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팁배너토니 2차대전AU
스팁배너토니 2차대전AU 미완
카펫 위로 흙발이 굴렀다. 두터운 굽이 박힌 부츠의 밑창에서 떨어져 나온 흙덩이가 바닥을 뒹굴자 부츠의 주인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사람을 보았다. 금발에 푸른 눈, 큰 키와 체격. 그 누구와 견줄 것도 없이 완벽한 외향의 사내는 금방이라도 나치당의 전단지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스티브 로져스는 감히 자신의 카페트를 흙발로 더럽힌 하사를 향해 너그러운 마음으로 괜찮다는 손짓을 해 보였다. 원래 그는 이 정도의 일로 언성을 높이거나 할 만한 성격도 아니었거니와 지금 자신의 눈 앞에서 동경의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하사는 곧 그에게 만족스러운 정보를 털어 놓아야 할 테니 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하사는 나름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그에게 보고를 했다.
"그 분을 찾았습니다."
그 분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스티브 로져스가 모를 리가 없다. 미소를 지으며 작은 칭찬의 말을 건네고 하사를 물렸다. 하사가 문을 닫고 나간 자리에는 그가 밖에서 이끌고 들어온 더러운 흙덩어리만 뒹굴 뿐이었다.
스티브는 창문 가에 몸을 기대었다. 완연한 봄이었다. 그의 필요 이상으로 거대한 저택의 뜰에 심어진 희고 노란 꽃들이 그 꽃봉오리를 피워내고 있었다. 분명 정원사가 그에게 꽃의 이름들을 가르쳐 주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네모네 였던가. 정원을 둘러 싼 담장 너머로는 기이할 정도로 평화로운 베를린의 시내 외곽이 이어져 있다. 붉고 검은 색으로 치장된 갈색의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즐비한 도시는 너무나도 완벽했으나 그만큼 완벽했기 때문에 현실성이 부재되어 있었다. 그가 어린 시절에 기억하는 베를린이라는 도시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상당히 유복한 가정에서 좋은 교육을 받으며 부족할 것 없이 살았다. 그의 아버지의 아버지는 미국 태생이었고 그 옛날 까마득한 시절에 독일로 건너와 독일인 할머니와 결혼을 했다. 스티브의 티 없는 금발과 푸른 눈은 그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고 그의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벽에 걸린 가족 사진은 흠 잡을 데 없는 그림같은 아리안 인들로 가득했다. 청년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그는 가정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모든 이들이 부러워하는 그림같은 저택 안에서 그림같은 사람들에게 둘러 쌓인 채, 그는 그 중에서 동떨어 진것만 같은 한 남자에게 수학과 과학, 음악과 미술, 지식과 철학, 삶과 우주 그 모든 것에 대해 익혔다. 딱, 지금처럼, 피어나는 봄과 같은 날에 찾아왔던 남자는 어린 스티브 로져스를 난생 처음으로 열정이라는 것에 들뜨게 만들었었다.
창문 너머로 나비가 한 마리 날아들었다. 스티브는 손으로 턱을 괜 채 그것을 무심한 눈으로 관찰했다.
끈질긴 억제와 복종. 그것은 상대방을 지루하게 만든다. 조련되어가는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의 습성을 지니지 못하게 된다. 어릴 적 스티브는 서커스를 보러 구경을 간 적이 있었다. 아름다운 어머니는 그의 옷매무새를 만져주며 자신의 아들을 들뜨게 만들었다. 그 곳에는 불을 삼키는 사람과 몸에 칼을 꽂는 사람, 공을 굴리는 코끼리도 있단다. 서커스의 거대한 텐트는 사람들을 어둠 속 미지의 공간으로 집어 삼키는, 현란한 색으로 치장한 더러운 것의 느낌을 주었다. 지금 비유하라고 하면 창녀에 비유할 것이다. 공연을 보던 스티브는 무의식중에 내뇌를 파먹는 해로운 사상에 전염되는 것만 같아 옆에 앉은 남자의 옷깃을 잡았다. 남자는 자상하게도 그의 어깨를 끌어 안으며 괜찮다고 말해 주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남자는 스티브에게 커다란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주었다.
사람은 환경에 적응하고 압력에 순응하는 생물입니다, 스티브. 남자가 자상하게 말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고통스러운 억압 속에서 비순응 하는 것이 바로 인간과 동물의 차이입니다.
아아. 그렇고 말고요, 선생님.
