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뱃 good luck darling 1
할뱃
Good luck, darling ! 1
밤이 내려앉자 라스베가스의 카지노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슬슬 초저녁이 될 무렵부터 네온 사인이 켜지고 길거리에 반 쯤 벌거벗은채 화려하게 치장한 여자들이 걸어다닐 때부터 라스베가스의 카지노는 물이 오르기 시작한다. 아니 사실은 낮 밤 할 것 없는게 한 번 카지노의 안에 발을 들이고 나면 그들에게 있어서 낮과 밤의 경계는 모호해지기 때문이다. 셀 수 없을만큼 수많은 카지노들의 자리가 빽빽하게 채워지는 건 그들 카지노가 특별한 호객 행위를 한다거나 상술을 부려서가 아니라 단지 한 순간의 행운을 잡기 위해 서성이는 무수한 포츈씨커들 덕분이다. 밤이 되기가 무섭게 조명이 돌아가고 분수대에서 수십미터에 달하는 물줄기가 뿜어져 올라오며 손님을 맞이했다. 그 장관에 홀린듯이 제각각 걸어 들어가는 사람들은 그들이 이 카지노의 분수대 유지비를 내는 데에 일조를 하게 될 것이란 건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라스베가스의 카지노는 그 어느 도시의 것보다도 그 질이 다르다. 사람들은 건물 자체의 화려함에 처음 압도당하고, 입구에서부터 실내로 이어지는 길을 걸으며 두 번째로 주눅이 들 수 밖에 없다. 번쩍이는 미니드레스를 입고 인사를 건네는 글래머의 아가씨들부터 양 옆에 늘어서서 허리를 굽히는 문지기들에 이어폰을 낀 채 그들을 하나하나 주시하는 검은 양복의 경비원들까지, 금빛 장식과 대리석으로 번쩍이는 건물 내부와 더불어 부담감을 주기 마련이었다. 그로 인해 손님들은 하나같이 옆사람보다 조금 더 돈이 있는 척 하고 싶어했으며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 값비싼 옷과 장신구로 치장을 했고 옆에 엄청난 미녀를 대동하려 했으며 지갑을 탈탈 털어 모든 현금을 색색의 칩들로 바꾸고는 했다. 조금이라도 더 자신을 뽐내기 위해 그 정도는 아끼지 않을 법한 사람들만 오는 곳이 이곳 라스베가스의 카지노였고 그 누구도 그들을 말리지 않았다. 되려 은근한 시선과 보이지 않는 경쟁으로 서로를 부추길 뿐이었다.
라스베가스에서 손 꼽히는 카지노 중의 한 곳은 그 입구에 도착해 줄을 지어 멈춰 서는 고급 승용차만 해도 모토 쇼에 출전해도 될만큼 장관을 이루어서 그곳을 지나치는 사람들마다 한번 쯤 멈춰 서서 누가 내리는지 구경하게 만들곤 했다. 아우디나 람보르기니나 벤츠같은 차들에서 내리는 사람들 중 티비나 신문에 한 번 쯤 나오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유명인사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다.
줄줄이 들어오던 차들 중 미끈한 애스턴 마틴이 섰다.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먼저 내려섰다. 젊은 남자는 브루넷의 준수한 외모였고 커스텀 된 세미정장을 멋드러지게 차려 입은 채였다. 그는 곧 그를 따라 내리는 여성을 에스코트했다. 구불거리는 블론드의 늘씬한 미녀는 우아하면서도 은근한 노출이 돋보이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들의 외모만 해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 했다. 몇 사람들이 금발의 여자를 보며 수군거렸다. 저 여자 제이 매커리 아냐? 맞아 그 모델이잖아.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금발 미녀의 옆에 선 남자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었으며 다들 온갖 추론을 하며 수근거릴 뿐이었다. 그 와중 두 남녀는 팔짱을 낀 채 카지노의 안으로 들어갔다.
"아까 했던 말 명심해, 자기."
제이 매커리는 자신의 화려한 금발을 어깨 너머로 넘기며 말했다.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아 에스코트하던 남자는 한 쪽 눈을 찡긋거리며 여유롭게 웃어보였다.
"아아 알았다니까. 정말 고마워 제이. 이번 일은 잊지 않을게."
"딱 한 번 뿐이니까 말이야. 저번에 내가 빚진 것도 있고. 이걸로 퉁친 샘이야."
"물론이지."
늘상 웃는 얼굴인 남자를 돌아보며 제이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녀는 이 남자를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성격도 서글서글하니 좋고 뒷끝이 없기도 했고 꽤 똑똑했으며 맡은 일은 뭐든지 해내는 성미였다. 게다가 잘 생겼다. 밤일도 잘 하는 건 보너스. 머리부터 발 끝까지, 웬만한 여자들이 반하지 않고는 못 베길만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이 완벽해 보이는 남자에게는 딱 한 가지, 아주 큰 문제가 있었다. 정말, 정말로 큰 문제였다. 그리고 그 문제는 아마, 그녀가 짐작하기로서니, 평생 고쳐지지 못할 것이다. 이 남자의 뼛속까지 틀어 박혀있는 천성이나 다름 없었으니 말이다.
