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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c/dc

할뱃 단문




손에 굳은살이 잔뜩이네요. 여자의 말에 브루스는 제 손을 내려다 보았다. 그래. 손에 굳은살이 잔뜩이었다. 참 새삼스럽지만 그녀의 말이 그렇게도 날카로울 수가 없어 브루스 웨인은 짐짓 평소보다도, 혹은 방금 전 보다도 더 만들어진 얼굴을 지으며 둘러댄다. 하지만 침착하다. 그는 조용하고 낮게 자신을 감출 줄도 알았고 그 누구보다 높은 자리에 서서 오만해질 줄도 알았다. 수십 개의 가면 중에서 그는 오늘 멋드러진 고급 정장을 입고 한 손엔 금빛의 샴페인을 든 억만장자로 서기로 한다. 무거운 샹들리에. 화려한 조명. 잔잔한 음악과 아름다운 사람들. 여유롭게 웃으면서, 조금 더 느리게, 눈은 내려깔다 천천히 뜨고, 손짓은 유혹하듯이 부드럽게. 치밀하게 계산 된 행동과 발음 하나하나에서 그를 둘러 싼 여자들은 무너지고 갈구한다. 누군가를 내려다 보는 것을 좋아하는 취미는 없지만 오늘의 그는 최고의 상태였고 그런 자신이 주목받는 것을 조금 즐긴다고 해서 나쁠 건 없을 것이다. 브루스 웨인은 철저한 사람이다. 쉽게 가벼운 웃음을 흘리고 그에게 몸을 붙여 오는 여자들을 밀어내지 않는다. 여자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점점이 떨어지는 유혹을 묻히고 그의 손바닥을 쓸었다. 단단한 굳은살 좀 봐. 립스틱 바른 진한 입술이 귀에다 속삭이는데, 이 손으로 만져진다면 정말 환상적일 것 같아요. 브루스 웨인은 그럴지도 라고 대답하며 웃는다. 노골적인 유혹은 질리듯이 많이 받아보았다. 그의 옆에서 다른 여자가 팔뚝에 손을 얹고선 이 팔에 안긴다면 기절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에 또 웃는다. 어느 쪽이던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얼핏 눈을 돌리다가 익숙한 사람이 시선 끝에 걸리는 것을 본다. 조명이 채 닿지 않아 조금은 어둑한 발코니에서 남자는 상대와 웃으며 대화하고 있다. 그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지만 브루스는 그들이 바로 그의 귀에다 대고 웃는 듯한 착각을 한다. 신나서 깔깔거리는 그 모습에 이상하게도 내장 속에 돌덩어리가 들어 찬 것만 같이 명치가 무겁다. 세상에서 가장 자신의 겉모습을 잘 꾸며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중 하나가 브루스 웨인일 테고 그 누구보다도 그것에 신경을 쓰는 사람 중 하나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아주 찰나에 불과하지만서도 두 남녀가 그들만의 세계에 갇힌 듯한 모습으로 웃고 떠드는 걸 보며 차마 느긋한 미소를 짓기가 힘들다. 누군가가 찬물을 끼얹은 느낌에 표정이 일순간 사늘하게 식는다. 눈치라도 챌새라 고개를 돌리며 또다시 익숙한 웃음을 만들어내지만 그는 제 시선에 날이 서는 것까지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눈을 내려 감았다. 그 답지 않았다. 어쩔 때 그의 예리하게 발달 된 직감은 너무나도 정확해서 그 누구도 심지어는 브루스 웨인 본인조차 자신의 감정에서 도망갈 수 없게 만든다. 차마 알고 싶지도 않고. 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 수 있을까. 그는 지극하게도 현실적이다. 마치 그의 손에귀에 베인 굳은살이 평생 그곳에 박혀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브루스 웨인은 저를 둘러 싼 상황의 제약에서 벗어난다거나 감정이 그에게 기여하려는 찰나의 일탈도 허락할 수가 없다. 참을 수가 없어진 그는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양해를 구하며 자리를 피한다. 그렇게 그는 또 다시 어둔 곳으로 숨는다. 그 곳에서 저는 웅크리고 무장하고 좀 더 강하게 태어날 것이다. 그래야 한다. 고작 별 것 아니어야 할 한 남자에 의해 이렇게 동요하기에 그가 짊어 진 업보의 무게는 너무나도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