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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리야 귓속말



솔리야 전력

귓속말






의지가 있음 안 될 것도 된다 하였다. 역사는 절반은 그렇게 한계를 뛰어넘은 인간들로 인해 씌여졌고, 또한 절반은 멍청이들과 머저리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일리야 쿠리야킨은 평소 자기 자신을 전자와 같이 궁극적이고 위대하게 들리기까지 하는 인간이라 표현할 만큼 자만하지도 않았으나 지금은 단연코 자신을 머저리라고 부를 수 있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임무는 나이트폴 작전이라 불렸다. 유럽-미합중국 연합으로부터 비밀리에 내려진 이 임무에 대한 지령은 어느 날 개비 텔러가 몽마르트의 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그녀의 커피잔와 받침 사이에 끼여진 채로 발견되었다. 동그란 커피잔 자국이 남은 봉투를 엄지와 검지로 집어들며 나폴레옹 솔로는 그녀가 에스프레소를 마셨는지 롱 마키아토를 마시고 있었는지 가늠하려 들었으며 일리야는 그의 추리를 일관적으로 무시한 채로 그녀에게 누가 그 지령을 전달하였는지 좀 더 실질적인 질문을 했다. 개비는 편지를 발견한 후에 그녀에게 커피를 가져다 준 웨이터를 찾았으나 그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령은 간단했고, 단지 다섯 가지 정도의 사항밖에 적혀있지 않았다. 본문의 끝에는 웨이벌리의 서명이 있었다. 솔로는 이상하다 여겼다.


"그는 이런식으로 지령을 전달하지 않아. 정말 바쁘거나, 최근 뭔가 내게 심사가 뒤틀릴만한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


솔로는 그를 쳐다보는 나머지 둘의 시선에 반듯한 눈썹을 아래로 휘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왜 다들 나머지 옵션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거지? 혹시나 이 편지가 웨이벌리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부터 왔다거나 하는 가능성이라던가. 솔로 특유의 아이처럼 늘어지는 투정은 상대방의 기분을 누그러트리곤 하지만 그에 어느정도 익숙해진 일리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건 이제부터 자네가 알아낼 수 있겠지. 웨이벌리에게 직접 연락하는 방식으로.

결론적으로 그들의 상관에겐 직접적인 연락이 닿지 않았으나, 그들의 의심이 차츰 도에 다다를 수록, 그리고 개비의 혹시나 로 시작하는 불안증이 극도에 다다를 수록("혹시나 이게 진짜면 어떡해? 우리가 중요한 임무를 놓치고 있는 거라면?") 다 합쳐서 다섯 가지는 거뜬히 넘어가는 세 명의 정신병이 딱히 좋은 작용을 하진 못했다. 그 와중 사건이 벌어졌다. 날씨가 좋던 그 날에 솔로와 일리야는 조사 목적으로 외출중인 상태였고 개비는 이러한 날씨에 그녀 혼자 집에 박혀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외출 준비를 하였다. 폴카 돗이 박힌 원피스와 그에 어울리는 검은 힐을 신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쓰던 그녀는 노크 소리를 듣고 문 앞으로 걸어갔다. 렌즈 너머로 신발끈을 묶고 있는 솔로의 뒷머리가 보였다. 개비는 그녀가 지금 문을 연다면 그가 꼼짝 못하고 뒤로 자빠질거라 생각하며 웃었다. 그녀는 잠금쇠를 풀며 물었다.


"둘이 나갔으면서 혼자 돌아왔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개비 텔러는 약간의 충격과 함께 잠시 시각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다음 순간 그녀는 바닥에 쓰러진 채 천천히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두 남자가 외출로부터 돌아와 개비 텔러를 발견했을 때 그녀는 이미 의식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원피스를 적시고 흐른 피가 바닥에 원을 그렸고 일리야는 자신의 옷을 벗어 뒤늦게나마 그녀의 옆구리를 지혈하기 시작했다. 솔로는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곤 병원에 연락하겠다고 급히 말했다. 개비가 일어서려는 솔로의 손목을 잡았다. 그녀는 입을 뻐끔거렸고, 솔로는 힘을 잃은 목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그녀의 입술에 가까이 대었다. 개비가 속삭였다.


"...왜 그랬어?"


일리야는 솔로의 얼굴을 보았다. 준수한 미국인의 얼굴이 의아함과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솔로는 그게 무슨 뜻인지 개비에게 다그쳤으나 그녀는 곧 정신을 잃었다. 일리야는 판단을 내리는 데에 있어 빠른 사람이었다. 그는 한 손으로 솔로의 어깨를 단단하게 쥐었다.


"넌 우리가 외출한 후 계속 나와 함께 있었어."

"나도 알아. 하지만... 방금 그녀가..." 솔로는 경황이 없어보였다.

"혹시 짐작가는 것이 있나?"

"아니. 전혀. 이것이 개비가 받았던 그 지령과 관련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우선 그녀를 안전한 곳으로 옮긴 후 행동한다."


솔로는 여전히 충격받은 모양새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개비 텔러를 병원으로 이송했고 그녀를 지켜볼 사람들에게 연락하여 안전을 부탁했다. 간단한 짐을 챙겨 차에 오른 그들은 지령의 첫번째가 가리키고 있는 구 연합군 비행장으로 향했다. 일리야는 운전대를 쥔 솔로를 곁눈질했다. 그가 아는 한 솔로는 쉽게 동요받는 적이 없는 사내였지만 지금 그는 눈에 띄게 경직되어 있었다. 늘 둥글게 휘어있는 눈매가 흔들리고 관자놀이에서 땀이 흐르는 것이 보였다. 일리야는 이런 나폴레옹 솔로를 본 적이 없었다. 평소 나폴레옹 솔로의 지나친 의연함은 거의 병적인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개비 텔러가 당한 습격과 그녀가 의식을 잃기 전 했던 질문이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리라. 일리야 역시 침착하게 있을 수만은 없었으나 이런 모습의 솔로를 보았을 때 그마저 동요하기 시작하면 위험할 수도 있다 판단했다.

비행장은 사용이 중지되어 몇 개의 조명을 제외하곤 모조리 어두웠다. 거칠게 차를 세운 나폴레옹 솔로는 소음기가 달린 권총을 장전하기 시작했고, 여태껏 침묵을 지키던 일리야는 총을 쥔 남자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솔로가 그를 돌아보았다.


"침착해, 카우보이. 넌 지금 필요 이상으로 굳어있다."

"난 굳어있지 않아. 그건 날짜 지난 빵덩어리에나 쓸 말이지."


그래도 농담할 여유는 있는 듯 했다. 일리야는 그의 손목에서 손을 떼었다. 솔로는 다른 손으로 지친 듯이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더 늦기 전에 진작 행동해야 했어. 만약 그랬다면... 개비는."

일리야는 고개를 저었다. "후회하기엔 늦었다. 그리고 그건 네 잘못이 아냐.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솔로는 일리야를 바라보았다. 새벽 바람에 헝크러진 머리칼이 솔로의 얼굴 위에 일렁이는 그림자를 덧씌웠다. 깊고 푸른 눈이 젖은 채로 그를 향하자 일리야는 불편한 듯 몸을 조금 틀었다. 남자의 손이 조심스레 일리야의 무릎 위에 얹혔다. 그가 낮게 말했다.


"항상 네게 키스하고 싶었어."


다음 순간 일리야는 시각이 흔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뒤는은 둔통이 얼얼하게 옆구리로부터 퍼지기 시작했고 그것은 두 발 더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솔로의 총구와 가벼운 키스 뿐이었다.