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뱃콘 in my veins 5
브루스 웨인은 레스토랑에서 나오다가 비가 부슬거리며 내리는 것을 보았다. 가볍게 흩뿌리는 정도였다. 그는 무언가를 회상하듯이 잠시 먹구름이 옅게 낀 하늘을 올려다 보다가 그의 옆에서 여자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비를 맞으면 화장이 지워질 거라며 칭얼거리는 여자에게 웃어보인 그는 대충 둘러댔다. 함께 비를 맞는 로맨틱한 장면을 겪어보고 싶었다는 식으로 말했던 것 같다. 그 말에 여자의 표정이 부끄러움 가득한 홍조로 물드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브루스의 비싼 정장 상의를 우산 삼아 길을 조금 걸었다. 여자가 깔깔거렸다. 커스텀 메이드 된 랄프 로렌을 우산처럼 쓸 줄 몰랐다 한다. 브루스는 그녀의 경박함을 그저 웃어 넘겼다. 어느 정도 걷다가 그는 갑자기 멈춰 서서 택시를 잡았다. 그리고 여자를 안으로 타도록 리드하는 손짓에 그녀는 영문도 모르고 올라탔다. 브루스는 창문 너머로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갑자기 할 일이 생각나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자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택시는 멀어졌다. 사라지는 택시를 눈으로 쫓다가 그는 고개를 돌렸다.
어둔 골목길 안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남자라고 하기엔 부족한 십대로 보이는 소년이다. 검은 머리카락에 푸른 눈을 가진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단단한 얼굴과 몸. 하지만 저를 잡아 먹을듯한 길들여지지 않은 맹수의 시선.
코너 켄트는 제 앞에 선 브루스 웨인을 마주했다. 빗물에 젖어 들어가는 남자의 머리칼이 얼굴에 들러붙고 셔츠 안의 몸의 굴곡이 드러난다. 감정을 알 수 없는 표정없는 얼굴로 브루스 웨인은 그를 스쳐 지나가려 했지만 팔목이 잡혔다. 길에 사람은 몇 없었다. 하지만 남자와 소년이 나란히 비를 맞으며 서 있는 건 시선을 끌기 마련이다. 코너 켄트의 손을 놓게 하며 브루스는 걸었고 코너는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들은 브루스 웨인의 차에 올라 탈 때까지 아무런 대화가 없었다.
운전석에 앉자마자 남자는 비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낮은 한숨을 내쉰다. 고급 시트가 물로 젖어 들어갔다. 빗물로 인해 몸이 식었는지 손 끝이 조금 떨리는 게 보인다. 브루스는 반 쯤은 화가 나고 반 쯤은 초탈한 말투로 말한다. 너 시크릿 아이덴티티가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거지? 애들 장난으로 보이나? 그의 말에 코너는 입을 다물고 있다가 한 손을 뻗어 남자의 떨리는 손을 잡았다. 갑작스런 행동에 그의 몸이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보고싶어서 왔어요. 코너는 그 말을 마치 씹어 뱉는 것처럼 말했다.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는데 여자와 있는 걸 보니. 참을수가 없어서, 라는 말은 입술 안으로 숨과 함께 말려 들어간다. 코너 켄트는 자신이 느끼는 것을 말하는 데에 서툴렀다. 표현의 문제다. 정작 그 말을 들은 브루스는 웃지도 않고 화를 내지도 않는다. 그것에 초조해질 무렵 그가 낮게 말한다. 네가 뭔가 착각하고 있나본데, 연인 놀음을 하고 싶다면 네 또래의 여자아이를 찾아보는 게 나을 거다.
별 것 아닌 말인데도 코너 켄트는 심장이 떨어지는 것만 같다.
어째서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브루스 웨인이 그에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을까. 그가 저에게 보였던 미약한 친절과 살의 맞부대낌이나 그 어느 것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는 것인가. 정말 코너 켄트가 왜 브루스 웨인과 관계하고 있는 것인지 그가 모르는 것인가. 그래서 약간의 이성을 붙잡고 코너는 되묻는다. 그거 진심으로 하는 소리에요? 고개를 돌려 남자를 본 코너 켄트는 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본다.