하사는 그를 어느 낡은 건물 앞으로 이끌었다. 땅거미가 지는 시각 시내 중심에서 한참 떨어진 외곽에 위치한 오래 된 건물은 주변 사람들이 그 존재를 인식하기에도 어려워 보일 정도로 눈에 띄지도 않고 다른 복잡한 도시 구조와 건물들 사이에 묻혀 오묘하게도 가려져 있었다. 그 녹슬은 현관문 앞에서 스티브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한쪽 손으로 다른 쪽 손목을 쥔 채 느릿하게 문질렀다. 하지만 그 정도가 스티브의 은근한 흥분을 나타내는 전부였기 때문에 그와 함께 있던 하사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하사는 그저 자신이 그 유명한 스티브 로져스라는 인물의 명령을 수행했다는 것에 굉장한 자기만족을 겪고 있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보는 것마저 하사에게는 영광이었다. 스티브는 자신의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마치 그 옛날, 중요한 자리에 참석해야 할 때마다 남자가 돌보아 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풀 먹인 듯 먼지하나 묻지 않은 단정한 칠흙 색의 제복은 자로 잰 것처럼 스티브 로져스의 몸에 빈틈없이 달라붙었다. 그는 군모를 고쳐 쓰고 눈빛을 주었다. 하사는 경례를 붙인 후 말없이 차에 올라 사라졌다.
스티브의 군화는 어두운 계단을 하나씩 밟고 내려갔지만 그의 시간은 반대로 역류하고 있었다. 마치 심장 깊숙한 곳에서 거대한 댐이 터지고 그 안에 갇혀 있던 온갖 더러움을 담은 물줄기가 사방으로 뻗어나가 사지를 훑어내리는 것 같았다. 손 끝이 저릿할 정도였다. 그 자신이 최근에 이리도 무언가를 기대해 본 적이 있던가? 어린 시절 그 숨소리, 손동작 하나 마저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 남자와의 추억이 파노라마처럼 망막 안에서 스쳐 지나갔다. 흐릿한 백열 전구 빛에 기이하게 흔들리는 자신의 그림자는 욕망의 화신이 되어 살아 일렁일 것만 같았다. 계단을 끝마쳐 어느 문 앞에 도달했다. 스티브는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자신의 혁대를 훑다가, 쇠로 된 문고리를 잡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브루스 배너는 자신의 기준 하에서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는 체코에서 태어났지만 그 곳의 시민은 아니었다. 살아오면서 전전한 수많은 나라와 도시들의 이름은 양 손으로 꼽기도 힘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딱히 험난한 삶을 살아 오거나 수십 개의 도시들을 전전할 정도로 방랑벽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자신에게 닥쳐오는 물의 흐름과도 같이 자연스레 파생 된 움직임의 철학을 거스르지 않았을 뿐이었다. 돌, 바람, 물, 빛, 신이 창조한 그 모든 만물과도 같이 인간에게도 모빌리티라는 것은 부재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그는 자신이 독일이라는 나라에 안주하게 되었던 것으로 인해 신을 원망하거나 해본 적은 없다. 단지 순리라는 것이 인간의 권위를 처참하게 능욕하는 장면에 대자연 앞에 무릎 꿇었던 것이었다.
이제 중년의 나이에 머물고 있던 배너 박사는 자신의 몸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사실에도 조금 탄식했다. 예전만큼 오랜 시간동안 환자들을 돌보기가 힘에 벅차다.
"그러길래 내가 충분히 먹어 두라고 했잖아요."
토니 스타크의 응석과도 같은 질책에 배너는 조금 웃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사치였다. 음식, 술, 수면, 휴식... 자유. 충분히 먹는다는 말은 그가 기억하는 '충분히'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다고 느꼈지만 토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몇 끼 거른다고 죽지는 않아요, 토니."
"박사가 그렇게 좋아하시는 환자 돌보기를 계속 하려면 조금씩이라도 배를 채우는 게 좋을걸요."
배너는 토니가 저런 식으로 말은 해도 그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배너와 토니 사이에 나이차는 많지 않아서 둘은 꽤나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갈색 머리카락과 턱수염에 짙고 큰 눈, 속눈썹까지 짙은 색에 피부색마저 그을린 토니 스타크는 국적을 종잡기 애매한 외관이였으나 폴란드 태생이었다. 그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이며 유쾌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와 반대로 유쾌함을 가장한 우울함을 끌어안고 사는 배너는 토니와 친하게 지냈다. 어쩌면 그들 무리에서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이 그들을 포함해 손에 꼽히는 수라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토니는 들고 있던 연장을 내려놓고 수리를 마친 총을 한 쪽에 밀어 놓았다. 그리고 검정이 잔뜩 묻은 손으로 위스키를 잔에 따라 한입에 들이켰다. 술은 사치였다. 하지만 사람들의 목숨과 생필품을 책임지고 있는 배너와 토니는 그런 사치를 종종 누리곤 했다. 게다가 토니는 그런 것을 거절할 만한 성격이 전혀 되지 못했다.
