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크파이크 oblitus 2
커크x파이크x칸
Oblitus
-2-
- 넌 그 때 그렇게 나오면 안 되는 거였어.
그렇게 상담실을 나가면 안 되는 거였다고. 한숨과 함께 다시 한 번 되풀이 해서 말하는 레너드 맥코이의 목소리는 반 쯤은 체념의 기색을 담고 있다. 또 한숨 쉬게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커크 역시 그렇게 무른 반응을 보여 줄 생각은 없었다. 그가 대답을 할 겨를도 없이 맥코이의 목소리가 줄줄이 이어 말했다. 그의 병원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가 아는 사람이었다 부터 시작해서 닥터 스팍은 유명하고 실력 있는 사람이라 약속을 잡는 것도 힘든 편이라는 것까지. 알게 뭐야, 라고 커크는 생각했다. 카운슬링 시간에 지켜야 하는 예절에 대해 배운 적은 없다. 상담에 대한 비용 역시 만만치 않았는지 맥코이는 '그게 대체 1분에 얼마 짜리 만남이었는지 알고는 있냐'는 식의 언급도 몇 번 스치듯이 흘렸다. 커크는 연신 쏟아져 나오는 맥코이의 한탄을 가장한 잔소리가 꽤 길어질 것을 느끼고 그걸 반 쯤 흘려 들으며 핸드폰을 스피커로 연결했다. 그리고 차 내부에 맥코이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는 것에 미간을 찌푸리곤 볼륨을 낮추었다. 그는 핸들을 부드럽게 돌리며 창 밖을 내다 보았다. 아이오와로 향하는 국도를 따라 건조한 평야가 펼쳐지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짐 커크가 애초부터 상담에 진지한 자세로 임하지 않을 거라는 건 맥코이 역시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제 성의를 생각해 커크가 조금이나마 상담받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할 거라 예상하기에 맥코이는 짐 커크라는 사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짐작한 대로 커크는 자신이 그 상담에 간 것만 하더라도 대단한 일이라며 마치 선심이라도 쓴 것처럼 내심 생각 했었다고 해야겠다. 커크는 그렇게 간혹 이상한 부분에서, 특히나 자신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묘하게 자존심을 세우거나 고집 센 면모를 보여주곤 했다. 정신 상담이라니, 처음 맥코이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엔 배를 잡고 낄낄거리며 눈물 날 정도로 웃었다. 차라리 휴가를 내고 집에서 요양을 하라거나 다른 나라에 가서 몇 달 간 지내고 오라거나, 심지어 필라테스를 해보란 말을 하는 게 더 낫지 않냐고 놀리듯 비아냥 거렸던 저였다. 하지만 맥코이는 근 오 년 동안 항시 진지한 표정으로 응수했고 결국 그 끈기에 두 손을 든 쪽은 커크였다. 짐 커크는 고집스러웠으나 맥코이 역시 지치지도 않고 완강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맥코이는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았으나 은연 중에 짐 커크가 맨해튼에 익숙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미 한 곳을 떠난 이상 다른 곳에서나마 정착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는 커크의 주기적인 침체기를 치료하지 않는 한 그건 이루어지기 힘들 거라 보았다. 커크의 입장으로서는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이해와 실천은 다른 이야기였다.
검은 색 신형 랜드로버는 부드러운 울림을 내며 아스팔트를 굴렀다. 한 손으로만 핸들을 쥐고 있던 커크는 운전석 쪽의 창문을 끝까지 내리고선 틀에 팔을 기대었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으로부터 차가운 겨울 바람이 밀려 들어 뺨에 부딪혔다. 차갑고, 또 따듯했다. 아이오와로 가는 길은 그러했다. 도로와 모든 것이 그를 몸 시리도록 앓게 만들었고 동시에 명치를 부드럽게 어루는 것처럼 포용적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기에 그러한 것일테다. 그가 자신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맥코이는 그래서 어찌되었든 간에, 라는 말을 시작으로 주제를 돌린다.