그래. 그가 진심으로 저에게 그런 소리를 한 거라면 저렇게 갈등하는 얼굴을 할 리가 없었다.
사실 코너 켄트가 알고 있는 것처럼 브루스 웨인 역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외로움과 공허함은 서로 닮아 있다는 걸 말이다. 그랬기에 이 위태롭고 어울리지 않는 관계를 이어나가는 거다. 다른 점이라면 코너 켄트는 지독하게 솔직했고 남자는 단순히 생각이 너무 많은 것, 그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남자가 마음에 없는 말로 코너 켄트에게 상처를 주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 또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들은 자주 만나는 편이 아니었다. 그럴 접점도 없었거니와 남자가 그를 먼저 찾는 경우는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만약 코너 켄트가 그에게 손을 뻗는 것을 그만 두었다면 그들의 관계는 진작 흐지부지 끝난지 오래였을 것이다. 남자의 그런 필요로 하는듯 만듯 한 반응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저를 받아 주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생각했다. 간혹 팀이라던가 웨인 저의 집사의 눈을 피해 코너 켄트는 브루스 웨인을 찾아왔다. 그럴 때면 그는 배트맨이 아닌 브루스 웨인으로서 그를 맞는다. 가면을 쓰지 않은 남자는 배트맨이면서도 또 다르다. 그의 몸을 그대로 보여주고 솔직하게 반응한다. 좋은 부분을 본인의 입으로 직접 말하기도 하고 최고조로 달아오를 때면 먼저 저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기도 했다. 코너는 그것이 좋았다. 마치 저 혼자서만 남자를 필요로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잠시나마 잊혀지기 때문이다. 남자는 그가 부드럽게 만지는 것 보다는 거친 쪽을 좋아했다. 부드럽게 만질 때마다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기 때문에 코너는 그런 얼굴이 보기 싫어서라도 심술궂은 마음이 들지 않는 이상 잘 하지 않는다. 정신이 빠질 정도로 거칠게 허리를 흔들면 자신의 손등을 입에 물었다. 그러면 코너는 남자의 허벅다리를 더욱 받쳐 올려 몸을 숙여서 그의 입가에 자신의 어깨를 대어 줄 것이다. 그럼 남자는 아무리 세게 물어 뜯어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코너 켄트의 어깨에 이를 박으며 신음을 죽인다. 코너는 남자의 정수리부터 발가락 끝까지의 전신에서 그가 좋아하는 곳을 모르는 부분이 없다. 그의 몸으로 섹스를 배웠고 남자를 배웠기 때문이다. 브루스 웨인은 그가 여자들을 애태우는 것처럼 상대를 안달나게 만드는 방법을 잘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코너를 흥분시키는 모든 요소가 의도적인 것은 아닌 듯 했다. 코너는 그의 천박하지 않게 야한 모습이 좋았다.
한 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다면 관계 후 남자가 바로 침대를 나가 버린다는 것이다. 그건 아무리 코너 켄트가 집요하게 그를 괴롭혀 진을 빼놓는다 하더라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도 남자는 덜덜 떨리는 다리를 내려 침대에서 내려가려 한다. 코너는 손을 뻗어 그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남자는 풀어나려는 듯이 몸을 비틀었고 코너는 그를 더 세게 안았다. 잠깐만 이러고 있어줘요. 그렇게 말하자 브루스 웨인은 움직이는 것을 멈추더니 몸에서 힘을 뺐다. 코너는 그의 목덜미에 이마를 대었다. 가슴에 닿는 남자의 등으로부터 일정하게 뛰는 심박이 들렸다. 코너 켄트는 어린 아이처럼 욕심이 많다. 그는 남자를 통해서 체념과 만족 역시 배웠다. 그래서 이 정도 뿐이라 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중요한 임무가 틴타이탄즈에게 주어졌다. 비밀 조직의 내부에 잠입해서 데이터와 실험 샘플을 빼돌려 와야했다. 