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콥과 술루
단문
악몽을 꿨다고 생각했다. 파벨 체콥에게 있어서 가장 끔찍한 악몽은 그의 뇌에서 만들어낸 헛된 상상도, 어느 적인가 보았던 공포 영화 따위의 일부도 아닌 그의 과거이자 그의 기억이었다. 꿈에서까지 자신의 뇌리를 파먹고 들어가게 할 만큼 지독한 기억이라 함은, 자신의 실패. 명예와 자존심의 훼손으로 이어지는 오점. 닥쳐오는 죽음을 막지 못한 무능력함. 죄책감과 좌절을 불러오는 결과에 순응해야 한다는 그 역겨운 패배감. 그리고 상실. 그런 복합된 잔인한 감정을 도출하는 악몽 같은 기억이다. 보이지 않는 붉은 피가 손가락을 타고 뚝 뚝 흘러내려 고이고 고여 늪이 되어 결국 제 몸을 집어 삼켜버리는 그런 악몽을, 체콥은 아주 오래 전 어렸을 적 그가 지구의 고향을 떠나 달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갈 때부터 경험하곤 했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두 번 다시 뒤돌아보지 않겠다 다짐하며 타그나로그발 셔틀에 오르던 때만 해도 한 번 괴로운 기억에 남겨진 장소를 떠나버리면 다시는 고통스런 꿈에 쫓기지 않아도 된다 생각했는데. 머리에 피부에 그리고 온 몸에 각인 된 기억은 제 아무리 감마 쿼드란트까지 달아난다 할지라도 결국은 평생 도망치지 못할 것을, 체콥은 너무 어린 나이에 깨달아버렸다.
열아홉. 이미 제 손 안에 실린 죽음의 무게는 너무나도 컸다. 안나. 그의 안쓰러운 어머니. 달의 춥고 메마른 땅이 그녀가 태어났던 러시아를 떠오르게 한다 말하던 그녀를, 체콥은 결국 지키지 못했다. 자신의 눈앞에서 차가운 시체가 되던 그녀를 보며 그 무기력함이 결국엔 자신마저 죽여 버릴 거라 생각했던 그 때를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소멸 그리고 좌절. 희망을 잃고 절박하게 뻗던 손은 시간이 지나 데자뷰처럼 되풀이되는 것이다. 벌칸의 무너짐과 함께 스팍이 제 어미를 향해 내밀던 간절한 손. 또 한 번의 실패가 유도한 죽음. 그 죄책감이라는 무게가 어깨를 짓눌러 그를 채 완전히 무너트리기도 전에, 파벨 체콥은 세 번째로 그의 눈앞에서 악몽의 새로운 주인이 될 순간이 흐르는 것을 관전 할 수밖에 없었다.
2257년. 베타 시스템에서 엔터프라이즈호는 트랜스포트 사고로 제임스 커크 함장을 잃는다.
아. 현실은 간혹 악몽보다도 잔인할 수 있었다.
장례는 여전히 치러지지 않았다. 세 달이 다 되도록 엔터프라이즈호는 정박되어 있었고 그 상태로 시간이 정지한 듯 푸른 불이 꺼진 채 움직이지 못했다. 스타플리트에서는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새로운 함장을 배치하여 그들의 가장 빼어난 함선 중 하나인 엔터프라이즈를 다시 움직이도록 만들고 싶어 하였으나 전 부함장이자 하프 벌칸인 스팍은 이론적인 듯 하지만 잘 들어보면 사실은 지극히 감정적인 이유를 들이대며 사라진 함장을 찾기 위해 홀로 떠났다. 아마 근 시일 내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스팍의 귀환 여부와 상관없이 장례식이 이행될 것이다. 그처럼 제임스 커크와 아주 가까웠던 자들 몇 명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엔터프라이즈호의 선원들은 다른 함선으로 재배치되거나 새로운 일자리를 구했다. 술루가 그랬다. 술루가 함장과 가깝지 않았냐 하면 그건 틀린 말이었다. 그는 다른 브릿지의 대원들과 마찬가지로 커크와 나름 친밀한 관계에 있었다. 체콥은 항상 술루가 그 어떤 물리적 혹은 감정적 장애물이 될 만한 요소가 일어난다 해도 그것을 짊어지고 앞으로 전진 하는 데에 있어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건 술루가 함장의 일에 슬픔을 표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거잖아.」스무 살 생일날 나가고 싶지 않다는 체콥을 술집으로 끌고 가 술루가 말했다. 독한 클링온 블러드바인은 평소라면 돈 주고 입에도 대지 않을 술이었지만 그 날은 어느 쪽도 그것을 시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술루는 평소 함장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조금 취해 있었고, 체콥은 그가 정 없이 내뱉는 말과는 다르게 떨리는 숨을 힘겹게 들이쉬는 것을 보았다.「고여 있으면 썩을 뿐이야. 사람도 똑같아. 감정에, 추억에 묶이는 순간 죽어버린다고. 천천히, 여기서부터.」그는 손바닥으로 심장 어귀를 문질렀다.