- 상담이 별로였나보군.
그렇게 말하는 맥코이에 커크는 잠시 입을 다물다가, 그래 별로였어. 라고 대답했다. 그는 막연하게 닥터 스팍을 떠올리곤 약간의 짜증이 치미는 걸 느낀다. 그의 외모, 말투, 행동 그 모든 걸 떠나서 만약 상담이라는 것이 항상 스팍이 행했던 식으로 진행되는 거라면 정말 끔찍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겨우 몇 마디 나누었다고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이 구는 태도에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 조차도 모르는 나의 내면 깊숙한 부분이라. 젊은 의사는 그 특유의 단호한 어투로, 정말 당연하다는 듯 그의 내면을 '치료'해 줄 수 있는 것처럼 말했다. 짐 커크가 받고 있는 무의식 속의 통증까지 그가 손을 뻗을 수 있단 말은 자기보호가 강한 커크 저에게 있어선 위협적이었고 또 협박적이었다. 적어도 그 누구에게도 완전히 속내의 모든 것까지 보여준 적이 없는 커크의 귀에는 그렇게 들려왔다. 스팍은 열쇠를 제시했고 커크는 그걸 거부했다. 한낱 치료라는 이름으로 그의 모든 걸 들춰내고 무너트리려는 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커크는,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온 몸의 가시를 세운 채, 위협을 느끼며.
맥코이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는 것으로 인해 인간이 얼마나 큰 상처를 받을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상담 시간에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에 대해 묻기 보다는 다른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 어디 쯤 가고 있어?
"이제 포트 웨인이야."
- 시카고에서 자고 갈 생각인가? 차라리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게 나았을텐데.
스피커로 맥코이가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맨해튼에서 오하이오 주 까지는 거의 18시간 거리였다. 미국의 반을 횡단해야 하는 거리였기에 쉽게 운전해서 갈 만한 거리라고는 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아직 11월이라고는 하나 겨울, 곧 있으면 눈이 내릴 날씨다. 아이오와는 맨해튼보다 기온이 낮아 아마 커크가 도착했을 때에는 눈이 내릴지도 몰랐다. 엔진이 언다거나 기름값이 더 든다거나 하는 부가적인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 커크는 그 전에 말했다.
"운전해서 오고 싶었거든. 새 차에도 좀 익숙해질 겸, 경치도 보고."
- 그 새 트램핑 하는 취미라도 기른 거냐?
"본즈. 비행하는 게 내 일이야. 이번 만큼은 땅 위로 가는 걸 허락해주지 않겠어?"
웃음 섞인 목소리에 맥코이 역시 피식 하며 웃었다. 바람이 점차 차가워져 커크는 창문을 올렸다.
"길면 이틀 정도 있을거야. 아무래도 거리가 거리이다보니 하룻 밤 정도는 자고 와야할테니까."
- 집을 파는 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게 어때?
"본즈."
- 아아. 알았어. 알았다고.
커크는 그에게 일 열심히 하라는 둥의 말을 남기곤 통화를 끊었다. 그는 끝없이 이어지는 도로를 보며 맥코이가 얼마나 좋은 친우인지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맥코이가 자신의 어떤 점을 좋게 보고 이러한 친우로 남아있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아니 어쩌면 동질감이나 동정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우울한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에 별 다른 반박을 할 수 없는 이유는 커크 그 자신 역시 맥코이를 향해 그런 생각을 아예 해보지 않았다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사랑하는 자를 잃은 사람들은 서로 그렇게 닮았다.