그들이 연구 및 개발하고 있는 무기에 대해 자세한 것을 알아내고 그에 대처를 하기 위해서다. 잠입은 쉬웠다. 그건 그들이 잘 하는 것들 중 하나였다. 조용히 메인 시스템을 해킹해서 자료를 찾아내는 것도 로빈의 실력으로는 식은 죽 먹기였다. 슈퍼보이는 그 앞에서 기분 나쁘게 끓어 오르는 초록색의 물질을 보았다. 사실 그는 크립토나이트 무기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로 인해 이번 임무에서 빠질 뻔 했지만 기어코 고집을 부려 로빈을 따라왔다. 로빈은 슈퍼보이를 걱정스럽게 한 번 돌아보았지만 그 뿐이었다. 로빈은 눈치가 빠르고 똑똑하다. 이미 어쩔수 없게 된 이상 친구가 싫어할 만한 행동은 하지 않는다. 그들은 최대한 눈에 띄지 않고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리거들 역시 건물의 다른 부분에 잠입하여 그들의 임무를 하고 있을 터였다. 사실 그것이 코너가 억지로 따라온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배트맨이 있었다. 잠시 상념에 빠진 슈퍼보이를 다시 현실로 끌어들인 건 로빈이었다. 배트맨이 신호를 보내왔어. 가자. 슈퍼보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로빈과 움직였다. 그들이 재빨리 합류 지점으로 향할 때 어디선가 폭발음이 울렸고 그와 동시에 경보가 울렸다. 천장으로부터 부서진 돌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그들은 서로를 한 번 쳐다보고 뛰었다. 건물 안에는 그들과 배트맨, 슈퍼맨이 전부였고 나머지는 밖에서 그들을 보조하고 있는 마샨과 플래시 등 다른 멤버들이 있었다. 로빈은 빈번히 배트맨과 연결을 해보려 하지만 실패했다. 폭발음이 다시 울렸다. 슈퍼보이는 달리던 것을 멈추고 폭발음이 들린 쪽을 노려보다가 옆으로 주먹을 세게 휘둘렀다.
거대한 진동과 함께 건물 벽에 거미줄과 같은 금이 퍼져나가더니 한 면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로빈은 기겁했고 슈퍼보이는 그가 다치지 않도록 몸으로 감쌌다. 아수라장이 지나가자 그는 몸 위에 떨어진 돌덩어리를 털어 내며 일어섰다. 무너진 돌에 깔린 적들이 간간히 보인다. 로빈이 제정신이냐고 소리치는 것을 뒤로하고 슈퍼보이는 주변을 둘러 보았다. 그는 곧 공중에 떠있는 슈퍼맨과 그 밑에서 적을 대치하고 있는 배트맨을 발견한다. 코너는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 곳으로 달려갔다. 뒤에서 로빈이 그를 불렀지만 들리지 않았다. 그는 뒤에서 배트맨을 공격하려는 적을 때려 눕히고 대치한다. 슈퍼맨이 그에게 애매한 시선을 보내다 곧 이 곳은 그들이 맡을 테니 로빈과 함께 빠져나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슈퍼보이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배트맨을 향해 총을 쏘는 적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뒤에서 배트맨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하는 거냐 코너 켄트. 남자가 화가 난다 해도 어쩔수가 없다. 명령을 복종하지 못한 걸로 추궁을 당한다 해도 코너 켄트로써는 그저 가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갑자기 어디선가 초록색 광선이 뿜어져 나왔다. 옆에서 슈퍼맨이 쿵 하는 무거운 소리와 함께 추락했다.
순식간이었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은 없다. 슈퍼보이는 무너진 돌덩이를 들어올려 광선이 쏘아진 방향으로 던졌다.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는 또 다른 적이 녹색의 무기를 그에게 들이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사방을 물들이는 환한 녹색의 섬광에 코너는 몸에서 갑작스럽게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다. 그는 한 쪽 무릎을 꿇었다. 그 때 옆에서 검은 인영이 튀어나와 그에게 쏘아지는 녹색 빛을 가로막았다. 코너는 시선을 남자의 등을 본다. 배트맨이다.