"오늘은 좀 어땠어요? 온종일 방구석에 처박혀 물건이나 고치고 앉아있으려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네."
토니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아마 천재 소리를 들을 사람이 있다면 그 중 하나는 당연히 토니 스타크일 것이다. 수학 과학은 물론 5개 국어를 구사하는 토니는 어디서든 움츠러들지 않고 자신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라 주목받지 않기 힘들었다. 이런 인재가 쓰레기 인종 취급 받으며 숨어 살아야 하는 시대에 태어나다니 세상 참 불공평하다고 느꼈다. 배너는 들고 있던 책을 덮어서 내려 놓았다.
"카밀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오."
"고통 없이 가셔서 다행이죠. 그 분도 이제 때가 된 것을 알고 있었거든요."
"분명 저승에 가서도 박사한테 감사할거요."
토니가 슬픈 표정을 보인 것은 스치듯 잠시였고 그는 바로 위스키를 한 잔 더 따랐다. 배너는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나타샤의 말에 의하면 제 3구역에 있는 사람들이 이쪽으로 몰려 도망 왔다고 하더군요. 아마 SS알게마인이 대대적인 소탕을 계속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거봐요, 이렇게 될 줄 알았다니까."
"아직도 레지스탕스를 생각 중인 겁니까?"
"내가 처음이자 유일한 사람이 아니에요, 박사. 알다시피 여러 번 이 문제가 우리들 사이에서 거론이 되었고 저번에는 거의 중심가에서 업라이징이 일어나지 않았소."
"하지만 토니."
"벌써 4년입니다. 도망갈 곳도 없어요. 배너 박사, 당신은 이런 곳에서 평생 도망만 다니며 살다 잡혀서 끔찍한 죽음을 겪는 것을 운명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난 아닙니다. 설령 죽게 되는 일이 있더라도 내가 원해서 죽을 거지 저 흡혈귀같은 놈들 손에 잡혀 죽지는 않을 거라는 말이요."
배너는 입을 다물었다. 토니는 이 일에 대해서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베를린의 더러운 거리를 누벼야 하는 환경은 그들에게 전염병과 같은 쓰라린 흉터를 주었고 동시에 강제적 억압에 의한 분노를 퍼뜨리게 했다. 배너는 이 일이 당연시하게 일어날 것이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고, 토니가 그 중심 인물 중 한 명이 되리라는 것 역시 그를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예상할 수 있었다. 토니 스타크는 그의 모든 것을 따져 보았을 때 착한 사람이라고 단정지어 말하기는 힘들었으나 그 누구보다 최선의 선택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필요에 의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토니의 자유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았다. 그는 어디서든 자유로웠고 누구에게나 잠재되어 있는 들끓는 염원과 희망을 끌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의 욕망은 건강하고 직설적이었다. 배너는 그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을 가졌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아마도 그 역시 토니의 그런 면에 끌렸던 것일지도 모른다.
토니는 배너의 얼굴에 드리워진 표정과 그림자를 보고 하하 웃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배너의 한 손을 단단히 쥐었다. 기계를 만지는 것에 익숙한 사람의 굳은 살 배긴 손아귀가 무시할 수 없는 든든함을 주었다.
"걱정 많으신 박사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글로 씌여져 눈에 보일 정도네요."
"토니."
"걱정 말아요 닥터. 어차피 난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 당신이 죽는 걸 보기 전에는 죽지 않고 싶으니까."
토니는 그렇게 말하며 배너와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배너가 그의 시선에서 뭔가를 읽거나 채 알아차리기도 전에 토니는 다시 몸을 돌려 또 다른 물건을 수리할 준비를 했다. 배너는 잠시 그 곳에 있다가 얼마 지나지 않고 조용히 빠져 나왔다.
꺄악-! 어느 방구석에서 소녀가 비명을 질렀다. 몇 명 없는 작달막한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구석으로 몰린 쥐새끼들처럼 갈팡질팡 하다가 코너로 몰려 서로를 부둥켜 안았다. 그들의 눈 앞에 보이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그의 녹아날 듯이 검은 옷은 셀 수 없는 사람들의 죽음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아름다운 금발과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 조각으로 빚은 것처럼 완벽한 얼굴과 몸은 천사의 탈을 쓴 저승사자였으며 그들에게 덮쳐 올 죽음의 그림자였다. 사람들의 비명이 시끄러운지 눈 끝을 슬쩍 찌푸린 검은 제복의 청년은 주변을 조금 둘러보다가, 한 남자를 발견했다. 그리고 미소지었다.