체콥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술루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굴면서도 사실은 그의 어린 시절 처참한 기억을 되짚어보고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들 중 상실의 고통으로 상처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그것에 익숙해지지 못하는 것이다. 체콥은 한동안 말없이 조명이 돌아가는 술집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눈이 아팠다.
「파벨. 디파이언트호로 와.」술루가 구슬리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거기서 함께 항해하자. 좋은 함선이야. 최신식이지. 다음 달 출항을 위해 개조를 마친 상태라 네가 좋아하는 모든 현대 기술의 집합체라고 봐도 될 거야. 함장님도 좋은 분이시고…」
술루는 똑똑한 남자였다. 체콥은 그보다 훨씬 똑똑했으나 또 미련했다. 미래를 제안하는 그의 말에 체콥은 힘없이 웃었다.
「가면 내가 뭘 할 수 있죠. 항해사? 조타수? 기관장? 히카루, 난 지쳤어요. 내 손으로 삶과 죽음을 저울질해야 하는 행위에 진절머리가 나요. 만약에 또 다시 내가 누군가를 죽이게 되는 일이 생긴다면 난…」
숨을 들이키는 소리와 함께 술루의 손아귀가 그의 어깨를 틀어쥐었다. 마주친 검은 눈이 부릅뜬 채 떨리고 있었다.
「감히 너 자신을 탓할 생각은 하지도 마. 커크에게 일어난 일은 네 잘못이 아냐. 삶과 죽음을 결정할 권리는 신에게만 있어. 커크가 죽는 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을 거야. 파벨, 이번 일 뿐만이 아니라 그 어떤 사고로도 널 탓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네가 죄책감을 느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주변의 모든 소리가 죽은 듯 했다. 술루는 확신하고 있었다. 단호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목소리. 너무 어린 나이에 패배감을 배워버린 파벨 체콥을 다시 일으키고 싶어 하는 절박감이 엿보인다. 체콥은 그에 무감동한 시선으로 조명에 일렁이는 술루의 눈을 응시했다.
커크는 죽었다. 죽지 않았다. 죽었다. 아니, 죽지 않았다.
어느 쪽일까. 이걸 감히 포기를 배운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나눌 수 있을까. 술루는 커크가 죽었다고 한다. 스팍은 죽지 않았다고 했다. 맥코이는 죽었을 거라 믿었다. 스콧은 죽을 리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남자는…….
명치가 쓰라렸다. 체콥은 애써 낄낄 웃으며 술을 넘겼다.「그래서, 취업 소개가 제 생일 선물이에요?」
술루는 답지 않게 조금 울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평소보다 과하게 마신다 했더니 결국 먼저 취해버린 술루를 부축해서 택시에 태워 보내야 했다. 아직 밤도 채 깊어지지 않은 이른 시간이었다. 출발하기 전 술루는 눈만 겨우 뜰 수 있을 정도로 취해있으면서도 주머니를 뒤적이며 체콥을 가까이 불렀다. 체콥은 그가 자신의 손 위에 올려놓는 조막만한 장식품을 보았다.「마레 임브리움. 네가 살던 곳이라며.」달, 루나의 조각이 오색으로 반짝이는 유리구슬 같은 공 안에 담겨있었다. 공의 표면에는 마레 임브리움의 철자가 꽤 기술적으로 새겨져 있는 것이 보였다. 기념품 가게에서 파는 거라고 하기엔 모양이 좋았는데 체콥이 그것에 대해 더 묻기도 전에 술루가 탄 택시는 빠른 속도로 멀어져갔다. 그는 잠시 그 자리에 선 채로 손 안의 물건을 물끄러미 보았다. 투박한 돌은 은은한 상아색과 은색으로 번갈아가며 빛났다. 제 어미가 죽었던 땅에서 나온 돌 치곤 끔찍하게 예뻤다. 체콥은 그걸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과 목구멍에 쑤셔 넣어 삼켜버리고 싶은 충동을 동시에 느꼈다. 그는 바지 주머니에 그것을 밀어 넣으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어찌됐든 술루는 그를 생각해서 준비한 선물일 것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