정작 그를 도우려고 한 건 저였는데 되려 도움을 받으려니 약간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 상황에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결국 몇 일 간의 근신을 받았다. 하지만 별로 상관은 없었다. 코너는 웨인 저의 안으로 창문을 통해 들어갔다. 브루스 웨인의 방에 난 창은 거의 항상 열려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방에 슈퍼맨이 간혹 방문을 하곤 한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으나 그것 역시, 마찬가지로, 별로 상관은 없었다. 코너는 등 뒤에서 받는 달빛으로 자신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는 걸 본다. 조용한 방 안에는 침대에 누운 남자의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팔과 어깨에 붕대를 감은 브루스 웨인은 평소보다 약간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눈을 내려감고 있다. 그의 상처는 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코너는 그의 불찰로 인해 남자가 다쳤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가 자신의 앞을 막아 서준 것은 좋았는데 막상 다친 그를 보고 있으니 눈 앞이 아득해진다. 코너는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한동안 계속 그의 얼굴을 보고 앉았다. 어느 순간 자는 줄 알았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셈이지. 약간 탁하게 잠긴 목소리에 코너는 그가 남자를 깨웠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가지런히 놓인 남자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치듯이 덮고 깨어질새라 매만졌다. 브루스 웨인은 눈을 떴지만 코너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어둔 음영이 남자의 얼굴 선을 따라 옆으로 드리워진다. 코너는 그의 창백한 피부나 서늘한 푸른 눈이 지독하게 어둠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미안해요. 라고 그가 말하자 남자는 다시 눈을 내려 감았다. 한동안 말이 없던 남자가 물었다. 나를 사랑이라도 하는거냐. 그 감정 하나 실리지 않은 질문은 동시에 질문이 아니어서 코너 켄트는 저도 모르게 조금 웃어버리고 만다. 사랑이라도 하는 거냐니. 그는 남자의 손을 들어올려 그 위에 입술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사랑... 이게 사랑일리 없잖아요. 남자가 그를 돌아본다. 코너는 조금 울 것처럼 웃었다. 이 감정이 고작 사랑일리가 없잖아요.
스몰빌은 여느 때나 그러하듯 평온했다.
여름의 계절로 접어들어가 장미에 봉오리가 맺혔고 태양은 좀 더 따사로워졌다. 코너는 자신의 발치에서 크립토가 따라 오도록 내버려둔 채 집 주변을 걸었다. 몇 일 동안 스몰빌을 벗어나지 않았다. 남자가 보고싶긴 했으나 스몰빌이 그에게 가져다 주는 평안함은 남자의 존재가 그에게 부여하는 종류의 편안함과는 또 달랐다. 그리고 코너는 둘 다 좋아했고 말이다. 그는 숨을 한 가득 들이쉬었다가 잠깐 멈추고, 천천히 내쉬었다. 폐 안으로 가득히 밀려 들어오는 따듯한 공기가 기분이 좋다. 코너 켄트는 최근 수 많은 종류의 감정과 더불어 자제력을 배웠다. 그는 자신에게 약간의 휴식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감이 굉장히 어른스럽게 들려서 코너는 조금 웃었다. 마사는 그에게 최근 들어 표현이 다채로워졌다고 했다. 빠르게 모든 것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고도 했다. 마치 갓 태어난 아이가 스펀지처럼 지식을 빨아들이는 것 같다고 그녀는 비유했다. 코너는 그 뜻을 정확하게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다. 칭찬받는 건 언제나 기분이 좋다.
한 번 남자에게 말을 하고 나자 감정이 고요했다. 그건 편안한 고요함이었다. 마음에 얹고 있던 큰 짐을 하나 덜어낸 듯한 기분이었다. 최근 여러가지 더러운 감정으로 얽혀 있던 머릿속이 멀끔하게 정리된 것 같았다. 코너는 손을 뻗어 이제 막 피기 시작하는 장미를 꺾었다. 그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모른다. 겪어보지 못했고 그 정의가 무엇인지 애매하다. 하지만 그는 남자와 저 사이에 놓인 감정의 선상이 사랑이 아니라는 걸 알 수는 있었다. 그는 남자가 그의 앞을 막으며 자신을 지키던 뒷모습을 떠올리고 조금 미소지었다. 서로를 아낀다거나, 안고 싶다거나, 목적 없는 집착이라던가 혹은 질투라던가. 그 전부는 서로의 안에 놓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서였다는걸, 코너는 알았다. 남자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코너 켄트는 그 고상한 감정을 가늠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그랬기에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 고작 사랑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도 강한 열망이다.