그 옛날과 똑같다. 시간이 이토록 지났는데 왜 당신은 변하지를 않지. 부드러운 잿빛 머리카락에 순한 눈매. 당황함에도 움츠러들지 않는 당당함. 어릴 적 기억하는 그 모습과 똑같다.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더 이상 스티브 그를 보며 웃고 있지 않다는 것일까. 스티브는 상관 없다는 듯이 경악에 찬 표정을 짓는 브루스 배너를 향해 웃었다.
브루스 배너는 어린 시절의 스티브 로져스를 쉽게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아마 평생을 통틀어 그의 뇌리에 가장 인상깊게 남은 사람들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인형같은 외모를 가진 일곱 살의 스티브는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어미와 함께 정원에 있었다. 꽃의 이름을 알려주던 어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스티브는 부드러운 금발에 유리 구슬처럼 맑은 푸른 눈동자, 덧없는 흰 피부를 가진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그 누구라도 한 번 보면 사랑에 빠질 것만 같은 외모. 천사가 존재한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어린 스티브는 그가 다가가자 눈을 마주쳤다. 그 어린 나이에도 스티브는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사람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볼 수 있는 당당함을 가졌었다. 아이의 눈은 배움을 향한 열정으로 반짝였다. 예쁘고 총명한 아이. 선생으로써 그보다 더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
스티브는 배우는 것이 빨랐다. 몇 번 선생질을 해본 적이 있는 배너는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어떤 수준으로 얼마나 빨리 배울 수 있는지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데 그런 그에게 있어서 스티브를 가르치는 것은 놀람과 즐거움이 가득 찬 일이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오랜 가르침에 쉽게 지치지 않았고, 흥미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질문을 하고 끝까지 이해해서 자신의 지식으로 만들어야 성미가 차는 아이였다. 똑똑하고, 사고가 깊다. 그럼에도 자만하지 않고 언제나 예의 발랐으며 활기에 차 있었다. 조금씩 어린 아이의 티를 벗어 가면서 단정한 외모가 드러나 인기가 많았을 것이 분명하지만 스티브의 본성은 배너가 알아오던 기간 하에 전혀 변질되지 않았다.
스티브가 열 살인가 열 한 살이 되었을 때였다. 그들은 저택의 가장 높은 층에 올라가 커다란 창문을 통해 밤하늘을 관찰했다. 여름의 밤하늘에 박혀있는 온갖 크고 작은 별들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배너는 망원경을 스티브에게 넘겨 주었다. 점차 소년의 몸이 되어가는 아이는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관찰하다가 갑작스럽게 질문했다. '선생님. 인간이 저 곳에 갈 수 있을까요?' 그 질문에 배너는 미소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자신도 어렸을 적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럴 겁니다. 사람의 능력은 한정지을 수 없으니까요.' 스티브는 여전히 망원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아이는 또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람은 무엇이던 가능한 건가요?' 배너는 창틀에 등을 기대었다. 그리고 고개를 틀어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예. 그것이 신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는다면요.'
그 외에 자잘한 기억들을 더불어 배너는 아이가 점차 자라는 것을 직접 지켜보았다. 열 다섯의 스티브는 일곱 살의 스티브와는 달랐다. 무섭도록 성장한 스티브 로져스는 배너로 하여금 세월의 흐름과 가르침의 즐거움에 대해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었다. 스티브는 어느 날 해가 진 후에 배너가 머무는 방에 찾아왔다. 왠만해서 스티브가 찾아오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조금 놀랐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마침 배너는 짐을 싸던 와중이었다. 스티브는 완연한 청년의 몸을 하고 있었다. 청소년의 나이였으나 성장이 빠른 아이는 이미 그만큼 커버려서, 넓은 골격에 길고 탄력 있는 다리, 각진 얼굴과 탄탄한 근육을 감출 수 없었다.
'가지 마세요.'
스티브가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어린 나이였어도 무언가를 직설적으로 부탁하는 일은 거의 없었고 강요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스티브는 담담한 얼굴이었지만 이마 위로 흘러 내려온 금발 밑의 푸른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 아직 감정을 채 감추기 힘든 나이였기에 이해할 수 있다. 스티브는 얼굴만큼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이 아버지에게 부탁해 거처를 마련해 줄 수 있다고 했다.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평생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마련해 주겠다고 했다. 솔직히 자신의 제자가 그리도 진심을 담아 하는 말에 그를 십여년이 넘도록 가르쳐 온 선생인 브루스 배너로써 마음이 절절해지지 않았다면 거짓이었을테다. 하지만 배너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때 자신이 스티브에게 무슨 말을 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랜만입니다. 선생님."
