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크칸 while the light lasts
커크칸
빛이 있는 동안에
while the light lasts i shall remember and in the darkness i shall not forget
다시 한 번 추위 속에서 잠이 들어야 했을 때 칸은 장담할 수 없었다.
십 년, 오십 년, 혹은 백 년이 지난 후 그가 눈을 뜨게 될 다음에 저가 어떤 감정을 느낄지에 대해. 증오? 분노? 슬픔? 고독? 아마도 그 전부. 적어도 그가 무의식의 상태에 빠졌을 때 칸은 단 하나, 그가 눈을 떴을 때 복수를 할 것 그것만을 약속할 수 있었다. 그건 그의 본성이었고 또한 의무였다. 그의 것을 탐하고 훼손하는 자를 응징하는 것은 지도자의 피가 흐르고 있는 칸으로 하여금 당연한 행동이었고 그건 차마 칸이 만약 거부하고 싶었다 하더라도 거부할 수 없는 종류다. 그는 그러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저와 저의 피를 가진 자들을 해하려 드는 것에 대한 복수는 불가피했다. 그래서 칸은 세상의 모든 고통과 증오와 뼈마디가 녹아 내리는 한을 품은 채 잠들었다.
끝 없는 어둠 속에서 칸은 꿈을 꿨다. 그의 살점이 수 갈래로 찢어지고 다시 붙기를 반복하는 꿈이었다. 그의 동료들과 저가 한 몸이 되기도 했고 다시 분해되어 하나 하나 칸이 지켜보는 앞에서 살점과 핏덩어리로 터져 나가기도 했다. 그는 꿈 속에서 악받친 눈물을 흘리며 지구를 잿더미로 만들었고 그가 태어났던 행성이 가루로 바스라져 우주에 흐트러지는 것을 보았다. 그 가루들이 제 동료들의 살점과 섞여 들었고 칸은 안 된다고 울부짖었지만 아무도 듣지 못했다. 무한한 진공의 상태에서 칸 누니엔 싱은 혼자였다. 그제서야 그는 깨달았다. 독재자로서 만들어진 칸은 혼자로 남는 것에 익숙할지언정 그가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아무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 곳에서는 그 무엇도 소용 없다는 것을. 어둠에 수백 번 잠식당하며 칸은 해답 없는 복수가 그를 비웃는 소리를 들었다.
천천히 빛이 그를 감싸는 것과 동시에 피가 느릿하게 흐르기 시작하자 칸은 그가 일어날 것을 직감했다. 이번에는 누가 그를 깨울 것인가. 칸은 자신이 눈을 뜨게 되는 것을 원하긴 했었으나 그 전에 꿈에서부터 달아날 수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끔찍한 환상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어야 했다. 칸은 닫힌 눈꺼풀 믿으로 흐르는 눈물을 느꼈다. 심장이 뛰고 벌려진 입술 사이로 숨이 들이켜 졌다. 빛 속에서 마주해야 할 현실과 꿈이 주었던 절망 중 어떤것이 더 고통스러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눈 위를 덮는 손을 느끼며 짧은 무의식에 빠져들었다.
손을 들어내자 커크는 자신이 본 것이 헛것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손바닥에 묻어난 약간의 물기는 분명 칸의 눈에서 나온 것이었다. 강한 신체의 남자는 눈을 뜨자마자 그들을 공격해 올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정신을 차린 것이 확실했는데도 불구하고 눈꺼풀을 들지 않았다. 손바닥에 닿은 피부는 차가웠고 보이는 것은 그보다 더 창백했다. 시체같았다. 방금 흐른 눈물은 자국조차 남지 않고 한기에 증발했다. 커크는 잠시 그를 내려다 보았다.
"분명 방금 전까지 의식이 돌아왔었는데 다시 가수면 상태에 들어갔어."
본즈가 스크린을 체크하며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커크는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러 닦으며 칸에게서 눈을 떼었다.
"뭔가 이상이 있는 건 아니야?"
"아니. 잘못 된 곳은 없어. 젠장, 방금 숨도 쉬었잖아. 눈을 뜨는 게 당연하다고."
"울었어."
"뭐?"
"방금 칸이 눈물을 흘렸다고."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이 그를 쳐다보던 본즈가 가까이 다가와 칸을 살폈다. 칸은 갑작스러운 온도차를 방지하기 위해 여전히 한기를 뿜는 쿨러에 둘러쌓여 있었고 눈물의 자국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저를 이상한 시선으로 돌아보는 본즈에게 커크가 성의 없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어찌됬건 하루 빨리 일어나게 해봐 본즈. 시간이 없어. 더 이상 지체하면 상부에서 내 목을 조르려고 들거야."
