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뱃 옴므파탈 3
안야함주의 그냥다주의
순식간에 주변이 얼어붙은 듯 서늘해졌다. 길지 않은 시선이 엉겼지만 찰나의 시간동안, 그건 마치 두 마리의 육식동물이 싸우는 것과 같았다. 기선제압. 신경전. 평상시에는 절대로 그들 사이에 있을 법한 징조가 아니었다. 원더우먼과 그린 랜턴이 이런 저질적인 정도로 본능적인 싸움을 한다는 것은 애초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랬기에 현실성이 없었고, 또 그만큼 치열하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다. 그들은 지배하고 군림하기 위한 알파였다. 하나의 먹이감을 사이에 두자 견제의 본능이 솟구치는 것이다.
다이애나는 할의 시선을 마주하다가 문득 입꼬리를 끌어 당겨 웃었다. 아름다운 얼굴이 그림자를 드리운 채 오만한 미소를 띄며 그에게 다가왔다. 여신과도 같은 모습이지만 소름돋을 정도로 파괴적이다. 할은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에 성적으로 끌리기는 커녕 본능적인 전투욕이 치밀어 올라 그것을 참아 내는 것만으로도 턱아귀에 힘을 주어야 했다. 그건 아마 다이애나 역시 마찬가지일테다.
꼭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이네. 그녀는 흥미로운 듯이 말했지만 그게 견제의 일종이란걸 할 조던이 모를리가 없다. 그 역시 느릿하게 웃으며 벽에 몸을 비스듬히 기댔다. 그 쪽이야말로. 심장 떨리는 눈빛인데? 할의 목소리에 스며든 빈정거림을 눈치챈 다이애나의 입술이 미묘하게 비틀렸지만 그녀는 곧 표정을 되찾으며 그에게 몸을 기울였다. 육감적인 몸매가 훅 다가오며 달큰한 향수와 화장품 내음이 풍겼지만 할은 그것에 진저리치는 자신을 발견한다. 다이애나는 벽에 손을 짚은 채 저보다 큰 할 조던의 몸을 덮치듯 했다. 돌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다이애나의 손 끝이 벽으로 파고 들었다. 그녀의 몸은 할 조던에 비해 작았으나 그 기백은 거대한 표범이 덮쳐 눌러 으르렁거리는 듯 해서, 할은 저도 모르게 긴장된 웃음으로 침을 삼켰다. 힘줄이 돋고 피가 머리로 솟구친다. 생리적인 흥분에 피가 빠르게 돌자 그들의 숨이 거칠어졌다. 다이애나의 웃는 입술이 바로 눈 앞에서 사납게 벌어졌다. 아직도 심장이 떨리나봐?
위협. 도발. 할은 힘이 들어가는 손을 애써 주먹쥐며 바지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한 번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뱉는다. 더 이상은 위험하다. 반지가 힘을 사용하고 싶어 안달을 내는 것이 느껴졌다. 아아 당신이 너무 매력적이라 죽을 거 같아. 그의 장난스런 대꾸에 다이애나는 한동안 시선을 마주하다가 벽을 짚은 손에서 힘을 풀었다. 끊어질 듯 팽팽하던 공기가 단번에 흐트러진다. 그녀는 가볍게 손을 털고는 등을 돌렸다. 거짓말 하는 남자는 매력 없어. 할은 그녀의 미끈한 뒷모습이 홀 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차가운 눈으로 지켜 보았다.
차가운 겨울 바람이 얼굴을 때리자 정신이 조금 드는 것도 같았다. 정원은 눈이 덮여 고요했고 간혹 분수대의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도망치듯 밖으로 나온 할 조던은 방금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다. 홀 안에 맴돌던 음침하고 질척한 기운이나 그 가운데서 제물이 되어 매혹적으로 웃던 브루스 웨인이나 저와 다이애나가 벌인 신경전까지. 그 어느 것도 현실성이 없어 마치 꿈을 꾸다 나온 듯 했다. 모두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자신 역시, 마찬가지다. 할은 생채기가 잔뜩 난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 보다가 세게 쥐었다.