스티브 로져스가 그를 향해 웃었다. 예전에 매일같이 보아왔던, 그 티 없는 미소다. 보는 사람을 홀려버릴 것처럼 완벽한 사람. 완연한 성인 청년의 모습을 한 스티브는 그 누가 보아도 매력적인 사람으로 자랐다. 하지만 검은 제복을 입은 오랜 제자가 건네는 인사를 마주하는 브루스 배너는 차마 웃음을 짓기가 힘들었다.
토니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옆에서 조수 역할을 해주던 청년이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니네, 아무것도. 그냥 느낌이 찝찝해서."
이상하게 뒷목이 뻐근하다. 오랜 시간동안 작업을 해서 그런 것일까. 토니는 잠시 쉬자면서 연장을 던지듯이 내려 놓았다. 그들의 앞에는 수리가 거의 다 되어가는 바이크가 한 대 있었다. 성능은 좋지 않지만 대충 고쳐 놓으면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얼마나 오래 일했는지 게러지가 습기로 가득 차고 꿉꿉했다. 토니는 어깨에 걸린 수건으로 목덜미의 땀을 닦으며 의자에 털썩 앉아 술병을 집었다. 청년이 한 쪽에서 술좀 작작 마시라는 시선을 주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1942년. 여름은 여느 때와 다름 없이 더웠다.
토니는 자신이 더 손봐야 하는 물품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몇 가지만 더 고치면 될 것 같다. 총이나 바이크 같은 것은 여러 모로 쓸모가 많을 것이니까 최대한 빨리 고치는 것이 좋다. 토니는 상황 판단에 빨랐고 어떤 것이 최우선시 되어야 하는지 잘 알았다. 이 베를린이라는 적진의 중앙에서 살고 있는 그들이 살아남으려면 당연히 자신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것들이 먼저 필요하다. 상대방이 자신을 죽이기 전에 방아쇠를 당길 수 있어야 하고, 그들 틈에서 살아남아 싸울 수 있도록 힘을 길러야 한다. 토니는 어떤 방면에서는 늘 입에서 술을 떼지 않는, 나이와 상황에 맞지 않게 유쾌한 남자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이성을 잃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 역시 살아남기를 그 누구보다도 소원하는 남자였다.
사람은 절망에 가득 차면 눈 앞의 아무것도 보지 못할 수 있다. 자신을 덮쳐 오는 암흑에 눈이 멀어 그 어둠이 자신을 삼키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하지만 토니는 달랐다. 시궁창에서 도망다니는 쥐처럼 사는 한이 있더라도 그는 포기를 몰랐다. 그는 자신의 능력과 매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고 그것을 사용할 줄 알았다.
그는 목구멍으로 술을 넘기며 브루스 배너를 떠올렸다. 토니 그가 자신의 능력을 내세우며 지키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 자신과는 상극에 위치한 사람. 현명하고, 누구에게나 자상한.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특별히 잘해 주지는 않는. 어쩌면 모든 것에 지극히 관심이 없거나, 박애주의자거나, 혹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거나. 자기중심적인 면이 없잖아 있는 토니에게 브루스 배너라는 사람은 어쩌면 받아들이기 힘든 종류의 사람일 수도 있다. 자신을 감추려고 하는 사람에게 토니는 그를 떠올리고 설명하려 할 때마다 ~할 것이다, 혹은 ~하다고 생각한다 라는 식의 가정 여구를 붙일 수 밖에 없었다. 어쩌면 너무나도 약한 사람.
"스타크 씨."
생각에 잠겨 있던 토니는 자신을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나타샤 로마노프는 늘씬한 다리를 움직여 그에게로 걸어 왔다. 그녀가 모자를 벗자 붉은 색 머리카락이 쏟아지듯 흘러 내렸다.
나타샤는 러시아 출신 답게 거칠며 무서운 것을 모르는 성미로 남자가 못하는 일도 해결하는 능력을 가졌다. 스파이처럼 은밀히 활동하는 것에 특기를 보이는 그녀는 아마 또 무슨 소식인가를 가져왔을 거다. 토니는 술병을 내려 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일인가? 대낮에 일터에 찾아주는 건 고맙지만 사람들이 오해한다네."
"A13건물이 습격 당했어요."
말장난으로 나타샤를 맞이하던 토니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졌다. 습격을 당하는 건물은 수도 없이 많다. 그와 더불어 죽어가는 사람의 수 역시. 하지만 그 건물의 코드를 듣는 순간 늘 상황에 따라 침착하게 응수하는 토니 스타크도 잠잠할 수는 없었다.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듯이 긴장하며 눈을 부릅뜨는 토니를 향해 나타샤가 이어 말했다.