샌프란시스코에 벤전스 호가 추락한지 삼 년. 우주를 항해하고 있어야 할 엔터프라이즈 호는 다시 지구로 호출을 당했다. 고등 생물이 만들어낸 아이언 메이든 벤전스 호는 그 기간동안 무수한 기술자들의 손을 거쳐오며 연구되어졌고 철판부터 전기줄 하나까지 샅샅이 들춰졌다. 그리고 그건 정말로 짐 커크가 가장 신경쓰고 싶지 않은 부분 중 하나였다. 그의 선원들을 앗아가고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죽음의 여신은 그의 원수라고 부르면 불렀지 관심을 가질 리 만무한 것이었다. 이틀도 되지 않는 시간동안 벤전스는 그 주인들과 함께 그에게 가늠할 수 없는 절망의 무게를 안겨주었다. 커크는 그 때를 기억하면 제 숨통이 조여드는 기분을 맛보았다. 의식적으로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지 않던 와중 오메가 센타우리 근처에서 스타플릿으로부터 호출을 받은 이유는 벤전스 호 안에 폭발 가능성이 잠재되어있는 나노테크의 액상 셀룰로이드가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벤전스 호가 탑재하고 있던 기술은 분명 뛰어났으나 현대의 기술 안에서 가능한 한도라고 밝혀진 바 있었는데 그것도 아니었는지 명백한 위험 요지를 갖고 있는 벤전스 호에 대한 자세한 사항을 알아내기 위해 수면 상태에 들어간 칸 누니엔 싱을 깨워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커크는 물론 그 의사에 반발했다. 하지만 그가 샌프란시스코 사건의 중심부에 서 있던 인물이었는데다 칸을 직면할 조건이 충족되는-비록 그 기준이 칸을 가까이서 대면한 사람이라는 부정확하고 애매한 이유이긴 했으나- 사람들 중 하나로 꼽힌 것과 별개로 그의 의견은 묵살되었다.
엔터프라이즈 호는 내키지 않아하며 지구에 착륙했다. 고향에 돌아왔으니 기뻐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 이유가 이유인지라 누구도 좋은 표정을 짓지 못했다. 칸으로 인해 그들은 동료를 잃었고 가족을 잃었으며 그들의 집이자 연인인 엔터프라이즈를 잃을 뻔 했다. 스코티는 도무지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씩씩거렸고 캐롤은 거의 이성을 잃을 것처럼 보였다. 스팍은 그의 마인드멜드가 칸에게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이며 딱히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다지 무감정적이지 못한 결정을 내렸다. 그 정도였다. 남은 건 어쩔 수 없이 의사로서의 의무를 떠맡은 본즈와 그들 누구 못지 않게 칸을 수백 번 죽이는 장면을 상상하곤 했던 짐 커크 그 밖에 없었다.
"현재 상태와 뇌파를 보아하니 자발적 가수면상태에 들어간 것 같은데 이래서야 언제 일어날지 장담할 수는 없어. 본인이 원해서 수면 상태에 들어갔다는 설명밖에 남지 않아."
"어딘가 문제가 있지 않은 게 확실해? 본인이 원해서라니 이유가 있는 건가."
"깨고 싶지 않을 이유라면... 하나 짐작은 가는군."
"혹시 캡슐에 들어갈 때에 동료들이 살아있다는 걸 모른 상태였던가?"
"그래. 스팍의 마인드멜드가 통하지 않았다고 했으니 말이야. 그 후에 바로 캡슐로 이동되었고."
그들은 잠시 말이 없었다. 침묵을 깨고 커크가 피곤한 듯 뒷목을 문지르며 말했다.
"최대한 빨리 일어나게 만들 수 있겠어?"
"보통 인간과는 다른 녀석이니 이것 저것 시도해 봐야겠지. 그 와중에 의료 사고로 놈의 뇌 상태가 어떻게 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고."
"될 수 있는 한 멀쩡하게 남겨 둬. 깨어나면 연락주고."
미간을 찌푸리는 본즈의 어깨를 두들긴 커크는 칸에게 시선을 돌렸다. 남자는 창백한 시체처럼 미동없이 누워 죽은 것만 같았다. 간혹 그의 심박수를 알리는 느린 기계음만이 칸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커크는 아직도 축축한 것 같은 손바닥을 옷자락에 문질렀다. 착각이었다. 애써 찝찝함을 뒤로 하고 그는 발걸음을 돌려 그 곳에서 나왔다.
칸의 얼굴을 보면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주먹질이라도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실패와 죽음을 직면하게 만든 댓가를 치루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째서인가. 어째서, 그들을 모진 절망에 빠트려 놓고 기약 없는 평온한 수면에 빠진 남자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손을 뻗고 말았던 것인가. 커크는 주먹을 쥐었다.
수많은 이의 피를 손에 묻힌 주제에 눈물 따위를 보이는 건 지독한 보복이었다.
캡슐이 열린 후 5일 하고도 여섯 시간 반이 지난 후에 칸 누니엔 싱은 눈을 떴다. 그는 눈꺼풀을 들기도 전에 여전히 눈부시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병실 안에 있었다. 곧 자신의 팔 다리가 침대에 결박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병실을 위장한 구금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방은 조용했고 간혹 열린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바람에 커튼이 가볍게 나부끼는 소리가 들렸다. 새소리다. 추위 속에 갇혀 있어야할 그에게는 이질적인 환경이다. 눈을 뜬 칸은 주위의 사물을 천천히 동시에 정확하게 인지하다 그의 옆 쪽에 불쑥 돋아난 금발을 보았다. 한 때는 정돈되어 있었을 머리카락은 어쩐지 조금 흐트러져 있었고 햇빛을 받아 모래색으로 빛났다. 눈이 아파와 칸은 도로 시야를 닫았다.
