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팍커크 금기의 성좌
스팍커크
금기의 성좌
모르겠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 커크는 보이지 않는 눈을 껌벅이며 손으로 장님처럼 벽을 더듬어 나갔다. 흔들리는 선체에 따라 몸이 제 멋대로 기우뚱거리고 그에 덩달아 구토가 쏠린다. 위장이 뒤집어지고 발은 허공을 걷는 듯 하고, 귀에서는 이명이 울리고 눈은, 시야는 뇌리를 들쑤실만큼 끔찍한 붉은 색. 어지럽고 또 어지러워서 세상에 집어 삼켜져버릴 것만 같은 그런 끔찍함. 악몽이 아닐까? 이건 끔찍한 악몽이 아닐까. 커크는 생각한다. 벽을 따라서 손바닥이 주륵 미끄러져 내렸다. 섬광과 폭발과 비명과 악취와, 화염의 냄새와 죽음의 소리가 사방에서 그를 조여 들어왔다. 마치 끔찍한 데자뷰와 같다. 언젠가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지 않았나. 눈 앞에서 그의 선원이 죽어가고 닿지 않는 공간으로 휩쓸려 들어갈 때에, 그의 함선이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난도질 된 레이스 자락처럼 흩날릴 때에 그가 아무 것도 하지 못하던 그 순간과, 흡사하지는 않은가. 커크는 눈을 들었다.
우주가 있었다. 그가 그토로고 사랑해 마지 않는 우주가 하나의 장벽도 없이 앞에 펼쳐져 있다. 처참하게 뚤려버린 함선의 한 귀퉁이를 통해 우주와 그 너머가 그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있었다. 커크는 자신의 몸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래, 그는 한 때 우주를 사랑한다 한 적이 있다. 그가 태어난 곳이었으며 그가 돌아갈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고향은 시꺼먼 아가리를 벌린 괴물의 무덤이 되어 그에게 미소짓고 있었다. 공포.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커크는 눈을 감았다.
엔터프라이즈호는 탐사선이었다. 커크는 그것이 좋았다. 하나의 고향에서 태어났으나 그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는 모습이 마치 제 모습과 같았다. 돌아갈 곳 없이 광활한 우주를 평생토록 떠돌 그 모습이 어찌나 처량하고 아름다운지, 커크는 저가 '그녀'라 부르는 제 함선의 이야기만 나오면 철부지 아비처럼 끝도 없이 떠들어댈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그러할 때에 아무도 그의 자부심을 말리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제 자신마저 처량하다 느끼는 것이 다른 사람의 눈에 그렇게 보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동정은 아니었다. 꼭 제 함선과 같이, 커크는 누군가의 동정을 사기에는 너무나도 잘나고 또 잘난 인간이었다.
좌표 92.08.14.29 는 베타 쿼드란트 변두리에 자리잡은 세리스트롤 행성이었다. 행성의 이름을 들은 커크는 손가락 끝으로 함장석의 팔걸이를 도독 도독 두들기며 웃었다.
-예쁜 이름이네. 그거 알아? 내가 잠깐 만났던 아다나인 중에 세리자라는 이름의 여자가 있었어. 세리자. 이름만큼 얼굴도 예뻤지. 아다나인은 지구인과 굉장히 흡사하게 생겼어. 아니, 거의 똑같은 거나 다름 없지. 그러니까, 음. 비교하자면 1970년대의 지구에서나 볼 수 있었던 사람들처럼 생겼다고 해야할까. 혹은 그보다 더 오래됬거나. 그런 옷을 입고, 그런 머리를 하고, 그런 화장을 하지. 그렇게 우아하고 고상하게 말을 하고 행동을 하면서. 세리자도 그랬고 말야.
커크는 그렇게 한동안 떠들어댔다. 한동안 아무런 일도 없는 평화로운 날들이 계속되는 와중이었으며, 브릿지의 대원들은 함장이 간혹 저렇게 주절거리는 것에 익숙해져 있기도 했으며, 간혹 그가 늘어놓는 정말 보통의 사람이라면 쉽게 경험해보지 못할 법한 여성체에 관련된 이야기들은 대개의 경우 흥미롭게 들리기 마련이었다. 물론 와중 목적을 잃고 횡설수설하는 말이 거슬렸는지 그의 일항사가 기어코 참지 못해 끼어들었다. 함장님이 말씀하시는 휴머노이드 여성체와의 연애담을 통해 어떤 중요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지 가늠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커크는 다시 웃었다.
