문이 부서질 것처럼 쿵쾅대었다. 문 열어요! 당장! 저러는데 무시할 수가 없어 난 이리 저리 부딪히며 겨우 현관문에 도달했고, 아무리 그녀가 나에게 잘 해준다 할지라도 소리를 지를 생각이었다. 다신 찾아오지 말라고 밀어낼 것이었다.
내가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자 크리스는 왈칵 내게 안겼다. 마른 몸이 가느랗게 떨려 오고 있었다.
"어떻게 된 줄 알았잖아요. 설마, 설마 해서..."
내 어깨에 묻힌 그녀의 머리에서 나는 라벤더 향에 아찔했다.
"왜. 죽기라도 할까봐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왜일까. 나보다 그녀가 더 슬퍼 보였다. 되려 입에서 웃음이 비져 나올 것 같은 내 얼굴을 그녀가 못 본 것이 다행이다. 난 손을 들어 그녀의 마른 등을 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