코너. 중저음의 듣기 좋은 남자의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코너는 장미꽃잎을 뜯던 행위를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클락 켄트가 평상복을 입은 채 서 있었다. 크립토가 꼬리를 흔들며 그를 맞았다. 코너는 클락을 향해 인사했다. 예전보다는 어색한 감이 눈에 띄게 줄어든 코너의 모습에 클락 역시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고 클락 켄트의 얼굴은 다시 어딘가 굳어졌다. 어색함 때문이 아니었다. 클락 켄트는 슈퍼맨의 얼굴을 지으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와 내가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코너.
시간은 잠잠하게 흘렀다. 여름이 조금 더 깊어질 정도가 되었을 때 그다지 많은 것은 바뀌지 않았다. 단지 장미가 만개했고, 날이 더워졌으며, 장마철에 들어갈 기미가 보이고 있었고, 그들을 위협하던 조직은 거의 붕괴되다 시피 했다. 그 사이에 리거들과 틴타이탄즈는 임무를 해결해 나가기도 했고 그들에게 주어지는 약간의 휴식을 즐기기도 했다. 여름이 되어서 그런지 분위기가 많이 느슨해진 감이 있었지만 그것에 뭐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코너는 여전히 브루스 웨인과 만났다. 그들은 간혹 만나 별 의미없는 짧은 대화를 했고, 섹스를 했다. 예전과 달라진 점이라면 브루스 웨인이 코너 켄트가 하는 말을 무시하는 횟수가 적어졌다거나, 섹스를 하고 나서 침대에 남아있는 경우가 생겼다던가, 혹은 그들이 만날 때 섹스를 하지 않는 날도 있었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코너는 그를 안지 않는걸로 인해 갈증을 느끼거나 하는 경우가 줄었다. 그저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나마 좋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자는 그의 변화에 대해, 혹은 저 자신의 변화에 대해 아무런 말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건 어찌보면 이상한 조합이었다. 성인의 남자와 그보다 한참은 어린 소년이 별 뜻없는 말을 주고 받다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헤어지고 하는 것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코너가 남자와의 섹스를 더이상 즐기지 않았다는 건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브루스 웨인을 향해 성욕이 일었고 그가 제 밑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벅찼다. 하지만 예전처럼 그의 몸이 부서질것처럼 거칠게 안지는 않았다. 남자 역시 처음에는 주저하긴 했으나, 그의 어리숙하고 자상한 움직임을 받아들였다. 그들 사이에는 어떠한 꾸밈도 없었다. 코너가 그에게 마치 연인같은 분위기라고 장난처럼 말했을 때 브루스는 웃었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코너 켄트 역시 그들의 관계가 연인같은 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그는 그런 관계가 좋았다.
저스티스 리그가 얼마 전에 소탕한 조직이 개발하고 있던 물건은 전부 회수되어 소멸되었다. 크립토나이트의 힘은 크립토니안 뿐만이 아니라 보통 사람에게까지 그 영향이 미칠수 있었다. 개발 중이었던 무기들은 완전한 개발이 되기 전에 멈춰질 수 있었기에 소멸이 가능했다.