-그냥 하는 말이야. 세리자. 이름이 예쁘잖아.
그만큼 얼굴도 예뻤지. 눈썹을 휘어 보이는 일항사를 향해 커크는 웃는다.
그는 눈을 떴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작렬하는 태양이었다. 와. 그는 내심 감탄한다. 아이오와의 태양조차 이렇게 뜨겁지는 않았는데 말이지. 커크는 태어나서 그런 태양은 처음 마주했다. 그것이 태양이라 부를 수 있다면. 노란 색의 끓어오르는 행상이 머리 위 높이 뜬 채 한없이 열기를 뿜어 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 비해 몸 상태는 지극히 쾌적했다. 깊은 잠에 빠졌다가 일어난 것처럼, 그런 괴상한 가뿐함을 느끼며 커크는 손을 더듬었다. 싱그런 풀이 잡힌다.
상체를 일으키자 숲이었다. 우거진 나무들은 울창했으나 동시에 어쩐지 띄엄 띄엄 자라있어 태양이 훤히 보일 정도는 되었다. 이름 모를 풀과 꽃이 온 군데에 만개해 커크는 그가 어렸을 적 읽었던 동화 속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한때의 지구는 이랬다고 들었는데. 인공적이지 않은 풀과 꽃이 자라고 사람 손을 탄 흔적은 보이지 않는, 그리고 새소리와 벌레 소리가 들려오고 싱그러운 풀 향이 코 끝을 시큰하게 찔러 오는. 그런 곳이었다. 하늘은 푸르렀고 구름 한 점 없었다. 만약 나무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순식간에 땅이 끓어 올라 머릿가죽이 타버릴만큼 더울지도 몰랐는데, 숲의 존재가 그것으로부터 막아주고 있는 것임이 확실했다. 두 발로 딛고 선 커크는 손으로 이마에 모자처럼 챙을 만들어 주변을 둘렀다. 밤나무였나? 혹은 은행나무였나? 그는 항상 식물학에 약했다. 술루가 봤으면 단번에 알아 보았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잔디는 발목까지 잠겼고 햇빛은 뜨거웠으나 아주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커크는 걸었다. 손 끝에 스치는 나무 둥지의 거친 결이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잔잔한 바람에 나뭇가지나 풀잎이 조금씩 흔들릴 때마다 숲의 내음이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갔고 그건 생전 느껴보지 못한 굉장한 기분이었다. 만약 지구에 이런 공간이 존재한다면 보호 구역으로 지정되거나 혹은 순식간에 밀어 없애버리거나 둘 중 하나가 될 것임에 분명했다. 아주 까마득하게 어렸을 때조차 커크는 이처럼 자연적으로 방치된 곳을 본 적이 없었다. 지구는 그렇게 아팠다. 나뭇가지 위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푸른 새들이 지저귀었다. 아마 그 누구라도 한 번 쯤은 발을 디뎌보고 싶은 장소가 아닐까.
-함장님?
커크는 뒤로 고개를 돌렸다. 스팍의 파란 유니폼은 초록 가득한 공간에서 새삼 이질적인 존재로 보였다. 커크는 반가움에 활짝 웃었다.
-아, 스팍. 있었구나?
-함장님이 맞으십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아니면 누구겠어. 안그래도 이 곳을 둘러 보려고 했던 참인데 잘 됐네. 자넨 과학 장교잖아. 그렇지? 나보단 자연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을 거 아냐. 내가 아무리 생물학을 잠깐 들었다고 했을 지라도 나의 자연에 대한 지식은 매우 한정적이거든. 수 년 동안 날 지켜와 본 자네도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시피.
-......