아이오와로 가는 길은 멀었다. 커크는 자신이 오 년 만에 찾는 고향이 얼마나 바뀌었을까 상상해 본다. 약간의 설레임과 이유를 알 수 없는 조바심과 그런 복합된 감정들이 매 1마일을 지날 때마다 알게 모르게 쌓여 갔다. 아이오와에는 너무 많은 추억이 있었다. 그것이 좋은 추억이건 혹은 나쁜 기억이건 간에 짐 커크를 뿌리부터 동요시키기에는 충분했다. 누군가가 그의 유년 시절에 대해 묻는다면 커크는 행복했다 대답할 것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강했고 자신의 처지를 동정하지 않는 성미였다. 불행 속에서 행운을 찾는 부류였으며 주어진 것에 불만을 갖지 않는 사람이었다. 비록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그에게 소홀한 부분이 있었다거나 그의 양아비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었다던가, 혹은 그의 형에게 어떠한 일이 있었다거나 하는 그다지 사소하진 않은 일들을 곱씹으며 우울해하는 취미는 없었다는 말이었다. 그는 내면으로 숨기는 것에 익숙했다. 깊숙이 묻힌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행위는 꼴불견이다. 마치 석고의 위에 아교를 덧칠하듯 그렇게 나이가 들 수록 사람은 강해지고, 그래야만 했고, 또 둔감해지고. 커크는 담배를 물었다.
그가 아이오아 주로 들어섰을 때 시간은 오후 다섯 시 쯤 되었다. 꼬박 하루 하고도 절반 정도가 걸려서야 도착했다. 쉬지 않고 달리는 것은 역시 무리였기 때문에 중간에 시카고에서 숙박을 해결해야 했다. 주유소에는 세 번 들려야 했다. 이동 할수록 날씨는 추워져 비록 하루만에 불과했으나 아이오와는 피부로 변화가 느껴질 정도로 서늘했다. 눈의 시초를 알리는 비가 퍼부었다. 후두둑 차체를 때리는 빗소리가 거세어지고 와이퍼가 분주하게 차창을 닦았으며 이른 시간 어둑해져가는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했다. 커크는 저가 집을 찾는 길을 헷갈리지 않을까 내심 생각했으나 마을로 들어서는 길목이 보이자 그 이후로는 손 안에 그려진 것처럼 익숙했다. 덜컹이는 비포장도로를 조금 달리니 집이 보였다. 쏟아지는 빗물에 유리창 너머 그 형상이 뿌옇게 일그러져 있다. 집 앞에 차를 주차한 커크는 이유 없이 잠깐 운전석에 앉아 뜸을 들이다 차 문을 열고 나왔다.
집 안으로 들어오는 데에 얼마 걸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흠뻑 젖어 커크는 나직이 욕했다. 나무로 만들어진 2층 집은 크지 않았다. 발을 디딜 때마다 삐걱이는 소리가 울렸다. 비닐로 덮인 오래 된 소파 위를 손 끝으로 슬어 보자 먼지가 잔뜩 묻어 나왔다. 껍질이 벗겨져 나간 벽. 불이 들어오지 않는 낡은 등. 집은 추웠으며 큼직한 가구를 제외하면 삭막할 정도로 아무 것도 없었는데 그건 커크가 집을 비운 후 떠나고 나서 한동안 이 집에 세들어 살았던 사람이 이사를 나갈 때에 모든 것을 말끔히 정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 안에는 짐 커크의 추억 속에 그려지는 장면들이 아닌 이상 그의 가족이 살았다는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커크는 그에 안도했다. 혹여 집에 돌아오는 순간 썰물같은 감정에 휩쓸리지 않을까 걱정했기에다. 그는 이제 잿가루 밖에 남지 않은 벽난로 안에 준비되어 있던 마른 장작을 넣고 불을 붙였다. 챙겨온 레토르트 식품으로 저녁을 때우고 이불과 침낭을 벽난로 앞에 깔았다. 대충 잘 수는 있을 것이다.
비가 연신 내렸고 해가 빠르게 저물고 있었기에 커크는 내일 아침이 되면 마을에 나가보기로 했다. 현관문에 노크 소리가 들린 것은 곧이었다. 벽난로 앞에 앉아 관련 서류들을 보던 커크는 의아함과 함께 문을 열었다. 그 누가 찾아올거라 생각을 못했던 건 그가 아이오와에 온다는 말을 고향의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커크는 곧 상대를 보곤 반갑게 웃으며 포옹했다.
