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비에님의 늦은 생일리퀘입니다
원래 할뱃으로 써드리려했는데 반넘게쓴게 날라가서ㅎㅎ..결국은 요즘빠져계시는걸걸로 써드리려했는데 제가 아주 큰 미스테이크를 저질럿다는걸 깨달았고..
보지도 못한 장르를 갖고 글을쓴다는건 미친짓이군요! 캐붕주의!
늦지만 다시한번 생일 축하드리고ㅠㅠ내사랑만받아주세요~!
숲은 울창했고 또 고요했다. 그 고요함 사이에서 조곤거리듯이 잎새 사이사이로 스며 들어오는 숲 그 자체만의 요란함이 있었다. 바람이 부는 소리, 그에 맞춰 나뭇잎이 바작거리는 소리, 작은 짐승들에 마찰하는 나뭇 둥지의 버석임과 간혹 귓등에 에는 이름모를 새의 지저귐이 있었다. 고요 사이에 소란이 있듯 그 자잘한 소음 속에서도 그는 정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름드리 우거진 나무의 잎새 위에서부터 햇빛이 그 틈을 찾아 발목까지 덮는 다듬어지지 않은 잔디 위로 노란 궤적을 그려내는 것을 보았다. 드문드문 쏟아지는 빛의 광선에 숲은 그렇게 시끄러운 침묵으로 그를 맞았다. 그건 어딘가 포근하기도 했으며 또 진저리쳐질 만큼 혐오스러울 정도로 그를 포용하려했기 때문에 그는 잠시 오한을 느꼈다.
기스본은 그를 둘러싼 평화로움을 곧이 곧대로 만끽할 수 없는 자신이 지긋지긋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반사적으로 돋아나는 날카로운 혐오심에, 한편으로는 쓸모없는 자아의 건재함을 느낄수 있었고 고로 위안을 얻었다. 절대적인 포용과 따스함은 간혹 그를 미치도록 유혹했지만 결국엔 그것에 등을 돌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애초에 쉽게 변화될 수 있는 자아를 가졌다면 그는 아마 꽤나 오래 전에 스스로 제 심장에 칼을 박아 넣었을지도 모른다. 기스본은 손을 옆으로 뻗어 굵은 나무 기둥을 쓸어 내렸다. 단단하고 거친 표면에 드드득거리는 소리를 내며 손바닥이 거슬하게 쓸려났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이제 그의 손바닥에서는 숲의 냄새가 났다. 사실은 얼마 전부터 숲의 풀냄새가 그의 옷에 베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문득 그의 익숙한 검은 색의 옷이 이 숲에 굉장히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기스본은 발을 돌려 그 무자비한 장소에서 걸어 나가는 것 대신 나무 밑둥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나무는 남자 다섯이 팔을 두르고 끌어 안아야 할 정도로 굵었다. 그것이 드리우는 그늘에 여름의 더위가 한층 사그라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손바닥으로 아무렇게나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 후에 손바닥에는 땀의 끈적함이 묻었고 그의 이마와 머리칼에는 나무의 냄새가 묻었다. 숲은 여전히 고요했다. 기스본은 미동없이 등을 기댄 편한 자세로 앉아 있었고 그런 그의 주변을 지나치는 다람쥐와 같은 동물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을 뿐이었다. 그 행위에 굉장히 집중한 듯이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기스본은 그의 머리 위에서부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에도 놀라지 않았다.
"그렇게 노려봐도 다람쥐는 널 헤치지 않아."
그 말에 문득 기스본은 자신의 시선에 그렇게 날이 서있었나 생각했다. 어쩌면 약간의 몸에 벤 습관이라던가 직업병으로 인한 무의식적인 행동이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건 로빈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작게 혀를 한 번 차는 소리가 들렸다. 재빠르게 몸을 숨기는 다람쥐를 보던 기스본은 축축한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아무렇게나 쓸었다.
"내려오지 그래."
"아니. 딱히 너와 얼굴을 맞댄 채 대화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숨기지 않는 빈정거림에 그제서야 기스본은 고개를 위로 들었다. 나무는 빈 말로도 작다고 할 수 없었다. 한참 높은 곳에 로빈이 편한 자세로 걸터 앉아 있었는데 대체 어떤 방법으로 저 위까지 올라 갔는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기스본은 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노려보는 로빈의 익숙한 응대에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고개를 내린 기스본이 여전히 자세를 바꾸지 않은 채 밑둥에 등을 기대고 있자 로빈은 거짓말로도 예의바르다고 할 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혼자 몸으로 여기까지 들어오다니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명백하게 적대시하는 그 목소리에서 기스본은 참으로 운치있게도 숲을 느꼈다. 자신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평화와 조용하게 메아리치는 경계심 따위였다. 그건 그에게 있어서 익숙한 종류였다. 날카로운 자각은 그를 동요시키는 것 대신 의외로 침착하게 만들었고 그가 잠깐의 대답을 고르는 순간에 로빈은 나무에서 내려왔다. 꽤 높이가 있음에도 단번에 뛰어내린 로빈은 별 유난할 것 없는 동작으로 옷을 털었지만 기스본은 한 쪽 시야에서 그의 경계에 서린 날을 보았다. 그것 역시, 익숙한 반응이었다. 어찌되었든 그들은 좋은 사이라고는 할 수 없었고 오히려 서로를 향해 이를 드러내는 것이 정상으로 보여야 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랬기에 이질감을 느낀 쪽은 공교롭게도 로빈이었다.