"할, 네가 만약 잡히게 된다면..."
"너와 난 오늘 어퍼 이스트에서 저녁식사를 하다가 처음 만난 사이이고 넌 내가 도박중독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호들갑스럽게 놀라며 역정을 내곤 홀로 떠나버린다. 맞지?"
"수식어가 조금 늘은 것 같지만... 맞아."
"걱정 마. 잡히지 않을테니까."
제이는 드문드문 보이는 경비원들을 곁눈질했다. 그녀는 능숙한 모델이었고 자신을 꾸미는 데에 도가 텄으나 눈 속에 약간의 불안함이 섞이는 것 마저는 없애지 못했다. 내심 남자를 말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으나 그녀의 사랑스러운 친우는 곧 그의 앞에 일렬로 늘어서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카드들과 칩들을 떠올리느라 정신이 없는 채였다. 제이는 다시 한 번 작게 한숨쉬었다.
그들은 메인 라운지를 지나 VIP 라운지의 입구에 섰다. 신분증을 확인한 경비원이 친절한 미소로 그들을 맞으며 육중한 문을 열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미스터 라포체티. 그리고 미스 매커리."
문이 열릴 때 그녀는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Good luck, Hal."
할 조던은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 맞췄다.
"I have all the luck in the world tonight, baby."
할 조던. 29세. 도박중독자이자 프로 갬블러.
해외 4개국의 카지노를 포함 전국 3개 주 20여곳의 카지노에 블랙리스트로 등극되었으며 6년 전 펜실베니아의 재활소에 들어갔다가 나온 경험도 있음.
어느 곳에서 얼굴을 들이밀지 모르는 두문불출의 남자이며 모든 카지노들의 숙적이자 먹잇감이다. 여태껏 그 누구도 할 조던을, 적어도 카지노 안에서 잡아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항상 최고의 수법으로 배팅을 했고 그 누가 눈치 채기도 전에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데에 있어서 도가 튼, 말 그대로 선수중의 선수였다. 물론 그 외에도 수많은 도박중독자들과 프로 갬블러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중 대체 무엇이 해롤드 조던이라는 남자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인가?
"잘 생겼잖아."
"음. 잘 생겼지."
리즈 먼로와 캐롤 페리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 그녀들을 탓하는 사람은 LAPD 경찰청 내에 아무도 없었다. 평일의 오전,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며 시끄럽게 울려대는 전화들과 호출음과 라디오 무전기 소리로 경찰청 안은 요란스럽기 그지 없었다. 그 와중 단 몇 명의 사람들은 엄숙하고 우울한 분위기를 한 채 서로 둥그렇게 둘러 앉아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옆을 지나치던 다른 동료들은 하나같이 측은한 동정의 시선을 보내곤 했다. 그도 그럴것이, 그들은 도박범죄 단속반이었으며, 바로 어제 한 곳의 카지노가 당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그들이 잡았다고 생각했던 할 조던에 의해.
빅터 스톤이 조금 진절머리 난다는 식으로 탄식했다.
"둘 다 진지한 거야? 지금 잘 생겼다는 말이 나와?"
하지만 사실이잖아. 그녀들은 조금 툴툴거렸다. 빅터는 제 옆에 앉은 클락 켄트마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이마를 턱하니 짚었다. 물론 할 조던이라는 남자가 잘 생겼다는 것과는 별개로 그의 존재가 그녀들의 골치를 썩이고 있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어젯 밤 23시10분 경부터 오늘 새벽인 03시45분 경까지 메트로폴리스 카지노에서 그가 따간 돈이 얼만 줄 알아? 자그마치 23만 하고도 9천 달러야. 23만 9천."
"- 하고도 칠백 오십 오 달러 육십 삼 센트."
"그만 둬. 우리 집 우체통에 쌓인 고지서가 떠오르니까."
"그 돈 조금만 나눠 주면 소원이 없겠다. 2퍼센트라도."
대화의 주제가 점점 현실도피형의 탄식처럼 흘러가기 시작하자 안절부절하며 지켜보던 클락 켄트가 손등으로 땀을 닦으며 끼어 들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그는 아직 근처를 벗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빅터가 고개를 저었다.
"신참, 자네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이 녀석이 한 번 카지노를 떠난 이상 잡기는 거의 불가능한 거나 다름 없다고. 알다시피 그를 잡은 적은 단 한 번 뿐이야."