"니오타."
"안녕, 짐."
늘씬한 몸을 가리는 롱코트를 입은 채 생기 넘치는 얼굴을 하고 있는 니오타 우후라는 우산을 접으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우후라는 집 안을 슬쩍 돌아보며 여전하네 라고 했다. 커크는 그녀가 어떤 부분에서 여전하다고 말하는 건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녀와는 예전부터 알던 사이로 커크가 아이오와를 떠나기 전 우후라는 그의 마을로 이사를 왔다. 우후라는 아직까지 아이오와에 지내고 있었다. 그간 아주 뜸하게 연락을 하긴 했었으나 그녀에게 역시 자신이 오는 건 알리지 않았었다. 커크는 그녀를 벽난로 앞으로 앉길 권했으나 우후라가 고개를 저었다.
"금방 가봐야 해. 네가 오는 것을 보고 바로 달려온 거라서. 스토킹이라도 한 것처럼 보지 마. 네 차가 이 집 앞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던 것 뿐이니까."
"하하. 여전하네. 잠깐 이야기 할 시간도 없는 거야?"
"오. 물론 나도 그러고 싶어. 그래서 지금 널 부르려고 온 거잖아."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눈썹을 휘는 커크에게 우후라가 웃었다.
"친구가 결혼했거든. 오늘은 마을 축제 날이나 다름 없어. 트렌트 알지?"
아아. 커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렴풋이 뇌리에 이미지가 남아 있는 트렌트는 그와 같은 고등학교에 다녔었다. 한동안 아이오와의 사람들과 거의 소식을 끊고 지내다시피 한 커크가 그다지 친한 편이 아니었던 트렌트의 결혼 소식을 알 리가 만무했다. 우후라는 늦었다며 함께 가자고 커크를 재촉했다. 그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보았다. 두터운 점퍼에 청바지, 그리고 진흙 묻은 워커 차림을 본 우후라는 눈을 한 번 굴리곤 가는 길에 해결하자 며 단정지었다. 솔직히 말해 커크는 그녀의 갑작스러운 방문과 더불어 갑작스러운 초대에 약간 얼떨떨한 기분이었으나 이게 아이오와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그들은 언제나 오랜 고향 사람들을 아무런 변함 없이 받아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커크는 아주 오랜만에 정말로 그의 '집'으로 돌아온 것을 느꼈다. 그는 반 쯤 우후라에게 끌려가다 시피 하며 집에서 나왔다.
하필 이런 날씨에 결혼을 할 생각을 하다니 참 대단하다. 커크는 트렌트와 악수하며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장난처럼 그렇게 말했고, 트렌트는 그에 웃으며 어쩔 수 없었다 대꾸했다. 그의 애인, 아니 이제는 부인이 된 그녀가 이미 임신을 한 상태라 말하는 트렌트에 커크는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찡긋했다. 우후라의 말마따나 크지 않은 마을 사람의 대부분이 모인 것처럼 시티 홀의 내부는 이 열악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가득 메워졌다. 조명은 색색으로 반짝이며 돌아갔고 마을 사람들이 직접 준비한 듯 보이는 음식과 술이 있었다. 음악으로는 역시 라디오 모스코우와 빅스 베이더벡 등이었다. 바로 바깥은 춥고 비가 퍼붓는 음울한 날씨인데 건물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분위기는 확연히 달랐다. 웃고 떠드는 소리가 즐비했다. 즐겁고 행복한 아이오와. 그가 기억하는 고향이다. 커크는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과 인사를 하기 바빴다. 결혼식을 마치고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하나같이 보기 좋은 옷들을 입고 있는 와중 저 자신은 캐쥬얼한 셔츠에 청바지 차림인 것이 민망하다. 이런 자리에 어울리는 차림새도 아니었거니와 짐 커크는 외관을 중요시하기도 했고 말이다. 커크는 의외로 그가 기억하는 사람들 중 여럿이 그 자리에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우후라가 그 옆에서 샴페인을 마시며 말했다. 코트를 벗은 그녀는 세미 드레스 차림새였다.
