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스팁
sick
어쩌면 처음 부터 이랬어야 했을지도 모르지. 이랬어야 했을지 모른다고 말하던 스티브는 토니의 눈을 차마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고 그건 토니의 심기를 더욱 건드리면 건드렸지 그 목소리만큼 차분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이랬어야 했을지도 모른다는 그들의 동떨어진 거리 위로, 그들의 관계 위로 비가 내렸다. 참 억수같이도 퍼붓는다. 빌어먹게 거센 빗방울이 구멍 뚫린 하늘에서 쏟아지듯 몰아 닥쳐 그들의 먹먹한 사이를 잠재우려 하는 것 같았다. 토니는 여전히 자신을 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스티브를 노려 보았지만 그 와중에도 상대의 긴 속눈썹에 맺히는 빗방울이나 젖어 들어가는 옷 너머로 짙게 비춰지는 단단한 육체의 윤곽에 시선이 가버리고 마는 자기 자신에게 두 배는 더 화가 났다.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을지 모른다니 우리의 처음은 대체 어디로 거슬러 올라가는 걸까. 내가 너를 만졌던 처음? 내가 너에게 보잘 것 없는 고백을 했던 처음? 내가 너에게 인사를 가장한 조롱을 건넨 처음? 내가, 내가, 내가. 혹은 나의 아버지가 너를 만나서 이 좆같은 인연을 시작한 그 처음? 안타깝지만 그 처음은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어. 토니는 손바닥에 파고 드는 자신의 뭉툭한 손톱을 느꼈다. 수 많은 질문과 분노의 끄트머리가 입 안에서 더러운 파리떼처럼 멤도는대도 막상 평상시에는 그토록 조잘대던 입이 오늘 만큼은 쉽사리 열리지가 않는다. 처음부터, 이랬어야 한다는 네 말에는 대체 내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 어떤 말이라도 지금, 당장, 입을 열어버린다면 분명 후회할 만한 말을 뱉아버릴 것만 같아서. 오늘 만큼은 그 후회할 만한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를 것이 너무 두려워서. 내가, 이 내가 아무 말도 하지를 못하고 그저 너를 노려보며 때려 붓는 빗방울만 오질나게 맞고 있는 수밖에 없다. 스티브는 빗방울이 걸린 속눈썹이 무거웠는지 몇 번 내려 감았고 그 덕에 뺨으로 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것이 스티브 로져스의 눈물이었으면 했다. 그 모든 감정의 북받침에도 불구하고 토니는 자신의 표정이 평상시와 별다를 바 없을 것임에 감사했다. 이왕 구질구질하게 비 맞으며 차였으니 마지막 남은 치졸한 자존심이라도 지키고 싶은게 토니 스타크라는 남자였다. 느릿하게,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욕을 하고 싶었고, 때리고도 싶었는데, 안아주고 싶기도 했고, 그 눈꺼풀에 입도 맞추고 싶었으니, 정말 답이 없다. 그래서 힘없이 웃었다. 그래, 어쩌면 처음부터 우린. 그는 청년을 스쳐 지나가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네게서 멀어져 가는 다리는 자꾸만 날 잡아 끌어서,
어쩌면 처음부터 우린.
아니. 네 말대로,
처음부터 우리는.
제일 먼저 페퍼가 걱정을 했다. 평상시에 손도 대지 않던 담배를 피우니 이상하게 보였나 보다. 그러더니 왜 요즘 스티브가 보이지 않냐고 둘이 싸우기라도 했냐고 우스갯소리로 물으며 이번에도 역시 당신이 뭔가 잘못했구나 지레짐작 혀 차는 소리를 낸다. 그는 대꾸 없이 담배를 몇 번 더 뻑뻑 피워 대다가 혼자 있고 싶다고 했다. 페퍼는 감이 좋았다. 그 다음은 로드였다. 요새 연락 한 번 없는 걸 보니 연애 사업이 잘 되어가는 모양이라고 미소를 만발한 채 방문했던 로드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타워를 떠나야 했다. 토니는 모두가 떠나버린 거실의 한 복판에 대 자로 늘어져 입에 문 담배가 타들어가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그 뭉게뭉게 퍼지는 연기에 녹아버린 천장이 묽은 시멘트가 되어 자신의 위에 떨어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온 몸이 시멘트로 덮여 사라져 버린다면 그의 몸을 온전히 떼어내지 않는 이상 장례식도 불가능 할테고, 그렇다면 사람들은 좀 더 오랫동안 그의 죽음을 애도해야 할테고, 그런 강제적인 감정의 소모를 겪게 만든 자신에게 죽을 때까지 빌어먹을 놈이었다고 욕지꺼리라도 할테고, 그렇다면, 만약 그렇다면 토니 스타크는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웃으며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선가, 우우웅 하고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가 담배를 피우기 시작할 때부터 화재 경보음이 울리지 않도록 자비스가 자동으로 환풍기를 돌리곤 했다. 똑똑한 인공 지능은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에 동요해주지는 못한다. 아빠 힘들어, 자비스. 너무 힘들다. 인공 지능은 대답이 없다. 토니는 담배를 뱉았다.
우우웅 하고 환풍기가 울었다.