"그런데 모두 멀쩡해요. 아무도 다치지 않았어요."
"뭐?"
"검은 제복이었다는 걸 보니 SS 사람일텐데 혼자 왔다 갔다는군요."
"그게 말이 돼? SS 놈이 봤는데 어떻게 멀쩡할 리가..."
"그런데, 배너 박사님을 데리고 갔어요."
토니는 방을 뛰쳐 나갔다.
몇 여년 만에 발을 들여놓는 저택은 바뀌지 않았지만, 바뀌었다. 벽에 걸려진 초상화들이 그랬고 물건이나 책에서 찾아볼 수 있는 붉고 검은 스바스티카 마크들이 그랬다. 그랬기에 오면 안 될 곳에 발을 들인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고, 분명히 눈을 감고도 길을 찾을 수 있었던 복도나 방 등이 왜 이리도 이질적인지 소름이 돋았다. 금방이라도 모퉁이에서 누군가가 돌아 나와 그에게 총을 겨눌 것만 같았다. 하지만 물론, 그의 뒤에 서 있는 스티브 로져스가 그것을 허락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나마 긴장을 자제할 수 있었다. 그 생각에 배너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 되었다. 그 오랜 세월 이후에도, 수많은 역사의 변환점을 거쳐서도, 사신의 옷과 같은 검은 제복을 입고 있음에도, 그 자신은 스티브 로져스를 꽤나 신임하고 있었다.
그리고 배너는 자신이 십 여년도 더 머물던 방을 보자 할 말을 잃었다. 그가 나간 후 그대로, 한 치도 바뀌지 않았다. 저택의 그 모든 곳이 바뀌어도 이 곳 만큼은 단 하나도 달라진 점이 없었다. 배너는 침대에 천천히 앉았다. 끼익 하고 낮게 목재 가구가 우는 소리도 똑같다. 손바닥 아래에 스치는 낡은 이불의 감촉 역시, 그 때 자신이 덮고 자던 그 이불이 맞다. 먼지 하나 쌓이지 않았고, 그 어느 물건 하나 몇 센치라도 자리에서 벗어난 것이 없다. 배너는 마치 자신이 시간을 거슬러 옛날 그 시절 어린 독일인 아이를 가르치기 위해 고용되어 이 집에 들어온 날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이 이 집을 떠나기 위해 짐을 싸던 날 역시 겹쳐졌다.
"기억 나십니까?"
배너는 시선을 들었다. 그를 뒤따라 온 스티브가 문턱에 기대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옅은 미소를 띈 스티브의 얼굴은 기뻐 보였다. 그의 단정하면서도 완벽한 외향에 늘씬하고 남자다운 몸을 감싸고 있는 검은 제복이, 슬픈 일이지만,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는 것을 무시할 수 없었다. 스티브는 자신의 생각에 빠져 있는지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 넘기며 창 밖을 보았다. 커튼이 활짝 열린 창문 너머에서 여름 공기가 잔뜩 밀려 들어왔다.
"제가 이 방에 마지막으로 찾아 왔을 때 말입니다."
"아아, 기억하죠."
"선생님이 떠나신 후로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계속 변화는 일어나고 있었지만 배너는 딱히 그것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스티브가 말하는 변화라는 것이 어떤 것을 말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계속 이어져 오는 나치당의 번성과 사회에서의 시선, 그리고 무언의 압력. 그것은 이제 정당화된 폭력과 살해로 이어졌고 변화에 적응하며 이익의 밑에서 순종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시하게 되었다.
전쟁은 너무나도 많은 무고한 생명을 빼앗아 갔다. 브루스 배너는 그 옛날 이 저택에 살고 있었을 때 날이 갈수록 자신에게 무던히도 쏘아지던 눈초리를 기억한다. 물론 그런 것을 느끼기도 전에 제 3제국의 이야기가 거론되기 시작할 때부터 배너는 로져스 가를 나올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불가피하면서도 당연한 결정이었다. 이 모든 것이 아름다운 저택에서 자신의 존재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 날 밤 어린 스티브가 시선으로 끈질기게 매달려 오는 것을 기어코 무시하며, 로져스 가에서 나왔던 것이었다. 로져스 가를 자신으로 인해 위험에 처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이유에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왔던 사람들을 향한 인간적인 도덕심이 있었고, 무엇보다는 그토록 아껴왔던 자신의 제자 때문이었다.
"저는, 많이 걱정했어요."
스티브가 안도감 섞인 숨을 내뱉음과 동시에 그렇게 읊조리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배너는 시선을 떨구었다.