"눈 뜨는 거 다 봤어."
짐 커크는 손에 들고 있던 패드를 내려 놓으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칸은 다시 느리게 눈을 떴다. 푸른 눈이 그를 그대로 마주 쳐다보는 것에 칸은 자신의 몸이 충분히 정상 체온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 서늘해지는 것을 느낀다. 제임스 커크. 엔터프라이즈 호의 어린 함장. 그가 죽이려고 했던 청년은 아직까지 멀쩡히 살아 있음이다. 여전히 젊은 모습인 걸 보아하니 그가 잠든 이후로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은 모양이다. 햇살을 받으며 전보다 더욱 강해진 채로 칸 그의 시선을 똑바로 바라보는 눈동자 밑엔 감출 수 없는-혹은 감추지 않는- 어둔 감정이 짙게 깔려있다. 칸은 비식 웃었다. 인간의 성장이란 얼마나 찰나에 이루어질 수 있는지.
커크는 침대에 누운 남자가 결박된 손을 절그럭거리는 것을 보았다. 칸의 바이탈은 정상의 궤도를 보이고 있음에도 그의 핏기없는 피부는 햇살을 받아 금방이라도 묽은 액체가 되어 녹아내릴 것 같았다. 감정을 엿볼 수 없는 검은 눈동자는 어쩐지 눈이 부신 듯 가늘게 뜨였다.
"내가 필요한 일이 생긴 모양이군."
오래 사용되지 않아 잠긴 목소리는 탁했고 무미건조했다. 커크는 팔짱을 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너희들이 내게 자유를 줄리는 없으니까."
"자유라. 고작 삼 년 전에 테러를 일으킨 사람치곤 꿈이 큰데."
"내 동료들의 시체는 어떻게 했지."
"그들은 죽지 않았어. 널 착각하게 만든 것 뿐이었다."
커크는 칸의 눈동자가 순간 동요한 것을 보았으나 그게 전부였다.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내쉰 칸은 보이지 않는 짐을 덜어낸 것처럼 눈을 내려감았다. 어딘가 지쳐 보이기도 안도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꿈을 꿨어. 아주 오랜 꿈을. 동료들이 우주에서 하나 둘 끔찍하게 죽어나갔지. 조아킴, 줄리안, 로케쉬, 말릭, 자야, 사울, 라네스, 오토, 유다르... 누구는 터지고 누구는 부서지고 누군가는 말라 비틀어지고 누구는 먼지가 되었지.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지켜보는 것 외엔 아무것도. 난 그들의 죽음을 위해 모든 것을 파괴하고 끊임없이 복수했지만 동료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어. 증강 인간이라는 것이 무슨 소용이지? 사람은 한 번 죽으면 다시 되돌아올 수 없는 것을."
커크는 본성으로부터 실연당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무기력증에 빠졌군."
칸은 부정하지 않았다. "치료될거다."
"참 재밌지. 네 동료들은 멀쩡하게 살아있게 되었는데 난 셀수 없는 가족을 잃었으니 말이야. 그 빌어먹을 기억을 되살리지 않으려 온갖 노력을 했음에도 다시 널 마주하고 있어. 신의 장난같을 정도야. 그리고 내 앞에서 넌 복수의 부질없음을 설명하고 있는 꼴이라니. 말 해봐, 칸. 이것보다 더한 코미디를 본 적이 있어?"
칸은 자신이 커크를 화나게 만들었음을 알았다. 아니. 그들은 서로를 화나게 만들었다. 적어도 칸에게는 그의 동족이 살아있는 한 누군가를 향해 복수심을 일으켜야 할 이유가 없었으나 제임스 커크는 아니었다. 칸은 그의 순수한 분노를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저가 한 때 모든 세포가 타들어갈 것처럼 혈관이 끊어지는 증오에 몸서리쳤던 것을 기억한다. 커크는 그와 같은 감정을 느꼈을 지었정 조금이라도 덜하지는 않았을테다. 그래서 칸은 자신에게 신랄한 말을 내뱉는 커크를 향해 이상하리만치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눈을 뜨면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 세포가 부서지지 않을까 칸은 상상했었다. 하지만 그는 동요없이 느리게 뛰는 심장과 괴이한 차분함이 몸을 지배하는 걸 느꼈다. 칸은 커크가 충동적으로 발을 움직여 그에게 다가와 한 손을 들어올려 눈가를 짓누르는 것에 눈꺼풀을 내려감으며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다. 단단한 손바닥이 그물처럼 살갗을 억누르고 그의 시야를 어둠 속에 잠기게 했다. 칸은 문득 젊은 남자가 입술 새로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 눈을 하지 말라고 말이다. 닫힌 시야에 더 이상 빛은 없었으나 칸은 그 안에서 살에는 따스함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