-이 곳을 뭐라 설명해야 할까? 태양은 마치, 그래. 벌칸의 것과 비슷한 듯 하군. 좋지 않은 기억을 되살렸다면 미안해. 하지만 자네의 고향에 대략 오 분 여간 발을 디뎌본 나로썬 그 때의 태양열이 정말 화끈했다고 말해 두고 싶어. 하지만, 스팍. 나무와 꽃들을 봐. 지구의 것과 닮아있지 않아? 심지어 새와 나비도 있어. 이 곳은 어쩌면 지구가 아닐까.
스팍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천천히 말하며 걸어왔다.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니까요.
-고마워.
-말씀하신 대로 이곳의 동식물은 지구의 동식물과 많은 유사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보다 세밀한 관찰을 진행시키기 위한 도구가 현재로써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신체적 감각을 통한 원시적인 관찰 방법밖에 활용할 수 없으나 태양열로 인한 대기의 평균적 온도를 제외한 나머지의 환경은 지구인과 벌칸인을 비롯한 휴머노이드가 무리 없는 활동을 이행하기에 적합한 것처럼 보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곳은 지구가 아닙니다. 스팍이 말했다. 일항사는 무언가 더 말을 하고 싶은 듯이 보였으나 결국 입을 열지는 않았고 그에 커크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곤 등을 돌렸다. 지구던 아니던 별로 상관은 없었다. 어찌됐건 그들의 임무는 탐사가 아니던가? 수풀을 헤치고 걷기 시작한 그의 뒤를 따라 벌칸의 조용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주변은 지나치게 조용했고 커크는 나무들을 돌아보는 것과 동시에 그가 늘상 그러했듯 또 다시 떠들어대고 있었다.
-공기가 정말 맑아. 그렇지 않아? M클래스일 것이 확실한 듯 하군. 이토록 지구와 유사한 환경을 가진 곳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게다가 누군가의 손도 타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 이 곳에 고등 생물이 존재할 가능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아직까지 인위적인 흔적은 찾아볼 수 없으나 이 장소의 지극히 일부분밖에 둘러보지 못했기에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없습니다.
-흐음. 그것도 맞는 말이야.
-함장님.
-응?
-혹시 이 장소에 어떻게 도달하게 되었는지 기억 나십니까?
-눈을 뜨니 이 곳이었는걸.
-그렇다면 그 전의 일에 대해선...
-스팍. 우리 둘 다 사지 멀쩡히 살아있어. 그걸로 된 거 아냐? 오. 저길 봐.
커크는 목소리를 죽이더니 재빨리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그는 조심스럽게 기둥 옆으로 고개를 빼어 내다 보았다.
-동물이야! 사슴인가?
-겉모습 만으로는 사슴과의 포유류처럼 보입니다.
-사슴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인 것 같군. 아, 그래. 사슴이라고 단정지어 부르는 건 틀리다고 하고 싶은거겠지? 하지만 정말 사슴처럼 생겼는데. 여기가 지구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야.
날씨는 최상이었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가자 사슴은 한 번 긴 목을 꺾어 그들을 돌아보곤 지극히 느릿한 동작으로 걸어가버렸다. 커크는 어쩐지 들뜨는 기분이 된다. 위험 요소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자연은 더없이 완벽했다. 온통 초록색에, 또 초록색. 끝이 없었다. 덩쿨처럼 자라는 꽃을 발견한 그가 다가가려 할 때에 뒤에서 스팍이 커크의 팔을 잡아 돌려 세웠다.
-함장님. 계획을 세우는 것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계획? 어떤?
벌칸의 눈이 이상하게 그를 훑었다.
-지금 함장님께선 답지 않은...
그리고 땅이 크게 울렸다. 그들은 한 번 기우뚱거렸다. 시야가 진동하는 데에 커크는 위액이 역류하는 기분이 들었고, 그 메스꺼움에 데자뷰가 들었다. 어디서 느꼈더라. 차마 기억할 수는 없었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던 땅이 멈추자 뭉게 구름이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아니. 단순한 구름이 아니다. 먼지. 그것도 아주 커다란 흙먼지의 구름이었다. 키 큰 나무들의 위로 흩뿌려지는 연기같은 먼지의 폭풍에 숲이 춤을 추듯 넘실거렸다. 커크는 중심을 잡는 스팍을 뒤로하고 비틀거리며 그 쪽을 향해 뛰었다. 함장님! 뒤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으나 멈추지 않았다. 그는 풀과 나뭇가지를 제치고 숲으로부터 튀어나왔다. 숨이 멈췄다.
