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크파이크 oblitus 0
커크x파이크x칸
Obli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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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다. 손 끝마다 꽁꽁 얼어서 감각이 무뎌져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짐 커크는 양 손을 입가로 가져가 입김을 불었다. 차가운 공기에 뿌연 김이 흩어졌다. 올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고 이제 11월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주면 눈이 내릴 거라는 말을 들었다. 맨해튼의 거리는 눅눅했고 우중충했으며 하늘은 밝은 회색이었다. 분주한 거리의 사람들은 저마다 빠른 걸음으로 추위를 피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의 사이에서 커크는 가로등 밑에 등을 기댄 채 멀뚱히 서 있었는데 마치 그 홀로 정체되어 있고 그의 주변으로만 시간이 흐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차들이 연신 도로를 갈아대는 소리와 바쁘게 오가는 신발굽의 부딪힘은 끝없는 모션 픽쳐처럼 그의 주변을 스쳤고 커크는 제 3의 방관자가 되어 그 사이에서 서성였다. 이 도시에서 소속감을 느끼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그는 옷깃을 한 번 여미고 손을 코트의 주머니 안에 찔러 넣으며 주변을 돌아봤다. 그리고 시계를 한 번 본다.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아직까지도 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자랑은 아니었으나 원래 저가 약속에 늦으면 늦었지 누군가를 기다려 본 적이 드문 짐 커크는 약간의 조바심을 느낀다. 커크는 기다리는 것을 싫어했다. 일 분 일 초가 지날 때마다 조급함을 느껴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본래 이런 기분은 늦은 사람이 느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하고들 하지만 커크는 그 반대의 경우인 적이 잦았다. 때문에 약속 시간에 정확히 도착하거나 일부러 늦게 오곤 하는 건 그의 습관과도 같은 건데, 오늘은 상대가 그보다 더욱 늦었다. 보통 늦는 사람이 아니라서 전화를 해볼까 생각했지만 곧 그만둔다. 참을성 없어 보이는 건 질색이었다.
차라리 자신의 차를 가지고 오는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 약속 시간에서 이십 분 째가 넘어갈 무렵 커크는 더 이상 기다릴 마음을 잃고 있었다. 그가 발걸음을 돌리려고 할 때 즈음 짧은 클랙션 소리와 함께 한 승용차가 그의 앞에 급하게 정거했다. 익숙한 98년도 검은색 도요타였다. 액간의 안도와 짜증이 섞인 한숨을 쉬며 커크는 조수석에 올라탔다. 맥코이가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많이 기다렸냐?"
"됐어. 운전이나 해."
다른 차들이 뒤에서 클랙션을 울리며 재촉하는 통에 맥코이는 작게 욕설을 뱉고 핸들을 꺾었다.
커크는 털털거리는 오래된 차체의 창문 너머로 도심의 풍경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맨해튼에 산지도 벌써 오 년 째인데 아직까지도 이 도시에 익숙해지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건 커크가 그 곳에서 사람을 사귀고 일을 하고 다른 맨해튼의 사람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해서 바뀌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 틈에 섞여 든다고 해서 그 일부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는 종종 자신이 여전히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는데 만약 그 주변의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면 굉장한 놀라움을 표현할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짐 커크는 그 누가 봐도 완벽한 맨해튼의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맨해튼에서 평생을 살아온 것처럼 일하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 법을 알았다. 물론 아직도 채 지워지지 않는 아이오와의 액센트가 남아있긴 했으나 그의 외모로만 보았을 때 그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이오와는 지금 쯤 비가 퍼붓고 있을 것이다. 그는 평온한 고향의 풍경을 떠올렸다. 5년 전 그 곳을 떠난 이후 한 번도 다시 가본 적이 없었는데 그건 짐 커크의 모친이 세상을 떠남과 동시에 그가 아이오와에서 지내야 하는 이유도 함께 사라져서다. 아주 가끔은, 그는 향수를 느끼곤 하는 것도 사실이다. 맨해튼의 지독하게 도시적인 분위기는 간혹 아이오와의 조용하고 잔잔한 공기를 그립게 만들곤 했다. 수많은 추억이 쌓이고 쌓인 곳을 벗어나기 위해 아이오와를 떠났는데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은 참으로 거짓인지도 모른다. 되려 그 곳을 추억하는 기억이 그 위에 덧그려지듯 쌓여갈 뿐이었다. 그가 도시로 떠나기 전 기억나지 않는 고향의 누군가가 그에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도시에서는 자살율이 엄청 높대. 시끄러운 인파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들 말이야. 커크는 그 말을 한 해가 지날수록 조금 더 깊숙이 이해한다. 딱히 자살에의 충동을 느껴본 것은 아니었으나 갈피를 잡지 못하는 허전함이 어디에서 파생되는지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되어서였다.