그는 술병으로 손을 뻗었다. 손 끝에 걸린 무거운 병이 넘어가며 콸콸 독한 내의 양주를 흘려댔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그것의 목을 집어 자신의 입 안에 잔여물을 쏟아 부었다. 그리고 던졌다. 유리와 액체가 산산조각 나서 사방으로 튀었다. 토니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은 채 양 손으로 자신의 머리칼을 쥐어 뜯었다.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는 블라인드 너머 흐릿한 창 밖의 날에 우울한 그림자가 졌다. 우우웅, 끊임 없는 이명이 울렸다. 그 나즈막하지만 시끄러운 파장은 기억의 산물이 되어 그를 몇 번 째인지 갈가리 찢어놓았다.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처음 운운하는 남자의 목소리도, 축축한 공기에 잔뜩 젖어서 메마르게 몰인정한 말을 주저리던 그 입도, 담담한 주제에 마치 자신이 버려진 것 같은 표정을 하던 꼴도, 차마 모질게 쳐내지 못하고 시선 하나 못 마주치던 눈도 정말 하나하나 가증스럽다. 누가 피해자냐고 이제 와서 따지고 싶어질 정도. 나보다 삼십 년은 더 숨쉬고 살았던 주제에 모든 것의 처음을 운운하는 못마땅한 말이라니 그건 너의 처음이자 나의 처음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당신이 탓하는 게 내가 함부로 건드렸던 당신의 처음인지 아니면 우리가 함께 해왔던 모든 것의 처음인지 그 경계가 애매해서 알 수가 없다. 결국 그들의 처음은 서로에게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바닥에 핏방울이 점점이 떨어졌다. 코를 만져보니 손 끝에 끈적한 피가 묻어 나왔다. 토니는 자조했다. 사실 겉으로 흘리는 피는 아무것도 아닌데. 이런 것 따위로는. 사실 이건
우우웅 하고 울고 있는
내 마음에서 나와야 하는 피인데.
너를 스쳐 지나면서 놓아 버렸던 모든 처음을 위해 울어야 하는 내 눈물인데. 그의 모든 처음을 가져갔던 남자를 향해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데 사실은 수도 없이 울었다는 사실이 끔찍했고 이런 그 자신이 무서울 정도라는 것을 남자는 알까 모르겠다. 그로 인해 오감이 무뎌졌다. 토니는 눈을 감았다.
세상의 모든 처음이라는 단어를 없애버리고 싶었다.
나타샤는 홀로 선 스티브의 등을 보다가 그에게 다가갔다. 인기척을 느낄 수 있도록 구태여 숨기지 않으며 다가 섰지만 스티브는 그녀를 향해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은 채 창문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만의 작은 공간에 갇힌 듯한 모습에 그녀는 잠시 망설였으나 대화를 시도하기로 마음 먹었다. 비가 오네요, 라고 말을 거는 나타샤에게 스티브는 그 한결같은 옆모습 만을 보여주며, 비가 오는군요, 하고 대답했다. 흠 잡을 곳 없이 완벽한 남자는 비를 보며 알 수 없는 사념에 잠긴 채 우수에 차오른 모습을 보일 수도 있었고 그것에 나타샤는 저도 모르게 조금 감탄했다. 사람을 끌어 들일 수 밖에 없는 사람. 그 누구보다 완벽한 사람. 아름다울 정도로 그들의 중심에서 우뚝 서는 사람. 스티브 로져스는 그런 존재였다. 한 때 나타샤는 이 남자와 토니 스타크 사이에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어찌 보면 스타크만큼 이 남자의 속으로 파고 들어 그를 중심 째 뒤흔들어 놓은 사람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또 다른 식의 감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스티브는 자신에게 계속해서 꽂히는 시선에 마침내 고개를 돌렸다. 분명 창 안 쪽에 있었는데도 남자는 온통 비를 맞은 것 처럼 어딘가가 젖어 있다. 나타샤는 한없이 우울한 날씨로부터 등을 진 채 팔짱을 꼈다. 그녀는 누군가를 심문해야 할 때가 아닌 이상 빙 둘러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로 말문을 떼었다. 당신도 스타크에 대해서 들었겠죠. 남자는 그 말에 동요하지도 않고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 침묵하던 그는 감정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 째인지 회의에 번번히 빠지고 있는 토니 스타크의 상태에 대해서는 사실 공식적으로 그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으나 모두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는 아팠다. 정말 아픈 모양이다. 몸의 병은 치유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토니의 문제는 몸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걸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나타샤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끼어 들어야 하지 않을 것에 손을 댔는 지도. 모든 것에는 물어야 할 것이 있고 안될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후회하는 나타샤의 예상 외로 침묵을 깬 건 스티브였다. 누군가의 처음이 되는 것은 생각보다 무서운 일이더군요. 그는 눈을 내려 깔았다.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 중요성이 내 안에서 커져 가는 것을 시시각각 느끼는 것 역시. 그제서야 나타샤는 이 완벽해 보이는 남자가 얼마나 사소한 것들로부터 익숙하지 못한지 깨달았다. 그 존재와 더불어 온전하게 정착하지 못하는 그런 감정. 가라앉을 수 없는 마음은 허공을 겉돌다가 결국 불안함이라는 씨앗으로 바뀌어 버렸을까. 나타샤는 손을 뻗어 스티브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두렵지 않은 것은 없어요. 너무 행복해서, 너무 아름다워서, 너무 가슴이 벅차 두렵기도 하죠. 그게 인간이에요. 우린 불완전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것을 버거워하죠. 나타샤는 잘게 떨리는 스티브의 눈동자를 마주 보며 슬픈 표정으로 웃었다. 아무리 비극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웃으며 맞이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