-...스트라토스.
하늘 섬이다.
모든 세상은 반 쪽에 불과해요. 온전한 하나가 되는 그 무엇도 없기 때문이죠. 이해가 가지 않나요? 하늘과 땅. 물과 불. 양극과 음극. 남자와 여자. 모든 개체는 유일무이하자 동시에 불완전한 존재에요. 저의 존재성 만으로는 온전하게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이겠죠. 카오스와 노모스에 대해 들어봤나요? 사람들은 카오스의 반대가 코스모스라고 말하곤 하죠. 하지만 질서 역시 무질서의 일부분에 불과한 법. 세상은 너무나도 황폐하고 혼돈으로 가득 차 있었고 우리는 그 속에서 평화를 갈구했어요. 무질서의 반쪽이자 연인을 찾아주어야 했을 때, 위대한 바안-나와 플락-토스께서 말씀하셨죠. 나를 거스르라. 곧 그것이 진리요 우주와 만물의 평화이니. 그리하여 우리의 조상의 조상들은 세기의 경전에 쓰인 대로 행할 수 있었지요. 모든 중력을 거슬러 우리는 카오스로부터 노모스를 찾았어요. 반쪽과 함께 공존하자 동시에 서로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마치 게브와 누트가 하나이나 영영 만날 수 없는 것처럼 말이에요. 우린, 하늘이 되었어요.
만약 거대한 한 마리의 고래가 땅을 짊어지고 허공을 부유한다면 그와 같은 모습일 것이다. 섬은 섬이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로 커서 하나의 자그만 국가가 머리 위에 떠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는데, 어찌나 높이 있는지 그 모양이 고작 우주 함선 하나를 보는 것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경외감. 커크는 자신이 처음 스타쉽을 보았을 때의 그 가슴 벅차는 경외감을 다시 한 번 느낀다. 그건 불가항력이다. 커크는 헐떡거리며 심장을 목구멍 밖으로 뱉어낼 것처럼 흥분하고 있었다. 벌어진 눈은 튀어나올 것만 같았고, 감정의 벅참에 몸부림치는 하나의 인간 위에서 하늘 섬은 유유히 움직이며 멀어졌다.
망연한 눈으로 점처럼 멀어지는 섬을 보던 커크는 제 옆에 몸을 숙인 스팍을 돌아보았다.
-다시 돌아올까?
-확신할 수 없습니다.
-저것이 정말로 스트라토스라면 이 곳은 아다나일 가능성이 높아. 하지만 아다나에 이런 환경을 가진 자연이 존재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어. 트로글라이트 조차 보이지 않아. 그런데, 만약 정말로 아다나라면? 아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저건 하늘을 날고 있어.
-제 추론으로는...
-이치에 거스르는 것이지. 불완전한 존재. 그렇다면 저건 노모스일까.
-지금 무슨 말씀을...
-그럼, 우리가 밟고 서 있는 이 곳은 카오스가 되는 것인가.
커크는 일어나 주변을 둘러 보았다. 이글거리는 태양과 그 밑에서 넘실대는 푸른 대자연을 지닌 숲이 끝 없이 제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머리 위에서 그들을 굽어보는 우람한 나무들과 얼기설기 엮인 덩굴, 벌레의 낮은 울음소리와 그 모든 것이 속삭였다. 그건 아까와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 누구에게도 침범받지 않은 세계. 방치되고 버려져 제 멋대로 자라버린 세계에 자리잡은 생명체들이 일렁거리고 수군거렸다. 길들여지지 않은 곳에 질서란 없다.
도망가야한다. 하지만, 어디로? 비틀거리는 커크를 스팍이 부축했다. 태양은 머릿가죽을 태워버릴 것처럼 타올랐으나 커크는 오한을 느꼈다. 나가자. 안전한 곳으로. 어디로든 좋아. 스팍은 침묵하던 입을 열었다.
-예. 우린 여기서 나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