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뱃 블랙할 단문
눈을 뜨니 이른 아침이었다. 여느 때보다도 일찍 일어난 듯한 느낌은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흰 햇살과 더불어 약간의 몽환적인 기분을 주었다. 공기는 적당히 서늘해 가볍고 땀 한 방울 나지 않은 몸은 시원한 채 개운했다. 그 사이로 웬지 모를 이질감이 파고들었지만 무시했다. 시계를 보니 시계 바늘은 평상시에 일어나는 시간 보다도 한 시간이나 더 일찍 맞춰져 초침을 까닥이고 있었다. 어젯 저녁에 맞추어 둔 알람은 한 시간 뒤에나 울릴 예정이지만 그다지 침대에 눌러 붙어 빈둥거리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는 아침에 약했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간혹 새들이 땅을 걷고 물고기가 하늘을 나는 것처럼 예외라는 건 있을 수 있는 일 아닌가. 마치 피로라는 것을 평생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듯 가뿐한 몸은 그에게 일어나길 종용하고 있었고 그는 반대하지 않았다. 침대에서 나와 충동적으로 커튼을 걷자 방 안으로 막 터오르는 아침 햇살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눈이 멀 것 같았다.
하루의 일과는 지극히 일상적이었다. 하지만 아침에 개운한 기분으로 일어난 것이 도움이 되었는지 그는 다른 날보다 비교적 멀끔한 기분으로 하루를 보냈다. 할은 저의 말주변을 잘 알고 있었다. 상대방이 어떤 식으로 말하면 얼마나 좋아할지 알며 그들의 기분에 맞춰 재치있게 말하는 법을 알았다. 그건 자신의 매력을 어필하는 것과 동시에 사람의 마음을 혹하게 만들어 그의 편으로 만들 수 있다는 말과 같았다. 캐롤은 오늘따라 굉장히 즐거워했다. 할 본인보다 더욱 그녀의 하루를 즐기는 듯이 보였는데 그도 그럴 것이 할 조던은 여느 때와 다르게 이른 시간에 출근한데다 비행 중 아무런 실수도 저지르지 않았고 그녀에게 점심을 사며 주말에 있을 환상적일 데이트에 대해 제안했기 때문이다. 할은 아름다운 여자가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행복해 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과 비슷한 웃음을 따라 흉내냈다. 해가 저물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되어서야 그는 잠시 그가 흉내내었던 기분을 떠올리곤 아침과 같은 이질감을 느꼈다. 그가 웃음을 흉내내어 지어 본 적이 있던가? 알 수 없다. 승용차의 그림자는 도로 위로 줄줄이 길게 늘어졌고 저무는 해와 더불어 아스팔트는 타이어 밑에서 식어갔다. 날씨에 예민해진 피부가 차가워졌지만 이상하게 명치가 뜨거웠다. 그리고 호출이 왔다. 저스티스 리그였다.
우주에서 많은 공간을 요구하는 행위는 무의미하다. 거의 무한으로 펼쳐져 있는 미세한 진공의 모든 공간은 소유라는 개념이 이루어지지 못할 곳이었다. 하지만 그 끝없는 공간 역시 랜턴이 되는 순간 오로지 그의 것이 될 수 있었다. 멀어진 지구의 반대편으로 태양이 기우는 것이 보였다. 할은 그가 아주, 아주 오랫동안 이 공간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그가 우주에 나온 것은 분명 사흘 전이었는데 그 동안의 시간이 이렇게나 길게 느껴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느릿하게 온 몸을 확장시키듯 숨을 들이 마쉬고 다시 내쉬었다. 검은 공간 안에서 아주 찰나의 순간 반경 수천 제곱 킬로미터 안의 별들이 그의 호흡을 주목하는 듯 했다. 이 곳은 그가 속한 곳이었다. 할은 들떴고, 그 들뜸에 이젠 익숙해졌다. 기억하는 한 오늘 하루 종일 그는 이것과 같은 상태로, 웬지 모르게 조금 허공 위를 걷는 기분이어서다. 여전히, 몸은 차갑게 식었으나 머리는 뜨거웠다. 아찔할 정도의 흥분 상태였다.
답지 않게 일찍 왔군.
할은 그에게 말을 건 남자를 돌아 보았다. 브루스 웨인이다. 배트맨의 복장을 했지만 카울을 쓰지 않은 남자는 의외라는 듯 하지만 평상시와 다름 없는 감정이 엿보이지 않는 목소리로 툭 뱉듯이 말했다. 말을 걸었다기 보다는 일방적인 보고 혹은 지시를 내리는 것이 배트맨의 언어를 설명하기에 적당할 것이다. 그런 말투에는 이미 익숙해진지 오래였으나 -남자의 성격이 그런 것은 어쩔 수 없음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에- 익숙함과는 반대로 할은 약간의 불편함을 느낀다. 하지만 구지 드러내지는 않고, 조금 어깨를 으쓱한다. 브루스 웨인이 저나 다른 리거들을 향해 그 특유의 철저한 방어막을 한 꺼풀 벗어 내린지도 꽤 되었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이 시꺼먼 남자가 뒤에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는 배트맨을 향해 웃는 시늉을 했다. 원래 눈치가 좋다 못해 무서울 정도로 예리한 편인데도 불구하고 이상한 점은 느끼지 못한 것처럼 브루스 웨인은 모니터를 향해 다시 시선을 돌린다.
할 조던은 그 뒤에 서서 브루스 웨인의 뒷머리를 본다.
그리고 그의 수풀처럼 새까만 머리칼이 이어지는 뒷목과 망토에 가린 등까지 무표정한 시선으로 벗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