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시 데인저 x 스트라이커 유레카
dream
집시는 꿈을 꾸었다.
회로와 엔진과 강철로 이루어진 몸체의 그 어디에도 오래된 예거로 하여금 꿈을 꿀 수 있도록 허락하는 장비는 설치되어있지 않았다. 꿈이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개념이었다. 꿈은 거짓을 보여주고 환상을 꾸게 하며 오색찬란한 비현실적 그림을 보여준다. 또한, 꿈이란 건 이미 경험해버린 지난 과거의 잔상을 뇌리의 한 구석으로부터 끄집어내오기도 한다. 집시는 셀 수 없는 숫자와 에너지로 구성된 그의 메모리 시스템에 저장되어있는 먼지 쌓인 배틀 로그의 영상들을 보았다. 그건 끝없이 펼쳐진 어둠과 일렁이는 파도, 부서져 내리는 건물의 잔해 그리고 괴물의 포효로 가득하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지나간 일을 간혹 잊기도 한다. 하지만 예거는 그러지 못한다. 그들에게 스스로의 힘으로 메모리 시스템을 파기시킬만한 권한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집시는 자신의 회로를 따라 무수한 영상들이 스쳐 흐르는 것을 지켜본다. 그걸 차마 꿈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할지 모르나 만약 기억을 되새기는 걸 꿈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구분의 경계는 애매해진다.
어찌되었든 꿈은 그저 꿈일 뿐이었다. 집시는 그것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케케묵은 먼지 속에서 철은 부식되고 이음새에는 녹이 슬어갔다. 그러나 놀랍게도 영상은 점차 뚜렷해졌다. 빛. 진동. 섬광. 집시는 그의 찬란하게 빛나던 파일럿들을 떠올렸다. 그들이 얽매여있던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얼마나 지독하게 고통 받았는지, 전장의 모습과 더불어 집시는 그 또한 마찬가지로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었다. 그의 인공 지능은 조종사가 보는 저들의 모든 과거까지 담아둘 수 있도록 허락했기 때문이다. 파일럿들은 그렇게 그의 안에서 하나가 되었고 그들은 도중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봐야한다는 사실에 진저리치곤 했다. 베켓은 어땠는가? 모리는? 그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선명해져 제 아무리 강한 인간이라 불리던 그들마저도 스스로의 기억의 마수에 집어 삼켜질 번 하지 않았던가? 예거는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간접적으로 경험한 인간의 것을 해석하려 들 수는 있었다. 그래. 인간은, 아마 그걸 두려움이라고 불렀던가.
누군가에게 있어 과거는 핏줄에 회로에 낙인처럼 박혀 사라지지 못할 지라도 평화의 시대에서 절망과 혼돈의 그림자는 더 이상 용납되지 못했다. 망각의 만은 이제 필요성을 상실한 채 잊혀져버린 고철의 영웅들로 가득했다. 인간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예거는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스트라이커는 항상 집시를 마주할 때 늑대의 이미지를 떠올리곤 했다. 그의 메카니즘은 흉부 터빈의 가장 깊은 내부에서부터 소용돌이치며 태풍의 눈처럼 주변 것들을 휘몰아 갔다. 집시는 고독했으나 그건 시간이 치유할 수 없는 상처로부터 온 자기배제였고, 그 누구도 그것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못했다. 스트라이커는 19년의 마닐라를 기억했다. 집시가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기 직전에 있던 전투는 그 여느 때보다 치열했으며 절박했다. 그리고 그건 스트라이커의 처녀전이기도 했다. 밤하늘 밑에서 도시는 괴수의 피로 뒤덮여 보석을 뿌린 것처럼 빛났고 바다에는 마치 은하수가 흐르는 듯 했다. 괴수의 시체를 밟고 선 붉은 예거를 보며 스트라이커의 시각 센서는 과열되었다. 이걸 아마 아름답다고 표현하는 것이겠지. 갈가리 부서진 비극의 잔해와 시체의 산밖에 남기지 못하는 전장을 차마 아름답다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이젠 모든 것이 조용하다. 괴물의 울음소리도 인간의 비명소리도 그 무엇도 없었다. 세상은 더 이상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되었고, 그리고 예거의 엔진이 요동치며 철갑이 맞부딪히는 소리 역시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다. 이제 집시는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예거들의 무덤에 주저앉아 죽어가는 모니터를 껌벅였다. 그 옆에는 스트라이커도 있었다. 호라이즌. 벌칸. 에코. 솔라. 러키. 에덴. 그들의 잔해 너머로 길게 뻗은 지평선을 따라 용암 같은 햇빛이 일렁였다. 그건 마치 괴수의 피가 한때 그러했던 것처럼 바다를 타오르는 듯한 오색으로 물들였다.
기억하고 있다. 집시의 배기구가 웅웅 울었다. 그 마지막 숨과 같은 소리에 스트라이커는 조용히 수긍했다. 그 역시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빛. 진동. 모니터를 태우는 섬광. 하지만 결국 그들은 한낱 고철로 만들어진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만족했다. 전쟁을 위한 영웅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었다. 시체의 위를 딛고 선 승리의 상징이 정말로 아름다울 수 있는가? 아니. 아마 아닐 것이다.
끝이 오고 있어. 스트라이커는 곧 있으면 흔적 하나 남기지 않은 채 바다에 흩어질 그들의 몸뚱이를 예상했다. 그들 전의 예거가 그랬고, 그 전의 예거가 그랬듯이 말이다. 예거는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고독의 요새에서 집시는 암전이 닥쳐오는 시각 센서를 움직였다. 노을이었다.
예거는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