젊은 청년이 그를 돌아보며 인상을 쓰는 것에 기스본은 움츠러들진 않았으나 내심 상대의 곧은 시선에는 당해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기스본은 아무렇게나 늘여트렸던 긴 다리를 접어 세우고는 그 무릎 위에 팔을 걸쳤다. 한층 더 편해 보이는 모습을 하자 로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기스본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왠지모르게 쉰 목소리는 여느 때보다 낮았다.
"싸우러 온 건 아니다."
로빈은 그 말을 믿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는 팔짱을 꼈다. 기스본은 로빈이 그를 적의 가득한 눈초리로 노려 봄에도 엉덩이를 일으킬 생각도 없어 보였고 간혹 손을 옆으로 내려 무성한 풀을 그 길죽한 손가락 사이에 얽다가 무심하게 잡아 뜯을 뿐이지 긴장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로빈은 그의 옷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의 정수리를 내려보다가 풀을 잡아 뜯는 손을 보았다. 긴 손가락은 마디가 굵지 않고 검을 잡은 사람의 것 치고는 단정하다. 풀의 무덤을 만들어 놓는 기스본을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보다가 로빈은 그의 옆에 앉았다. 옆이라고 하기엔 거리감이 있었으나 서로 의식하지 못할 거리는 아니었다. 로빈 후드는 문득 기스본과 나란히 어깨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괴상한 기묘함을 느꼈고 그와 동시에 이 상황에 어색해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들은 빈말로도 이런 긴장감이 배재되어있는 분위기를 연출할만한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로빈은 시야에 흩어진 여름의 햇살이 빛줄기가 되어 드문드문 흩어지는 광경이 머릿속에서 그들에 관련된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을 느꼈다. 그건 대부분 말싸움과 조롱과 고함과 다툼이 뒤섞인 종류였다.
그는, 적어도 그의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가이 기스본에게 익숙하지 않았다. 기스본은 침착했고 동요가 없었으며 그와 어울리다고는 하기 힘든 이 숲의 침묵에 동화되어지고 싶어하는 것처럼 무겁게 입을 다물고 있었으며 어딘가 느리다고 생각할 정도로 움직임이 적었다. 로빈은 경계심 하나 품지 않는 상대에게 다짜고짜 덤비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그다운 생각이었고, 기스본 역시 알고 있을만큼 뻔했다. 어디선가 매미 소리가 울렸다. 벌꿀주를 찾고 싶을 정도로 더운 날씨였는데 남자는 오늘도 검은 옷을 입고 있다. 문득 기스본이 풀물 든 손바닥으로 목덜미를 슬어 땀을 훔쳐낼 때 로빈은 벌어진 옷깃 사이로 얼룩진 그의 피부를 보았다. 검을 드는 남자의 몸에 상처 한 두개 생기는 것이 뭐가 대수냐고 치부할 수도 있었겠지만 로빈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기스본의 어깨를 잡았다. 그 손은 바로 뿌리쳐졌고 그 사나운 반응과 자기 자신의 무의식의 행동에 놀란 표정을 하는 로빈을, 기스본은 사나운 눈으로 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순한 생물처럼 눈꼬리를 늘이고 있던 모습이 온데간데 없다. 꼬리를 물린 고양이같았다. 로빈은 허공에 어정쩡하게 들린 손을 내려 남자의 손을 잡았다. 약간의 저항이 있었지만 로빈이 그 손을 확인하는 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풀물이 든 손끝마다 돌바닥이라도 긁은 것처럼 손톱이 끔찍하게 갈라지고 핏물이 엿보였다. 남자는 입을 꾹 다물었다. 큰 몸이 잘게 떨리는 것이 맞닿은 살갗으로 전해졌다. 잠깐의 어색한 침묵 후에, 로빈은 도무지 제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고 멍하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을 당한거야?"
기스본은 눈에 띄게 침울해졌다.
표출되지 못한 감정은 응고되어 심장 한 쪽 구석에 꾸역꾸역 쌓여지기 마련이었고 그건 두 남자 전부 마찬가지였다. 단지 그 감정이 서로의 반대일 뿐이었다. 단순한 선과 악으로 구분되어질 수 없는 애매한 경계라는 거울을 사이에 둔 채 그들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들은 너무도 달랐지만 동시에 굉장히 비슷했다. 그들이 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로빈은 노팅엄의 들판에 뒤죽박죽 섞여 솟아나는 색색의 꽃들이나 철마다 쟁기를 두르고 밭을 가는 농마를 기억한다. 유쾌한 음악소리와 그녀가 짓던 헐벗은 웃음을 떠올리지만 기억은 마치 어렴풋한 환상처럼 안구 뒤쪽에서 능근히 떠올랐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분명 숲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그의 마을이 너무나도 멀게 느껴져서 로빈은 그가 발디딘 곳이 지도의 위에서 지워지는 것과 같은 착각을 느꼈다.