"아이오와를 떠난 건 너 뿐만이 아냐, 짐. 우리 마을의 인구는 많이 줄었어."
"그런 것 같군. 넌 계속 여기 있을 생각이야?"
"난 이 곳이 좋아."
커크는 이해한다 했다. 그런 그를 흘끗 쳐다본 우후라는 뭔가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고 커크는 그것에 안도했다. 그녀는 할 말과 하지 않아야 할 말을 알았다. 한 때는 그런 그녀의 매력에 빠져 추근거렸던 적도 있었으나 결국은 친구의 관계가 더 나을 거라 생각한 것도, 이러한 그녀의 성격 때문이었다. 우후라는 강했다. 그녀는 든든하게 또 안정적으로 상대를 포용하는 법을 알았다. 과거 아이오와에서 커크는 많이 외로웠다. 자신을 이끌어 줄 수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한 것 뿐이란 걸 알아차리는 데에 걸린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아이오와에서의 그는 어렸다. 더디게 성장했다. 그를 이끌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건 그의 잘못이 아니지 않은가. 우후라는 그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단지 손을 올려 커크의 어깨를 위로하듯 어뤘다.
시간은 금새 흘렀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사람들과 그간 못한 사람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웃으며 술잔을 부딪히면 늘 그러하듯. 커크는 원래 웃고 즐기는 것을 좋아했다. 사람을 만나 모든 것을 잊을 정도로 흠뻑 유흥에 취하는 것을 즐겼다. 나름 도피적이란 것은 저 역시 자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성미로 인해 커크가 언제나 주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온 것도 사실이다. 그가 기억하는 한 그의 주변에는 항상 친구들이 있었고 그에게 말을 걸어주는 자들이 있었고 그와 함께 밤을 보내줄 여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이, 모두 일회적인 온기에 불과하다. 고향의 사람들은 진심으로 짐 커크를 반겼다. 커크는 그것에 감사하는 한편 아이오와에서 그가 보내게 될 며칠의 시간 역시 도피나 다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도피하듯 즐겼다. 적어도 아이오와의 사람들에게 그는 여전히 밝고 인기 많은 제임스 커크로 기억되지 않을까. 신랑 신부를 위해 헹가레를 하고 여자들과 춤을 추고 샴페인을 마셨다. 파티는 즐거웠다. 네 시간 정도 후 그는 양해를 구하며 화장실로 향했다. 시계는 벌써 열 시 즈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찬 물로 세수한 커크는 거울을 보았다. 물기 떨어지는 그럭저럭 준수한 얼굴을 가진 청년이 저를 마주보고 있었다. 그 얼굴이 어쩐지 이질적이라 커크는 다시 한 번 더 물을 끼얹었다. 그렇게 먹고 마셨는데도 속이 허했다. 공허함. 애써 그 감정을 털어낸다. 커크는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화장실에서 나왔다.
축의금을 내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함께 즐겼으니 아무 것도 내놓지 않고 가는 건 예의가 아닌지라 얼마 가지고 나오지 않은 지갑을 뒤적이는데 정말로, 몇 푼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섭섭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아 우선은 그걸 트렌트의 주머니에 꽂아 넣어줬다. 웃으며 축하한다는 말을 남기곤 모두가 정신없이 즐길 때 그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그 곳을 빠져나왔다. 실내에서 잊고 있던 추위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왈칵 밀려들어 커크는 두터운 점퍼를 여몄다. 비는 멈췄으나 그 공기는 여전히 시렵다. 어쩌면, 어쩌면 그가 그저 시렵다고 느끼는 걸지도 몰랐다. 먹구름이 어느 정도 걷힌 밤하늘에 별이 한 가득이었다. 도시에서 볼 수 없는 광경에 커크는 반가움을 느끼며 담배를 물었다. 주머니를 뒤적이며 라이터를 찾을 때, 커크는 그 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
비명. 섬광.
시선의 마주침. 그리고...
담배가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