신경이 곤두선 귀에 인기척이 들린다. 반사적으로 눈을 돌리니 한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홀로 서서 전화기를 귀에 대고 있는 건, 바로 전까지 그가 생각하고 있던 남자였다. 새하얀 주변을 배경으로 조각같은 얼굴을 기울인 채 눈을 내려 뜬 브루스 웨인은 이질적이다. 그 곳에 있으면 안될 사람처럼, 주변과 동화되어 그림과도 같았지만 그 정도로 현실성이 부재되어 있는 것이다.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며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손동작과, 창백하게 핏기가 가신 얇은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뿌연 김에 추운 것처럼 어깨를 조금 움츠리는 것까지. 할 조던은 시선 하나 떼지 않고 그 모든 동작을 주시한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하는 건 시도에 불과하다. 남자가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방금 전까지의 잡다한 모든 생각이 순식간에 희미해지기 때문이었다. 전화를 마친 브루스 웨인은 몸을 돌리다가 할 조던을 발견한다. 발걸음을 멈춰 선 채, 감정이 엿보이지 않는 시선으로 그를 마주본다.
다가갈까. 말까.
그들 사이의 오 미터가 녹아내리는 듯 했다. 할은 남자에게 다가가고 싶었지만 동시에 물러나고도 싶었다. 위험하다. 하지만 정확히 무엇이 그를 위협하는지 알기 힘들다. 늘 마주치곤 했던 남자가 오늘따라 정말로 다른 사람과도 같아서, 할 조던은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움직이지 못한다. 하지만 제 시선은 담담하겠지. 먼저 발을 뗀 쪽은 브루스 웨인이다. 그는 한 걸음씩 천천히 눈을 밟으며 그에게로 다가왔다. 걸음 한 폭 마저 완벽하다는 생각이 들자 할 조던은 제가 진심 미쳤다고 생각한다. 짙고 길게 빠진 눈매 안의 시리도록 파란 눈동자가 바로 앞까지 다가왔을 때 할은 저도 모르게 그를 제지하듯 손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남자는 되려 그 손을 잡았다. 차가운 손끝이 천천히 맞닿자 소름이 돋았다. 브루스 웨인은 할 조던의 손바닥이 위로 향하게끔 돌렸다. 채 아물지 않은 생채기들이 드러났다.
다쳤네.
낮은 목소리가 속삭이듯 말하자 할 조던은 마지막 이성까지 멀어지는 기분이 되었다. 속눈썹이 고르게 박힌 눈매와 단아한 이가 드러나는 얇은 입술까지 아까 전 독하게 풍기던 페로몬은 어디로 간 채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유혹을 한다. 고고하고 권위적이게 사람들을 제 밑에서 부리던 브루스 웨인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자칫하면 부서질 것처럼 아름다운 모습이 되어 있다.
아아. 그는 정말 어떻게 하면 상대를 홀려낼 수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이것 역시 그의 계획적인 도발이란 것을 모를리가 없다. 알면서도 할 조던은 손을 뻗는 것을 망설이지 못한다. 차갑게 언 뺨에 손을 가져다 대자 남자가 시선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깔며, 저의 손바닥 안으로 슬며시 뺨을 들이대었다. 할은 홀린 듯 그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움푹 들어간 단단한 허리 선이 휘어지며 부드럽게 그의 안으로 끌려 들어온다. 제 팔을 그러쥐는 손아귀에 반항의 기미는 없다. 흐트러지는 숨. 흔들리는 머리칼. 저를 바라보는 시선. 접촉.
가질 수 없는 것을 손에 넣은 쾌감.
브루스 웨인은 닿을 듯한 입술을 스쳐지나 할 조던의 귓가에 속삭였다.
쉬운 남자는 재미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