코너는 그 사건이 그렇게 덮어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어느 날 그가 웨인 저로 찾아왔을 때 클락 켄트와 브루스 웨인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고 코너는 몸을 숨기고 그들을 엿들었다. 브루스의 목소리는 화가 난 표시가 역력했다. 어째서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거지? 브루스의 날 선 목소리에 클락이 비교적 차분하게 대답한다. 아니 그게 유일한 방법이야. 그들이 개발하던 또 다른 무기는 인간이, 아니. 정정하지. 크립토니안이 아닌 다른 존재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범위야. 코너 켄트는 그의 말을 듣자 그들이 무엇에 관해 이야기하는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칼엘이 스몰빌에서 그에게 했던 말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브루스 웨인은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 클락, 와치타워를 지은 게 누구라고 생각하는거지? 자네는 지금 모두를 과소평가하고있어. 아니면 본인을 과대평가 하는 건가? 어느쪽이던 자네 말은 듣지 않은걸로 하지.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그렇게 말한 브루스 웨인이 걸어가 버리는 것과 동시에 그를 잡으려 하던 클락 켄트는 입을 다물고 등을 돌렸다. 그래 브루스, 자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그리고 슈퍼맨의 모습을 한 클락 켄트가 창문을 넘어 날아갔다. 코너는 그가 점처럼 멀어졌을 때가 되어서야 브루스 웨인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코너가 들어오자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남자가 그를 보았다. 다 들었어요 라고 말하는 코너에 남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클락은 중요한 존재다. 그가 없는 리그는 예전같지 않을 테지. 브루스가 그렇게 읊조렸다. 코너는 그가 굉장히 순화해서 말하고 있긴 하지만 그의 안에서 몰아치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코너는 손을 들어 남자의 등을 가만히 쓸며 말했다. 그리고 그는 당신의 친구이기도 하죠. 그 말에 브루스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착잡해 보이는 남자에게 코너는 슈퍼맨은 괜찮을 거라고 말해 주었다.
딱히 인사를 할 사람은 많이 없었다. 시간은 밤이었고 그 애매한 시간대에는 누군가를 만날 여유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코너는 팀과 그 날 오후를 함께 보냈다. 평상시에 그들이 그러했듯 함께 패스트푸드 음식을 먹고 쓰잘데 없는 이야기를 했다. 그는 팀이 그의 학교라던가 임무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전부 들어주었다. 그리고 헤어지기 전에 그를 한 번 포옹했다. 팀은 이상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그 역시 포옹해왔다. 저녁은 스몰빌에서 보냈다. 클락 켄트 역시 함께 한 식탁은 조촐했지만 따듯했다. 마사는 코너가 문득 고맙다 고 인사하는 것에 놀랐으나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그저 웃어주었다. 그의 발 밑에서 크립토가 낑낑거렸으나 무시했다. 코너는 스몰빌이 정말 좋았다. 켄트 가의 이름을 받은 것 역시 좋았다. 마사는 코너가 짧다면 짧은 시간 안에 많이 성숙했다고 말했다. 식사가 끝난 후 모두 잠이 들을 무렵 코너는 밖으로 나와 슈퍼맨의 모습으로 서있는 클락 켄트를 마주했다. 그들은 만날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헤어졌다. 코너는 웨인 저로 향했다. 빗방울이 하나씩 떨어지고 있었다.
조용한 웨인 저는 그가 그곳을 들락거리기 시작한 처음부터 여태까지 똑같은 모습이다. 마치 평생 변하지 않을 것만 같은 스몰빌의 집처럼 말이다. 익숙하게 창문을 넘어 들어간 코너는 남자의 앞에 섰다.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 수트를 입은 채 한 손에는 카울을 들고 있었다. 막 패트롤을 나가려고 했나 보다. 그는 빗물에 젖은 코너가 들어오자 그를 한 번 슬쩍 보더니 카울을 쓰려 했다. 하지만 코너가 그 팔을 저지하자 브루스는 그의 푸른 눈에 의아함을 띄웠다. 코너는 양 손으로 그의 얼굴을 잡고 저보다 키가 조금 더 큰 남자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공중에 조금 뜬 채로 키스했다. 처음에 브루스 웨인은 코너의 팔을 잡고 버티려 했으나 곧 그의 입맞춤이 굉장히 진지하다는 것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힘을 풀었다. 달래듯이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 코너는 입을 떼고 남자를 보았다. 저를 마주하는 남자의 시선은 한없이 곧다. 코너는 자신의 외로움을 공유할 수 있던 사람이 브루스 웨인이었다는 것에 아쉬움이 없었다. 그가 저에게 조금이나마 마음을 열어준 것이 고마웠다.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기에 코너는 아직 너무 어리다. 그래서 그는 그저, 그가 늘 그래왔던 것처럼 말했다. 보고싶어서 왔어요. 브루스는 그를 물끄러미 보다 숨이 새어나가듯이 웃었다. 그 작은 웃음 하나에 마음이 녹는다는 걸 그는 모를테다. 그는 마주 웃었다.