차 안의 히터가 웅웅거리는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미지근한 바람을 뿜어 내는 것에 커크는 히터를 꺼 버렸다. 맥코이는 아무리 말을 해도 그의 오래된 도요타를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조용한 그를 곁눈질하던 맥코이는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릴 때 입을 열었다.
"춥지 않아?"
"참을 만 해. 왜 늦었어?"
"급한 환자가 생겨서 말이야. 동료한테 맡기고 왔어."
"저런."
"괜찮으니 신경쓰지 마."
"신경 안 썼는데."
언제 가라앉은 기색을 보였냐는 듯이 장난스럽게 웃어보이는 커크에 맥코이도 조금이나마 굳었던 기색을 풀며 피식 웃었다. 그들은 커크가 처음 맨해튼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알게 되었다. 파일럿과 의사라는 직업에 종사하는 자들이 가장 친한 친구가 되다니 보기 드문 조합이기도 했고, 그들의 성격만을 따져 보았을 때에도 아주 상극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친해진 것이 참 신기하다고 가끔 생각한다. 대부분은 커크가 술을 진창 마시고 싸움에 끼어들거나 하면 맥코이가 달려오고 하는 식의 바보같은 사건이 잦기는 했다. 레너드 맥코이는 그들의 관계가 보모와 아이의 위치에 가깝다고 생각했고 커크는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절대 동의하지는 않았다. 맥코이가 한숨을 쉴 때마다 커크는 낄낄 웃었고 차마 맥코이가 저로 인해 곤란해하는 상황을 즐기지 않는다고 하지는 못하겠다는 걸 인정하곤 했다. 하지만 맥코이는 그런 커크에게, 그가 정말로 충고를 필요로 하는 경우가 아닌 이상 진심으로 화를 내는 적은 없었다.
맥코이는 그들이 자주 가는 식당에 차를 세웠다. 비교적 한적한 곳에 위치한 작은 곳이어서 그들이 가끔 찾곤 하는 식당이었다. 점심 시간이 지난 오후의 애매한 시간대라 내부는 한적했고 그들은 창가의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맥코이는 필터 커피와 간단한 요깃거리를 시켰고 커크는 핫 코코아 한 잔을 시켰다. 그걸 보며 눈썹을 휘는 맥코이에게 커크는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요즘 당이 떨어져서 말이야. 맥코이는 혀를 찬다. 저혈압도 아닌 녀석이 당이 떨어질 이유라면 식사를 제대로 챙기지 않거나 몸을 혹사시키는 일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가끔 커크는, 꼭 그럴 것 같지 않으면서도 이상하리만치 제 몸을 돌보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그건 주로 겨울이나 봄이 끝나갈 무렵 즈음이었다.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는 짐 커크가 집 안에만 틀어박힌다던가 혹은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구지 떠맡아서 일 주일을 쉬지도 않으며 꼬박 비행을 하고 온다던가 할 때가 되면 그의 연례 행사처럼 찾아오는 주기적인 조울증이 도진 것일테다. 물론 커크는 자신이 조울증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아예 배제시키려 들었기 때문에 맥코이의 판단은 별 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을 뿐이다. 짐 커크는 가끔 정말이지 지나치게도 일방적으로 그 누구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에 맥코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조금이라도 빨리 그의 친우가 회복하길 돕는 것이 전부였다.
밖에선 비가 한 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창문에 투둑 투둑 부딪히는 물줄기를 보던 커크는 핫 코코아가 나오자 종업원에게 웃어 보였다. 그는 자신의 외모가 이성에게 얼마나 잘 어필되는지 알고 있었고 그걸 써먹는 법 역시 알고 있었다. 여자 종업원은 커크에게 눈을 휘며 마주 웃곤 걸어갔다. 커크는 뜨거운 코코아 잔을 양 손으로 감싸 쥐었다. 맥코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종업원을 불러 추가로 커크의 몫의 음식을 더 시켰다. 물론 만류하는 커크의 말은 듣지 않는다.
"먹는 거라도 제대로 해 둬. 의사가 하는 말 정도는 들으라고."
커크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척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나를 하루 이틀 알아온 것도 아니면서 왜 그래? 이러다 괜찮아져. 본즈."
"짐. 늘 말하는 거지만 상담이라도 받아 보는게 어때. 평생 매년 이런 시기를 겪을 수는 없잖아?"