아니... 생각해 보면, 그는 그저 겁에 질려 달아난 도망자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답시고 치장하여 어쩌면 가장 가까운 위험이 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도망가려고 했던 자기본능 이었을지도, 모른다.
낮은 굽 소리를 내며 창가로 다가간 스티브가 가벼운 손짓으로 배너를 불렀다. 그 동작에는 지나친 따스함과 미소가 스며들어 있어서 배너는 차마 거절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것은 스티브가 그를 찾아 A13 건물의 지하방으로 들어와 손 내밀 때도 그러했다. 배너는 스티브의 옆에 서서 그의 시선을 따라 창문 밖으로 늘어진 정원을 내려다 보았다. 노을빛이 희고 노란 꽃들을 불에 타오르는 듯이 물들였다.
"아..."
배너는 그 아름다운 광경에 탄식과도 같은 신음을 냈다. 그 장면은 예전 그가 이 방에 살고 있었을 때 자주 보던 풍경이다. 배너는 더 이상 그 시간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눈은 그 기억 속에 안착 된 과거로 돌아가 순수한 미학적 욕구를 불러 일으킬 뿐이었다. 금방이라도, 이 곳에서 뛰어 내리면, 저 불타오르는 꽃의 무덤 속에 떨어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스티브는 그런 선생을 웃음이 깃든 눈으로 바라 보았다. 방 안으로 쏟아지듯 들어 온 노을이 그들 모두를 질척하게 젖게 만들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듯한 기분을 들게 만들었다. 스티브는 이제 자신보다 키가 작아진 선생을 따스한 눈빛으로 내려다 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 기다릴게요Ich warte hier."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스티브에게로 돌려졌다.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과 기쁨을 머금은 푸른 눈동자, 호선을 그린 입매, 스티브 로져스의 모든 아름다운 오감이 자신에게 향해 있다는 것을 깨달은 배너는 이상하게도 더 이상 당황스럽지가 않았다.
여기서 기다린다, 고 떠나는 그의 등을 향해 말했던 제자는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졌다. 그 수많은 셀 수 없는 시간동안 자신을 이 곳에서 기다려준 스티브였다. 스티브가 손을 뻗었다. 배너는 다가오는 그를 마주 끌어 안았다.
사람은 누구나 부서질 것만 같은 환상을 품고 산다.
터질 듯이 부풀어오르는 환상은 꿈이라는 아름다운 날개를 달고 비상한다. 희망이라는 바람을 타고 수십, 수백 명의 이카루스들은 태양을 향해 돌진한다.
그리고 끝에 가서야 그들은 자신의 녹아버린 아교를 보며 자신의 환상은 그저 더러운 욕망의 형체였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토니 스타크는 술잔에 위스키를 부었다. 그는 그것을 들고 방 안을 둘러 보았다. 여러 명이 함께 생활하는 방은 너저분했으나 한 쪽 구석은 눈에 띄게 깔끔한 것이 보인다. 단정하게 정돈 되어있는 모포와 몇 가지의 차곡차곡 정리된 소소한 물건들이 있었다. 토니는 가슴이 갑자기 시큰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건 쓰라리면서도 숨을 턱 막히게 하는 일순간의 미어지는 고통이었다. 그는 몇 걸음을 걸어 몸을 숙였다.
몇 권의 의학 관련 책과 옷가지, 그리고 새까만 표지의 성서가 보였다. 남자의 모든 물건들은 그를 떠올지 않게 할 수가 없었다. 그 곧게 펴진 등이나 활자를 찬찬히 훑는 조용한 시선 따위가 머릿속에서 그려지듯 떠올랐다.
'흥분하지 말아요 스타크. 침착해요.'
대낮에 아무런 위장이나 준비도 없이 건물 밖으로 뛰쳐 나가려는 토니를 나타샤 로마노프가 어깨를 잡아 돌려 멈춰 세웠다. 그녀는 당신만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걱정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비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자살 행위라고도 했다. 토니는 그가 정확히 뭐라고 씨부렸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너희가 걱정하는 건 더 이상 병수발을 받아 줄 의사가 없어져서 그런 게 아니냐는 듯이 비꼬았던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이성적인 나타샤 로마노프에게 뺨을 맞았을 리가 없다.
'잘 생각해 봐요. 그는 아무도 건드리지 않고 박사님만을 데리고 갔어요. 서로를 단번에 알아 보았다더군요. 마치 잘 아는 사이처럼.'
'......'
'내가 충분한 정보를 알아내기 전까지는 혼자 섣불리 움직이지 말아요.'