코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창문을 넘어 웨인 저에서 나왔다. 시간이 되었다.
칠흙같은 하늘의 귀퉁이에 녹색의 섬광이 일었다.
고담의 밤거리에서 배트맨은 그 드넓은 섬광의 파동에 고개를 들었다. 그의 옆에서 하늘을 올려다 보던 로빈이 물었다. 저게 뭐죠? 그 물음에 배트맨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와치타워는 고요했다. 모든 우주가 고요하듯이 말이다.
브루스 웨인은 의자에 앉은 채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우주를 바라 보았다. 언제를 보아도 익숙하면서 또 익숙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수없이 반짝이는 별이라던가 지구라던가 혹은 그 어떠한 은하에 속한 어떤 별이라도 저만의 방법으로 작별을 고할 수 있다. 단지 그게 언제인지 모를 뿐이다. 하나의 불이 꺼지면 또 다른 불이 그 잿더미 속에서 솟아나는 것처럼 말이다. 브루스는 여러 죽음을 보았고 또 새로운 삶이 태어나는 것도 보았다. 하지만 그것에 영원히 익숙해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건 익숙해지기에는 너무나도 경이롭고 또 슬픈 모습이다. 그는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투명한 장막 너머로 비춰지는 소년은 눈을 감은 채 평온한 잠에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 그가 들어있는 마치 관처럼 생긴 생명유지장치가 낮은 울림을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브루스는 그의 위를 덮고 있는 강화유리 위를 손으로 쓸었다. 금방이라도 눈을 뜰 것만 같았다. 코너 켄트는 언제나 브루스 웨인이 그를 돌아보기 전에 이미 그를 바라보고 있고는 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반응하곤 했다. 거짓 없는 푸른 눈이나 순수한 만큼 무서울 정도로 직선적이던 그 감정의 부딪힘까지. 브루스는 그 버거운 감정을 떠올린다. 그것은 가슴이 아프다던가, 혹은 씁쓸하다거나 하는 설명은 어울리지 않는 기분이다. 단지, 조금 허전했다.
그래. 허전했다.
그는 어둑하게 저녁놀이 지고 있는 도시의 거리를 걸었다. 날씨가 눅눅한게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브루스는 비가 오는 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너무 많은 기억이 몰려 있어서였다. 거리의 인파에 간혹 어깨가 부딪히거나 했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고 걸었다. 벌써 여름도 끝나간다. 시간 참 빨리도 간다. 곧 얼마 있지 않아 빗방울이 한 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뛰기 시작했지만 브루스 웨인은 계속해서 걸었다. 그러다 그는 비가 무섭게 쏟아 붓자 한 처마 밑으로 피했다. 온 몸이 젖었지만 되려 여름의 열기를 날려 줄 정도로 시원했다. 그는 물기가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비 내리는 거리를 보았다. 왠지 청승맞다고 생각했다. 간혹 우산이 없는 사람들이 그의 옆으로 들어와 비를 피하다 또 달려나가곤 했다. 브루스는 거리가 한산해질 때까지 계속 그 곳에 서있었다. 그의 옆에 누군가가 또 비를 피하러 들어왔다. 하늘이 깜깜해지자 네온사인들이 하나씩 밝혀지고 있었다.
비가 엄청 내리네요. 그의 옆에 선 사람이 말을 걸었다. 브루스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러게요 하고 대답했다. 갑작스런 폭우였는지 빗줄기가 서서히 약해지고 있다. 옆의 남자가 물었다. 우산이 없으신가봐요? 그 질문에 우산이 있었으면 애초에 이 곳에 왜 들어왔겠냐고 말하고 싶었다. 오늘 비가 내릴 줄 몰랐어요. 잠시 후 옆에서 우산 펴지는 소리가 났다. 우산도 있는 사람이 구지 처마 밑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곧 남자는 브루스의 머리 위로 우산을 기울인다. 남자가 어색한 듯이 목을 소리내서 가다듬는 게 들렸다.
비도 오는데 남자들끼리 술 한잔 할래요? 그쪽이나 나나 처량해보여서.
브루스는 눈을 내려감았다. 따듯하고 익숙한 빛이다. 비가 여전히 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