진지하게 말을 꺼내는 맥코이를 외면하며 커크는 코코아를 마셨다. 그의 걱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맥코이는 항상 알게 모르게 커크를 챙겨왔었고 커크는 간혹 자신이 그의 걱정과 염려를 당연하게 받을 만큼 괜찮은 사람인가 생각해보곤 했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그건 맥코이에게 있어서 일종의 직업병과 같은 것이기도 했고 커크가 그를 알아온 한 그는 변함없이 일관적인 관심을 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커크가 일부러 그 관심을 받기 위해 조울증 걸린 아이같은 행동을 한다는 것 역시 아니었다. 나쁜 습관이었다. 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맥코이를 향해 얼핏 웃었다.
"달다. 이거."
"짐."
"이제 거절하는 것도 지치네. 알았어. 나중에 기회가 되면 가볼게."
단지 그 순간을 넘기기 위해 커크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맥코이 역시 알고 있었으나 우선은 고개를 끄덕인다. 지난 오 년 동안 그렇게 닥달을 해도 상담이나 정신과라면 학을 떼던 사람이 가보겠다는 말이라도 한 게 어딘가 싶어서다. 음식에 포크를 가져가며 맥코이는 이번에도 자신이 너무 짐 커크를 닥달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지만 결국은 마땅히 했어야 한 것이라고 결론 지었다. 사람은 어떤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보다 나은 것을 위한 변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죽음. 그것이 짐 커크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을지 맥코이는 간신히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어찌되었든 커크는 동정 받는 것은 질색하는 편이었고 그가 그의 조울증의 이유를 딱히 어머니의 죽음 때문이라고 말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이유가 뭐가 되었던 간에 맥코이는 커크가 더 이상 몸을 상하게 되는 일이 없었으면 한 것이 전부였다. 커크는 맥코이를 보며 비록 그런 의도는 없었으나 마치 자신이 관심받기 위해 꾀병을 부리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는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다. 혹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한다. 그런 그가 자신의 일에 한해서는 무의식적으로 소홀해진다는 건 어찌보면 저도 모르게 일말의 진심어린 관심과 손길을 바라고 있다는 것일수도 있고. 어쩌면 그래서, 짐 커크가 레너드 맥코이에게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고는 하는 걸지도 몰랐다.
"고향에서 연락을 받았다며?"
맥코이의 말에 커크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잊고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러고보니 오늘 급하게 만나기로 한 것도 이것에 대해 맥코이가 이야기를 나누려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떠올린다. 되려 커크 그보다도 맥코이가 더욱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이 웃겼다. 언제나 상대를 걱정하게끔 만드는 것도 못할 짓이다. 커크는 웃었다.
"갔다가 금방 돌아올테니까 그런 표정 짓지 않아도 돼."
"보험 때문인가?"
"그렇지. 더 이상 그 집을 방치해 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오 년 전 커크가 아이오와의 집을 떠난 후 그 곳은 잠시 세를 주기도 했었으나 사람이 살지 않은 지 벌써 삼 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커크가 더 이상 그 집에서 살려는 마음이 없는 이상 그대로 남겨두는 것은 어찌 보면 손해였다. 그랬다. 그는 아예 아이오와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애초에 맨해튼으로 옮기려는 결정을 내렸을 때부터 그는 아이오와의 집을 어떻게 처분해야 하는지부터 고민했기 때문이다. 마침 보험 기간이 끝나가고 있었기에 커크는 집을 마지막으로 본 후 정리할 것을 정리한 후 팔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맥코이는 극단적인 커크의 선택에 조금 미간을 찌푸리지만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추억이라는 것이 묻으면 묻을수록 떼어내기가 힘들다. 커크는 그의 어머니를 떠나보내며 그것을 느꼈고, 그들이 함께 살던 집을 뒤로 할 때에 다시 한 번 느꼈다. 심지어 오랫동안 쓰던 펜을 잃어버려도 아쉬움이 남는 법인데 그의 유년 시절부터 성년까지의 기억이 남아 있는 장소가 특별하지 않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건 성장을 위한 발판이라고 생각했다. 커크는 자신이 그 장소에 묶임으로 인해 더 이상 앞으로 진전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그렇지 앟은 척 해도 커크는 여전히 과거에 얽메여 있어서였다. 그는 자신이 무언가로부터 쫓기듯 연신 과거로부터 도망치려 하는 것을 발견한다. 하지만 도무지 무엇에 쫓기고 있는 지 알 길이 없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빗줄기가 강해지고 있었다. 처마 밑에서 새 한 마리가 차마 빗속으로 날지도 못하고 서성이며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