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셰주의 대충씀주의 성의없음주의 안꼴림주의
마침 겨울이었다. 첫 눈이 내린지 얼마 되지 않아 고담 시에서는 파티가 열린다.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주최로 열리는 파티는 수많은 고담시의 그리고 다른 지역의 유명 인사들이 참여하게 되는 윈터볼이었고 아마 그 해 겨울 고담시 최고의 파티가 될 것이었다. 사적인 파티였음에도 불구하고 게스트 수만 해도 적어도 백여 명은 거뜬히 넘는다고, 기자라는 위장 신분을 가지고 있는 클락 켄트가 그렇게 말했다. 다이애나는 그런 류의 파티에 처음 초대되어 본다며 들떴고 배리 앨런은 어울릴 만한 옷이 없는 것 같다며 고민했다. 아마 그 날에 눈이 내린다지. 다이애나가 왠일인지 소녀처럼 웃었다. 화려한 드레스와 멋진 음악이 흐를거야. 화려한 계단과 발코니에는 흰 눈이 쌓일테지. 샹들리에는 댄스홀을 아름답게 비추고. 정말 아름다울 거야. 그런 그녀를 다른 리거들이 웃음 띈 얼굴로 바라 보았다. 온통 분위기가 좋고 따듯했다. 그런 그들 사이에서 한 남자, 할 조던은 퀭한 눈빛으로 브루스 웨인을 쳐다 보았다.
브루스 웨인은 한 쪽에서 팔짱을 낀 채 핸드폰을 확인하다가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검은 머리카락이 자연스레 내려와 그의 차가운 푸른 눈을 드러내는데 할은 아직도 그것이 어색했다. 그에게 있어 배트맨은 항상 음침한 박쥐 흉내를 내는 녀석에 불과했고 그건 그가 브루스 웨인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밝힌 이후에도 여전했다. 혹은 그렇게 생각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할은 남자가 준수한 외모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빛 바랜 듯이 어딘가 시린 피부색에 그에 대비되는 새까만 머리카락은 남자다운 얼굴과 그 몸에 완벽할 정도로 잘 어울렸다. 눈매가 길게 빠진 파란 눈이 그를 향하자 할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것이 전부 기분이 나빠서임은 아니었으나 어딘지 브루스 웨인의 카울을 벗은 맨 얼굴과 그 눈을 마주할 때마다 이질적인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건 낯설면서도 또한 아름다운 것에 끌리는 본능같은 것이라 할은 그 기분을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던 브루스는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무감동한 얼굴을 했지만 말이다. 그들이 잠시 시선이 마주치고 둘 중에 누군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다이애나가 다가와 브루스의 팔에 손을 얹으며 말을 걸었다. 남자는 여전히 무뚝뚝하지만 한결 풀어진 목소리로 그녀의 말에 대답을 해준다. 할은 인상을 쓰며 그들을 보았다. 왠지 모르게 속이 쓰렸다. 그 옆에서 배리가 팔꿈치로 그를 툭툭 쳤다. 둘이 정말 잘 어울리지 않아? 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배리 앨런에 할은 더욱 심란한 기분이 되었다. 뭐야 둘이 사귀기라도 한다는 거야? 배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은 아닌 것 같지만 곧 그럴지도 모르지. 배트맨이 저렇게 잘 생긴 사람일 줄은 누가 알았겠어. 할은 배리를 흘끗 쳐다 보았다. 그리고 그 시선이 향하고 있는 브루스를 보았다. 그림처럼 곧게 뻗은 옆선과 그 관자놀이 위로 내려온 머리칼은 단정하지만 묘하게 흐트러진 것 같다. 할은 애써 시선을 돌렸다. 여자 꽤나 홀렸을 상인데 다이애나만 손해 아닌가? 그의 퉁명스런 말에 배리는 그런가 하고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고 그 틈에 할은 그 자리에서 등을 돌렸다.
파티 당일에는 정말로 눈이 내렸다. 하지만 끔찍할 정도로 춥진 않았다. 부슬거리며 떨어지는 눈은 화려한 조명으로 치장된 파티장의 치장거리일 뿐이었다. 값비싼 드레스와 수트를 차려 입은 사람들이 고급 승용차에서 내려 파티장 안으로 들어갔다. 품격있는 클래식 음악이 울려 퍼졌고 샴페인의 분수가 흘렀다. 할은 그곳에서 기자로서 참석한 클락과 마주쳐 인사했다. 서로의 옷차림에 대해 칭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거의 매일같이 히어로로서의 모습으로만 보다가 이런 장소에서 만나니 색다른 기분이었다. 우아하고 고급스럽게 입은 다이애나와 수수하지만 멀쑥하게 차려 입은 배리 역시 있었다. 할은 샴페인 잔을 손에 든 채 빙글 돌리며 주변을 둘러 보았다. 그래서 오늘의 주인공은 어디 있지? 그가 비꼬듯이 하는 말에 클락이 어렴풋이 웃었다. 그는 이런 자리에서 항상 조금씩 늦곤 하지. 이제 곧 도착하겠군. 클락이 그렇게 말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브루스 웨인이 파티장 안으로 들어왔다.
남자는 머리칼을 자연스레 넘긴 채 차이나칼라가 두드러지는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의 양 옆에 데코레이션처럼 따라 들어오는 두 명의 아름다운 여자들은 시선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브루스 웨인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화려한 등장. 그만큼 화려한 외모. 그건 단순히 외관 뿐만이 아니라 그가 저의 이목구비를 놀려 만들어내는 표정에도 있었다. 서늘하게 꼬리가 뻗은 눈을 내려 감다가 턱을 당긴 채 눈을 뜬다. 그리고 시선을 모로 기울이며 인파를 둘러보고, 느긋한 동작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다가, 입술 끝을 끌어 올린다. 얇은 입술이 여유롭게 휘어지고 적당히 오만하며 상대를 주눅들게 하는 눈빛이 엿보인다. 머리카락을 넘긴 손끝이 목덜미로 미끌어져 내려오며 금욕적이게 잠긴 차이나 칼라의 목깃을 슬쩍 잡아 당기는 일렬의 모습에 할은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샴페인잔을 세게 쥐었다. 순간 무언가에 홀린 것만 같았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본 그는 저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 심지어 클락 켄트나 다이애나마저 브루스 웨인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것에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그건 조바심과 소유욕과 흥분이 섞인 기묘한 감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