잘 아는 사이라. 토니는 배너와 알아온 시간에 비해 그에 대해 아는 것이 많이 없었다. 궁금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방이 일부러 잘 이야기하지 않는 과거를 꼬치꼬치 캐묻는 취미도 없었다. 배너와 대화 도중 몇 번인가 과거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었다. 하지만 그가 SS알게마인의 단원과 친분이 있다는 이야기는 귓등으로라도 들어본 적이 없다. 사람들은 벌써부터 불안하게 수근거리고 있었다. 내통자. 그 자상하고 친절하던 배너 박사가 혹시 동족을 팔아치우는 인간들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하고.
토니는 성서의 가죽 표지 위를 가만히 손으로 쓸다가, 위스키를 한 번에 들이키고 몸을 일으켰다.
해로운 상상은 거대한 암흑을 불러들이는 촉매제와도 같다. 그 것이 전신을 뒤덮어버리기 전에, 강박적인 이성과 타협해야 하는 것이다. 토니는 손으로 무겁게 얼굴을 쓸어 내렸다. 그들은 하나같이 해부되어버린 짐승의 파편들과 같았다. 용도의 실용적임과 그것의 외향, 맛, 냄새 따위에 따라 구별되어 버리는 끔찍한 도살장의 향연 같았다. 그것에 한해서는 우리나 혹은 당신들이나 다를 것이 없다.
죽이려고 발버둥치는 것과 살아 남으려고 발버둥치는 것. 어차피 둘 다 인간의 지극적인 본능 그 자체가 아니던가.
"토니, 준비가 끝났습니다."
한 청년이 문을 열고 들어오며 말했다. 토니는 고개를 끄덕이고 모자를 눌러 썼다.
적어도 지켜야 할 것이 있어 움직이는 사람은 달랐다. 우리들이 존재하는 세상의 그 모든 비인간적 요소들을 비웃어버리는, 그 애착이란 감정 말이다.
스티브의 부모는 모두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의 어미는 배너가 저택을 떠난 후 삼여 년 쯤 후에 몸이 약해져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고, 그의 아비는 독일 육군Wehrmacht 장교로 전쟁터에 나가는 도중 연합군의 폭격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스티브는 그 모든 말을 굉장히 무덤덤하게 해서 마치 옆집 할아버지가 기르던 늙은 개가 죽었다는 식으로 들렸다. 그것에 배너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스티브에게 애인이 있느냐고 물었다. 스티브는 그 질문에 은근히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물어 오는데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 동안 만나오지 못한 공백을 채우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스티브는, 일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배너가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 그의 시야 안에서 벗어나는 적이 드물었다. 그들은 함께 식사를 했고 정원을 산책하기도 했으며, 책을 읽으며 가벼운 토론을 하기도 했다. 스티브가 하는 말을 들으면 나치당의 일원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그는 여전히 예전과 다름 없이 얽메이지 않는 사고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성인의 스티브 로져스가 어릴 적 그가 지니고 있던 무언가를 잃어버리기도 한 건 사실이었다. 대신 그는 성숙함이라던가 느긋함 따위를 드러냈다.
토니 스타크가 건강한 정열이라면 스티브 로져스는 병 든 권태였다. 배너는 그렇게 생각했다.
스티브가 무언가에 흥미를 보이는 적은 드물었고 만약 있다면 그것은 브루스 배너 그 자신과 연관되는 적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의 감추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애정이 부담스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스티브는 배너를 최대한 배려해 주었고 그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게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한 번은 스티브가 신문을 들여다 보는 그의 뒤로 다가와 오페라를 보러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배너가 읽고 있던 페이지의 하단에 유명 오페라의 광고가 있었다. 배너에게는 스티브가 그런 질문을 한 것 자체가 충격으로 다가왔다. 문화 생활? 얼마나 단절 되어 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다음 날 스티브는 상냥한 강요와 함께 그를 차에 태워 오페라하우스로 갔다. 마주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고 그 누구도 배너를 신경쓰지 않았으며, 그들은 발코니 석에서 오페라를 본 후 집으로 돌아왔다.
그 평범함이 배너는 무서웠다. 두려움이 벤젠드린처럼 그를 갉아먹었다.
눈치 빠른 스티브가 배너의 기분을 알아 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방황하는 배너의 손을 잡고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행동했기에 어색함 따위는 느끼지 못했다. 이상하게 스티브가 그에게 입을 맞추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껴져서 그 어느 자의적인 반발도 나오지 않았다. 스티브는 배너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전부 괜찮아 질 거라고 말했다. 그 막연한 위안의 단어가 브루스 배너의 두려움을 모조리 없애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최소한의 위안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