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뱃 옴므파탈 4
옴므파탈
올해의 겨울은 추웠다. 동시에 음침했다. 여기저기 눈이 녹은 자국으로 더러웠고 도로마다 흙탕물이 튀었다. 할은 내린지 얼마 되지 않아 금새 녹기 시작하는 눈을 발굽으로 문댔다. 가차없이 짓뭉개진 눈뭉치가 흙색이 되어 녹아내렸다. 꼭 제 기분같았다. 더럽고 하찮았다. 할 조던은 정장을 입고 있다. 웬만해선 장롱에서 꺼내는 일이 없는 쓰리피스 정장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직모의 겨울용 코트를 걸친 채였다. 마치 대부같은 영화에나 나올 법한 차림새라고 내심 혀를 찼다. 이 고급 레스토랑에 갈 때 지켜야 할 귀찮은 드레스코드였고 동시에 그가 최근 만나고 있는 여자의 취향이기도 하다. 그는 목을 옥죄는 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풀며 손목 시계를 보았다. 약속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여자는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곧 도착한 문자에는 십 분 정도 늦을거라는 말과 함께 미안하다는 단어가 적혀 있어서 할은 작게 욕설을 뱉는다. 초겨울의 도시는 아직 채 겨울에 익숙해지지 못한 행인들의 빨은 발걸음과 목깃을 귀까지 올린 채 웅크린 몸짓들이 가득하다. 추위를 잘 타지 않는 편인 할은 다른 이들과 다르게 허리를 뒤를 젖히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담배를 물었다. 지나가는 여자들이 노골적인 눈빛을 보냈지만 그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세상의 모든 유혹의 전부를 본 사람에게 그 정도는 뒤돌아볼 가치조차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서있던 도로 가장자리에 차 한 대가 섰다. 검은색의 값비싼 승용차다. 조금 있어 할이 들어가기로 예약해 놓았던 레스토랑의 매니저가 뛰어 나와 차 문을 열었다. 할 조던은 그 차에서 내린 남자를,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잘 알고 있었다.
얼마 전 있었던 웨인 저에서의 파티는 브루스 웨인을 향한 할 조던의 시선을 강제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마치 그 때 있었던 일이 꿈만 같을 정도로, 할 조던은 자신이 경험한 감정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동시에 인정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도덕적으로 일그러져있다. 그랬기에 할은 끝없이 자신으로 하여금 그 기억이 왜곡된 것이란 걸 인정하라 종용하고 있었으며 그의 판단을 돕기 위해 그 후로부터 여태껏 남자와 마주치게 되는 일을 회피하고 있었다.
그래, 할 조던은 도망쳤고 외면했으며 브루스 웨인을 피해왔다.
나약하고 미숙한 꼬맹이처럼 말이다.
할은 손가락 사이의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시선이 낮게 가라앉았다. 남자는 그가 기억하는 것처럼 완벽한 모습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남자는 마치 할을 그제서야 발견한 듯이 의식적으로 발걸음을 멈추며 약간의 미소와 함께 말했다. 말했다기 보다는 읊조렸다. 아니, 읊조리기 보다는 속삭였다. 겨울의 밤처럼 티없이 새까만 머리카락을 반듯하게 넘긴 남자는 배트맨도 아니었으며 브루스 웨인조차 아니었다. 할은 담배를 바닥에 떨어트려 발의 앞굽으로 불씨를 짓뭉갰다.
아아. 오랜만이네. 브루스.
제 목소리는 거끌하다. 조금 낭패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건 곧 눈 앞의 존재에 묻혀버리고 만다. 강한 데자뷰는 할이 여태껏 기억 속에 묻으려고하던 그 날 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할은 어째서 브루스 웨인이 저를 향해 그런 눈빛을 보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건 마치.
의외라고 생각했겠지.
브루스 웨인이 말했다. 칠흙같은 머리칼에 그처럼 검은 정장 그리고 그에 대조되는 피부가 창백하다. 이미 주변의 모든 시선을 사로잡은 남자는 그것에 익숙한 듯이 굴었고 그 행동에는 약간의 오만함과 타당한 권위감이 묻어났으나 누구도 그것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었다. 당연한 지배자의 것이었고 그를 제외한 모두는 남자에게 지배받아 마땅하기 때문이었다. 브루스는 이마 위로 흘러내려온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느릿하게, 눈꺼풀을 내려 감다가 다시 떴다. 할은 제 눈이 그 시선에 묶이는 것을 느끼며 간신히 웃었다.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기막힌 우연인데.
우연이란 건 없어.
남자가 몸을 기울이는 것과 함께 향수가 스쳤고 할은 뒤로 몸을 물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마디지고 단단한 손 끝이 마치 쌓인 눈을 털어 내리듯 할 조던의 코트 어깨자락을 스치곤 떨어졌다. 물론 떨어진 눈은 없었다. 할 조던은, 무려 길거리에서마저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남자와 함께 존재하는 모든 공간은 그의 영역 안에 들어가 버리고 만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브루스는 눈으로 웃었다.
피한다고 해결되는 건 없잖아. 안 그래?
브루스 웨인은 식당의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가 되어서야 할은 몸을 굽힌 채 구역질을 했다.
창녀같아.
할의 악받힌 말에 배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시선은 배트맨을 향한 채다.
모르겠어. 그것 뿐만은 아니잖아. 너도 알잖아?
할은 침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