그들은 하나같이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고는 동시에 한숨을 쉬어야 했다. 자그마치 6년 전이었다, 할 조던이 잡혔던 유일한 적은. 그것도 그들의 힘으로 잡은 것이 아니었다. 할 조던에게 앙심을 품은 그의 연인들 중 한 명이 그의 위치를 발각시키는 바람에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유는 그에게 연인이 너무 많아서 라는 질투 때문이었는데 결론적으로 할 조던을 잡기는 했으나 경찰청의 자존심은 완벽하게 밟혀버린 셈이었다. 직접 잡은 것도 아닌, 질투 가득한 여자로 인해 잡게 되다니 말이다.
빅터 스톤은 아직도 그 날 할 조던을 잡던 때를 기억한다. 그를 잡으러 향한 주소에는 거대한 저택이 그들 경찰들을 반기고 있었다. 다름 아닌 그 지역 갑부로 알려진 모 기업의 총수의 자택이었던 것이다. 신분 확인을 받고 거대한 정원과 몇 개나 되는 응접실을 거쳐 한 방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집사로 보이는 사람이 경찰들에게 '미스터 조던은 곧 나올테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하십니다' 라는 메시지를 받을 때까지만 해도 일이 그렇게 어이없이 흘러가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웬 젊은 여자의 헐떡임과 찢어지는 듯한 교성이 저택 안에 쩌렁쩌렁 메아리칠 때마다 귀를 틀어막고 싶어 안달이 났고 넋이 빠지는 것은 덤이었다. 그리고 할 조던이 계단에서 내려왔다. 다 풀어 헤쳐진 셔츠에 구김이 잔뜩 간 고급 정장 바지 그리고 맨발 차림으로, 그 누가 봐도 방금 전 정사를 마친 사람이란 걸 증명이라도 하듯 헝클어진 머리칼과 함께. 그는 마치 제 집에 온 손님들을 대접하듯 경찰들을 향해 티끌 없는 미소로 말했다. 그럼, 가실까요?
그 때 기억이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끄응 신음을 내는 빅터를 안쓰러운 눈으로 보던 클락 켄트가 안경을 치켜 올리며 서류를 뒤적였다.
"세계 곳곳의 카지노에서 돈을 쓸어 담는 것에 고위층 여자 몇 명 꼬시는 건 부업 정도. 가짜 신분증과 약간의 분장을 사용하기도 하고."
"문제는 그에게 넘어간 여자들이 범죄를 돕는 경우도 허다하다는 거야."
"이번 메트로폴리스 건도 그랬죠?"
"제이 매커리. 그를 파트너로 데리고 갔었지."
"세상에, 샤넬 전속 모델이잖아요! 능력도 좋네."
"어느 쪽을 부러워 해야하는 건지."
"지금 로스앤젤레스의 곳곳에 연락을 취해 놓은 상태지만 과연 잡혀줄 지는 모르겠군."
"우리도 어서 나가서 합류하죠."
그들이 하나같이 한숨을 내쉬며 반 쯤은 포기 상태로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사무실 안으로 한 여자가 걸어 들어왔다. 단정한 쥐색의 투피스를 갖춰 입고 검은 머리칼을 틀어 올린 미모의 여자였는데 그녀가 들어오자 경찰청 안의 사람들이 하나같이 일어서거나 하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클락 켄트 역시 몇 몇의 다른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약간 허둥거리며 일어서다가 의자를 넘어트렸고 곧이어 홀린 듯이 멍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캐롤과 리즈는 속으로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로이스 레인은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며 다가오다가 빅터 스톤과 그의 무리들을 향해 인사했다.
"지금 수색에 동참하려 나가려고 했나보죠?"
"맞습니다 국장님."
"어제 일은 유감이네요. 정말로."
하나같이 풀죽은 얼굴이 되었고 클락 켄트가 그 중 제일 심했다. 마치 엄마에게 꾸중듣는 아이같은 표정을 짓는 클락 켄트를 보던 로이스는 조금 웃으며 그들에게 파일을 하나 건넸다.
"질책하려 온 건 아니에요. 할 조던을 수사하는 데에 도움이 될까 싶은 물건이 있어서 갖고 왔어요."
그녀가 건넨 파일을 넘겨 보던 빅터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처음 보는 사람입니다만. 이 자가 도움을 줄 수 있다고요?"
로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때 NYPD의 프로파일러이자 형사였죠. 그가 잡은 범인들과 처리한 사건 수만 해도 수십 건은 가뿐히 넘어가요. 요즘은 딱히 바쁘지 않다고 들었으니 한 번 찾아가서 도움을 구해봐요. 실력은 뛰어난 사람이니 수사에 본격적으로 협조하게 만들면 더 좋고."
그 로이스 레인이 인정한 사람이라면 더 물을 것도 없이 뛰어난 사람인 게 확실했다. 빅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파일을 챙겼다.
"이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죠? NYPD에 연락하면 됩니까?"
로이스는 문득 그녀가 잘 짓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약간의 난감함이 묻어나는 웃음이었다.
"아뇨. 브루스 웨인은 현재 캘리포니아 주립 정신병원에 있어요."
"...예?"
"아마 207호인가 그럴거에요. 전화번호 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