기스본은 피난처를 찾고 있었고 그의 막다른 생각이 다다른 곳은 이 숲이었다. 로빈은 그에게 많은 것을 묻지는 않았다. 가이 기스본은 단단한 남자였고 그의 그런 단단한 겉모습을 깨트리는 건, 어찌보면 굉장한 폭력적인 즐거움을 줄지도 모르겠지만 로빈은 그 정도로 질낮은 취향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단지 기스본으로 하여금 호숫물로 몸을 씻도록 내버려둔 채 조금 떨어진 곳의 나무 둥치에 앉아 있었다. 이 곳까지는 아무도 오지 않을 거라고 몇 번이나 다짐한 후에야 가능한 일이었다. 작은 호숫물은 근처 냇가에서 흐르는 물과 이어져있었기에 썩은 냄새도 나지 않고 당장 마실 수 있을 정도로 깨끗했다. 검은 옷가지를 하나씩 벗어내릴 때마다 남자는 제 허물을 벗는 듯 했다. 로빈은 그의 여상스럽도록 빛바랜 피부가 희게 보일 정도라는 것에 조금 놀랐다. 기스본은 긴 다리를 움직여 호수 안으로 들어가 몸을 닦았다. 날은 한여름이라 덥기 그지없었고 로빈은 그 역시 물 속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은 있었으나 한 번 남자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 가능성 높은 짐작을 하게 되어버리자 함께 알몸으로 물 속에 들어가는 것은 웬지 꺼림칙한 행동으로 느껴졌다.
기스본은 자신의 멍들고 생채기 난 몸을 보이는 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마치 아까 전 로빈이 건들였을 때 보였던 날선 반응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는 지극히 로빈을 의식하지 않으며-꼭 의도하기라도 한 것처럼-몸 위에 물을 끼얹어 손바닥으로 문질러 닦았다. 균형 잡힌 근육에 햇빛이 괴다가 물기와 함께 흩어지곤 했다. 로빈은 그가 몸을 씻는 행위를 지켜 보았다. 평상시처럼 무뚝뚝하고 말없는 남자는 정갈해보이기까지 했는데, 같은 무리로부터 '그런'행위를 당한 후에 이 곳으로 도망치다시피 들어왔다는 사실이 겹쳐질 때마다 로빈은 모순적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그건 같은 수컷들끼리 무의식중에 서로의 서열을 정할 때에 들곤 하는 기분이었지만 그런 데까지 생각이 닿지 않는 로빈은 약간의 불편함을 느낄 뿐이었다. 얼마 후 기스본은 물에서 걸어 나왔다.
그들의 시선은 기스본이 물묻은 손으로 자신의 바지를 줏어 들 때에 마주쳤다. 로빈은 본인의 시선이 어떤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저를 바라보는 기스본의 눈빛에서부터 자신의 표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반사적으로 눈을 돌렸고 상대방에게서 언어의 폭력 혹은 믿음을 져버린 것에 대한 쏟아지는 비난을 받을 것을 각오했다. 하지만 기스본은 말없이 젖은 못 위에 검은 바지를 꿰어 입었다. 로빈은 그가 어서 자신의 시선 안에서 사라지기를 원했다. 부끄러움과 당혹스러움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은근한 흥분이 뒤섞인 채였다. 그는 곧 자신의 몸 위에 드리워지는 남자의 그림자에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기스본의 긴 다리와 그의 상체와 물에 젖은 얼굴이 보였다. 그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얼굴로 말했다.
"너도 결국은 똑같아."
그는 로빈이 대꾸를 할 새도 없이 그의 위에 올라탔다. 느릿한 동작은 로빈에게서 반항의 의사를 염두에 두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로빈은 기스본의 늘씬한 양 허벅지가 그의 허리를 죄며 작고 올라붙은 둔부가 그의 고간 위로 내려앉자, 긴 생각을 포기한 채 그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성급하게 맞닿는 입술에 기스본이 한숨처럼 숨을 내쉬었다. 로빈은 상대가 이런 행위에 익숙해보인다는 것에 약간의 소름을 느꼈으며 진저리가 쳐졌다. 막상 '그'행위를 하려고 하는 자기 자신은 생각지도 못한 채로 말이다. 마치 이것이 전적으로 기스본의 유혹에서 온 것처럼 치부하려는 행동은 기스본이 그의 단단해진 다리 사이를 손으로 눌렀을 때 현실로 부상했다. 숨을 들이킨 로빈은 남자의 눈을 보았다. 젖은 수풀처럼 흐트러진 머리칼 밑으로 유리알같은 푸른 눈동자가 감정 없이 저를 마주보았다. 그 곳엔 분노도 혐오도 그 어떤 감정도 심지어 흥분도 느껴지지 않아서 로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